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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 칼뱅주의 사회개혁 새장 열어

by 【고동엽】 2011.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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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브라함 카이퍼인가] 칼뱅주의 사회개혁 새장 열어
국민일보|기사입력 2006-04-16 15:35 |최종수정2006-04-16 15:35

 

왜 아브라함 카이퍼인가? 근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이 확산되면서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1837∼1920)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기독교 인문학 학술대회나 강연장에선 약방의 감초처럼 그의 이름과 사상이 언급되고 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목사 신학자 정치가 교육자 언론인 저술가의 삶을 살았던 네덜란드의 전 총리이다. 칼뱅주의 사회개혁운동의 새 장을 열고 기독교 세계관의 정초를 닦았다는 그의 생애와 사상을 요약해본다.

 

◇생애=아브라함 카이퍼는 1837년 네덜란드 남부 마슬라우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개혁교회에 속한 목사였다. 어릴 때부터 천재소리를 들은 카이퍼는 책읽기를 무척 좋아했고 1862년 레이덴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862년 카이퍼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 후보생 신청을 했고 1년 뒤 목사가 되었다. 첫 부임지는 네덜란드 동부지역의 조그마한 교회. 그는 이 교회에서 성도들과 교류를 통해 영적 갱신과 성장을 경험했고 더욱 영향력 있는 교회의 부름을 받아 사역을 확대해 나갔다. 유트레히트를 거쳐 암스테르담으로 임지를 옮긴 카이퍼는 당시 자유주의 신학에 물든 네덜란드 교회의 영적 풍토에 깊은 슬픔을 느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가 되어 칼뱅주의에 입각한 교회개혁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그는 언론과 국가,정치 영역에도 관심이 많았다. 주간지였던 헤라우트지의 편집장을 지내고 기독일간지 슈탄다트의 편집도 맡는다. 그는 또 성경과 개혁주의 원리에 기초한 고등학문을 주창,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을 설립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수행했다.

 

카이퍼는 그후 정치에 뛰어들어 국회에 진출하고 반혁명당의 지도자가 된다. 반혁명당은 프랑스 혁명의 무신론적 사고방식에 반대하는 것을 기치로 내건 일종의 기독교 정당이다. 그는 정계에서도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20세기가 시작되던 1901년부터 1905년까지 네덜란드 총리가 돼 빈민구호정책 등 기독정신에 입각한 여러 법안들을 통과시키고 사회정의구현에 열중했다. 수많은 저서와 칼럼을 쏟아내기도 한 그는 1920년 11월8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신학과 사상=카이퍼는 누구보다 성경의 무흠함과 절대적인 규범성을 강하게 믿었다. 그는 성경의 규범이 현대사회의 난제들에 대한 해결 원리로 계속적으로 적용됨을 확신했다. 그는 1898년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 행한 강연에서 “성경은 피조물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규례들에 관해 계시된 규범성과 사고 방식 속에서 창조의 참된 의미를 열어준다”고 역설했다.

 

카이퍼는 칼뱅주의를 세상 한 구석의 종교사상이 아닌 ‘땅을 정복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여겼다. 그는 칼뱅주의가 전포괄적 삶의 체계를 소유하고 있다며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를 역설했다. 그의 삶의 체계란 말은 우리에게는 ‘세계관’(worldview)이라고 더 잘 알려진 표현이다.

카이퍼는 또 1878년 ‘우리의 프로그램’이란 글에서 “하나님은 온 우주의 절대주권을 갖고 계신다. 한치도 하나님의 통치를 벗어날 수 없다”며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교회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세상 모든 분야에 적용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세상에 존재하는 교회 가정 경제 교육 국가 등 모든 기관과 조직들도 하나님의 창조 법 구조에 입각한 기독교적 원리에 따라 조직돼야 한다고 보았다.

 

카이퍼는 또 일반은총과 특별은총을 주장했다. 즉 “하나님은 특별은총으로 구원을 이루시고 일반은총으로는 세상의 생명을 유지시키시며 세상에 내린 저주를 느슨하게 유화시키고 세상의 부패 과정을 지체시키며 우리의 삶이 마음껏 발전하도록 해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영역주권론도 그의 독특한 주장이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나름의 영역에 합당한 주권이 나타난다고 보았다. 국가 학교 교회 등이 대표적인 영역주권 분야이다. 카이퍼는 하나님이 이들에게 각각 영역주권을 부여했으며 이 주권들은 동등하고 특별한 주권이므로 서로 존중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또 인본주의 계몽주의자들이 주창한 사회계약론을 거부했다. 모든 권력은 사람간의 계약이 아닌 하나님에게서 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끼친 영향=그는 이런저런 활동으로 거의 반세기 동안 네덜란드의 교회 및 정치사를 지배한 인물로 평가된다. 수많은 연설과 저서들은 당대의 자유주의 신학을 타파하고 개혁주의 신앙을 찾으려는 사람들을 깨우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활동으로 칼뱅주의라는 말과 개념이 네덜란드의 국가적 차원에서 회자되었고 많은 기독인들에게 복음과 사회(국가)와의 관계를 생각하는 방식을 새롭게 해주었다. 또 개혁주의 사고를 갖고 사회개혁을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한 모델을 몸으로 제시해 주었다. 그의 사상과 활동은 프란시스 셰퍼 등 많은 칼뱅주의 개혁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카이퍼가 남긴 유산을 M R 랑홀레이는 △포괄적인 복음의 증언 △그리스도인 왕권과 일반은총 △그리스도의 직무의 역사적 의미 △포괄적이고 쉬운 언론 활동 △정치적 영성·정의와 단체의 권리의 투쟁 등 5가지로 요약하기도 했다.

 

그가 주장했던 ‘삶의 체계로서의 기독교’는 오늘날 회자되는 기독교 세계관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그의 신학은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을 통해 지금까지 계승,발전되어 왔다. 이 대학은 오늘날 12개 학부에 1만8000여명의 학생을 포용하는 개혁주의 교육의 산실이자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헤르만 도예베르트 등 걸출한 기독철학자들이 그의 뒤를 잇고 있다. 특히 이 대학 신학자들이 중심이 돼 1990년대 중반 설립된 세계개혁신학회는 한국 북미 유럽 아프리카 등 전 세계 개혁신학자간 네트워크 형성과 연구의 상호 진작을 위해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의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도 여기에 가입해 있다.

◇그를 둘러싼 논쟁=카이퍼의 신념과 사상은 교회내에서 적지않은 논쟁도 야기했다. 특히 세상 질서 전체에 세상적인 방식으로도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할 수 있다고 보았던 일반은총론은 큰 쟁점이 되었다. 그의 일반은총 속의 세상 발전에 대한 견해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역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못한 것이라는 비판도 있었다. 또 영역주권론도 논쟁의 대상이었다. 전체적으로 그가 새롭게 제시한 칼뱅주의가 과연 이전의 칼뱅주의와 일치하느냐에 대한 논쟁이 개혁주의 진영 안에서 몸살의 진원이 되었다. 일각에선 그의 사상을 뉴칼뱅주의라 부르기도 한다.

박동수 편집위원  dspar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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