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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의 신대륙 도착

by 【고동엽】 2021. 9. 28.

오늘날의 매사츄셋즈로 불리우는 곳에서 가장 많은 이민 집단을 이룬 것은 퓨리탄(Puritan), 즉 청교도들이었습니다. 이들은 1630년에 이곳에 도착하기 시작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영국에서 매사츄셋즈 베이 회사(Massachusetts Bay Company)를 설립했습니다. 영국왕은 이 회사에 챨스(Charles)강에서 메리맥(Merrimack) 강 사이의 땅을 주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영국 교회, 즉 앵글리칸 쳐치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회를 더욱 성스럽게 만들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매사츄셋즈에서는 원하는 방식대로 살수가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이들은 최대의 종교 그룹을 형성했습니다. 1690년에 이르자 매사츄셋즈에는 5만명의 청교도들이 살게 됐습니다.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유일한 참 신앙이라고 믿었고 누구든 그 신앙을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은 또 교회 지도자들이 현지 행정 기구도 이끌어 가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또한 식민지의 모든 주민은 청교도 교회를 위해 헌금을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청교도들은 주민들에게 무엇을 믿으라고 말하는 것이 정부 지도자들의 할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식민지 정부의 지도자가 된 청교도들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로져 윌리암스(Roger Williams)라는 청교도 목사였습니다. 로져 윌리암스는 다른 모든 청교도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유럽의 종교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토착 인디언들의 종교도 잘못된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와 똑같이 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신앙을 내세워 누구를 살해하거나 처벌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헌금을 하는 사람은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고 믿었습니다.

로져 윌리암스는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쓰고 연설로 발표했습니다. 그는 다른 믿음을 갖고 있다고 해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인디언의 땅을 훔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영국왕이 자기땅이 아닌 인디언 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권한이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매사츄셋즈 베이 식민지의 청교도 지도자들은 1636년 로져 윌리암스에게 그곳을 떠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는 남쪽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는 인디언들로부터 돈을 주고 땅을 구입해 마을을 이루었습니다. 그 마을의 이름은 프라비던스 (Providence)였습니다. 영국 의회는 그에게 프라비던스를 수도로 하는 새로운 로드 아일랜드 (Rode Island)식민지를 건설하도록 허용했습니다.

하나의 식민지로써 로드 아일랜드는 카톨릭, 퀘이커, 유태인, 심지어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까지 모든 사람을 받아들였습니다. 로져 윌리암스는 또 정부는 교회와 아무런 연계가 없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교회와 정부가 분리돼 있다는 생각은 매우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이는 그후로 미국의 모든 정부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의 하나가 됐습니다.

매사츄셋즈를 떠난 사람들은 다른곳에서 새로운 식민지들을 건설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코네티컷트입니다. 목사였던 토마스 후커가 이끄는 청교도들은 1636년 보스톤을 떠나 서부로 갔습니다. 그들은 코네티커트강 부근에 정착했습니다. 머지않아 다른 사람들도 여기에 합류했습니다.

매사츄셋즈를 떠난 다른 집단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더욱 북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영국 국왕은 두 친구에게 북쪽의 넓은 땅을 떼어주었습니다. 친구들은 이 땅을 나누었습니다. 죤 메이슨(John Mason)은 나중에 뉴 햄프셔(New Hampshire)가 된 땅을 차지했습니다. 훼르디난도 고지스(Ferdinando Gorges)는 나중에 메인(Maine)주가 된 땅을 차지했습니다. 메인은 아메리카 합중국이 수립될때까지 식민지가 되지는 않고 매사츄셋즈주의 일부로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뉴욕으로 불리우는 땅은 네델란드 사람들이 개척했습니다. 이들은 그곳을 뉴 네델란드(New Netherland)라고 불렀습니다. 당시 네델란드는 세계 여러 곳에 식민지를 두고 있는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대부분의 식민지는 덧취 웨스트 인디아 컴패니(Dutch West India Company)라는 기업체에 의해 운영됐습니다.

네델란드는 영국인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이 발견한 땅도 네델란드 소유라고 주장했습니다. 허드슨은 영국인이지만 네델란드 회사에 소속된 사람이라는 것이 그같은 주장의 근거였습니다. 네델란드가 주장한 땅은 북쪽의 청교도 정착지에서부터 남쪽의 영국인 담배 농장 지대까지였습니다.

네델란드는 신대륙의 정착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덧취 웨스트 인디아 컴패니(Dutch West India Company)는 네델란드가 소유권을 주장하는 강을 따라 교역 거점을 설치했습니다. 유럽인들은 신대륙의 동물 가죽으로 만든 상품을 사기 원했습니다.

 

1626년 덧취 웨스트 인디아 컴패니(Dutch West India Company)는 인디언 원주민들로부터 두 군데 섬을 샀습니다. 그중 하나는 맨하탄(Manhattan) 섬이고 다른 하나는 롱 아일랜드(Long Island) 섬이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네델란드는 약 25달라에 해당되는 물건을 주고 두 섬을 매입했습니다.

덧취 웨스트 인디아 컴패니(Dutch West India Company)는 미국에 정착할 사람들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네델란드 사람중 유럽을 떠나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식민지에서 온 사람,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람들은 맨하탄 섬에 도시를 건설했습니다. 이들은 도시 이름을 뉴 암스테르담이라 불렀습니다.

머지않아 이곳은 멀리서 배를 타고 온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차게 됐습니다. 당시 뉴 암스테르담에서는 18가지나 되는 언어를 들을수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1655년 뉴 네델란드 지사는 부근 델라웨어 만(Delaware Bay)에 있던 스웨덴 식민지를 차지했습니다.

 

1664년 그들은 영국인들로부터 똑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영국인들은 뉴 암스테르담을 차지하고 이름을 뉴욕이라 고쳤습니다. 이로써 오늘날 뉴욕 주, 뉴 져지주, 델라웨어 주에 걸친 네델란드의 영토 소유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네델란드인들은 신대륙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영국인들은 누구에게나 자리를 잡고 살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들은 네델란드인들에게 종교의 자유도 누리도록 했습니다. 달라진 것은 네델란드인들이 관할권을 갖지 않는다는것 뿐이었습니다.

 

이제 이땅을 관리하는 사람은 요크공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왕 챨스 2세의 동생이었습니다. 챨스 2세는 뉴욕 부근에 있는 땅의 일부를 두 친구, 즉 써 죠지 카테레트와 죤 버클리 공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들은 카테레트가 탄생한 영국의 한 섬의 이름을 따 새 지역을 뉴져지(New Jersey)로 명명했습니다.

두 사람은 새 식민지를 통치할 계획을 수립했습니다. 이들은 정착민들을 대표하는 대의 기구를 조직했습니다. 새 식민지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뉴저지의 남성은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투표권을 가질수 있었습니다.

머지않아 뉴저지에는 유럽 전지역 출신들이 모여 살게됐습니다. 그 뒤를 이어 챨스 국왕은 이 지역을 관할했습니다. 그는 총독을 보내 식민지를 통치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식민지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의결기구를 통해 자체적으로 법률을 만들도록 허용됐습니다.

 

챨스 국왕은 자신이 통제하는 식민지 모두에 그같은 제도를 사용했습니다. 그는 식민지 사람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어들였으나, 식민지인들에게 자치를 허용했습니다.

영국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는 종교인들중에는 퀘이커 교도들도 있었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자기들 끼리는 서로를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으로 연결되는 내면의 믿음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무엇이 옳다고 말해주는 종교 지도자란 필요치 않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목사가 없었습니다.

이들은 또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고 믿었습니다. 영국의 퀘이커 교도들은 왕이 다른 사람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라고 인정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또 영국 교회, 즉 앵글리칸 쳐취(Anglican Church)를 돕기위해 세금을 내기를 거부했습니다.

퀘이커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든 옳지 않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군대에 가서도 싸우기를 거부했습니다. 이들은 또한 신을 제외하고는, 왕이나 정부, 또는 깃발 따위에 충성을 바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런 모든 이유에서 영국은 퀘이커를 싫어했습니다. 많은 퀘이커 교도들은 영국을 떠나기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메리카 식민지 대부분 지역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바꾸어 놓은 인물이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웰리엄 펜(William Penn)이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웰리엄 펜은 퀘이커로 태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청년 시절에 퀘이커 교도가 됐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앵글리칸 교단의 교인이었고 챨스 국왕과 가까운 사이였습니다. 챨스 국왕은 윌리암 펜의 아버지로부터 돈을 빌렸습니다. 아버지가 죽자 윌리암 펜은 국왕에게 빚대신 아메리카의 땅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1681년 국왕은 펜에게 펜실바니아라고 명명된 땅을 주었습니다. 왕실 위원회가 이름을 지은 펜실바니아는 펜의 숲이라는 의미였습니다.

퀘이커들은 이제 자신들의 식민지를 갖게 됐습니다. 이 식민지는 북쪽의 청교도 지역과 남쪽의 앵글리칸 지역의 중간에 해당되는 곳이었습니다.

윌리암 펜은 이 식민지가 누구든지 퀘이커의 믿음에 따라 살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곧 누구나 평등하게 대하고 어느 종교나 허용한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그것은 또 누구나 선거로 특정한 자리에 선출될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식민지에서는 주류 교회의 신도가 되지 않는한 어떤 종교를 갖고 있건 투표를 하거나 공직자가 될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펜실바니아에서는 어떠한 종교든 평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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