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이 사람이 누구냐 하고 하나님께서는 욥에게 물으셨다(욥38장2절).
인간이 알면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시시비비 하느냐는 하나님의 질문인 것 같다.
하나의 이데올로기의 파생품이라 말할 수 밖에 없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와 성경이 직접 만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이로니컬 하게도 교파와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본질상 이데올로기의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Ideology)란 특정한 이념(Idea)을 중심으로 모든 사고를 재편성한다.
이러한 사고는 전투적이어서, 자기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는 자는 적으로 간주하고 바로 전투적 자세를 취하게 되는 것이 관례적이다.
칼 바르트가 ‘성경적’ 자세에서 ‘성경주의적’ 자세로 넘어가게 되면 불가피하게 이성주의에 종속된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는 신학의 이데올로기화를 의미한다고 볼수 있다.
그러나 기독교는 단연코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허용하지 않으며,
개념이나 사상의 신봉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인격적 화해와 관계를 그 본질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특정한 개념이나 교리나 사상을 절대시하고 추구하는 이데올로기의 도입은 기독교를 세속화시키고 급기야 분열을 결과하게 만들었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나
회중교회는 정치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파들이다.
성경은 어느 특정한 정치체제를 절대로 명령하지 않는다.
장로정치나 감독정치나 회중정치 체제는 모두 성경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가능한 방식들이지만 결코 배타적으로 절대화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정치체제를 절대화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종속하는 결과를 초래하며 분열을 불가피하게 만들고 적으로 만든다.
또한, 보수주의나 진보주의도 교회를 분열시키는 이데올로기들이다.
한편, 특정한 개념을 중심으로 분열하는 경우도 있다.
침례교회는 침례를 절대화하여 완전히 몸 전체를 물속에 담구어야 유효하다고 믿고 대다수의 교회가 행하는 세례를 무효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물속에 몸 전체를 담구지 아니한 세례들은 모두 이단들인가?
성결교회는 성결을 중심적 이상으로 생각하지만, 성결교인이 다른 교파의 교인보다 더 성화되었다는 증거도 없는 것이다.
개혁교회는 끊임없는 개혁이라는 이념을 중시하지만, 사실은 새로운 개혁을 거부하고 과거의 개혁을 절대화하는 모순된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오순절교회는 특정한 신앙방식을 절대화한 것이다. 삼박자 구원 방언 등이다.
그리고, 특정인의 신학을 절대시하고 추종하는 것이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루터교회는 루터의 신학사상을,
칼빈주의는 칼빈의 신학사상을 절대화한다.
훌륭한 신학자는 교회에 필요하지만, 그의 신학을 절대화하여 무오의 경지에 올려놓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신학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된다.
모든 신학은 인간의 작업으로서 불완전하며 신앙에 보조적인 역할을 감당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칼빈주의’나 ‘개혁주의’ 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사용하지만,
그것은 예수를 믿는 성도로서 매우 조심스럽게 생각해야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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