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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예화 모음 17편

by 【고동엽】 2011. 4. 19.

1. 자비로운 모습

영국 브라이튼 프레드릭 로버트슨이라는 전설적인 선교사가 있었다. 어떤 사람이 상점에 가서 로버트슨의 이야기를 꺼내자 상점 주인이 방에 데리고 가서 로버트슨의 초상화를 가리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부정한 행위의 유혹을 받을 때 이 초상화를 바라봅니다. 이 초상화를 바라보면 도저히 부정한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소녀는 로버트슨의 초상화에서 그의 자비스러운 눈과 잠깐 부딪친 후 눈물을 흘리며 더욱 선을 행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를 자비롭게 부르신다.
/장형일

2. 참지혜

옛날 어느 집에 두 며느리가 있었다. 하루는 두 며느리가 시어머니께 친정에 다녀오게 해달라고 청을 드렸다. “오냐, 그러나 조건이 있다. 돌아올 때 큰며느리는 바람을 종이에 싸오고, 작은며느리는 불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너라. 알겠느냐?” 두 며느리는 그저 허락이 내린 것만 기뻐하며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친정으로 달려갔다.
며칠 후 돌아갈 날짜가 되었다. 두 며느리는 보따리를 한 아름씩 이고 각각 친정을 나섰다. 시집이 있는 마을 어귀에서 두 며느리가 만났다. 두 며느리는 마을 어귀에서 더 이상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내린 명령이 두 사람의 가슴을 눌렀기 때문이다. 불과 바람을 종이에 싸 가지고 오라는 명령을 두 사람 모두 지킬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며느리는 너무 속이 타서 한탄을 하다가 서로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다. 그때 지나가던 마을 노인이 우는 이유를 물었다. 며느리들의 사연을 들은 노인은 빙그레 웃으며 가르쳐주었다. “바람을 종이에 싸는 건 종이로 만든 부채를 이르는 것이요, 불을 종이에 싸라는 건 종이로 만든 초롱을 말하는 거요. 그러니 ‘종이 부채’와 ‘종이 초롱’을 구해 가지고 들어가시오.”이것이 지혜이다. 세상의 지혜도 귀하다. 그러나 이런 지혜는 낡아질 수도 있고,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 참된 지혜, 최고의 지혜, 영원한 지혜는 무엇인가?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말했다. “최고의 지혜, 참지혜는 자신과 하나님을 참되게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간은 가련하고 상실된 죄인들이며,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하시려고 열망하시는 자비로운 분이심을 아는 것이다.”
- 자신을 뛰어넘는 새 능력 / 김동성

3. 가시나무에게도 자비를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떼어내었으나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상처가 나고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을 보면서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하여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놓은 털들을 쪼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털을 물고는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사실 대자연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 가라지라면 이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라지나 가시나무들일지라도 뽑거나 베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의 끝 날에 심판하실 이가 따로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가시나무도 가라지도, 좌절과 실패와 죄에 시달린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다 품에 안고 언젠가 우리 주님이 보상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4. 치유의 원천

하버드대 학생이 아프리카에 있던 슈바이처 박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고자 했다. 그런데 환영은커녕 박사를 만날 수도, 만나주지도 않았다. 몹시 실망해 귀국을 준비하고 있을 때 큰 비가 와 마을이 온통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때 한센병을 앓는 한 아이가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뛰어들어 구해주었다. 그제야 박사가 그를 불러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며칠 자네를 지켜보니 전혀 나를 만날 준비도, 만날 가치도 없었네. 그런데 아이를 구해주는 것을 보고 자네에게 긍휼의 마음이 있는 것을 보았네. 세상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의사나 약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일세.”
세상을 치유하고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긍휼의 마음이다. 이 마음이야말로 황폐하고 강퍅한 이 땅에서 품어야 할 마음이다. 지금 이 순간 죽어가는 영혼들에게 긍휼의 손을 내밀어줄 사람은 바로 당신이다.
/정삼지 목사<제자교회>

5.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한 아이가 학교에서 신발을 도둑맞았다. 신발을 훔쳐 간 도둑 때문에 그 학급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발 도둑을 잡는 일은 아주 쉽다. 아이들은 순진해서 훔친 신발을 그냥 신고 다니기 때문이다. 신발 검사 결과 신발을 훔친 아이는 금방 드러났다. 신발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리고 훔친 신발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를 불렀다. 아마도 이 아이는 집안 살림이 넉넉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말했다. “신발을 그 아이에게 주면 안 되겠니? 너는 부자라서 신발이 여러 켤레 있잖아?” 선생님은 신발을 훔친 아이가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신고 올 신발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신발을 훔친 것은 나쁜 일이다. 돌려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세상은 정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정의보다 더 큰 개념은 자비를 베풀고 품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덮고, 품어 주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를 붙들어야 한다. 나의 의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는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을 붙들어 방종에 빠져들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의를 붙들어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이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삼하22: 26)

6. 징계 속에 감춰진 사랑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보면 도로시, 겁 많은 사자, 허수아비, 양철 인간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마법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마법사가 있는 곳에 다가가자 ‘펑’ 하고 불꽃이 튀면서 거대한 녹색 연기가 치솟는다. 그리고 연기가 걷히자 위협적인 모습의 머리가 나타나 각자의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 하지만 전지한 마법사는 사실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두뇌를 갖고 싶다는 허수아비에게 “소의 여물이나 될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놈이 두뇌를 요구하다니 뻔뻔스럽구나”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그분이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이해나 사랑이나 자비가 전혀 없는, 불꽃과 연기에 둘러싸인 두려운 존재라고 믿는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오해다. 부모들은 잘 알겠지만, 자식을 징계하는 것은 결코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나도 자녀들에게 훈계하기 위해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징계를 가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징계해야 할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 자녀를 징계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지상의 부모들과는 달리 징계의 목적과 범위는 물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분의 완전한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이런 점에서 그분의 징계는 완전하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렘애3:22,23)

7. 하나님의 자비하심

당신 눈에는 자비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잔이 보이는가?
아니면 그저 잔이 마를까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르는 법이 없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 인자와 긍휼로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원하여 쉬지 않고 중보하는 지체들 위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히시며 주께 돌아오는 자들이 주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받아 우리도 형제를 사람하고 용서하게 하소서.

8. 용서를 받을 줄 아는 인간

돈멀루의 「붐비는 우회로」라는 책에는, 부정한 방법으로 자기 회사의 자금 중 수천 달러를 몰래 빼돌린 한 젊은 회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행위는 적발되었고, 젊은이는 사장실에 가서 그 경위를 보고해야 했다. 그는 자신에게 내려질 법적 조치가 두려웠다. 그의 행위가 모두 사실이냐는 질문에 그는 그렇다고 답변했다. 그러자 사장은 깜짝 놀랄 만한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를 지금 그대로 일하게 해 준다면, 앞으로 자네를 믿을 수 있겠는가?”
젊은이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대답했다. “예, 사장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저도 이 일로 인해 깨달은 바가 있습니다.”
사장이 말했다. “나는 자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네. 가서 일을 계속하게.” 젊은이와 대화를 끝내면서 사장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자네가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 있어. 이 회사에서 유혹에 넘어갔다가 관용을 받은 사람은 자네가 두 번째 사람이야. 첫 번째 사람은 나야. 나도 자네와 같은 짓을 했었지. 자네가 받고 있는 자비를 나도 받았다네.”
용서받는 자는 진정으로 자신이 용서받았음을 알고 있어야 한다.
- 「거룩한 몸부림」/ 구대일

9. 소녀의 호소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이 길을 지나갈 때 한 소녀가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제 아버지를 용서해주소서"
무슨 사연이 있느냐고 나폴레옹이 묻자 소녀는,
"아버지가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라고 대답 했다.
"법을 어겼으니 어쩔 수가 없구나" 그러자 소녀가 흐느끼며 호소했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정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탄원하는 것입니다"
침묵을 지키던 나폴레옹이 말했다.
"네 말에 아버지를 용서하니 돌아가라"

10. 사토라레

'사토라레’라는 제목의 일본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사토라레는 어린 시절 비행기 사고로 비행기 잔해에 깔리게 되었습니다. 사토라레는 단지 마음속으로 “엄마, 살려주세요”라고 외쳤습니다. 그때 구조대원들의 귀에 그 외침이 들립니다. 사토라레는 자신의 생각이 다른 사람의 귀에 음성으로 들리게 돼 자신의 생각을 감추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후 의사가 된 사토라레는 수많은 환자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그의 순수하고 아름다운 마음,특히 환자들을 향한 긍휼과 애정이 낱낱이 드러나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생각을 숨길 수 없는 우리는 모두 ‘사토라레’일 수밖에 없습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생각들이 드러나면 오죽 좋겠습니까? 하나 우리는 사악하고 부정한 생각, 음란과 탐욕, 천박한 생각들이 들통나는 슬픈 죄인들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덮어주시는 용서와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류영모 목사(한소망교회)

11. 자비

자비는 성령님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신 자비는 인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유순하고 온유하여 타인을 넓게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마음은 관용과 친절이 내포된 마음입니다. 인간의 자비하는 마음은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할 때 그 자비는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사실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일컫습니다. 하나님께는 절대적인 성품과 도덕적인 성품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과 완전무결, 절대불변, 영원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좋으신 분이란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매우 풍성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에게 자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골 3:12).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신과 같이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지 아니하면 벌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여기서 인자는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 ‘크레스토테스’ 곧, 자비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자비로 무장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선한 사람입니다.
셋째,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자비는 참된 자비라고 말씀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의 자선행위를 자비로 단정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신 자비만이 참된 자비입니다. 인간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임할 때 인간의 자비는 참된 자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에게 임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자비가 될 때 세상은 밝아지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인 자비가 없는 세상은 인류의 큰 고통입니다. 자비는 말이나 이론이 아닌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비로 무장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한세대 영산신학연구소

12.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신 하나님

우리는 때때로 실수하기도 하고 범죄하기도 합니다. 아무리 올바로 깨끗하게 살려고 힘써도 부지중에 잘못하고 주님의 뜻을 어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약함을 한탄해 보기도 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쳐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계속 돌보아 주십니다.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회개할 때 즉시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옛날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하나님은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사람을 깨끗하게 해 주시고 온전하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괴테의 대표작 『파우스트』에 파우스트가 자살하려다가 회개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젊을 때는 충실히 신앙 생활했던 파우스트가 그의 학문이 진보하자 교회를 떠나게 되었고 사회에서는 성공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중년에 이르러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벽에 부딪칠 때 낙심하고 자살을 기도하게 됩니다. 독배를 들고 그 인생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찰나, 먼 곳에서 부활절의 교회 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 교회다닐 때의 일과 교회를 떠난 후의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게 됩니다. 결국 그는 독배를 내던지고 통곡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깨닫고 회개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누가복음 16장에는 탕자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 아버지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죽었던 아들이 살아났고 잃었던 아들을 다시 얻게 되었다고 기뻐하면서 큰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자비와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은 아무리 타락한 사람도, 돌아오기만 하면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온갖 은혜와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기도: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져진 믿음으로 삶을 살게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시며 주님 주신 자비를 실천하는 삶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13. 자비로운 하나님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한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다. 과연 그렇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이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이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신다.
/양은식

14. 하나님의 자비하심

당신 눈에는 자비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잔이 보이는가?
아니면 그저 잔이 마를까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르는 법이 없다
-맥스 루케이도의 ‘은혜’ 중에서-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새벽종소리

15. 주님의 인자하심

성경: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덴마크의 유명한 조각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예수님의 상을 만들려는 열정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리한 왕과 같은 형상을 조각하기 시작했습니다. 머리는 뒤로 젖혀있고, 두 팔은 위엄 있게 하늘을 향해 들려져 있었습니다. 왕이신 그리스도의 강하고 권위 있는 모습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상이 완성되던 날 "이것이야말로 나의 걸작품이 될거야."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 날 밤 짙은 안개가 그 지역에 끼여, 물보라가 조각가 방의 열려진 창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습기가 조각을 상하게 하여, 아침에 본 조각은 매우 손상된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조각에 붙은 물방울들은 마치 그리스도의 피를 연상케 했습니다. 머리는 숙여져 있었으며, 얼굴 표정은 엄격한 얼굴에서 동정 어린 모습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팔은 모든 사람을 환영하듯이 축 내려져 있었습니다. 이 조각가는 그 형상을 바라보며 다시 시작할 생각을 하니 낭비된 시간이 아깝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신비한 힘이 그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진정한 모습이 바로 이 모습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새롭게 만들어진 상에다 이렇게 써 붙였습니다. "내게로 오라!"
오늘도 인자하신 주님을 바라보며 아름답게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송태승 목사

16.긍휼히 여기는 자

성경 : 야고보서 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만족감은 받는데서 오지 않고 사실은 주는데서 옵니다. 받는 기쁨만을 아는 경우를 속어로 거지근성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는 참 기쁨은 없습니다. 주는 데에 기쁨을 아는 사람은 자기도 행복하고 남도행복하게 합니다. 뉴욕 역대 시장 중 가장 명시장으로 알려진 사람은 라과디아 (Laguardia) 씨였습니다. 그가 뉴욕시의 즉결재판부 판사로 있을 때 하루는 가게에서 빵을 도둑질하다가 붙잡혀온 노인이 기소 되었습니다. 노인은 "배가 고파 빵에 손을 댔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라과디아 판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행위는 10불의 벌금형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자기 지갑에서 10불을 꺼냈습니다. "그 10불은 내가 내겠습니다. 이토록 배고픈 사람이 뉴욕 거리를 헤매고 있었는데 내가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은 벌금으로 내는 것입니다."라과디아 판사는 그 유명한 넓은 중절모자를 재판부 서기인 베일리프씨에게 주며 말했습니다. "이 재판정에 계신 불들도 나처럼 너무 잘먹은데 대한 벌금을 내고 싶으면 이 모자에 넣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해서 가난한 노인은 오히려 47불을 손에 들고 눈물을 흘리며 재판정을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 기도 : 자비로운신 하나님! 오늘도 긍휼히 여기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17. 긍휼히 여기라

성경: 시편 102 장 13 절
"주께서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리니 지금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때라 정한 기한이 옴이니이다"(시102:13)

사일러스라는 어린 소년이 어머니에게 7센트의 용돈을 받았습니다. 어머니는 ‘사일러스, 그 중에서 1센트나 2센트는 아주머니 댁에 있는 선교헌금함에 넣는 것이 좋지 않겠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일러스는 아주머니 댁으로 가면서 선교헌금으로 얼마를 넣을지 고민했습니다. 한참 만에 사일러스는 2센트를 넣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양심의 소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뭐라고? 배를 채우는 데는 5센트를 쓰고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는 겨우 2센트를 내겠다고?’ 그리하여 사일러스는 군것질에 4센트, 헌금에 3센트를 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런데도 마음이 가볍지 않았습니다. 드디어 헌금함에 다다른 사일러스는 눈을 딱 감고 용돈으로 받은 7센트 전부를 털어 넣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사일러스는 허기로 지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경위를 듣고 난 후 접시에 빵과 우유를 가득 담아 아들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긍휼이 약속되어 있습니다(마 5:7). 하나님의 긍휼을 움직이는 힘은 긍휼을 베푸는 우리의 따뜻한 손길입니다.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힘 닿는 대로 도와 줌으로써, 주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도록 하루를 살아갑시다.
* 기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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