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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교회개혁과 쇄신

by 【고동엽】 2020. 7. 22.

김영재 목사

 

독일 교회를 제외하고는 10월 31일을 종교개혁 기념일로 챙기는 국가의 교회가 별로 없는 것 같은데 한국 교회에서는 그 주간의 주일을 ‘종교개혁 주일’이라고 하여 찬송가의 예배의 교독문에 삽입할 정도로 그날을 기념합니다. 금년은 종교개혁 500주년이어서 대대적으로 특별하게 기념합니다. 평소에는 독일 이외의 유럽과 미국에 있는 교회들은 그들의 역사에서 그들 나름의 종교개혁이 있었고 신앙 전통을 가졌기 때문에 구태여 그날을 온 교회가 기념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종교개혁이 우리 역사에서는 없었던 것이므로 루터로 말미암아 시작된 종교개혁을 개신교의 탄생일로 특별히 기념하는 것으로 압니다. 

 

우리가 종교개혁을 기념한다면서 그것을 교회 개혁 또는 쇄신의 모델로 생각하고 마는 것은 종교개혁의 의미를 옳게 되새기는 것이 못 됩니다. 종교개혁은 교회 역사에서 일어난 그 어떤 교회 쇄신 운동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의미를 가진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단순히 과거에 있었던 사건으로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정도의 사건이 아니고 교회와 신학의 전통을 이룬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오늘의 개신교 교회를 있게 한 계속성을 가진 사건이므로 종교개혁의 의미를 잠깐이나마 살펴보도록 합시다.

 

역사적인 종교개혁

 

종교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비텐베르크 성문에다 당시의 교회의 부패상과 잘못된 관행을 지적하는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써서 붙임으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습니다. 이 소식은 4주 만에 독일에, 6주 만에 온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교황의 권세에 도전하는 큰 사건이어서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했던 일이었기 때문에도 그러했습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부터 종교와 정치가 하나로 유착되어 왔던 유럽 세계에서 종교개혁은 교회의 개혁 운동일 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 전반에 큰 변혁을 초래한 운동이었습니다. 중세 가톨릭교회 교황의 영향과 간섭을 받던 나라들 중 많은 나라들이 교회와 함께 교황의 세력을 벗어나 자율을 구가하는 나라와 교회가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의 개혁을 촉구했을 뿐이었으나 교황 교회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며 그들을 정죄함으로 말미암아 중세 가톨릭교회는 크게 로마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의 개신교로 이분되었습니다. 개신교에는 루터교회, 개혁교회, 앵글리칸교회, 재세례파 등의 교회가 있게 되었습니다.  

 

루터가 14, 15세기 종교개혁의 선구자 위클리프와 후스와는 달리 처형을 면하고 개혁을 성공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 개혁을 할 정도로 때가 무르익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인문주의의 발전으로 많은 지성인들이 합리적이며 비판적인 사고와 사상을 갖게 되었으며, 인쇄술의 발달로 더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정보에 쉽게 접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독일의 중부와 북부 제후들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어서 로마 가톨릭교회에 버금가는 큰 세력을 가진 교회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북쪽으로 스칸디나비아 나라들로 확산되어 루터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남쪽에서는 스위스에서 1523년 1월 29일 츠빙글리가 공개토론회에서 67개 조항을 발표함으로써 개혁의 기치를 들었습니다. 개혁 운동은 여러 칸톤과 도시로 확산되었습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개혁 운동을 먼저 시작한 파렐의 간청으로 1537년에 참여한 종교개혁 제2 세대의 지도자였습니다. 스위스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은 독일의 일부 지역과 동유럽의 여러 나라로 확산되어 개혁교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잉글랜드는 헨리 8세 왕이 개인적인 동기에서 교황의 세력에서 벗어나고자 정치적으로 단절을 선언하고 1534년 왕을 앵글리칸교회의 수장으로 공표함으로 말미암아 개신교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때 매리 여왕의 통치(1553-1558)하에 가톨릭으로 복귀하는 우여곡절이 있었습니다만, 엘리자베스(1533 출생, 1558~1603)가 왕위에 오르자 개신교가 다시금 득세하게 되었습니다. 앵글리칸교회는 처음에는 신학적으로 루터의 영향을 받다가 매리 여왕 이후에는 칼빈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왕이 수장으로 있는, 개혁에 미온적인 앵글리칸교회가 교회 일치 정책을 강행함으로 말미암아 철저한 개혁을 추구하는 청교도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신앙의 자유를 구가하는 많은 교파 운동이 일어나 잉글랜드는 교파의 온상이 되다시피 했습니다. 청교도들 중에는 앵글리칸교회에 그대로 머문 그룹, 독립교회 또는 장로교회와 회중교회를 형성한 그룹들로 나뉘었습니다. 스코틀랜드는 제네바에 머물면서 칼빈에게서 배운 요한 낙스가 귀국하여 개혁 운동은 활기를 띠게 되어 장로교회가 형성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개혁 운동이 진척되는 과정에서 지적한 중세 교회의 잘못은 교황 주의, 목사를 제사장이라는 사제주의司祭主義, 교계주의敎階主義 hierarchy, 교회의 전통과 법을 신성시하는 것, 연옥을 믿는 신앙, 미사의 제물 사상, 즉 성찬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선물이 아니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로 여기는 사상, 세례와 성찬을 제외한 가톨릭의 다른 성례들, 성자聖者들에게 기도하는 것과 성상 숭배, 죽은 자를 위한 기도, 순례, 예배시의 행렬, 성수, 부적 등등을 제거하였으며, 공로 쌓는 일, 수도원, 환상을 보거나 황홀을 추구하는 일, 풍유적인 성경해석 등등을 반대하였습니다.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과는 역행하는 풍습과 관례들은 하루 이틀에 생긴 것이 아니고 초대 교회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중세 교회가 부패하였다고들 말하지만 교회 전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찍부터 교회 역사에서 교회와 교회에 속한 기관이 부패할 때면 쇄신 운동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수도원도 그래서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종교의 쇄신을 위해 생긴 수도원이 세월이 감에 따라 부패하곤 했었습니다. 6세기 중반에 생긴 베네딕트 수도원은 8세기에 본래의 모습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너무 부패하게 되어 프란체스코와 도미니코 등 참신한 수도원들이 생겼습니다만, 14, 15세기에 이르러서는 많은 수도원들이 교회와 함께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수도원 생활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인문주의자들의 희롱과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의 배경을 이야기하려니까 부정적인 것만 늘어놓게 되므로 먼저 교회의 긍정적인 면을 보기로 합니다.

 

초기의 기독교

 

기독교는 초기에 핍박을 받으면서도 놀랍게 성장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교를 통하여 기독교는 주후 200년경에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큰 세력을 갖게 되었으며, 그 이후 50년간에 복음은 더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 기독교는 250년경에 로마 제국의 전역에 전파되었으며, 제국의 경계를 넘어 멀리 확산되어 갔습니다. 북아프리카와 이집트 및 동 시리아에서는 도시나 농촌을 불문하고 기독교 신자들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로마는 방대한 제국을 유지하기 위하여 제국 내의 모든 민족들이 신앙할 수 있는 범세계적인 종교를 필요로 했으나 기독교 이외의 이방 종교들은 이에 부응할 만한 요건을 갖추고 있지 못했습니다. 넓은 층의 대중들은 매일의 생활에서 경제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특히 3세기에 이르러서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대중들은 그럴수록 저 세상의 복된 삶을 희구하게 되는 법인데, 교회는 인권을 존중하고 구제함으로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개개인이 영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도록 설교하였습니다. 한편, 지식을 제일로 치던 사회 풍조가 종교를 우선적인 것으로 여기는 풍조로 바뀌게 되어, 철학은 계시와 기적을 믿는 신비주의 신앙과 결합하여 변질되고 마침내는 열광주의로 퇴락頹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신앙을 지적으로 변증하며 건전한 삶을 가르쳤습니다. 주후 300년경에 사람들은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이방 종교나 사이비 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종교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즉, 유일신 사상은 다신론多神論이나 신화 등의 잡동사니와는 다른, 계몽된 사상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기독교는 귀신에 대한 공포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해방을 안겨 주는 복음이었습니다. 기독교는 고대의 신화나 신비 종교와 전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세계관과 신학을 가졌음을 사람들은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기독교는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가 계심을 말하고, 만물의 시작과 종말이 있다고 하며, 한 사람의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하다고 말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한 구원에 참여한다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성경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비밀을 담고 있는 경전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리스도의 성육의 교리와 성례는 저 세상과 교통하는 통로요, 접촉점으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기독교는 모든 사람에게 자제自制하도록 촉구하고 남을 구제할 것을 가르치는 등 윤리적인 교훈을 말하고, 금욕할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통일적인 조직으로서 지체인 교인들을 잘 관리하고 보호할 뿐 아니라, 재래 종교가 가진 요소들 가운데 당시의 사람들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들을 수용하는 잠재력을 지녔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위치에서 복음을 증언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기독교의 우월한 교리와 윤리적인 교훈은, 교회가 가르치는 교훈대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하여, 신빙할 만한 것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입니다. 교회는 과부와 고아를 돌보고, 병약자, 가난한 자와 장애인을 도우며, 옥에 갇힌 자와 납치되어 강제 노동을 당하는 자, 노예와 실직자를 돌보며, 재난이 있을 때에는 신속한 구조 활동을 벌였습니다. 숙박업이 발달하지 못한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은 손님을 친절하게 맞이하며 숙식을 제공하였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지체들은 사랑으로 서로를 도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이러한 윤리적인 미덕의 생활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으며, 무엇보다 영원한 나라를 바라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들의 신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순교자들에게서 사람들은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이 원인이 되고 원동력이 되어 기독교는 마침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패

 

교회가 이와 같이 긍정적으로 발전하고 있을 때부터 부정적인 요소들이 독버섯처럼 생겨나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세계는 넓고, 교회는 수없이 많았기 때문에 그랬을 것입니다. 2, 3세기에 순교자와 영웅들을 기념하는 제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소아시아의 교회는 190년경에 초대 교회의 선지자, 요한, 빌립과 그의 세 딸의 묘소가 있음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로마 교회는 주후 200년 이후 바티칸에 베드로의 묘소를 둔 것과 로마 근교의 해변 도시 오스티아로 가는 거리에 바울의 묘소를 둔 것을 자랑하였습니다. 3세기 이전에 교회는 이미 백성들의 이방적인 종교심에 의도적으로 부응하려는 대책을 강구하였습니다. 2세기에 성자숭배가 종교 의식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며, 성물聖物 숭배, 부적, 기적을 믿는 신앙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행들은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더 심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행들은 4세기에 기독교가 이방 종교를 끌어안는 데 일조하기도 하였으나, 초기의 순수한 신앙을 점차 상실하게 만든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2세기부터 초기 기독교인들의 엄격한 도덕성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독신자들은 수적으로 불어났으나 세상과 접하면서 초기의 열정은 식어져 갔습니다. 교회 지도자들, 감독들은 이단적인 사상과 운동에 대항하여 기독교 진리를 보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만, 한편, 이방 세계에서 들어오는 교인들을 상대로 교회를 어떻게 보존하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접촉하는 것을 어느 정도로 허용해야 할 것인지에 관심을 기울이도 했습니다. 8세기에 동방교회 지도자들은 성상 숭배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다가 마침내 그것을 허용하기로 하였습니다. 처음에 반대하던 서방교회 지도자들도 성상 숭배를 허용하였습니다. 

 

중세 교회를 부패하게 만든 가장 큰 요소는 9세기에 도입된 평신도 서임권敍任權이었습니다. 즉, 제왕이 성직자를 임면하는 권한을 갖게 되면서부터 성직매매가 성행하게 되었으며, 자격 없는 왕족과 귀족들이 대거 고위 성직을 맡음으로 말미암아 교회는 더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제왕들은 교회를 왕실의 재원을 충당하는 기관으로 이용했습니다. 뜻 있는 교황(11세기 중엽의 그레고리 7세)은 이런 관행과 제도를 개혁해 보려고 했으나 개혁의 대상인 고위 성직자들과 군왕들의 호응을 얻을 수 없어서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교황청도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모으는 데 점점 혈안이 되었습니다. 교황은 주교나 대주교를 이동시킴으로써 수입을 올렸습니다. 주교와 대주교는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 위하여, 혹은 보다 나은 자리로 옮기기 위하여 상부에 거금을 헌납해야 했습니다. 교황청은 이런 재미를 보느라고 고위 성직자의 전임 발령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주 내렸습니다. 1365년의 3개 문서에 보면 7명의 대주교, 49명의 주교, 123명의 수도원장을 거짓 맹세한 자로 선포하고 출교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참 하나님을 믿는 종교도 세월이 흘러 교권주의가 팽배하게 되면 물욕과 정욕에 탐닉하는 성직자들이 많아져 부패는 극에 달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 제사장들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돈 바꾸는 자와 장사하는 자들을 보시고 분노하시며 그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성전을 거룩하게 관리해야 하는 제사장들이 성전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를 만들어 환전하여 헌금하게 하였습니다. 제물도 성전에서 사도록 하였습니다. 장사치들에게 상권을 부여하여 그들로 하여금 3, 4배의 폭리를 남기게 하고는 부정한 상납금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돈)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신 말씀이 함축하듯이 사람에게 돈은 하나님과 버금가는, 아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타락한 종교나 사이비 종교는 돈을 축적하고 섬기는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이 거의 공식처럼 되어 있음을 우리는 교회 역사와 우리 주변에서 봅니다. 

 

루터가 항의문을 쓰게 된 배경

 

루터가 항의문을 쓰게 된 직접적인 동기와 항의의 대상은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로마의 교황청은 베드로 성당 건축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브란덴부르크에서 면죄부를 팔고 있었습니다. 할버슈타트와 마그데부르크의 주교 알브레히트가 마인츠의 대주교가 되었습니다. 알브레히트는 브란덴부르크 왕가의 왕자였습니다. 그는 24세의 연령 미달의 나이로 대주교의 자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대가로 교황청에 1만 두카텐(Dukaten-금화)이라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기로 하였습니다. 알브레히트는 교황청의 제안으로 자기가 갚을 돈을 갹출하기 위하여 1506년에 발행한 면죄부를 자기가 관할하는 대주교구와 자기 형제들이 다스리는 주에서 팔기로 하고, 판매 대금의 반은 베드로 성당의 건축 기금으로 바치고 나머지 반은 빚진 돈을 갚는 데 충당하기로 하였습니다. 알브레히트의 면죄부 판매책을 맡은 이는 테첼 (Johann Tetzel)이었습니다. 그는 죽은 사람을 위하여 면죄부를 사는 사람이 돈을 궤 속에 넣으면, ‘쨍그렁’ 하고 울리는 순간에 죽은 사람의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게 된다고 하면서 어리석은 백성들에게 면죄부를 사도록 권유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모든 목사들이 동원되어 설교를 해야 했습니다. 

 

인문주의 교육을 받은 지성인들과 루터를 위시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행태에 분노했습니다만, 어리석은 백성들은 연옥,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등의 잘못된 교리로 교육을 받았으므로 테첼 설명과 권유를 받아들였습니다. 면죄부는 이미 11세기경에 생긴 관행이었습니다. 죄를 지어 징계를 받게 될 경우, 죄 사함 받기 위해 고행을 해야 할 경우, -십자군에 원정에 참여하는 것은 큰 고행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면제를 받거나 혹은 죄의식에서 쉽게 해방을 받으려면 면죄부를 사도록 하였습니다. 교황주의 교회는 상품권을 발행하듯 면죄부를 발행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사죄와 구원을 주시는 참 종교를 돈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사람들을 기만하는 사악한 종교로 실추시켰습니다. 

 

공로주의와 은혜 교리

 

중세에 교회를 병들게 한 사상은 공로주의였습니다. 즉, 구원을 받거나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하고 공로를 쌓아야 한다는 교리와 사상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종교 사상이며, 우리 안에 잠재해 있는 고질적인 종교적인 편견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도리는 공로를 통하여서가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내세운 구호가 “오직 성경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였습니다. 

 

중세 교회에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관없거나 역행하는 종교적 가르침과 관행들이 팽배한 것은 성경이 희귀한 탓도 있었습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식자들도 직접 성경을 보기 어려웠습니다. 루터만 하더라도 에르푸르트 대학교에서 처음으로 성경 전권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교황교회가 잘못을 행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성경의 진리를 더 발견하여 구원은 선을 행하고 공로를 쌓음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며 은혜로 구원을 주시는 것을 깨닫고 백성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를 제일 먼저 깨우쳐서 평생 이를 강조한 이가 루터였습니다. 

 

그런데 은혜의 교리가 루터와 종교개혁에서 비로소 논의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5세기에 북아프리카의 히포의 감독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예정 교리와 함께 은혜 교리를 말했습니다. 교회는 예정 교리는 두고 은혜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만, 얼마 지나서는 만연한 공로주의 사상에 가려 은혜 교리를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12, 3세기에 신학자들이 성례와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교리를 논의하면서 은혜의 교리를 다시 논의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혜를 세분하며 후대의 종교개혁자들의 은혜 교리에 상당히 접근했습니다만, 공로주의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토마스는 인간은 의를 성취할 수는 없다고 하며, 의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의 몫이라고 하였습니다. 단, 인간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선물을 받기 위하여 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에르푸르트 대학교도 이런 가르침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칭의 교리의 발견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 주신다.”는 칭의稱義, 즉 이신득의以信得義 교리는 은혜 교리의 핵심입니다. 어느 다른 종교개혁자보다 창의적이며 예리한 통찰력을 가졌던 루터도 칭의 교리를 스스로 발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내내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아무런 희망도 없으며 하나님의 노여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진노의 자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1511년 탁발 교단의 부단장 요한 슈타우피츠Johannes Staupitz가 비텐베르크를 방문했을 때 루터는 그와 면담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슈타우피츠는 토마스주의자였으며, ‘디보시오 모데르나’라는 경건 운동 출신이었습니다. 고민 가운데 있는 루터는 그에게서 신비적이면서도 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슈타우피츠는 루터의 내적인 고민은 하나님의 구원으로 가는 길로 이해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루터에게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말했습니다. 그 사랑 안에서의 택하심은 구원의 은혜를 받게 만드는 전제 조건이 된다고 했습니다. 슈타우피츠의 도움으로 루터는 자신을 괴롭혀 온 고민에서 놓여나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평생을 두고 슈타우피츠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성례에 관한 문제를 두고, 슈타우피츠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리를 말해 주었습니다. 즉,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인간 자신의 노력으로 선을 행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은혜를 베푸심으로써 시작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의 행위 이전에 오는 은혜로, 그리고 다만 그 은혜를 통하여 또 다른 도움을 받아 함께 일함으로써 인간은 성례를 효과 있게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루터는 이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여태까지와는 달리 심판자로 보지 않고 돕는 이시요, 친구로 보게 되었습니다. 토마스에 의하면, 아담이 죄를 범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는데, 성례를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이를 되돌려 주신다고 했습니다. 성례는 주입된 은혜를 통하여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께 대한 충만한 사랑을 일깨워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르침은 루터가 마음의 평정을 얻는 데 도리어 방해가 되었습니다.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세상에 대한 생각이나 자신을 위하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렇지 못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1514년 가을에 시편 강의를 하면서 시편 71:2의 말씀(라틴어 불가타판 성경으로는 70편),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풀어 주시며”(in justitia tua libera me)에서 하나님의 의가 사람을 자유롭게 한다는 말씀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여태껏 이해해 오던 공의로운 잣대라는 뜻의 ‘justitia’의 개념과는 다른 의미를 함축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영어 성경에 의는 righteousness라고 하고 있습니다. justice는 정의, 공의로 번역합니다.)

 

루터는 로마서 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과 로마서 3:21 이하의 말씀(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을 함께 고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갖추신 자질이 아니고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의’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경우와 마찬가지임을 발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의미하는 것임이 명백해졌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하나님의 복’의 경우도 같은 사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고 할 때도 사람이 사랑을 하기 위하여 억지를 쓰며 괴로워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루터는 슈타우피츠에게서 들어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의는 우리 자신이 씨름하고 행함으로써 얻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의 선물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로마서 주석(1515 부활절~1516년 9월-시편과 로마서를 강의했음) 서문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은 간증을 합니다. 이 글은 경건주의자들의 한 그룹인 모라비아 파 사람들이 런던에서 모여 예배할 때 늘 읽었던 글입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요한 웨슬리로 하여금 자신이 중생했음을 깨닫게 한 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기 때문에 불의한 자를 의롭게 다루셔서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의’로만 내내 생각하다가 마침내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가 믿을 때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를 깨달았을 때 나는 거듭났음을 느꼈으며, 낙원으로 활짝 열린 문을 들어섰음을 느끼게 되었다. 성경 전체가 새롭게 이해되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의’가 혐오스러운 말로 들렸으나 이제는 말할 수 없이 달고 사랑스러운 말이 되었다. 바울의 이 글은 나를 천국 문으로 인도하는 대로가 되었다.

 

오늘에 교회가 윤리적으로 무능하고 부패하게 된 것이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라고 하는 칭의 교리가 결과적으로 행함을 소홀하게 만들었다고 하면서 칭의 교리 대신에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교리를 새롭게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학자들이 더러 있습니다. 우리는 위에서 은혜와 칭의의 교리가 교회를 부패하게 만든 공로주의에서 해방시켜 준 역사적인 사실과 우리를 포함한 수많은 성도들에게 구원의 소망과 기쁨을 안겨 주게 된 역사적인 과정을 피상적이나마 잠깐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우리가 받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터득하고 주창한 신학과 교회의 전통은 우리가 늘 감사함으로 되돌아보고 새롭게 배우며 우리의 후세대에게 전수해야 할 전통입니다. 복음서에 보면 구원은 절대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은혜로 값없이 주시는 것임을 예수님께서 누누이 가르치시고 실천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이를테면, 포도원 비유(마 20:1-20), 불의한 청지기 비유(눅 16:1-9), 천국 추수에 대한 말씀(요 4:35-38), 삭개오의 부르심(눅 19:1-10), 그 밖에 많은 비유와 교훈들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병자들을 고쳐 주신 일 등 일일이 다 들어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하여 부르신 일, 땅의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을 약속하신 말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백성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의 약속과 사랑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에게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말해 줍니다. 사도 바울은 은혜와 칭의 교리를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와 서신 곳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초두에서 하나님의 예정을 찬양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합니다. 루터는 면죄부에 항의함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성경에서 칭의 교리를 발견하고 가르침으로써 종교개혁 신학의 물꼬를 텄습니다.

 

칼빈은 칭의 교리 위에 성화의 교리를 더 체계 있게 설명했습니다. 칼빈의 후계자인 베자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는 항상 개혁하는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교회의 지체인 우리 각자는 모두 함께 그리스도의 온전한 몸이기 위하여 늘 말씀을 따라 새롭게 되기를 추구해야 한다는 말씀을 상기며 종교개혁의 전통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자고 말씀 드리면서 에베소서의 말씀으로 강의를 맺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언하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진리가 예수 안에 있는 것같이 너희가 참으로 그에게서 듣고 또한 그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을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에베소서 4:1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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