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 그 진정한 의미 (요한복음 16:25-33)
예수님의 생애는 영적 전투에 삶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한 영적 전투는 예수님의 승리로 일관됨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예수님의 영적 전투 중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현장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직전에 예수님이 잡히셨던 밤이었다고 보여집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을 금식하시고, 사단에게 시험받으셨던 그 현장이었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그 날밤에 로마의 군사와 그리고 제사장 측근의 사람들과 가장 믿었던 가룟 유다가 예수님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캄캄한 밤에 횃불을 밝히고 완전 군장을 한 그야말로 창칼을 든 군사가 예수님을 점점 더 가까이 포위해 왔습니다. 이 때, 성격이 매우 급한 베드로가 칼을 빼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친 것이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검을 사용하는 자는 검으로 망할 것이다.' 말고의 떨어진 귀를 예수님은 다시 붙여 주셨습니다. 그러시고 예수님은 말씀을 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만약 하나님께 청한다면, 열 두 영도 더 되는 하늘 군사가 와서 이 로마의 군사를 진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러한 기도를 하시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 말씀 속에 메시지가 있습니다. '적이란, 결코 타인이 적이 아니다. 자아가 적이다. 내 적은 지금 나를 잡으러 온 군사도 제사장도 가룟 유다도 아니다. 바로 내 마음속에 적이 있다.'하는 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명명백백히 감람산의 기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버지여, 할 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내게서 면케 하여 주시옵소서.' 두 번씩이나 거듭 그렇게 기도를 올렸습니다. 얼마나 기도를 전력을 다해서 했으면 땀이 피처럼 흘렸다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최종적 기도는 제목이 바뀌었습니다. '내 뜻대로 하시지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는 줄로 압니다. 사랑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죽음에로 내모는 것이 사랑입니까? 이건 이래서 되지 않습니까?'라고 두 번씩이나 기도했고, 그러던 중에 예수님의 심령 중에 떠오르는 사건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필이면,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모리아에서 바치게 했을까? 적어도 이삭은 아브라함과 동일 된 존재였을까? 아니다. 바로 이삭이 자기 자신이었다. 아브라함이 100세에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쳤을 때, 하나님은 사실 이삭을 그대로 번제물로 쓰셨던가? 아니다. 그를 되살리셨다. 그리고 풀에 뿔이 얽혀 있는 수양을 대신 드리게 했다. 그렇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십자가 지게 하시고, 죽게 하심은 그것이 가장 큰 은총이요. 진정한 사랑이다. 죽어야 산다. 부활이 약속되어 있다. 그런고로 아버지가 나에게 행하시는 사랑은 참 사랑이요. 은총입니다.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그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속에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 나를 패배케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이루어짐이 승리임을 알게 하는 영적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 타인이 나를 사랑해주는 것, 이것은 나에게 대해서는 영적으로 이적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이 사역하시기 전에 사탄이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여기, 돌들이 떡이 되게 하세요.' 이 말은 결코 예수님에게 적된 말이 아니었습니다. 성전 꼭대기에 올려 세우고, '뛰어 내리세요. 천사가 발이 다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시편 91편 말씀을 인용해서 사탄이 말했을 때, 이것 역시 예수님을 패배케 하는 말은 아니었습니다. 세상 부귀 영화와 권세를 다 주겠사오니 내 앞에 절 한번 하라고 했던 이 사탄의 유혹이 결코 예수님에게는 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속에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하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받아들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케 해야 하느냐? 바로 이 두 마음이 예수님의 진정한 적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내가 밥을 먹고, 강건한 상태에서 나를 사랑해 봤자, 나를 참으로 사랑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40일간 금식했으니 더욱 내가 나를 사랑해 봤자,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만이 나를 사랑하실 때, 그것이 나에게 가장 유익합니다. 나를 사랑할 분은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나는 돌로 떡을 만들어 먹지 않겠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선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란,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역사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가끔씩 목회를 하면서 성도들이 피곤하고, 어려워진 상황을 보면서 '말씀대로 사세요. 그리하면 잘 살게 될 것입니다.' 말을 하고 보면, 그것이 아닌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그 자체가 복입니다.'라고 바꾸어 말씀드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 안에 역사하셔서 그 사랑이 그대로 표출되어지는 현존적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 이보다 더 큰복이 어디 있다는 말입니까?
시드니에는 지금 2000년 이후에 처음 있는 하계 올림픽 게임이 시작되었습니다. 첨단 장비로 화려한 개막식, 그리고 웅장한 시설들, 특별히 이번에는 남과 북이 손에 손을 잡고, 입장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의미 깊은 스포츠 정신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경기장에는 세계에서 가장 그 국가적으로 기량이 높은 선수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거기에는 적과 적이 손에 손을 잡고 서있다고 생각이 되십니까? 적과 적이 아니라 이웃과 이웃입니다. 여러분이 생각할 때는 거기 선 선수들에게 미래에 경기의 결과로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이 주어질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다 자기가 받을 메달을 들고 서있습니다. 왜냐고요? 연습을 통하여 자기가 얼마나 자기를 이겼느냐에 결과대로 주어질 것입니다. 메달은 미래의 경기에서 받는 것이 아니고, 과거의 연습 양대로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므로 선수와 선수가 적이 아닙니다. 바로 내 자아가 나의 적이었을 뿐입니다.
서양 사람의 격언에 보면 '승리의 비결은 3P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Peace, Practice, Patience' 즉 평화, 실천 더 나아가서 인내입니다. 평화로워야 고요한 마음을 갖고, 고요한 마음이 되어야 new idea가 나옵니다. 불안한 사람은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야구의 타자는 결코 홈런을 칠 수가 없습니다. 저도 운동을 하러 나가보면, 꼭 저에게 하는 말이 '목사님, 어깨에 힘좀 빼세요.' 평화로워야 제대로 승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적극적으로 생각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앉아서 승리를 바랄 수는 없습니다. 뛰어야 합니다. 피나는 노력만이 승리에로 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 이것은 최종적 승리로 이끌어 가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 교훈은 한 마디로 말해서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타인이 적이 아닙니다. 대적인 타인이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나에게 열악한 환경, 환경을 이겨야 할 과제들은 모두 나를 강건케 하는 트레이너들입니다. 아울러서 나에게 적처럼 보이는 나의 이웃이 나에게는 귀한 스승인 것입니다.
산인(山人)은 이렇게 말합니다. '산이 거기 있으니까 산에 오른다.' 만약 산 위에 올라보지 아니하는 최고봉을 올라서 본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산이 있어서 나로 하여금 여기 최고봉에 오르는 기쁨을, 만족을, 희열을 얻게 되었다. 산은 그에게 승리의 기쁨을 준 아름다운 은인인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신앙으로 인간 승리를 거둬낸 사람 치고, 좋은 환경, 좋은 조건, 그리고 많은 협력자에로부터 승리를 가져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가장 힘들고 어려운 환경 중에서 하나님을 붙들고 승리한 사람들, 그리고 그야말로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의 삶을 집요하게 그의 삶을 방해하고, 지장을 주고, 승리 못하게 하지만은 그럴수록 하나님께 의탁을 해서 승리한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로 성경에 주인공들을 삼아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나의 진정한 스승은 나의 원수입니다. 그가 나를 위하여 그렇게 원수의 역할을 해주고 있습니다. 나를 성숙케 하기 위해서 영의 사람되기 위해서 나에게는 열악한 환경을 준비하셔서 우리에게 다 주신 선물입니다. 제가 아는 한 사람, 딸 아홉을 낳고, 부모가 나이가 쉰이 넘어서 10번째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것도 7대 독자입니다. 식사를 해도 그 아이 위주입니다. 그 아들이 기분 좋으면 온 식구가 덩달아 기분 좋고, 그 아들이 기분 나쁘면, 온 식구가 덩달아 기분이 나쁜 집입니다. 초등학교를 다니는데, 도시락 가방, 실내화 가방, 누이가 다 들어다 교실에 갖다 줍니다. 뿐만 아니라, 비오는 날에는 업고 누이들이 등·하교를 시켜줍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가야되겠는데, 아버지가 묻습니다. '얘야, 너 중학교 갈래?' '나 공부 싫어요.' '그럼 가지 마라. 그저 건강이 제일이다. 잘 먹고, 잘 노는 것이 최고다. 공부는 안 해도 된다.' 소문이 들려오기를 그 집의 모든 재산은 그에게 다 유산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몇 번이나 결혼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요. 자기를 위하여 살아 줄 여성이 어디에, 누가 있습니까? 다 사랑 받고 싶어서 왔지.
어느 때인가 비오는 날, 서울의 거리에서 폐인 된 그를 만나보았습니다. 그를 그토록 위했던 형제와 자매들, 그를 그토록 그 사람 위주로 살았던 부모와 주변 사람들, 그들은 진정 사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를 폐인되게 하는 조역자요, 폐인되게 하는 함정으로 몰아넣은 장본인들이란 사실을 그 나이 쉰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의 원대로 해주는 부모가 좋은 부모가 아니올시다.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는 은인이 아니올시다. 진정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이끌어 가는 사람들, 바로 그 사람들이 나의 참 이웃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되 호의호식하시기만 하지 않습니다. 평탄한 길로만 이끌어 가시지 않습니다. 좋은 여건 안에서 안주하게만 두시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사랑하신 족장 3을 소개하면, 아브라함부터 들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가장 그 시대에 소득이 많은 곳, 그리고 거기서 유복하고 평탄한 가정 생활을 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그는 광야에로 하나님으로부터 내 던져져 버렸습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가정에서 매우 귀여움을 받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자 명분을 추구하는 바람에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를 순례자, 도망자로 내쳐버렸습니다. 요셉은 야곱에게 특별히 사랑받고, 라헬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끌어내서 노예 삶에 그 구렁텅이로 내던졌고, 마지막에는 억울한 재판을 받아 감옥으로 내쳐버렸습니다. 그것은 '네가 네 자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 사랑을 사모하고 갈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아무리 사랑해 보았자 인생에는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메시지는 노예로 팔려간 요셉의 사건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이 노예로 있는 여주인,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사랑을 고백해 왔습니다. 정말 요셉을 좋아했습니다. 요셉에게는 특혜를 누릴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 여주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면 앞으로의 삶이 얼마나 평안해지고, 또한 여러 부분에서 유리한 것이 참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범죄할 수 없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추구해야지, 보디발의 아내, 당신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의 영적 승리였던 것입니다. 자기와의 싸움, 자기와의 싸움 중에 가장 위험한 전장이 고독이라는 전장입니다. '나는 나홀로다'하는 생각이 접어들 때, 아주 위험한 전장에 자기 스스로 들어간 것입니다.
성경에는 영성의 급변한 사람들을 많이 기록해 두었습니다만, 그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엘리야일 것입니다. 엘리야는 참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는 종이었습니다.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이방 사제 850명과 엘리야 홀로 영적 대결을 벌입니다. 이방 사제들은 그야말로 광만적인 제사 형식을 그대로 실행했습니다. 자해까지 합니다. 열광적으로 신을 부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조용히 응답되어질 불을 기다리며 오히려 제물 곁에 물을 가득히 붓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불은 엘리야의 제물을 태웠고 그 응답의 역사를 보자 엘리야는 공격투사가 되어서 850명의 그 다른 신을 섬기는 사제들을 잡아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성경을 보면, 그리 시냇가에서 '하나님, 나를 죽여주십시오.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다 하나님을 배신하고, 저 이세벨과 아합의 여러 가지 공격과 불의를 치는 그런 핍박을 견디지 못해 마음이 다 바뀌었고 다 죽어버렸습니다. 이제는 나밖에 없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엘리야야, 아직도 바알과 아세라에게 입맞추지 않은 종이 칠 천이나 있다.' 왜 엘리야는 칠 천명의 종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을까요? 엘리야는 홀로 고독해 있었기에 바로 하나님과 멀어져 있었던 사실입니다. 고독합니까? 외롭습니까?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멀어졌다는 자기 영성의 표현인 것입니다. 외로우면 두렵습니다. 외로우면 위로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외로우면, 위로자의 위로가 오히려 졸음으로 들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삼손하면 힘의 상징입니다. 삼손이 사사로 있는 그 때에 강한 나라, 블레셋은 이스라엘을 이길 길이 없었습니다. 전쟁만 하면, 삼손이 나와서 승리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승리를 한 삼손, 승리 뒤에 찾아온 외로움이 그를 못살게 했습니다. 그 고독을 이기기 위해서 사람에게 위로를 청하여 데릴라라는 여자를 찾아갔습니다. 고독할 때, 홀로 있을 때, 사람으로부터 위로를 받으려고 하는 이 문제가 더 큰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승리한 장군을 패배로 이끌어 갔습니다. '내 힘의 원천을 머리털에 있다.' 하나님과 약속했습니다. '이 말은 결코 비밀로 하자.' 하나님의 사랑을 전폭적으로 의지했던 삼손이 데릴라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과의 사랑을 밀어낸 것이 바로 비밀을 토해 누설한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그의 눈은 시뻘겋게 단 인두로 지져버림을 당하고, 그리고 그의 온 몸은 사슬로 묶여서 마치 마소처럼 일터에 나가 연자맷돌을 돌리는 그러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도 혼자였습니다. 외로우셨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하면서 3년간 따라다니던 제자도 다 예수님 보시기에는 떠나갈 존재입니다. 배신할 존재입니다. 베드로부터 앞장서서 '고기 잡으러 가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모두 고기 잡으러 떠나버렸습니다.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기 위해 입성하실 때에 연도에 나와서 종려나무를 꺾어 들고, '호산나! 호산나! 이스라엘 왕이여, 우리를 구원하소서.'하던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예수님의 나귀에 겉옷을 덮던 사람들이 빌라도의 법정에 횃불이 번쩍이는 자리에서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라.' 거짓 증거하는 무리라는 사실을 예수님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무리 중에 있었으나 홀로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생애와 여러분의 삶을 비교해 보십시오.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배신당한 사람이 과연 또 누가 있단 말입니까? 예수님처럼 철저하게 고독해 본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처럼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이 세상에 과연 누가 있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러기에 내가 이렇게 외롭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혹시 가장 친한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했습니까? 잘됐습니다.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여러분, 기가 막힌 억울한 일을 당해서 죽고 싶습니까? 죽을 바에는 하나님께로 가십시오. 왜 하필이면 이런 병이, 나에게 왜 하필 이런 사건이 경험되느냐? 마음속에 어쩔 줄 몰라 하십니까? 좋은 복받았습니다. 무릎을 여호와 하나님 앞에 꿇으십시오. 우리의 마음이 강퍅하고, 자기 사랑에 완전히 찌들어진 존재들이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하나님은 이런 기회를 여러분에게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고독하고 억울하고 괴로울 때 사람을 찾아가지 마세요. 가서 비밀스러운 자기의 내면을 드러내놓고 얘기하면, 평생 그분에게 삼손처럼 사슬이 와서 그 마음을 얽어 매여 그 사람에게 종노릇해야 됩니다. 억울하고 답답하거든 하나님께로 가십시오. 마음껏 부르짖으십시오. 목숨을 걸고 하나님 앞에 외치십시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진정한 것입니다.
여러분, 다니엘은 참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바벨론의 포로생활을 하고 있는 지경에 저 이방 사람들은 우상 섬김이 그들의 신앙생활이었기에 다니엘을 시기하고 질투하는 사람들로 다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항상 성전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일을 잊지 않고 외로운 생활을 했습니다. 급기야는 환경적으로도 외로워졌습니다. 맹수가 있는 사자굴에 다니엘을 던졌기 때문입니다. 극단적인 고독이 찾아왔습니다. 이 때에 다니엘은 알았습니다. '이제는 환경도 사람도 아무도 나를 도울 자는 없다.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하나님을 향하여 붙들고 기도했을 때, 그 사자들이 바로 이 다니엘의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 한 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좋은 도움자요, 스승이요. 원수가 가장 나를 사랑하는 친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지는 열악한 환경이 나를 하나님께로 가게 하는 하나님의 이끄심이라는 사실을 알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27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했습니다. 승리란,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승리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심이요, 하나님이 나를 이기셔서 내가 패배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나를 온전히 정복됨이 바로 승리가 되는 것입니다. 얍복강 강변에서 밤새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야곱입니다.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로 압니다. 나의 기도 들어주지 않은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삼촌 집에 가서 머슴살이 할 때에 라헬을 사랑해서 라헬을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기도했더니 미인을 내 품에 안겨주셨죠. 내가 세경을 변경하는 삼촌의 불이익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바꿔주시고, 내가 물질적 축복을 받아야겠다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점있고, 흠있는 양들을 무진장 주셔서 두 떼를 이루고 왔습니다. 이제 한가지만 더 하면 됩니다. 에서가 나의 머슴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나의 본토, 그리고 나의 고향집, 모두 내가 장자니까 내가 다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에서가 건방지게 마음이 강퍅해서 군사를 몰고, 나를 지금 치려고 오고 있답니다. 에서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옵소서.' 환도뼈가 부러지도록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 환도 뼈가 부러지기까지 기도한 뒤에 이루어진 역사는 '하나님, 하나님! 나의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 뜻대로 하옵소서.' 야곱이라는 말은 '내가 나를 사랑하는 자'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나에게 이루어진 자'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 주시옵소서.' 그는 절뚝절뚝 하면서 얍복강 나루를 아침에 걸어갔는데, 그 날 낮에 에서를 만나서 에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 승리하는 삶을 살자면, 하나님이 나에게 오셔서 항상 승리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왔다 그리고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그랬습니다. 이 말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내가 창조될 때, 하나님의 뜻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가 되었다. 그런고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돌아간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고로 인간에게 주어진 유일한 승리,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이루어지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했습니다. '환난이란, 의롭게 사는 자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환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말씀대로 사는 자가 불이익을 당하는 것을 환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제 고향에 참 아리따운 처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그 처녀를 짝사랑하는 남자 청년이 있었습니다. 10년간 그 처녀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과일이 나면 제일 좋은 과일을 골라서 보내고 또 그 처녀가 어디가면 먼발치에 서서 그 처녀를 보호해 주고, 명절마다 찾아가서 어떻게 해서든 그 부모들에게 논, 밭일까지 다해주고, 부모 섬기듯 했습니다. 10년이 가도 그 처녀가 본체만체 합니다. 생각다 못해서 결심을 합니다. '아무개야, 내가 오십천을 오토바이를 타고 한 시간만 도는데, 같이 동참해주면 다시는 안 괴롭히고 잊어버릴께.' 그랬더니 답이 오기를 한 시간은 너무 길다는 거예요. 그러면, 30분, 30분도 길다는 거예요. 그러면 10분, 10분은 좋아. '10분만 타!' 오토바이를 태우고, 산길, 비탈길, 험한 길, 울퉁불퉁한 길을 죽기 살기로 달리는 거예요. 그러니 이 처녀가 할 수 있나요? 안 떨어지려면, 허리를 감싸 안아야지요. 아니, 처녀가 남의 총각 허리를 잡았으니 결혼해야지, 별도리 있습니까? 돌아보고 묻습니다. '결혼해 줄래? 안 해줄래?' 안된데요. '그러면 더 어려운 길, 죽기 아니면 살기지, 뭐냐?'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죽는 것보다 결혼한다는 것이 좋겠어. '결혼해 줄께.' '그래!'
예수인 총각이 교회인 처녀에게 얼마나 수없는 시간을 '사랑한다. 사랑한다.' 그토록 사랑의 고백을 해왔지만, 교회인 처녀가 받아들여야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 총각이 교회 처녀를 오토바이에 뒤에 태우고, 환난의 길을 달리는 거예요. 환난은 예수와 우리를 하나로 묶는 사랑에 매는 줄이요. 그리스도인이 되거든 환난 받을 줄 아세요. 환난이 오거든 '아! 하나님이 나에게 적극적으로 사랑을 받아들이라고 강요하시는구나.' 그러는 줄 아세요. 그리고 담대하십시오. 그 길이 바로 승리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출처/윤대영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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