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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강건하게 하옵소서(에베소서 3장 14절~21절)

by 【고동엽】 2023. 2. 5.
목차

 

강건하게 하옵소서(에베소서 31421)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우리 가운데서 역사 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 무궁하기를 원하노라. 아멘.

 

 

흔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를 가리켜 4무주의(四無主義) 시대라고 합니다. 네 가지가 없는 시대, 즉 무감동, 무책임, 무관심, 무목적의 시대라는 뜻입니다.

첫째, '무감동'이라는 것은 둔감한 이성을 가리킵니다. 우리의 감정이 병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기뻐하는 것도 슬퍼하는 것도 정상이 아닙니다. 무엇을 기뻐하고 있는지, 무엇을 슬퍼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시대입니다. 둘째, '무책임'은 도덕적 질병을 의미합니다. 서로 책임을 회피합니다. 잘못된 것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실패는 사생아(私生兒)'라는 말이 생겨난 것입니다. 병든 사회에서는 책임을 질 줄 모릅니다.

실패에 대한 책임을 모두 남한테 전가시킵니다. 그래서 무책임한 행동과 무책임한 발상, 무책임한 비판이 난무합니다. 셋째, '무관심'이라는 것은 극단적 이기주의가 낳은 결과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자기 말고는 아무에게도 관심을 기울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넷째, '무목적'이라 하는 것은 종교적인 병리 현상을 말합니다. 굉장히 애쓰고 수고하는 것 같으나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가치도 목적도 분명치 않은 수고를 합니다. 허무한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4무주의에 빠져 있는 사회를 병든 사회라고 하며, 이 병든 사회에는 또 두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적대감입니다.

사회란 우리가 다같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가 의지해야 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병든 사회에서는 서로 상대방이 없어져야 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죽어야 내가 살고, 저 사람이 망해야 내가 성공하는 것처럼 착각하며 삽니다. 바로 적대감이 만연된 사회, 건전치 못한 사회입니다. 둘째, 의심입니다. 함께 사는 사회에서는 뭐니뭐니해도 신뢰가 최고입니다. 의심하게 되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회에는 의심 풍조가 거세게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의심 때문에 유발되는 낭비가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서로 믿으면 간단한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아까운 시간과 돈을 들여 복잡한 제도, 장치를 마련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회,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사회------이것은 무서운 사회입니다. 공산주의 사회를 보십시오. 절대로 남을 믿어서는 안 되고 믿을 수도 없는 사회입니다.

심지어 부모가 자식을, 아내가 남편을 믿지 못할 정도로 큰 불신이 자리잡고 있는 사회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도록 감시 체제를 만들어 놓습니다. A라는 사람은 B,B라는 사람은 C, C라는 사람은 A…… 이런 식으로 서로서로 감시하게 만들어 놓는 것이지요. 제가 아주 젊었을 때에 북한의 교회에서 성가대를 지휘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후에 알고 보니 그 성가대원들 중 두 사람이 저를 감시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감시뿐만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저를 거꾸러뜨리도록 특별 지시를 받고 있었다는 거예요.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불신사회, 서로 믿어서는 안 되는 사회------이런 사회가 바로 병든 사회입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사회란 어떤 것입니까? 서로 믿는 곳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서로서로 소망이 되는 곳입니다. 남에게 희망을 주고, 또 모든 사람을 소망적으로 보는 그런 사회가 건강하고 건전한 사회입니다.

병중에서 제일 무서운 병은 '병든 줄 모르는 병'입니다. 의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간장 병이라는 것이 아주 무서운 병이라고 합니다. 우리 몸 속에서 간장은 말이 없고 침묵을 좋아하는 기관이랍니다. 그래서 간의 절반이 썩어 들어올 때까지도 우리는 그런 줄 모른답니다. 3분의 2가 썩어 없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간이신호를 보내고, 그때에야 사람은 자기간에 탈이 난 것을 깨닫게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때는 병을 고치기엔 이미 늦은 때입니다. 그러므로 병든 줄 모르는 병, 속에서 썩어 들어가도 아픈 줄 모르는 병------이것이야말로 사람 죽이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무서운 병이 있으니 그것은 '합병증'입니다. 요즘 우리가 무서워하는 것들 중에 에이즈(후천성 면역 결핍증)라는 병이 있지요? 알고 보면 그것 자체는 병이 아닙니다. 문제는 병균을 저항하는 힘이 없기 때문에 무슨 병이든지 걸리기만 하면 그대로 죽는다는 데 있습니다. 예를 들어 에이즈에 걸린 사람이 감기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다른 모든 병까지 유발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합병증으로 죽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합병증보다 더 무서운 병은 전염병입니다.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남까지 죽이는 것입니다. 자기만 망하는 게 아니라 남까지 끌어들여 함께 망하게 만드는 사람을 가리켜 물 귀신같다고 하지 않습니까? 병든 인격 하나가 많은 사람들을 병들게 합니다. 병든 심령 하나가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전부 병들게 합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쓴 뿌리'라고 말합니다.

병든 줄 모르는 병, 합병증, 전염병-----이 모두가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바야흐로 그러한 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병든 사회와 병든 인간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논쟁을 아시죠? 이것을 우리들의 문제에 응용해 봅시다. 개인이 병들어서 사회가 병든 것인가, 사회가 병들어서 개인이 병든 것인가------어느 쪽이 먼저입니까? 우리는 때때로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가 병들었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없고, 착한 나까지 병들어 간다고, 스스로를 피해자라 부릅니다. 그러나 그게 과연 그럴까요? 내가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은 아닐까요? 내가 다른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게 아닐까요? 다른 사람 때문에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니고 나 때문에 온 가족이 고생하며 나 때문에 온 사회가 어지러워진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파피니라고 하는 이탈리아의 문인(文人)은 말했습니다. '세계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이며, 인간의 문제는 곧 마음의 문제이다.' 저는 여기에 한마디 덧붙이고 싶습니다. '마음의 문제는 곧 영혼의 문제'라고요. 성경은 언제나 인간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모든 문제를 인간 자신의 문제로 풀어나갑니다. 환경으로 인해 인간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인해 환경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입니다.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대자연도 고생하게 되고 만물이 탄식한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병들 때에 사회도, 세계도, 우주도 병들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건강한 사람,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건강한 인격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대표적 심리학자 몇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먼저, 칼 융(Carl G. Jung)'존재에 대해서 개별화된 의식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다'라고 존재의 개별성을 강조했습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얼마 전 제주도에 특별집회가 있어서 비행기를 타고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비행기 속에 앉아 있는 승객들을 보니 저 말고는 모두 신혼부부들이었습니다. 갓 결혼한 사람들이라 어찌나 사이좋고 보기 좋던지요. 저는 흐뭇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신부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구경했습니다. 객관적인 눈으로 보니 예쁜 사람도 있고 못생긴 사람도 있고…… 뭐 그랬습니다. 하지만 신랑들 눈에야 당연히 자기 신부가 최고로 보였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한 쌍의 부부가 신혼 여행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부부 싸움을 시작한 거예요. 물론 다른 사람들 보기에 부끄러워서 작은 소리로 티격태격하고 있었지만 저는 곧 눈치를 챘습니다. 문제는 신랑이 딴 여자를 훔쳐봤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이상한 눈빛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결혼을 했으면 자기 신부만 보아야지 남의 여자하고 비교하면 되겠습니까? 자기 신랑만 봐야지 남의 신랑과 비교하면 됩니까? 비단 남녀 문제뿐만이 아닙니다. 매사에 자기 것과 남의 것을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병든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남의 아이가 어떻고 남의 집이 어떻고……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나는 나대로 사는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자기를 남하고 비교하지 않습니다. 남한테 질질 끌려 다니지 않습니다. 20년을 함께 살면서도 자기 배우자를 남의 배우자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가지고 어쩌자는 것입니까? 여러분, 큰 사람은 큰 사람대로, 작은 사람은 작은 사람대로 각기 장점이 있게 마련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다 따로 있는데 왜 남의 달란트를 넘봅니까? 반 달란트면 어떻습니까? 작으면 작은 대로 좋은 데가 있습니다. 크면 큰대로 좋은 데가 있고요. 그런데 자꾸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비교의식의 노예가 되는 사람들, 자기 정체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런 사람들이 병든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들은 존재를 개별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과 비교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개별성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다음으로, 롤로 메이(Rollo May)라는 심리학자는 '건강한 사람이란 수용성이 큰 사람, 즉 마음이 큰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남의 충고를 잘 받아들이고 누구의 이야기도 잘 듣습니다. 리스판스(response)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 받아들이고 다 수용하며 좀더 깊이 사고(思考)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건강치 못한 사람은 대수롭잖은 소리만 들어도 발끈합니다.

화를 잘 냅니다. 리액션(reaction)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한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말하기를, '생산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 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건강한 인격(healthy personality)'을 말할 때에 'productive orie-ntation'을 말합니다. 생산적인 사랑, 생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나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남까지도 행복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 생산적인 사람, 곧 건강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가정에 문제가 있습니까? 제가 문제 해결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꼭 제 말대로 해보세요. 간단합니다. 하루에 세 번, 아내이거든 남편을 바라보면서, 남편이거든 아내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하세요. "나는 당신 때문에 행복합니다." 또 부모이거든 자녀들을 바라보며 "나는 너희들 때문에 행복하다"라고 말하고, 자녀이거든 부모님을 바라보며"저는 어머니 아버지 때문에 행복해요" 라고 말하십시오. 건강한사람의 행복은 생산적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건강치 못한 사람은 말끝마다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 때문에 망했다, 당신 때문에 못살겠다…… 에리히 프롬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비유를 인용해 다음과 같이 재미있는 말을 했습니다. '인간은 거미 같은 사람, 개미 같은 사람, 벌 같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 거미 같은 사람은 그물을 쳐놓고 거기에 걸려드는 다른 사람을 철저하게 자기 것으로 만드는 사람이다. 개미 같은 사람은 열심히 벌긴 하지만 저 혼자 먹기 위해 버는 부류이다.

그러나 벌과 같은 사람은 열심히 벌어서 자기도 먹고 남도 먹게 하는 사람이다.' 에리히 프롬은 바로 벌과 같은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립니다.

건강한 인격은 건강한 영혼에서 옵니다. 여기서 겉 사람과 속 사람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겉 사람으로 인해 속 사람이 이루어집니까, 속 사람으로 인해 겉 사람이 이루어집니까? 어느 쪽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습니까? 사람들은 흔히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역설적입니다. 고린도후서 416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朽敗)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겉 사람은 점점 낡아지고 늙어가지만 속 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진다는 역설입니다. 또 욥 같은 사람도 많은 시련 중에 하기 어려운 역설적인 말을 합니다.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 : 10)." 많은 시련과 환난 중에서 오히려 정련된 금과 같이 더 깨끗하고, 더 고상하고, 더 진실하고, 더 거룩해지는 속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속 사람으로 향해야합니다. 그리고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주도하는 그러한 인격으로 발전되어야 합니다. 변화하여야 합니다.

성경은 환경과 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내적 인간에 대하여 계속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 316절에 나오는 '속사람'이라는 단어를 헬라어 성경에서 찾아보면 '에소 안드로폰'이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으로서의 이성, 혹 도덕적으로는 양심을 가리킬 때 쓰이고, 실천력과 의지력을 지칭할 때 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의 의미는 위의 세 가지 의미와 조금 다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에소 안드로폰'은 내적인 존재, 즉 영혼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인 그 영혼을 지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내적 존재인 영혼(우리 성경에 '속 사람'으로 번역되어 있는)이 어떻게 하면 건강해질 수 있겠습니까?

마태복음 4장에는 예수님께서 마귀로부터 시험 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자세히 보면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첫번 시험을 물리치시며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 :4)." 우리의 영은 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산다, 부하고 가난하고 건강하고 병들고가 꼭 물질적으로 많고 적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건강해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3 : 16)" 여기서 '강건해진다'------크라타이오데나이'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힘있게 한다, 건강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크라타이오데나이 에이스 톤 에소 안드로폰'이라는 것은 속 사람에게 내적 강건함을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 원문을 영어로 직역하면 'to be fortified into the inner man'입니다. 먼저 그 영광을 따라서 건강해진다는 말이지요. '그 영광의 풍성'이라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저는 크리스마스 메시지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천사들을 통해 전해진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2:14)." 하늘에 영광, 땅에 평화------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늘에 영광이 있어야 땅에도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영광을 보아야 내적 건강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내 영혼의 건강이 땅에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 영혼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회개하고 중생하고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십자가를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그 개별적인 사랑을 뜨겁게 느끼면서 몸과 마음이 동시에 뜨거워지며 이 허물 많은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여진다고 하는, 그 거룩한 손에 붙들리어 쓰여진다고 하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소중해지고,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발견하고 확증하면서 건강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헨델의 '메시야'를 아시지요? 이 성담곡(聖譚曲)이 우리의 마음을 얼마나 신령하게 해주고 은혜롭게 해줍니까? 언제 들어도 가슴 벅차 오르는 거룩한 곡입니다. 그런데 이 대작(大作)이 어디에서 씌어졌는지 아십니까? 감옥에서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는 고상한 동기에서가 아니라 빚에 쪼들려서 감옥에 갇힌 것입니다. 하지만 감옥에 갇혀 고생하는 가운데 헨델은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 하늘의 영광을 보면서 '메시야'를 작곡하게 되었는데, 헨델이 처음에 쓴 작곡 노트에는 지금도 곳곳에 그의 눈물 자국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헨델이 본 하나님의 영광을 상상해 보십시오. 감옥에서 하늘을 바라보고 메시야의 영광을 바라볼 때에 그의 영혼은 평생의 어느 때보다도 훨씬 더 건강했을 것입니다. 그처럼 건강한 상태에서 작곡한 찬송이기에 우리도 그 찬송을 듣고 부를 때마다 건강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 스데반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복음을 전하다 돌에 맞아 죽습니다. 하지만 죽어 가는 가운데에도 하늘을 우러러봅니다.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그를 내려다보시며 어서 오라고 하십니다. 스데반은 그 영광스러운 모습과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이 됩니다. 마음도 천사의 마음이 됩니다. 이제 그는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그리스도의 뜻까지도 그대로 닮아, 자기를 죽이려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7 : 60)."어찌 이토록 아름답고 건강할 수가 있습니까? 이것은 영적 건강의 절정-----peak experience였습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가리켜'영성(靈性)의 핵심(core quality of the spirituality)'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통하고, 능력으로 통합니다.

하나님 영광의 풍성함------이것을 깨닫고 보는 순간, 그 안에서 내 영이 소생함을 입습니다. 나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큰 영광을 바라볼 때에 병든 영혼이 고침을 받습니다. 또한 성령으로 말미암아서도 그렇게 됩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을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영이요, 중생케 하는 영이요, 성화케 하는 영이요, 영화롭게 하는 영입니다. 이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에만 그 능력으로 강해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사랑의 뿌리가 내리고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계시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깨닫고 행동으로 옮겨가면서 나의 영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글레멘스톤이라는 사람은 말했습니다. '마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팔자 한탄이나 하고 있지 마십시오. 운명은 여러분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중생하는 바로 그 순간에 운명도 바뀝니다. 내적 존재가 변할 때에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음식 중에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이들과 함께 식사할 때 주로 자장면을 먹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아이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그들의 자장면 그릇을 보면 국수에 언제나 윤기가 흐르고 물기가 배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음식을 보는 순간 마음속에서부터 기쁘기 때문에 입 속에 침이 잘 고입니다. 그래서 국수 가락이 마르지 않고 끝까지 맛있게 먹게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어른들의 자장면 그릇은 언제나 뻣뻣하게 말라 있습니다. 침이 나오지 않아 연신 물을 마셔가며 먹습니다.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러니 소화가 잘될 턱이 있나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음식 자체가 나쁘고 좋고가 문제가 아닙니다. 건강한 사람한테는 무슨 음식이든지 좋고 맛있습니다. 소화가 잘 됩니다. 영적으로 건강한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사람한테는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맛있습니다. 무슨 말씀을 들어도 꿀 송이보다 더 달게 느껴지는 사람, 어떤 말씀이든지 다 소화시킬 수 있는 사람------이런 사람이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병든 심령은 어떻습니까? 10분만 앉아있어도 졸음이 오고 딴 생각이 나요. 쑤시고 가려운 데는 왜 그렇게 많은지요. 연신 몸을 비틀고 꼬고 합니다. 말씀이 영 귀에 들어오지를 않아요. 영적으로 병들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귀에 거슬리는 말 한마디만 들어도 소화불량에 걸려 고생을 합니다. 건강한 사람은 말씀의 은혜를 받고 집에 가서도 화평한데, 병든 사람은 은혜 받고 돌아가서 부부 싸움을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병든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짜증스럽고 불평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병든 사람이 세상에서 화평하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다 아름답고 귀하게만 보입니다.

여러분, 깊이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병든 사회를 염려하십니까? 병든 인간을 염려하십시다. 병든 이웃 때문에 괴로워하십니까? 남 얘기하기 전에 내 속 사람을 점검합시다. 내 속 사람이 건강해지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다 이길 수 있고, 다 소화할 수 있고, 다 긍정적으로 생산적으로 창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승리의 사람을 바라보며 진실한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이여, 나의 속 사람을 강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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