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삼위일체
[삼위일체적] 계시는 이미 구약 성경에서 시작한다. 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실재를 단지 흐릿하게 알려 준다고 할지라도, 구약은 점진적으로 생성되어 가는 삼위일체론에 대한 책이다.
제일 먼저, ‘엘로힘’Elohim 이라는 명칭이 고려된다. 이 명칭은 신성의 충만함과 생명의 풍성함을 지시하는데, 엘로힘은 자신의 말씀을 선언하고 자신의 영을 보냄으로 창조한다. 하나님이 언설한 그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므로, 하나님과는 구별되어, 나중에 지혜로 인격화되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중보자로 만물을 창조한 것이다. 반면, 친히 자신의 영을 통해서는 모든 피조물들 가운데 내재하고, 만물에게 생명을 부여하고 장식하였다. 따라서 구약 성경의 가르침에 의하면, 만물의 기원과 지속적 생존은 삼중적 원인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이미 창조에서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을 객관적 원리로, 하나님의 영을 주관적 원리로 갖는다.
구약성경에서 이 삼중적 원인은 특별 계시의 영역에서, 재창조의 사역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더 이상 ‘엘로힘’만이 아니라 ‘여호와’로도 나타나는데, 그는 언약과 맹세의 하나님, 계시와 역사의 하나님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알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는 직접적으로 그리고 즉각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지는 않는다.(출33:20) 그가 자신을 알리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며 보호하는 것은 다시금 자신의 말씀을 통해서다(시107:20). 그래서 구원 계시의 말씀의 전달자는 여호와의 사자, 언약의 사자다. 그리고 그는 주관적으로 자신의 영 안에서, 그리고 영을 통해 자신을 계시한다. 하나님의 영은 계시영역에서 모든 생명과 구원, 모든 은사들과 능력들의 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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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성경에서 나온 이러한 사상들은 다양한 방향에서 열매를 맺었는데, [유대]묵시문학 그리고 필로, 유대교 신학에 이러한 사상들이 드러난다. 이들 사상의 특징은 신과 인간 사이를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그 사이에 중간적 존재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특히 필로는 플라톤적 이데아론, 스토아적 로고스론, 구약 성경적 지혜론 등을 단 하나의 체계로 혼합시켰다.
그러나 [유대]묵시문학, 필로 그리고 유대교 신학은 갈수록 구약 성경의 사상으로부터 더욱 탈선하는 철학의 영향을 보여준다. ➊먼저, 원리상의 차이가 있다. 중간적 존재들의 교리는 필로와 후기 유대교 신학에서 하나님과 세상의 플라톤적 대립에서 생겨난 것으로, 그러한 대립은 구약 성경에서 그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다. 말씀과 지혜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를 중재하는 중간적 존재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며, 하나님에게 속하고, 피조 세계의 원리들이다. 그러나 필로에게 있어서 중간적 존재들은 불가능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들은 하나님도 피조물도 아니며, 인격도 속성도 아니며, 실체도 힘도 아니며, 그 둘 모두에 참여한다. 그것들은, 구약 성경이 항상 피조물과 창조자를 구분하는 경계선을 지우고, 영지주의와 카발라 철학의 등장을 준비했다. ➋둘째, 성격상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필로에게 있어서 로고스의 일차적 의미는 하나님 안에 내재한 하나의 속성일 뿐이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서 말씀은 하나님이 영원부터 소유하고 지명한 인격이며, 만물의 창조 시에 협의하고 유심히 살폈던 인격으로 제시된다.
➌셋째, 중간적 존재들은 필로와 유대교 신학에 있어서 구원론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반면, 구약 성경은 ‘엘로힘’과 ‘여호와’는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한다. ➍마지막으로, 필로의 중간적 존재들에 대한 교리 등은 완성되지 않았고 경계가 없었다. 그리고 세상은 항상 하나님 밖에 머물러 하나님과 대립하며 하나님의 영의 중요성은 이해되지 않았다.
이 모든 이유들로 인해 묵시문헌, 필로 그리고 유대인들에게서 발견되는 구약 성경의 삼위일체적 사고의 발전과 신약 성경의 삼위일체적 개념의 발전 사이에는 원리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명칭과 형식적인 면에 있어서는 공유하지만 내용은 다르다.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언어라는 육체를 취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단어들에 새로운 내용을 부여했다.
신약 성경은 구약 성경의 삼위일체적 개념들의 순수한 발전을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신약 성경은 비록 구약 성경과 연관되기는 하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훨씬 초월한다. 이제 구약 성경에서보다 훨씬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실은, 언약의 하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이며 반드시 그래야만 하고, 삼중적 원리가 구속 사역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몇몇 본문들이 아닌, 신약 성경 전체가 삼위일체적이다. 모든 구원, 복과 은총의 삼중적 원인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 안에 있다.
우리는 예수의 탄생과 세례에서 이 세 분이 곧바로 활동하는 것을 본다. 예수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삼위일체적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성부를 선포하면서, 성부를 영으로 묘사하는데, 이 영은 스스로 자신 안에 생명을 가지며, 전적으로 독특한 의미에서 예수의 아버지다. 예수는 성부로부터 구별되지만, 성부의 유일한 독생자이며 많은 사랑을 받는 아들이고, 생명, 영광, 권세에 있어서 성부와 동일하다. 그리고 예수는 자신을 인도하고 자신에게 능력을 덧입혀 줄 성령을 자신이 장차 아버지에게서 보낼 ‘다른 보혜사’로 말하는데, 그 보혜사는 확증하고, 가르치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며, 위로하고, 영원히 머물 것이다.
이 가르침은 사도들에 의해 진전되고 확대되었다. 즉, 그들 모두는 구원의 삼중적, 신적 원인을 알고 자랑하고 있다. 기뻐하는 뜻, 예지, 선택, 권세, 사랑, 나라는 아버지께 속한다. 중보자 됨, 화목, 구원, 은혜, 지혜, 공의는 아들에게 속한다. 그리고 중생, 갱신, 성화, 교제는 성령에게 속한다. 그래서 예수가 자신의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요약했듯이, 마찬가지로 사도들 역시 이 세 분을 반복해서 서로 나란히 그리고 동일 선상에 놓았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자료에 그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제공하며, 이 구별된 세 주체들,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 간의 관계에 대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이를 위해 제일 먼저 성부의 이름이 고려된다. 이 이름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자신의 모든 작품들, 특히 인간의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그리고 성부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아버지로 나타난다. 하지만 전적으로 독특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성자의 아버지다. 예수는 항상 성부에 대한 자기 자신의 관계와 성부에 대한 다른 유대인들, 제자들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구별한다.
성자에 대한 부성은 성부의 특별한 위격적 속성이다. 심지어 그리스도는 그를 자기 아버지라고 부를 뿐만 아니라 자신의 하나님이라고도 부르고 스스로를 하나님의 그리스도라고 부른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가 신적 경륜에서 첫 번째라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은 말하자면 그의 서열과 위치를 지시하는 공적 직분의 명칭으로, 마치 사람들 사이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본성을 가졌을지라도, 사회적 지위와 영예에 있어서 서로 차이가 나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성자가 성경에서 지닌 명칭들을 통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들을 알게 된다. ➊첫째, ‘로고스’라는 명칭이 고려된다. 이 명칭의 출발점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이 창조와 재창조에서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했다는 성경의 지속적인 가르침에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로고스’라 칭하는데, 왜냐하면 하나님이 창조와 재창조에서 자신을 계시하는 것은 그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통하여 계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약 성경은 이것을 훨씬 초월한다. 요한은 하나님이 그 말씀 안에서, 그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했던 로고스가 인격이라고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이 로고스가 태초에 있었다[요1:1]고 명백하게 선언한다. 그는 로고스가 된 것이 아니었고, 창조 때에 비로소 만들어지고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인격으로서 그리고 본성상 영원부터 로고스였다. 더 나아가,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다.
➋그리스도의 다른 이름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메시아에게 적용된 ‘하나님의 아들’이란 명칭은 분명히 이 표현에 대한 구약의 신정적 의미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 이름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지닌다. 그리스도는 형이상학적 의미에서, 즉 본성상 그리고 영원으로부터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선지자들보다 높이 들린 자이며, 하나님과 전적으로 독특한 관계를 갖는다.
➌셋째로, ‘하나님의 형상’ 이라는 이름이 여기서 여전히 고려된다. 물론 인간이 유비적으로 그렇게 불려질 수 있으나, 그리스도는 절대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리스도는 독생자와 먼저 나신 자, 아들과 로고스, 하나님의 온전한 형상으로서, 영원부터 하나님과 전적으로 독특한 관계를 갖는다. ‘먼저 나신 자’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를 피조물들 가운데 포함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로 피조물들로부터 제외시킨다.
마지막으로, 성경은 성령의 이름을 통해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에 대한 어떤 통찰을 우리에게 제공하기도 한다. 먼저 지적되어야 할 사실은, 성령론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모든 책들을 통하여 동일하다는 것이다. 비록 성령론이 신약 성경에서 훨씬 더 선명하게 계시되었을지라도, 원칙적으로는 구약 성경에도 나타난다. 하지만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이 신약 성경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온간 신적 속성들이 하나님 자신에게 돌려지듯이,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영에게도 돌려진다. 예를 들어, 영원성, 편재성, 전지, 전능이 그렇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금 성령이 본질상 하나님 자신과 동일하다는 것을 전제한다.
성령은, 그리스도가 성부에 대해 갖는 관계와 동일한 관계를 그리스도와 맺는다. 성자가 스스로 아무것도 갖지 않고, 하지 않고, 말하지 않고, 다만 모든 것을 성부에게서 받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성령도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부터 취한다. 성자가 성부를 증거하고 성부를 영화롭게 하듯이, 마찬가지로 그 다음 성령도 아들을 증거하고 영화롭게 한다. 그 누구도 아들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아버지께 올 자가 없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성령을 통하지 아니하고는 그 누구도 예수를 주라 고백할 수 없다.
속사도 교부들에게 있어서 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적 사유란 아직 있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진리들의 깊은 의미와 상호 관계를 깨닫지 못한 채, 성경이 말한 것을 그대로 따라 말했고, 후기에 더 이상 변호되지 못할 표현들을 사용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한 삼위일체 교리에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들은 에비온주의적 경향과 가현론적 경향을 논박했으며, 천사들보다 높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다양한 강도의 표현들로 선언했기 때문이다.
2세기 영지주의가 등장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사고 역시 깨어났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교리적 중요성을 획득했고, 따라서 훨씬 더 명확하게 선언되었다. 유스티누스 마터는 종종 그리스도를 하나님이라 부르고, 심지어 정관사가 붙은 ‘그 하나님’이라 부르기조차 했고, 그리스도에게 여러 가지 고상한 서술어들을 붙였다. 더 나아가, 유스티누스 마터는 단지 능력만이 아니라 인격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선재를 명확하게 가르친다.
하지만 유스티누스에게 있어서 성부와 성자의 내재적 관계는 아직 명확하지 않았다. 유스티누스는 성자가 과연 정신이 아니라 수에 있어서 성부와 다른 존재이며, 성부에게 종속된다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단일성을 주장하고자 추구한다. 성자는 모든 것을 성부로부터 받았으며, 그가 하나님이며 주님인 까닭은 성부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며, 그는 “성부이자 주님에게 종속되었다.” 그러므로 유스티누스의 삼위일체에 대한 견해는 다양한 점에서 여전히 불완전하다. 성자와 대조적으로 감추어진 성부의 존재, 성부의 뜻과 창조의 필요로 인한 성자의 발생, 성자의 성부에 대한 종속은 나중에 교회에 의해 정죄되었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들은 유스티누스를 아리우스주의자라고 부르지만, 이는 부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첫째, 이러한 문제는 아직 유스티누스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고, 더 나아가 유스티누스의 견해는 아리우스의 견해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다양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유스티누스는 단호하고도 명확하게 성자의 신성을 가르쳤으며, 성자는 창조된 것이 아니라 출생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종종 성부, 성자, 성령을 우리 경배의 대상으로 함께 언급했다.
유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에 교착되었던 결함들은 후속 변증가들인 테오필루스, 타티아누스, 아테나고라스에 의해 회피되지 못했다. 삼위의 구별에 있어서 그들의 단일성은 충분히 강조되지 못했다. 성부는 유일하고, 태어나지 않은, 영원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며, 성자와 성령은 성부와 더불어 정신과 능력에 있어서 동일하지만, 존재에 있어서는 동일하지 않다.
곧바로 뒤이은 삼위일체론의 발전은 특히 철학적 요소들을 추방하는 데 있었는데, 그것은 기독교 교리의 수립에 나름대로 공헌했던 세 사람의 공로 때문이다. 이네나이우스는 영지주의적 신 개념과 세계 관념으로서의 로고스에 대한 견해의 강력한 반대자였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단일성은 이레나이우스에 의해 아주 명확하게 표현되었는데, 그들의 신적 본성은 명백히 주장되었고, 그들은 거듭 함께 언급되었다.
성자의 발생은 시간 속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며, 성자는 시작이 없이, 영원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다. 하지만 이레나이우스는 어떻게 단일성 가운데 셋이 존재하는지, 즉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비록 동일한 신적 본성을 소유하지만, 어떻게 구별되는지를 보여 주지 못했다. 이것은 테르툴리아누스에 의해 보충되었고 개선되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성부와 성자를, 보이지 않는 비가시적 하나님과 보이는 가시적 하나님으로 구별했다.
그는 온갖 방법과 온갖 논증으로, 즉 로고스라는 이름, 성육신, 신의 현현 등으로 그 차이를 주장했다. 진실로, 테르툴리아누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하나님의 말씀하심, 발생, 성육신의 세 단계를 거쳐 비로소 완전한 아들 됨과 독립적인 인격성에 이르렀다. 따라서 성자가 존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가 성부수난설에 대한 변증에서 위격들을 지나치게 구별했다고 할지라도, 다른 한편으로 그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삼위성 안에 있는 단일성과 단일성 안에 있는 삼위성을 더욱더 확고하게 견지하려고 애썼다. 그는 위격들의 삼위일체를 성부의 위격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에서 도출하려고 시도했던 첫 번째 신학자였다.
그러나 테르툴리아누스가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우주론적이고 구원론적인 과정에서 아직 해방시키지 못한 반면,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전적으로 하나님의 존재 자체 내의 영원한 과정으로 이해한 신학자는 오리게네스였다. 하지만 단일성과 동등성 가운데 감위 간의 구별을 주장하기 위해, 오리게네스는 종속론의 도움을 요청하여 테르툴리아누스 이전으로 되돌아가, 하나님의 존재에서가 아니라 성부의 위격으로부터 삼위일체를 도출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오리게네스는 성부를 [정관사를 붙인[ ‘하나님’으로 표현했고, 성자를 정관사 없이 ‘하나님’ 즉, ‘본질에 있어서 성부와는 다른 분’ 으로 세상이 성자보다 못한 것처럼, 그런 정도로 성부보다 못한 분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교회는 오리게네스를 따르지 않았다. 교회는 그의 종속론을 거부하고, 니케아회의에서 참되고, 완전한 성자의 신성을 선언했다. 이 고백은 전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지녔다. 이 고백은 기독교의 구원론적 원리를 견지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삼위일체론의 의미가 달라졌다. 니케아 회의는 삼위 하나님 간의 구별을 선언했으며,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이 하나님이라고 가르쳤다. 따라서 그 이후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구별 가운데서 단일성을 견지하는 것이었다. 니케아 회의 이전에는 하나님의 단일성으로부터 삼위성에 이르는 것이 어려운 문제였는데, 이제는 그 반대였다. 이제부터 삼위일체 교리는 그 자체의 독자적인 가치, 신학적 중요성을 획득했다.
이런 방식으로 삼위일체론을 정교화하고 완성한 신학자는 아타나시우스, 캅바도기아 신학자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다. 아타나시우스는 기독교가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고 삼위일체와 더불어 생사를 같이한다는 점을 자기 시대에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했다. 그는 이 진리를 변호하는 데 자신의 온 정력과 인생을 바쳤다.
그가 투쟁한 것은 철학적 문제가 아닌 기독종교 자체, 하나님의 계시, 사도들의 가르침, 교회의 신앙을 위한 것이었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핵심이다. 그는 삼위성이란 그 어떤 낯선 요소와의 혼합, 즉 창조주와 생성되는 피조물과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신적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삼위성은 영원한 것이다. 삼위성은 항상 존재했던 것처럼, 그렇게 존재하고 계속 존재할 것이며, 그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이 삼위는 진실로 구별된다. 삼위란 단일한 전체의 세 부분들이 아니고, 단일한 대상에 대한 세 가지 이름도 아니다. 성부만이 성부이고, 성자만이 성자이며, 성령만이 성령이다.
하지만 이런 맥락에서 아타나시우스는 단일성을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그 모든 삼위는 동일본질이고 단 하나의 실체이며, 동일한 속성들을 지닌다. (2)성부는 ‘신성의 근본원리이며 원천이다. (3)삼위는 서로 안에 존재하고, 자신들의 사역에서 일치한다. 아타나시우스의 이러한 삼위일체론을 주로 세 캅바도기아 신학자들의 작품들에서 발견하는데, 단지 명칭들, 이미지들, 유비들을 통해 더 자세하게 설명되었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을 더 사색적이고 심오하게 취급했는데, 그의 전 15권의 ‘삼위일체론’은 이 교리에 대한 가장 심오한 작품이다.그는 거기서 초기 교부들이 이 주제에 대해 말한 것을 요약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독자적으로 취급하여 거기에 중요한 수정을 가했다.
➊제일 먼저, 아우구스티누스의 출발점은 성부의 위격이 아니라 단 하나의 단순한, 모든 복합을 배제한 하나님의 ‘본질’이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이전의 그 누구보다도 삼위의 절대적 단일성을 더 강하게 선언했다. 각 위격에는 동일한 신적 존재 전체가 있기에, 세 하나님, 세 전능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한 분 하나님, 한 전능자가 있다. 그러므로 위격들의 차이란, 한 위격은 소유하지만 다른 위격은 소유하지 못하는 속성들이나 비본질적인 것들이 아니라 단지 상호 간의 관계만 다를 뿐이다.
➋둘째,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에 성부와 성자 사이에 형성되었던 모든 대조를 반드시 거부해야만 했다. 성자는 참된 하나님으로서 성부처럼 숨어 있고, 눈에 보이지 않으며, 그래서 성부와 완전히 동등하다. 모든 종속론은 추방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타나시우스보다 더 나아간다. 아타나시우스는 여전히 어떤 종속을 허용했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마치 성부가 참된, 원래의 하나님이라는 모든 생각을 극복했다. 그는 모든 삼위에 똑같이 내주하는 ‘하나님의 본질’에서 출발했다.
➌마지막으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이전의 그 어떤 교부보다 더 삼위일체의 이미지들, 유비들, 삼위일체의 흔적들을 추구했고, 전체로서 신론과 우주론의 연관성을 밝혔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테르툴리아누스가 시작햇던 것을 완성했다.
서방교회는 모든 점에서 동방교회와 일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과는 다른 삼위일체론 견해를 견지했다. 동방교회는 성자와 성령 모두가 과연 성부로부터 나오지만, 그 외에는 서로 관련이 없다고 고백한다. 반면, 서방교회는 세 위격들의 본질적 동등성과 상호 관계는 비로서 ‘필리오크베’(filioque)에서 완전하게 표현되었다고 이해한다.
서방교회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어떤 요점들에 있어서는 그의 삼위일체론을 더 자세하게 전개했지만, 그 어떤 수정도 하지 않았고 거기에 새로운 것을 더하지도 않았다. 아타나시우스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그리고 분명히 400년 이후에 등장한 ‘아타나시우스 신조’는 전적으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신을 따라 표현되었기에, 서방교회는 이 신조를 수용한 반면, 동방교회는 수용하지 않았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이 신조에 동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에는 이에 대한 강한 반대가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로마교와 개신교의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대한 수용 태도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은 얼마나 순수하든 간에 삼위일체론에 대한 역사적 신앙이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한 하나님 자체에 대한 올바른 마음의 신앙만이 구원한다고 밝혀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항상 심한 반대를 받아왔다. 외부의 적들, 즉 유대인들과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대가 있자, 그리스도인들은 이에 대항하여 변호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 교리는 기독교 영역 내에서도 공적인 확정이전과 이후에 많은 이들의 저항을 받았다. 기독종교의 심장은 삼위일체에 대한 신앙고백에서 박동한다. 따라서 모든 오류는 삼위일체론의 이탈에서 비롯되거나 또는 더 깊이 숙고해 보면 그 이탈로 귀결된다.
이제 이 교리의 커다란 문제는 본질의 단일성이 위격의 삼위성을 소멸시키지도 않고, 또한 그 반대로 위격의 삼위성이 본질의 단일성을 없애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좌로나 우로나 이탈하여 아리우스주의나 사벨리우스주의의 오류에 빠질 위험이 항상 도사린다.
아리우스주의는 2세기와 3세기에 이비온파, 알로기파, 테오도투스, 아르테몬, 사모사타의 바울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초자연적으로 태어나 자신의 사역을 위해 세례시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고 능력을 갖추어 주로 높여진 인간으로 여기고, 그의 선재와 신성을 단연코 부인했다.
이들은 양자론적 기독론의 추종자들이었다. 아타나시우스가 단편들을 모아 보존했던 작품, ‘향연’에 의하면, 하나님은 태어나지 않았고 시작이 없기에 절대적으로 독특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기 전에 일종의 중간적 존재, 독립적 실체나 본질로서의 매개자를 산출했는데, 그 매개자는 성경에서 지혜, 아들, 로고스, 하나님의 형상 등의 이름을 지니며, 하나님은 그를 통해 만물을 창조했다.
그리고 하나님은 또한 이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더 낮은 실체, 즉 성령을 산출했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며, 성부와 본질을 공유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럴 경우에 두 하나님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로고스는 성부와 동일본질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부와 분리되어, 변할 수 있으며,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잇었다. 하지만 그는 ‘완전한 피조물’ 이었다. 그는 선을 선택했고, 이로 인하여 불변하게 되어, 말하자면 하나님이 되었다. 이 로고스는 또한 인간이 되어, 진리를 선포했고, 우리의 구원을 이루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우리의 존경을 받기에 합당하지만, 우리의 경배를 받는 대상은 아니다.
사벨리우스주의는 2세기와 3세기에 노에투스, 프락세아스, 에피고누스, 클레오메네스에 의해 마련되었다. 그들은 성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태어나 고난을 받고 죽었으며, 따라서 성부와 성자는 다양한 관계들, 즉, 성육신 이전에 그리고 성육신 가운데, 그 자체로 그리고 그의 역사적 출현 가운데 있는 동일한 위격에 대한 이름들이며, 또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적 본성은 성부이며, 인성, 육신은 성자였다고 가르쳤다. 이 단일신론, 성부수난설 또는 양태론은 3세기 사벨리우스에 m이해 옹호되고 더욱 발전하였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동일한 하나님이었다. 그리고 동일한 존재에 대해 세 가지 이름이 있다.
교회의 공식적인 삼위일체론의 좌우 두 경향인 아리우스주의와 사벨리우스주의는 오랫동안 기독교회 안에 지속적으로 존재해 왔다. 아리우스주의는 다양한 형태로 등장하는데,
➊첫째, 종속론의 형태로 등장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성자는 피조물이나 무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라 성부의 본질로부터 영원히 출생했을지라도, 성부보다 열등하고 성부에게 종속된다. 오로지 성부만이 [정관사가 붙은 ‘하나님, 신성의 원천’ 이며, 성자는 [정관사가 없는] ‘하나님’으로, 성부와의 교제를 통해 자신의 본성을 받았다.
➋둘째, 아리우스에게 있었던 옛 형태의 아리우스주의는 종교개혁 이후, 특히 영국에서 많은 신학자들에게서 다시금 등장했다. 예를 들어, 밀톤은, 성자와 성령은 성부의 자유로운 뜻에 의해 창조 전에 피조되었고, 그들이 단지 하나님이라고 불렸던 것은 구약 성경의 사사들과 관원들처럼, 그들의 직분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➌아리우스주의의 세 번째 형태는 소시누스주의로 등장했다. 성부는 유일하고 참된 하나님이다. 성자는 하나님에 의한 즉각적, 초자연적 수태를 통해 피조된 거룩한 인간으로, 그는 수태되기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고, 인류에게 새로운 율법을 설교하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태어났다. 그는 이 임무를 완수한 후, 승천하여 신적 은혜에 참여했다. 성령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능력이다. 사벨리우스주의 역시 다양한 형태로 등장할 수 있다. 사벨리우스주의는 아리우스주의처럼 신적 존재의 삼위성을 공통적으로 부인한다. 하지만 이제 사벨리우스주의는 하나님의 단일성을 얻으려고 추구하는데, 성자와 성령을 하나님의 존재 밖에 놓는 것이 아니라 그 둘을 그 안에 흡수시킴으로써 삼위 간의 모든 차이가 사라진다.
삼위일체론은 교회의 교리였으며, 따라서 아주 탁월한 신비였다. 기독교의 본질, 즉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계시와 성령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 전달은, 오로지 그 토대와 원리가 존재론적 삼위일체에 근거할 때만 주장될 수 있었다. 이를 위해 제공된 성경의 자료들이 신학적 사유의 대상이 되자, 또한 곧바로 여러 가지 명칭들과 표현들에 대한 필요가 생겨났다. 이 표현들은 비록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이 진리를 어느 정도 불완전하게나마 재현하고, 이 교리에 대한 오류와 반대를 대항하기 위해 필수적이었다.
결국 성경이란 우리가 단순히 앵무새처럼 반복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숙고하고 우리 자신의 고유한 언어로 다시 표현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예수와 사도들은 성경을 사용하지만, 그로부터 추론을 통해 더 진전된 결론들을 도출했다. 따라서 성경은 법조문도 교의학 교과서도 아니며, 오직 신학의 근본원리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단지 그 문자적 어구들만 구속력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성경으로부터 정당하게 도출된 것들 역시 구속력을 지닌다.
삼위일체론을 잘 이해하기 위해, 다음 세 가지 질문이 반드시 대답되어야 한다. ‘본질’ 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위격’ 이라는 단어는 무엇을 지칭하는가? 그리고 ‘본질’ 과 ‘위격’ 그리고 위격들 사이의 상호관계는 무엇인가? 이 신적 본질과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 사이의 구별은 피조물들 가운데서 그 유비가 발견된다. 이 유비에서 우리는 본질과 개인들을 구별한다. 바울, 요한, 베드로는 모두 동일한 인간적 본성을 갖지만, 인격으로서 그들은 존재와 구분되고, 또한 상호 간 서로 구분된다.
하지만 이러한 유비는 동시에 아주 중요한 차이를 전제한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개념은 하나의 일반적인 개념이다. 인간 본성은 각 사람 안에 고유한 방식으로, 유한한 방식으로 존재한다. 인간은 다신론에서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과연 본질에 있어서 유사하지만, 본질에 있어 동일하거나 본질에 있어 단일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 가운데 있는 인간 본성은 전체적으로 동일하지 않으며, 양적으로도 동일하지 않다. 그러므로 인간은 단지 구별될 뿐만 아니라 또한 분리된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은 다르다. 신적 본성은 추상적 보편 개념으로 생각될 수 없으며, 마찬가지로 위격들 밖에, 위에 그리고 배후에 있는 하나의 실체라고 생각될 수도 없다. 신적 본성은 위격들 안에 있으며, 각 위격 안에서 전체적으로 그리고 양적으로 동일하다. 따라서 위격들은 물론 구별되나, 분리되지는 않는다. 위격들은 본질에 있어 동일하며 본질에 있어 단일하며, 동일한 존재다.
위격들은 시간이든 장소, 그 무엇에 의해서도 분리되지 않는다. 위격들 모두는 동일한 신적 본성과 미덕들을 소유한다. 단 하나의 동일한 신성이 삼위 모두 안에 존재하고, 특별히 각 위격에 존재한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는 한 분의 영원한 존재, 한 분의 전능한 존재, 한 분의 전지한 존재, 즉 하나의 지성, 하나의 의지, 하나의 능력을 지닌 단 한 분의 하나님이 있다. 따라서 본질[존재]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계속하여 전면에 부각되고, 일신론 안에 포함되며, 또한 유니테리언에 의해서도 변호되었던 하나님에 대한 단일성의 진리를 보존한다.
신적 존재 안에 그 어떤 구별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은 단일한 본성을 부당하게 취급해서는 안 되며 취급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그 단일성은 불완전하거나 제한되지 않고, 완전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복합이나 분할이 없는 절대적 단일성과 단순성이다. 이 단일성 자체는 인간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윤리적 속성도 계약적 속성도 아닌 절대적 성격을 지닌다. 따라서 이 단일성은 본질에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 자체와 동일한 것이다.
하지만 이제 삼위일체에 대한 고백이 갖는 영광은 무엇보다도 이 단일성이, 얼마나 절대적이든 간에, 다양성을 배제하지 않고 포함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 어떤 추상적 단일성,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다양성 가운데 바로 최상의 단일성을 전개하는 존재의 충만, 무한한 생명의 풍요함이다. 모든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진리로 인정한다. 우리가 위격들을 말하는 것은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침묵하지 않기 위해서다
.” 삼위일체론에서 위격이 단지 가리키는 것은,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위란 양식들이 아니라 각기 고유한 방식의 존재라는 사실만을 가리킨다. 심지어 이 개념의 합리성과 자의식은 강조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삼위가 동일한 존재와 모든 미덕들을 가지며, 따라서 같은 지식과 지혜도 갖는다는 사실로부터 자연적으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위격이라는 단어가 표현하는 것은, 신적 존재의 단일성이 삼중적실재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삼중성을 도출하는 단일성이다.” 위격들은 단일한 신적 인격성의 세 가지 계시 양식들이 아니다. 신적 존재는 다름 아닌 삼위적인데, 이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절대적이고 신적인 인격성이기 때문이다. 삼위는 존재 안에서, 존재로부터, 존재를 통해, 존재 내부에서 완전한 자기 전개를 이룬 단 하나의 신적인격성이다.
우리는 이러한 진술로부터 위에서 언급된 세 번째 질문, 즉 존재[본질]와 위격, 그리고 위격들 상호 간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답이 어떤 의미로 주어져야만 하는지 알 수 있다. 비록 성경이 엄격하게 일신록적이라 할지라도, 성경은 성자와 성령의 신적 본성과 완전들을 인정하고, 성자와 성령을 성부와 동일 선상에 놓는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이며 동일한 신적 본질 안에 있는 구별된 주체들이다. 그러한 주체들로서 그들은 다양한 이름들을 지니고, 특별한 위격적 속성들을 지니며, 내적, 외적 관계에서 항상 일정한 순서로 등장한다. 따라서 위격들의 차이는 전적으로 소위 위격적 속성들, 특성들에 놓여 있다.
즉 ➊아버지 됨, 능동적 출생, 능동적 내쉼, ➋아들 됨, 수동적 출생, 능동적 내쉼, ➌발출, 수동적 내쉼. 이제 이러한 속성들은 일의 성격상 하나님의 존재에 실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더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된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금까지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관계로 등장할 뿐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성부 됨, 성자 됨 그리고 성령 됨에서 내용적으로, 실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성적으로, 관계적으로 구별될 뿐이다. 하나이며 동일한 존재는, 아들의 관계 가운데 있는 동일한 존재에 대해, 자신의 관계에서 생각될 때, 성부라 불린다. 따라서 위격들 상호 간의 차이는 단지 한 위격은 성부, 다른 위격은 성자, 그리고 세 번째 위격은 성령이라는 사실일 뿐이다.
삼위일체론이 일반적으로 개괄되었기에, 이제는 삼위 각각이 논의될 차례다. 첫 번째 위격은 성부이며, 그의 위격적 속성은 성부 됨 또는 태어나지 않음이다. 삼위 모두는 모든 피조물과 대조적으로 ‘아게네토스’(피조되지 않은)라고 불릴 수 있었다. 그들 중 어느 위격도 피조물의 방식으로 산출되지 않았으며, 그들 중 어느 위격동 존재의 시작을 갖지 않았다. ‘아게네시아’(피조되지 않음)는 신적 존재의 속성이며, 삼위 모두에게 공통된다.
하지만 ‘아겐네시아’(태어나지 않음)는 이것과 반드시 구분되어야 했다. 이것은 오로지 성부만의 속성이다. 성자가 ‘겐네토스’(태어난)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피조물처럼 시간 가운데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영원부터 성부의 존재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부들은 동시에 이 속성 즉, ‘아겐네시아’(태어나지 않음)는 특히 위격에 속하는 것이지, 존재에 속하는 것이 아님을 지적했다.
하나님의 존재는 삼위 안에서 하나이며 동일하지만, ‘아겐네시아’는 그 존재 내의 한 관계다. 게다가 ‘아겐네시아’라는 명칭은 부정적이어서 단지 성부가 출생을 초월한다는 것을 말할 뿐, 하나님의 본성에 관하여 부가적인 것을 전혀 말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명칭은 사실상 성부의 위격을 가리키지 않는데, 왜냐하면 ‘태어나지 않음’과 성부 됨은 결코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부란 명칭이 ‘아겐네토스’(태어나지 않은 존재)라는 명칭보다 선호된다.
성부라는 성경적 명칭이 ‘아겐네토스’라는 명칭보다 첫 번째 위격의 위격적 속성을 훨씬 더 낫게 지칭한다. 성부 됨[아버지 됨]안에 두 번째 위격에 대한 적극적인 관계가 담겨 있다. 하나님에게 있어서 아버지라는 이름이 하나님이란 이름보다 더 고유한데, 왜냐하면 후자의 명칭은 보편적인 명칭, 품위 있는 명칭이지만, 신약의 아버지라는 명칭은 구약 성경의 여호와라는 명칭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위격적 속성을 지시하는 고유한 명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거부하는 자는, 그의 창조를 부인하는 것보다 더 큰 모욕을 행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내의 두 번째 위격의 특별한 속성은 아들 됨이다. 그는 성경에서 성부에 대한 자신의 관계를 지칭하는 다양한 이름들을 지닌다. 말씀, 지혜, 로고스, 아들, 맏아들, 독생자, 하나님의 형상, 형상, 실체, 흔적이 있다. 오리게네스에 의해 처음으로 일컬어진 영원한 출생의 교리는, 이 이름들과 위에서 인용했던 몇몇 본문들에 근거하여 수립되었다. 하나님에게 생산력이 있다는 것은 교부들에게 있어서 거듭 반복되는 훌륭한 사상이다. 그는 결코 추상적인, 경직된 단일성이 아니며, 단자적인,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 그는 충만한 생명이다. 즉, 그의 본성은 생산적인, 열매를 맺는 본질로서 확대, 전개, 전달이 가능하다.
하지만 이 출생은 신적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➊그러므로 이것은 일차적으로 영적이다. 이 출생은 유출과 분할이 없이 일어난다. 이것은 신적 존재의 구별과 구분을 초래하나, 모순과 분할을 초래하지는 않는다.
➋둘째, 그러므로 출생은 니케아 회의에서 확정된 것처럼, 성부가 “성자부의 본질로부터, 하나님에게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 하나님에게서 나온 참 하나님, 피조되지 않고 태어난 분, 성부와 동일 본질”인 성자를 낳는다는 사실을 포함한다.
➌셋째,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또한 출생을 영원한 것으로 고백했다. 그 신적 낳으심은 참된 의미에서 영원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것은 영원 가운데 한 번 발생하고 성취된 것이 아니라 영원 불변하며, 따라서 동시에 영원히 완성되고 영원히 계속되는 하나님의 행위다. 태양이 빛을 비추고 샘이 샘물을 솟구치게 하듯이, 낳으심은 성부의 본성에 고유한 것이다. 성부는 낳으심 없이 존재하지 않았고, 또한 결코 낳으심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항상 낳는다. “성부가 아들을 낳았고, 성부가 그를 그의 기원으로부터 방출한 것이 아니라 그를 영원히 낳는다.” 하나님의 낳으심은 말씀하는 것이고, 그의 말씀하심은 영원한,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은 성령이라는 명칭을 지니며, 그의 위격적 속성은 발출, 내쉼이다. 성령론은 기독교 신학에서 항상 성자론의 후속으로만 취급되었다. 두 번째 위격에 있어서 논쟁은 거의 그의 신성에 대한 것이었을 뿐, 그의 인격성은 일반적으로 확고하여 논쟁되지 않았다. 하지만 성령에 있어서 논쟁은 주로 그의 인격성에 대한 것이었다. 만일 성령의 인격성이 인정되었다면, 그의 신성은 자동적으로 따르는 것이었다.
성령의 인격성과 신성에 대한 고백은 철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독종교 자체의 핵심, 교회의 신앙에서 나온 것이다. 이 고백은 성자의 신성과 마찬가지로 종교적 중요성을 지니며, 기독종교 자체가 이 고백과 연관된다. 성령이 모든 구원, 즉 중생, 신앙, 회개, 성화 등의 주관적 원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이 성경에 확고하게 근거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을 떠나서,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성부와 성자와의 교제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둘 중에 한 가지다. 성령은 피조물이든지(능력, 은사, 인격), 또는 참된 하나님이다. 만일 그가 피조물이라면, 그는 과연 진실로 하나님 자신, 성부와 성자의 모든 유익들을 우리에게 부여할 수 없다. 성자가 성부와 긴밀하게 연관되듯이, 성령은 성자와 긴밀하게 연관된다. 성령은 성자 안에 있으며, 성자는 성령 안에 있다. 성령은 지혜와 진리, 능력과 영광의 영이며,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교회를 거룩하게 하며, 성령 안에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유익들, 신적 본성, 양자 됨, 하나님과의 신비적 연합을 교회에 부여한다.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주는 성령 자신은 반드시 참된 하나님이어야 한다.
성부와 성자에 대한 성령의 관계는 그의 이름 ‘성령’에 의해 알려지고, 또한 ‘주어지다’, ‘보내어지다’, ‘쏟아부어지다’, ‘내쉬어지다’, ‘나오다’, ‘내려오다’ 등과 같은 많은 동사들에 의해 어느 정도 알려진다. 기독교 신학은 이 관계를 ‘발출’, ‘나오심’, ‘내쉼’, ‘보내다’, ‘나타나다’, ‘쏟아부어지다’ 등으로 지시했다. 가장 선호되었던 용어는 ‘내쉼’이었다.
이 묘사도 출생과 마찬가지로 반드시 동일한 본질의 영원한 전달로 여겨져야 했다. 또한 이 묘사는 반드시 출생과 구별되어야 했는데, 왜냐하면 출생은 성자에게, 그리고 내쉼은 성령에게 [성부가]자신 안에 있는 생명을 준 것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것을 더 자세하게 규정하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구별을 추구했다. 그래서 그들이 발견한 구별은 ➊성자는 오로지 성부로부터만 나오지만,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거나, 또는 ➋성령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지는 것으로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성령은 성자의 아들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 특별히 지적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과 서방의 삼위일체론은 점차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다. 2세기에 성자의 성부로부터의 존재론적 발출은 영원한 출생으로 이해되었다. 그리고 성부, 성자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는 성령에 대해서도 반드시 유사한 발출로 여겨져야만 했다. 성부와 성자에 대한 성령의 관계는 반드시 확정되어야 했다. 아타나시우스는 이 관계에 대하여, 성령은 성부의 영, 그리고 성자의 영이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불리고, 성령은 성자가 성부에 대해 갖는 관계처럼 성자에 대해 동일한 특성, 위치, 본성을 갖는다고 가르쳤다.
아타나시우스가 성자에 대한 성령의 의존을 매우 명백하게 가르친다고 할지라도, 성령이 성부 그리고 성자로부터 나온다고는 선언하지 않는다. 세 캅바도기아 신학자들도 동일한 맥락에서 말한다. 그들은 명백하게 가르치기를, 성령은 성자가 성부에게 대한 것처럼 성자에 대해 관계를 가지며, 성령은 순서상 성자를 따르고, 우리에게 성자와 성부를 수여하고, 성부로부터 나오며, 성자와 더불어 그리고 성자 이후에 이해되고, 성령은 성자를 통해 성부에게서 나오며, 오로지 삼위 상호 간의 관계가 각자에게 고유한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중 누구도 성령이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언급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 이것을 부인했거나 반대했다고 말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당시에는 이 질문이 제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방에서의 삼위일체론은 서방과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다. 요하네스 다마스케누스는, 성령의 성자로부터 나오고 성자로부터의 자신의 실재를 갖는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거부했으며, 성자와 성령은 “단 하나의 원인으로 귀결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것은 그 이후로 그리스 교회의 교리로 남아 있다. 동방교회는 교부들의 신학에 머물렀던 반면, 서방교회는 그보다 더 나아갔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 교부들의 생각을 초월했다.
그는 삼위를 단 하나의 단순한 신성 안에 있는 관계들로 이해했고, 따라서 성령을 단지 성부만이 아니라 성자와도 반드시 연관시켜야 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령은 성부 그리고 성자와 관련되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간의 형언할 수 없는 교제라고 분명하게 가르쳤다. 이 성령의 발출 교리는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톨레도 회의의 신조, 투리비우스에게 보낸 레오 1세의 서한, 아타나시우스 신조,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신조의 본문에 ‘필리오크베’(filioque, 그리고 성자로부터)를 삽입한 세 번째 톨레도 회의의 신조에 나타난다. 서방의 교회와 신학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랐고, 동방교회에 대해 ‘필리오크베’(filioque)를 반복하여 변호했으며, 종교개혁은 여기에 동조했다.
이 모든 시도들이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주목을 받을 만한데, 이는 그 차이가 아주 사소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스 신학자들은 종속론을 가르치지 않으며, 삼위의 완전한 동일 본질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성령을 보내고 분배하는 그리스도에 대해 성령이 일정한 관계를 갖는다고 뚜렷하게 말한다. 그들은 또한 성령이 성자를 통해, 성부로부터 나온다고 말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 그와는 반대로 서방교회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성령의]발출은 두 가지 원리들로부터 나오는 것으로, 두 가지 내쉼 가운데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다만 한 가지 원리에서 나오는 것으로, 한 가지 내쉼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심지어 “성자를 통하여 성부로부터”라는 공식문구는 그 자체로서 서방교회의 반대를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일치되지 않았다.
그리스 신학자들은, 만일 성령이 또한 성자로부터 나온다면, 신성에는 두 가지 원리들, 두 가지 원인들이 있다는 것이라고 항상 심하게 반대했다. 이러한 반대는 하나님에 대한 다른 가르침과 다른 종교적 실천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한다. ‘필리오크베’ 논쟁은 그리스 교회에 여전히 남아 있는 종속론의 마지막 잔재다. 아무리 삼위가 완전히 하나이며 동등하게 여겨진다고 할지라도, 그 단일성과 동등성은 오로지 성부에 의해서만 성자와 성령에게 속한다. 성부는 신성의 원천이며 원리다. 따라서 만일 성령이 성자에게서도 나온다면, 성자는 성부와 나란히 서게 되고, 통일성의 원칙은 깨지며, 일종의 이신론이 생겨난다. 그리스 교회의 신적 본질의 통일성과 삼위일체의 뿌리는 신적 본성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부의 위격에 있다. 성부는 유일한 원인이다.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이러한 삼위의 내재적 관계는 또한 그들의 계시와 사역 가운데 외부로 드러난다. 물론 모든 외부로 드러난 사역들은 삼위에게 공통적으로 속한다. “위격들의 순서와 구별이 유지되는 반면, 외부로 드러난 하나님의 사역들은 분리되지 않는다.” 항상 하나이며 동일한 하나님이 창조와 재창조에서 활동한다. 하지만 그 통일성 안에 삼위의 순서가 보존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또한 경륜적 삼위일체에서 자신을 반영한다. 모든 외적 사역은 물론 한 존재의 사역일지라도, 삼위의 각 위격은 이 사역에서 신적 존재 안에서의 자기 존재의 순서에 상응하는 자리를 차지한다. 성부는 자신으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일한다. 성경은 이 구별을 소위[헬라어] ‘에크’(로부터), ‘디아’(를 통하여) 그리고 ‘엔’(안에서)이라는 ‘구별하는 전치사들’로 명백하게 지적한다. 학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성경이 삼위를 구별하는 것을 알았기에 그 구별을 강조했다.
모든 외적 사역들, 즉 창조, 보존, 다스림, 성육신, 속죄, 갱신, 성화 등은 삼위일체 전체의 사역이다. 하지만 경륜적 의미에서 창조는 보다 구체적으로 성부에게, 구속은 성자에게, 성화는 성령에게 돌려진다. 존재론적 삼위일체에서 성부가 순서상 첫 번째이고, 성자가 두 번째이며, 성령이 세 번째인 것처럼, 계시 역사에서도 성부가 성자보다 앞서고, 성자는 다시금 성령보다 앞선다. 성부의 경륜은 특히 구약의 경륜에 속하고, 성자의 경륜은 성육신으로 시작되었으며, 성령의 경륜은 오순절 날과 더불어 등장했다. 성부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나오지만, 성자는 오로지 성부의 보내심을 통해서만 나오고, 다시금 성령은 오로지 성부와 성자를 통해서만 보내심을 받는다.
하지만 이러한 시간 가운데 보내심은 하나님의 존재 내의 삼위의 내재적 관계에 대한 반영이며, 출생과 내쉼에 그 근거를 갖는다. 로고스의 성육신은 성자의 출생에서 그 영원한 원형을 가지며, 성령의 부으심은 성부와 성자로부터의 발출에 대한 희미한 유비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시간 속에서 인간의 눈에 드러난 삼위들 간의 관계들로부터 그들의 영원한 내재적 관계들을 도출했다. 그리고 성자와 성령이 성육신과 부어짐에서 가시적인 형체로 나타난 반면, 이러한 그들의 나오심은 그들의 보이지 않는 모든 신자들의 마음 가운데, 성자의 교회에, 성령의 전에 오심으로 완성된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로부터 영원히 나왔는데, 이는 성부자신이 그들을 통하여 그리고 그들 가운데 자기 백성들에게 다가오며, 결국 하나님이 만유 가운데 모든 것이 되기 위함이다[cf. 고전 15:28; 엡1:23].
삼위일체론은 인간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기에, 학자들은 처음부터 그것을 실례들을 들어 밝히거나 추론을 통해 논증하고자 애를 썼다. 하지만 이 모든 비교들이 단지 유비들과 이미지들이며, 그들 사이의 유사성에 있어서도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해야한다. 그래서 인간 내의 삼위일체는 인간 자체가 아닌 인간 안에 있는 어떤 것, 또는 인간에 대한 어떤 것인 반면, 하나님 안에 있는 삼위일체는 하나님 자신이며, 삼위가 한 분 하나님이다. 인간 안에 있는 기억, 지성, 사랑은 단지 능력들이지만, 신적 존재 안에 있는 삼위는 세 주체들이다.
인간에게 있어서 그 세 능력들은 종종 동등하지 않고 서로 보충하는 것이지만, 신적 존재 안에는 위격들의 완전한 통일성과 동등성이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에서 출발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삼위일체를 수용했다. 그래서 그의 작품, ‘삼위일체론’의 처음 일곱 권은 주로 성경에서 나온 증거들에 몰두하고, 후반부의 여덟 권에서 비로소 그는 자연의 영역과 인간 세계로부터 삼위일체를 확정하려고 추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거기에 덧붙이기를, 인간 정신 가운데 있는 이러한 삼위일체는 물론 모든 사람이 관찰할 수 있을지라도, 오로지 신자들만이 하나님의 삼중적 존재에 대한 이미지로 여길 수 있다고 했다.
교회와 신학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이러한 철학적 수립에 대해 일반적으로 아주 조심스런 태도를 취했다. 기껏해야 교회와 신학은 삼위일체에 대한 증명들을 단지 후험적으로 삼위일체 교리를 밝히기 위한 어떤 것으로 여겼을 뿐이다. 그럴지라도 많은 학자들은 여전히 이 교리에 대한 지지를 이성에서 추구하지 않도록 경고했다. 삼위일체 교리는 그 어떤 다른 것보다도 신비로서, 자연과 이성을 훨씬 초월하고 오로지 특별계시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이다.
토마스는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피조계 안에 있는 삼위일체의 흔적들을 수용했고, 그것들을 또한 후험적으로 추론을 통해 해설하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그는 삼위일체가 이성에 의해 알려질 수 없다고 명백하게 설명했는데, 왜냐하면 창조는 삼위일체 전체의 사역이며, 따라서 존재의 통일성을 드러내지만 위격들의 구별은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칼빈은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제공된 삼위일체에 대한 유비들과 증명들이 거의 가치가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많은 개혁파 신학자들과 루터파 신학자들도 동일하게 평가했다.
이제 우리는 삼위일체론을 합리적 근거들 위에 기초하고자 하는 모든 자들에 대해, 이 교리에 대한 지식은 오로지 하나님의 특별 계시에서 비롯된 것임을 의심의 여지없이 주장해야 한다. 성경은 삼위일체론에 대한 유일하고도 최종적인 근거다. 이성은 기껏해야 이 교리를 후험적으로 사유를 통해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삼위일체 교리를 비추기 위해 제시된 추론들은 전혀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➊첫째, 성경 자체는 온 피조계와 특히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한다. 성경 자체는 모든 피조물들이 삼위일체의 흔적들이며, 인간이 장차 삼위일체의 형상을 드러내리라는 것을 지시한다. 객관적으로 죄가 아무리 하나님의 작품들 가운데 잇는 하나님의 계시를 가리우고, 주관적으로 죄가 아무리 우리의 눈을 어둡게 했다고 할지라도, 선험적으로 부정될 수 없는 사실은, 계시에 의해 밝아진 지성은 자연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고, 그 하나님은 성경 가운데서 존재와 사역에 있어서 삼위일체로서 알려졌다는 것이다.
➋둘째, 이 모든 추론들이 비록 삼위일체 교리를 확실히 증명할 수 없고, 그 어떤 추론도 우리의 신앙의 근거가 될 수 없지만 이러한 추론들은 진실로 이 교리에 대해 제기된 다양한 반대들을 논박할 수 있다. 그 추론들은 계시가 우리에게 알려 주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터무니없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그리고 그 추론들은 반대자들의 믿음이 충분하지 못하며, 이성 자체와 모순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삼위일체론은 초기와 후기의 피상적 합리주의에 의해 고려되었던 것처럼 그렇게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다. 이 교리는, 하나는 셋이 될 수 없고 셋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단순한]계산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➌마지막으로, 이러한 추론들은 자연과 은혜, 창조와 재창조 사이의 연관성을 발견하고 보존한다. 우리를 창조하고 보존하며, 자신의 형상을 따라 재창조하는 이는 한 분이며 동일한 하나님이다. 은혜는 물론 자연보다 월등하나, 자연과 모순 되지 않는다. 은혜는 죄로 인해 자연 가운데 부패된 것을 회복시키면서, 자연 가운데 여전히 남아 있는 하나님의 계시를 또한 밝히고 완전하게 한다. 사유하는 지성은 삼위일체론을 자연과 인류의 풍성한 삶의 중앙에 놓는다.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대양 가운데 있는 한 섬이 아니라 전체 피조계를 조망하는 높은 산 정상이다.
기독교 신학자의 임무는 하나님의 계시를 삶 전체와 연관시켜 그 의미를 분명하게 밝히는 것이다. 모든 존재가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인도되고,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이 우리의 사고와 삶 중심에 놓여질 때 비로소 기독교적 사유는 만족한다.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쓸데없는 사변과 헛된 호기심에 대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깊은 종교적 관심에서 나온 것이다. 만일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면, 이것은 반드시 최상의 의미를 지녀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물은 오로지 하나님에게서 나오고,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이다[롬11:36]
➊첫째, 삼위일체는 하나님이 참으로 살아 계신 분임을 알려준다. 이미 교부들에 의해 지적된 사실은, 삼위일체가 이신론과 범신론, 일원론과 다신론의 오류를 피했고, 하나님에 관한 이 모든 개념들 가운데 감추어져 있는 참된 요소가 삼위일체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➋둘째, 삼위일체는 창조론에 가장 중요하다. 창조론은 오로지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 가운데서만 주장될 수 있다. 오로지 이 고백을 통해서만, 한편으로 이신론에 대하여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연관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범신론에 대하여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구별을 주장할 수 있다.
➌셋째, 삼위일체는 기독종교에서 최고의 비중을 지닌다. 기독교 전체, 특별 계시 전체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고백과 더불어 흥망성쇠의 운명을 같이한다. 삼위일체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모든 교리들의 근간이며, 새 언약의 실체다. 그래서 이 종교적, 기독교적 관심으로부터 교회의 삼위일체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교회의 관심은 진실로 형이상학적 교리나 철학적 반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독종교 자체의 핵심과 본질에 관한 것이었다. 삼위일체론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전체 계시의 심장이 박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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