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禮拜觀)과 21세기 한국교회 예배
안덕원 (Ph.D, 서울신대 겸임교수)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예전적인 요소들을 통해 본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
3.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 평가
4. 조나단 에드워즈와 한국교회예배
5. 나오는 말
1. 들어가는 말
조나단 에드워즈와 예배는 필자에게 왠지 부조화를 이루는 두 단어의 병립처럼 느껴진다. 그의 예배에 대한 입장은 그의 설교와 편지 등에 여러 차례 등장하기는 하나 예배에 대하여 전적으로 지면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그는 교회예전을 위한 예식서를 출간했다거나 예배에 대하여 친절한 안내의 논문을 남긴 적도 없다.1) 게다가 매우 비현실적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그의 엄격한 성찬참여조건은 예배를 선택받은 소수의 신자들만의 배타적인 의례로 비쳐지게 만들고 예배참여자들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감을 안겨준다. 그런 배타성 탓일까? 그가 목회하던 노샘프턴 교회의 교우들과 심각한 마찰을 빚고 갈등 끝에 결국 노샘프턴 교회를 떠나게 된다. 이렇듯 예배, 특히 성례에 있어서 가시적 성공을 이루었다고 보기 힘든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본고는 예배에 대한 그의 의견을 통해 청교도의 끝자락에서 철저한 회개와 경건한 삶을 이상 시 했던 그의 영성을 발견 하고 그의 예배관을 통해 현재 한국개신교의 예배갱신에 일조 할 수 있는 가치관과 방법론을 찾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서 출발한다. 미리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은 21세기 한국개신교회가 직면하고 있는 예배의 모습을 심사숙고하며 바라보게 해줄 가치기준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는 예배갱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초대교회 예전의 회복과 생동감 있는 예배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위해 노력중이다. 어떤 구조와 형식이 참된 예배의 모습인가에 초점이 맞추어진 두갈래의 방향을 보면서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우리의 예배가 어떠한 자세에서 어떤 모습으로 드려져야 하는지 실마리를 제공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필자는 두 번째 장에서 설교, 세례 및 성찬, 기도와 안수등 예배의 요소들에 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의견을 정리할 것이다. 세 번째 장에서는 현대 예배학자들의 이론을 빌려 에드워즈가 이야기하는 이상적인 예배의 형태와 예배자의 자세를 논하고 그의 예배관을 평가할 것이다. 네 번째 장에서는 한국교회의 현실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이 어떠한 예전적 타당성을 가지는지 살펴본 후 이어서 결론에서 그의 예전적인 공헌을 정리하고 필자 나름의 제언을 포함할 것이다.
2. 예전적인 요소들을 통해 본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
2-1. 설교와 공적인 예배2)
조나단 에드워즈가 활동하던 당시의 주일 공예배는 매우 간단한 구조로 되어있었을 것이다. 당시의 순서를 자세하게 알려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가 예로 든 예배의 요소(element, 순서)를 보면 당시 예배가 매우 간결한 형태임을 짐작하게 해준다.3) 에드워즈 이전의 청교도예배를 기준으로 하여 에드워즈당시의 주일 공예배에 들어가 있는 순서를 되살려 본 다면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우선 목사의 고백과 사죄의 기도로 시작되어 악기의 반주 없는 시편의 찬송4), 그리고 예배에서 가장 길었던 요소인 설교가 이어졌다. 설교 후 에는 결단하는 순서가 있었고 이어 성찬식이 거행되며 광고, 헌금과 감사의 기도가 있은 후 축도로 예배를 마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경과 주기도문 그리고 설교후 시편찬송이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되나 구체적으로 어디에 어떻게 위치하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5)
조나단 에드워즈가 남긴 설교의 분량으로 보아 그는 최소한 한 시간 반 정도는 했을 것으로 보여 예배에 있어서 설교는 그 차지하는 비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였음에 틀림없다.6)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행위이며 은혜의 수단이다.7) 이렇듯 중요한 의미를 지닌 설교의 전달에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인간의 지성과 감성에 모두 호소했다고 존 한나 (John D. Hannah)는 평가한다.8) 그에 의하면 에드워즈의 설교는 진리를 마음에 전달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가슴을 움직이는, 두 가지의 분리할 수 없는 요소를 지니고 있다. 설교의 지성적이며 감성적인 면을 드러냄과 동시에 실천적, 윤리적 성격을 잘 나타낸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체리(Cherry)가 이야기한 대로 설교는 성령과의 만남을 통해, 성령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되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말씀(truly the Word of God)이 된다.9) 즉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설교는 설교자의 능력에 의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고 예배안에서 하나님의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고서야 비로소 생명력을 얻게 되어 은혜의 수단이 되는 예전인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평균 주일에 두 번 그리고 목요일에 한번 설교를 했고 특별한 행사나 기념일에도 설교를 했다.10) 예배에 있어서 설교의 자리는 확고부동하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예배의 “핵심요소”(centerpiece)였다.11) 게다가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배를 마친 후 집에 가서 그날의 본문이나 인쇄된 설교원고를 읽고 다시금 깊이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라고 권유한다.12)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설교는 예배에서는 가장 중요한 일회적 사건임과 동시에 지속적인 성령의 임재를 위해 생활화해야할 명제이기도하다. 따라서 설교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종, 혹은 사자인 성직자에 의해서만 행해질 수 있다. 복음을 선포하고 가르치는 설교는 성직자의 “권위를 상징하는 행동”(An act of authority) 으로서 가장 “존귀한” (the most honorable)일이다.13)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매주 성찬의 전통이 나타나는데 이는 초대교회에 있어서 말씀과 성찬의 이상적인 조화를 엿보게 할뿐만 아니라 청교도의 예전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여러 차례 설교 후 결단의 시간을 갖고 성찬식에 참여했다는 기록을 남겼다.14) 결단이라는 다리를 통해 말씀과 성찬이 들리는 말씀과 보이는 말씀으로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음에 틀림없다.
악기나 반주의 경우 공적인 예배에서, 특히 기도와 설교에서 사용하는 것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반대하였다. 우울한 (melancholy) 분위기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도에서는 다른 잡념들을 제거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하여 반주의 사용을 장려하기도 했다.15)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설교는 가장 숭고한 성직자의 임무이며 예배의 중심된 요소이다. 설교는 공예배의 틀 안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로서 성만찬과 유기적인 연관을 지니고 있음도 발견된다. 더 나아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령의 역사를 전제로 하여 선포되며 듣는, 하나님과 설교자와 회중간에 일어나는 사건이면서 동시에 듣는 이의 윤리적 실천까지 내포하는 종합적인 예배행위라고 할 수 있다.
2-2.세례와 성찬
조나단 에드워즈는 세례의 중요성에 대하여 여러 곳에서 강조하고 있다. 우선 그는 준비와 근신의 과정 없이 받는 세례에 대하여 비판적이다. 그는 간혹 교회에 입문하기 위해 어떤 주의나 심각함 없이(without such caution and strictness) 세례 받는 경우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16) 그는 순교자들이 불로 세례를 받았다고 보았다. 첫째 이유는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의 거룩하고 순결한 불길을 내려주셨기 때문이고 둘째 이유는 불길 같은 시험(fiery trial)의 과정을 통해서 정금과 같이 만드셨기 때문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바로 이러한 고통을 세례라고 규정한다.17) 그런 까닭에 그는 준비와 훈련, 그리고 근신의 과정 없이 받는 세례에 대하여 경계하고 있다.18) 즉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되도록이면 사전에 거룩한 성도로 살아갈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찬의 경우처럼 철저한 분리를 요구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는 토마스 확스크로포드 목사에게 쓴 편지(May 24, 1749)에서 세례가 성찬에 비해서 “하위개념”(lower terms)임을 언급한바 있다.19)
유아세례와 관련하여 조나단 에드워즈는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으나20) 유아의 부모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결단해야한다고 그는 주장한다.21) 그는 "진심으로 그리고 전적으로 아이를 주님 앞에 내어놓는"(truly give up and so fully)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했다.22) 그는 유아의 부모가 믿음 가운데 전적으로 (believingly and entirely) 세례에 임한다면 유아가 어린나이에 죽더라도 유아의 구원에 대한 소망의 좋은 기반을 얻게 되며 유아가 잘 자라날 경우에도 주님 안에서 양육되는 것에 대한 좋은 기반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23)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세례는 거듭나는 것과 구별된다. 은혜를 체험하는 거듭남이 부재한 세례는 의미 없는 것이라고 그는 단언한다.24)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세례는 결단 혹은 신앙고백(profession )이나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지니지만 예식 자체로는 공적인 언약이나 신앙고백보다 덜 중요하다고 할수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재세례파처럼 다시 새로운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았으나 신앙의 고백 혹은 결단을 세례와 연결시킴으로 인하여 연약한 신앙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심적 부담을 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례에 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입장은 대단히 엄격한 자격조건을 내걸었던 성찬에 비하여 상당히 유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재 한국교회의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상당히 부담스러울 정도의 진지함으로 세례를 다루고 있다.
성찬과 관련하여 조나단 에드워즈는 세례를 다룰 때보다 훨씬 더 상세하고 심각하게 그 의미와 자격조건을 다루고 있다. 우선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찬의 의의와 효과를 중요시했다는 사실을 그의 저술에서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가 활동하던 시대를 두고 설교도 늘었고, 공적인 기도(social prayer)도 늘어났으며 찬양도 늘었는데 유독 성찬만은 늘지 않았다고 지적하면서 성찬은 초대교회 교인들이 매주일에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며 실행했던 중요한 성례임을 강조하고 있다. 성찬이 제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영혼들을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을 풍부하게 증거 해 주는 이 예전을 왜 (자주) 실행하지 못하느냐"고 묻고 있다.25) 그에게 있어서 성만찬은 매주일 예배에 반드시 포함되어야할 가장 핵심적인 기독교의 예전의 한부분임이 분명하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만찬이 제공하는 효과에 대하여 여러 차례 언급한다. 그에게 있어서 성찬은 새로운 성령의 기운을 충전하는 예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742년 12월 19일에 쓴 일기에 보면 성찬 후 달라진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엿 볼 수 있다. 그는 성찬 참여후 사사로운 문제에 연연하지 않고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주님께로 향했다고 표현하고 있다.26) 또한 그는 주님의 실재를 만끽했으며(enjoyed something of the divine presence) 자신의 추악함과 공허함, 그리고 죄악됨으로 인하여 겸손하게 되었고(had a humbling sense of my vileness, barrenness, and sinfulness) 세월이 흘러도 진보가 없음을 탓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1744년 6월 10일 주일에 있었던 성찬식의 경험도 그는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성만찬에 참예한 후 주님의 신실하심(divine goodness)이 그를 새롭게 했다고 고백하면서 그의 영혼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향해 사랑과 온유함(tenderness)으로 가득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모든 창조물에 까지 그러한 사랑이 뻗어나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27)
그는 가는곳 마다 성찬을 집행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설교에서 뿐 아니라 그의 다른 기록에서도 집회(혹은 예배)참석자들의 헌신을 결단하게 한 후 성찬을 집행한 것이 어렵지 않게 발견된다.28) 그의 성찬집행에는, 물론 그가 인디언 선교사이기도 했지만, 인종적인 차별도 없어 보인다. 1745년 8월 4일에는 약 50명에 가까운 인디언들과 더불어 성찬을 했음을 기록하고 있고 그 외 여러 차례 인디언들에게 성찬을 베풀었다.29)
조나단 에드워즈가 성찬을 매우 중요시 했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1746년4월 7일의 일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성찬식 집행 시 그가 했던 일들을 기록하고 있다. "오후에 고린도전서 1장 23-26절을 설명했다. 성찬 제정사(Institution)와 그 성격(nature)과 성찬의 결과(end), 그리고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qualification)과 준비사항(preparation)에 대하여 지도했다."30) 이런 사례는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그가 성찬의 의미와 의의에 대하여 강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자격을 매우 강조했다는 사실이 증명된다. 그는 성찬식이 거행되기 전 철저하게 우리의 약함과 우리마음의 사악함을 철저히 되돌아볼 것(strictly examining)을 강력한 어조로 권고하였다.31)
조나단 에드워즈는18세기 미국이 더 이상 신정사회가 아닌 이상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은 회심에서 찾아야한다고 믿었고 그런 까닭에 그의 신념을 교회에서 적용했다. 그는 그의 조부인 스타다드가 주장했던 "회심의 예전"(converting ordinance) 로서의 성만찬의 개념을 약화시켰다.32) 즉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회심은 성만찬 이전에 이미 갖추어야할 교인의 덕목인 셈이다.
설령 성찬이 죄인의 회심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다 하여도 죄인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주장한다.33)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찬은 죄인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는 성례전 이라기보다는 이미 회개하고 은혜를 체험하였으며 앞으로의 삶이 주님을 향하겠다고 다짐, 결단하는 사람들을 위한 준비된 사람들의 예전이었던 것이다. 그의 후기 저작들에서 두드러지는 양상은 성찬자체가 주는 즐거움, 기쁨보다는 무엇을 어떻게 갖추어야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느냐는 심각한 질문이 자주 등장한다.
1728년의 "The Spiritual Blessings of the Gospel Represented by a Feast" 라는 설교를 통해 조나단 에드워즈는 성찬에 참여하는 성도들의 특권과 기쁨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749년과 1750년의 성찬 참여자 자격에 대한 논쟁이 있을 당시를 비롯해서 그의 말년에 그의 성찬신학을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설교를 남기지는 않았다. 34)
성찬에 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진지하고도 심각한 입장은 시간이 갈수록 그 정도가 깊어지는데 1744년 까지는 자신의 신앙에 미심쩍어 하는 이들에게도 성찬을 허용했으며 개인적인 신앙의 결단에 대한 공식적인 증언을 유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 조나단 에드워즈의 입장에 변화가 일어났고 마침내 조나단 에드워즈는 1749년에 에드워즈 자신이나 성스럽고 은혜로운 사람들의 평가에 의해서 결정된 헌신하기로 결단한 사람들에게만 제한적으로 성찬을 허락할 것을 선언했다.35)
그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계약(explicit covenanting)이 성찬참여에 선행 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36) 노만 페팃(Norman Pettit)37) 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기존교회의 성찬참여자들의 자격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았으며 신앙의 결단(Profession)을 보여주는 사람들에게만 허락해야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자세히 밝히고 있다.38)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찬신학은 곧 회심한 성도들이 실제 생활에서 성령의 열매(fruits of the Spirit)를 보여줄 것을 강조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노만의 견해를 빌리자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매우 윤리적 실천을 강조하는 성찬신학을 표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39)
조나단 에드워즈의 42번째 결심문에 따르면 세례와 성찬은 종교적 체험을 제공하는 소중한 것이며 자주(frequently) 그리고 엄숙하게(solemnly) 되새겨야 하는 예식들이다. 42번째 결심문은 다음과 같다. "세례 받을 때 하였고 성찬식 때 진지하게 했던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종종 새롭게 하자. 그리고 오늘 1월12일 나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대한 헌신을 새롭게 하였다."40)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찬은 매주 교회에서 실행되어야할 중요한 예전이다. 그러나 그 실행의 횟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찬 참여자들의 내적인 변화와 외적생활로의 증거이다.
긍정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만찬에 대한 입장은 내적인 변화와 외적인 표지(sign)의 조화라고도 정의할 수 있다.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룬 완전한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고 또 그 참여의 정신대로 살아야하는 것이 바로 성만찬 예식인 셈이다. 그는 그의 마지막설교에서 조차 성찬에 대한 그의 생각이 순수한 동기, 복음에의 열정에서 비롯되었음을 역설하고 있다. 동기가 순수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을 두고 그것의 진위여부를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보기엔 그가 성찬회복에 가진 열정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고 마지막 가장 중요한 자기의견을 피력할 수 있는 기회조차 예배와 윤리의 불가분의 관계를 천명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의 예배관이 담지하고 있는 윤리적 진지성을 확인하게 해준다.
2-3. 안수, 기도, 금식, 기타 예배일반
조나단 에드워즈자신이 정의하는 목사직은 그리스도의 일로, 그리스도에 의해, 교인들에게 파송된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자(messenger)이다. 그는 마태복음 10장 40-41절의 내용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다. “목사들은 그의 사자들로서 그의 파송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직분과 회중들 속에서의 사역을 통해 그의 인격을 대변하며 그를 대신하는 자리에 섭니다.”
41) 이렇듯 중요한 역할을 하기에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성직은 철저히 검증받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주어지는 소명(召命)이다. 그는 초대교회 사도들의 예를 들면서 비록 그 정도의 철저한 검증(examination) 과 시험(trial)을 요구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교회(유형의 교회, 보이는 교회, visible church)에서 성직에 입문하려면 일정수준의 검증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5장 22절의 예를 들면서 성직에 입문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검증을 받고 나서 임해야함을 강조하고 있다.42)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 상태를 "자기 자신에 대해서 편안하게 만족할 만큼"(comfortable satisfaction concerning themselves)43) 이라고 규정하여 성직안수를 받는 사람들의 개인적 경건의 점검을 필수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그에게 있어서 성직자는 아무나 해서는 안되는 거룩하고 경건한 소명 받은 자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안수 받은 사람 (목회자)의 역할을 예배공동체와 연관시켜 설명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예배공동체의 목자들이다. 그리고 공적인 예배에 있어서 그들의 머리이자 안내자이다. 성서에 따르면 "다스리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회중들은 그들에게 순종해야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저들의 영혼을 마치 회계하듯이 살펴보기 때문이다.44)
이러한 그의 견해를 보면 그가 왜 성만찬논쟁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성직자가 예배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을 다스리는 사람이라는 그의 주장은 그것이 설령 성경에서 인용된 것이라 해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이 있을지 의문이다.
그가 깊은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하게 그의 글에서 드러난다. 그는 매우 규칙적으로 자주 기도하였으며, 성경구절을 가지고 기도하기도 했다. 특별히 예배에서 공적기도를 들을 때 간구와 고백 등 첫 번째 내용에 주의를 집중하자고 말했다.45) 그는 공적기도에서 죄의 고백의 차원을 중요시 한 것으로 보아 그의 기도관 역시 경건한 성도의 생활의 연장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기도는 다른 이들을 구원을 위해 하는 것이며,46) 하나님을 찾는 방법이기도 하고,47) 하나님을 찬양하는 길이며,48) 자주해야하고 성도의 생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이며,49) 평안을 주며,50) 기쁘고 복된 일이고,51) 성도간의 교재의 통로이기도 하다.52) 평상시 뿐아니라 예배를 드릴 때에도 비교적 긴시간동안 기도를 드렸으며 형식에 있어서 틀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기도를 선호했다.
금식에 대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견해는 어떻게 생활에서 경건을 실천할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에게 있어서 금식은 기도와 함께 실행되어야하거나 강조되어야 하는 덕목이다. 그는 목회자들이 비밀기도 (secret prayer, 혼자서 은밀하게 드리는 기도, 필자 주)는 강조하면서도 금식은 강조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면서 그가 이해하기에는 금식은 모든 기독교인들이 반드시 실천해야할 의무(a duty that all professing Christians should practice)라고 주장한다.53) 조나단 에드워즈의 결심문에서도 이러한 입장이 잘 표명되어 있다. "먹고 마시는 것은 엄격하게 절제하며 살자"는 그의 스무번째 결심문은 금식에 대한 에드워즈의 견해와 일맥상통한다.54) 한마디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전인적인 영성, 몸과 마음이 함께 경건에 참여하는 것을 강조했던 것이다.
찬양에 대한 기록은 그의 글들에서 매우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다. 우선 앞서 지적한대로 에드워즈는 공예배 에서의 시편을 위한 반주의 사용은 반대하였다. 시편을 암송하거나 노래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생활의 중요한 일부였다. “시편을 가지고 또한 내 마음의 묵상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자”(1723년 9월 21일)55)는 내용을 보면 공적인 예배에서와 마찬가지로 시편의 찬양은 그의 삶에 있어서 회개의 영성을 북돋우는 매우 중요한 영적생활의 동반자였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다음은 그의 일기에 등장하는 찬양에 대한 언급인데 그의 찬양관을 짐작케 해준다.
동트기 전에 어제 던졌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죄를 회개하면서 시편, 특히 회개에 대한 시편과 찬양을 노래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야만 했다. 이러한 의무들은 내가 빠져있었던 상태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1723년 1월 21일).56)
풀리지 않은 숙제를 가지고 있을 때에 그는 하루의 시작을 회개의 내용이 담긴 시편을 읽거나 찬양을 하였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회개의 영성이 그의 찬양관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한편 주일에 관하여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하게 사용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는데 쓰도록 성별되었다고(consecrated) 밝히고 있다. 또한 주일은 주님의 만찬 (the Lord's Supper)를 위해 성별된 날이라고 설명한다.57) 주일에 관하여는 개혁주의 전통은 물론이고 범 기독교적인 보편적인 이해를 도모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그는 매주일 성찬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 평가
3-1. 구원과 윤리를 향한 개방적 실용성
그의 예배관은 내적인 경건의 외적인 표출, 나아가 개인과 이웃의 변화된 생활을 유도한다는 면에서 그의 성찬에 대한 입장과 맥을 같이한다. 예배에서의 외적인 경건의 표시들, 즉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거룩하심과 선하심을 이야기하는 것도 자신의 마음에 영향을 주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58) 조나단 에드워즈는 실제 예배에 들어가 있는 순서들을 예로 들면서 예배가 주는 영향력을 설명한다. 즉 설교나 성례의 집전, 기도과 찬양으로 드리는 예배의 행위들은 그러한 것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감화시킨다고 (affect the hearts of those who attend these means) 강조한다.59) 그에게서 있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종교적인 감화를 표현하고 즐겁게 하도록 만들어주는 의무(duty)다.60)
그는 예배가 주는 영향력을 강조하면서도 예배의 행위들이나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다고 단언한다.61) 또한 "외적인 예배행위들, 즉 말이나 행위, 외적인 형태"(External acts of worship, in words and gestures and outward forms)들은 상징에 불과한 것이고 내적인 예배(inward worship)의 결단의 형태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즉 예배드릴 때 사용하는 언어나 행동(몸짓)들은 내적인 예배가 밖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외적인 행동으로 내적인 예배를 완벽하게 구현할 수는 없으며 외적인 행동들이 위선적 (hypocritical)일 가능성도 있지만 그래도 그것 나름대로 매우 중요하며 본인들에게나 이웃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라고 언급한다.62)
그에게서 있어서 성만찬이나 세례를 포함한 예배의 요소들은 지극히 실용적인 입장에서 정의되고 있다. 즉 찬양이나 설교나 성만찬등의 요소들은 종교적인 감화를 위한 최적의 수단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배의 요소들이 절대적인 가치를 갖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다. 이러한 요소들은 어디까지나 성도들의 영적 각성과 감화를 위한 수단일 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절대적 증거는 될 수 없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배참여자들의 자세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당시 예배에 잡담을 하는 이들이 있었는지 조나단 에드워즈는 공중기도나 찬양을 부를 때, 설교와 성만찬시 회중들이 말하는 것을 엄중히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성령에 사로잡힌바 된 경우에는 예외로 할 수 있다.63)
이 부분에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이 매우 개성적이고 그와 동시에 탁월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는 성만찬 참여자의 기준을 정할 때처럼 그렇게 완고한 고집으로 그의 예배관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는 예배자들의 진지한 참여를 강조하면서도 예배 안에서의 성령의 임재에 대하여는 매우 개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의 개방적인 예배관이 아주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앞서 소개하였듯이 시편을 즐겨 읽었고 시편의 중요성을 여러차례 강조했다. 그러나 찬송에 있어서 시편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예기치 않은 주장을 제기한다. 이에 대하여 양낙흥은 찬송에 대해서 그가 상당히 진보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평가하고 있다.64)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떤 면에서는 상당히 배타적이면서 동시에 실용적인 표용력을 지녔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배타성과 포용력이 만나게 될 때 자칫 자의적인 해석에 의해 취사선택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되면서도 적어도 예배의 순서와 구조에 있어서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매우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예배의 형식이나 구조보다 보다 앞서야할 구원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양낙흥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정통적 개혁주의자로서는 놀라울 정도의 개방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그의 설교내용을 인용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람들의 양심을 깨우치기를 기뻐하신 결과로 그들이 커다란 외적 표현(great outward manifestation)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다면, 그들이 참석하고 있던 공적 수단들 (public means)을 다소 침범하고(interfere) 깨뜨리는(break off) 결과가 생긴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혼란이나 침범이라 생각지 않는다.65)
즉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예배는 성령의 역사와 그 역사에 응답하는 형태로서 성도들의 반응이 표현되는 경우, 다소 무질서하게 보여도 그것은 단순히 무질서한 것이 아닌 것이다. 예배를 평가할 때 단순히 예배의 형식이나 모양, 그리고 태도만 피상적으로 살필 것이 아니라 예배 안에 진정한 고백과 은혜의 외적 표현이 있느냐를 보아야한다는 의견이다.66) 겉으로 보이는 예배의 모습은 구원이라는 대전제 앞에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껍데기 일뿐이다. 지나치게 실용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하겠으나 그의 주장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평가한다면 구원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지 예배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3-2. 개인적 헌신(獻身)과 공적인 예배의 혼재
예배를 정의함에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는 개인적인 예배와 공적인 예배사이의 구분이 모호하다. 물론 조나단 에드워즈는 시편의 가치에 대해 강조할 때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시편의 성격을 이야기하긴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시편은 씌여진 당시뿐 아니라 후대에 이르기까지 주님의 교회가 드리는 공적인 예배(public worship) 에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그 용도를 규정하고 있다.67)
그리고 그 시편을 쓸 때 다윗 같은 기자는 개인적인 자격(as a private person)으로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시편기자로서 (as the Psalmist of Israel) 주님의 교회의 겸손한 지도자로서 노래하고 있다고 평가한다.68) 다윗을 개인적으로 성령의 거룩한 영향(Holy affection)을 받은 이로 묘사한 것과 동시에 다윗이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공동체의 대표로써 시편을 지었다고 언급한 것은 개인적 헌신과 공동체의 영성을 연결시킨 탁월한 시각이라고 생각한다. 즉 개인적 탄원시 로서의 시편의 가치를 공동의 고백이며 기도라는 의미를 제공함으로써 시편이 지니고 있는 공동체적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그가 시편의 기자인 다윗을 이야기할 때 다윗의 공동체내에서의 대표성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예배가 공적인 행사임을 천명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는데, 이러한 입장은 다음의 글에서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이러한 예배 공동체( worshipping society) 들은 자발적으로 서로 연합하고, 결국 하나님의 공적인 예배(God's public worship)에서 하나가 된다. 그리고 한몸의 지체들로서, 형제(자매)로, 성숙한 조력자들로써 일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종교적인 일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생각해주고 염려해준다. 이것이 바로 공적인 예배의 한 부분이다.69)
이상적인 공동체를 이야기하는 부분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공적인 예배를 그 공동체 구성원들이 하나가 되는 의식으로 정의 하고 있다. 공적인 예배를 강조한 듯 보이는 이 문장은, 실은 자세히 살펴보면 공적인 예배의 실제적인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져 있다. 더 나아가 공동체에 속한 지체들 상호간의 협력과 사랑이야말로 예배의 한부분임을 특별히 언급하여 예배공동체 안에서 공동체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들 상호간의 윤리적 생활을 강조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따라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공적인 예배를 사용할 때 그 용법은 개인적 예배와의 확연한 구분을 위한 것 이라기보다는 철저히 실용적인 측면에서 공적인 예배의 효과와 성격을 정의하기 위함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안타깝게도 위에 인용한 공적예배에 대한 의견 외에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공동체적 예배에 대한 견해를 찾아보기 매우 어렵다. 일반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실존으로 나아오는 방법으로서 공적인 예배와 개인적인 예배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70) 현대 예배학자들은 개인적 헌신(personal or private devotion)과 공적예배(public worship)를 엄밀하게 구분하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는 개인적인 헌신도 예배이고 공적인 예배도 예배다. 따라서 다분히 개인주의적인 예배관을 가졌다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71) 그가 개인적 헌신을 강조하고 개인의 영적 생활을 중요시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이러한 구분의 모호함은 쉽게 예상되는 일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예배를 통한 공동체의 일치된 고백의 경험과 친교보다는 각자 알아서 미리 고백하고 와야 하는 이미 준비된 사람들이 모임으로서의 예배를 강조하여 예배 참여자들에게 부담을 주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것이다. 모두가 함께 허물없이 참여하는 포용성으로 대변되는 사랑의 공동체의 모임이 아닌 배타적인 모임으로서의 예배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를 갖게 한다. 공동체의 헌신과 고백, 공동체의 참회와 용서가 공존하는 초대교회의 정신은 에드워즈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행인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가 공동체 전체의 고백과 영성으로서의 예배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예배드리는 공동체의 실제 생활에는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와 올바른 행실의 필요성은 서로 모순 되지 않고 상호 보완적이며 성서적이라는 머레이(Murray)의 주장을 떠올리지 않더라도72) 조나단 에드워즈의 사회 윤리적 입장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성도의 올바른 삶에 기반 하여 그 실천적 영성이 사회적 책임감으로 이어지고 공동체를 살리는 사회윤리에의 확대되는 것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확실하게 보인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예배는 그러한 사회윤리의 실천과정의 다리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신앙생활의 요소이다.
덧붙여 그는 공동체의 윤리를 강조하여 자신을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는 것 보다는 개인적인 영성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73) 유명한 그의 결심문 또한 사회적 책임을 이야기 하면서도 결국에는 개인적 영성의 차원에 집중되어 있거니와 성찬 참여문제에 있어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결국 교회에 속한 회중 개개인의 영적 각성과 준비상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4. 조나단 에드워즈와 한국개신교회 예배
4-1. 형식에 대한 융통성
과연 한국교회는 이러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 혹은 예배신학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첫번째로 우리가 조나단 에드워즈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성령의 내주 가운데 예배의 형식과 구조에 대하여 열린 마음을 갖는 것이다.
한국의 개신교와 그 개신교의 예배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평가하는 북미의 예배학이 당면한 과제는 토마스 롱(Thomas G. Long)이 직시하는 대로 예배들 사이의 전쟁이다.74) 초대교회의 예전을 회복하여 그 영성과 형태를 보존하여 전달하려는 경향을 토마스 롱 (Thomas Long)은 히폴리투스 진영(Hippolytus Force) 이라고 정의한다. 한국개신교의 예배서들의 개정에는 이러한 흐름이 일조하고 있다. 그 반대쪽에는 비형식적이며 비예전적인 예배를 주장하는 예배의 전통이 있다. 롱은 소위 구도자 예배(seeker service) 혹은 열린 예배를 주장하는 이들을 윌로우 크릭 진영(Willow Creek Force)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사정은 한국의 개신교에서도 발견되는데 각 교단의 예식서들은 초대교회의 예전을 회복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다른 한편에서는 비형식이야말로 21세기를 위한 정답이라며 전투적으로 예배를 식상함과 형식화를 비판하고 있다. 히폴리투스와 윌로우 크릭으로 대변되는 전통과 현대, 형식과 비형식의 처절한 싸움 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어떤 지혜를 우리에게 줄 것인가?75)
앞서 논한대로 조나단 에드워즈는 예배의 순서와 요소에 대해서 매우 융통성이 있고 개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예배구조에 있어서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다. 예배의 요소들, 순서와 형식들은 실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말씀이 넘치고 다양한 예배의 시도들이 넘치는 이때, 정작 회복해야 할 것은, 갱신해야 할 것은 삶으로서의 예배, 예배하는 삶, 하나님과 만나고 이웃과의 지평을 넓혀가는 삶이 아닐까? 기본정신의 회복, 그것이야말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꿈꾸었던 이상적인 예배의 모습이며 우리가 추구해야할 예배갱신의 방향이 아닐까? 조나단 에즈워즈는 형식과 비형식, 전통과 현대를 아우를 비책을 우리에게 제공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4-2. 예배와 윤리의 유기적 관계의 회복
필자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예배자의 참된 영성에 관한 모범을 그 스스로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예배와 윤리가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적어도 필자가 정의하자면 이상(理想)주의자이다. 이상주의자는 실현하기 어려운 것들을 꿈꾼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이상을 자신의 삶으로 구현하려고 애썼고 일정부분 목표를 달성했던 인물이다. 물론 조나단 에드워즈의 배타적인 성찬참여기준을 한국교회에 적용한다면 한국교회는 그가 겪었던 사임의 아픔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의 정신만큼은, 진지함과 훈련에의 열정만큼은 예배자의 전형 (典型)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그는 자신의 시간을 카이로스로 만들기 위해 부단히 애썼던 실천적인 이론가이다. 그에게 있어서 시간은 지속적 신앙유지를 위한 틀이다. 마치 수도원의 성무일과를 보는듯한 그의 생활을 보면 그의 시간관은 교회력자체라고도 평가할 수 있을 만큼 규칙적이고 철저하다. 그는 47번째 결심문 에서 그의 인격과 신앙을 스스로 매주 점검할 것을 다짐한다.
최선의 노력을 다해서 선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조용하고 평화롭고 만족하고 편안하고 자비롭고, 관용적이고 겸손하고 온유하고 순종적이고..중략...그리고 매 주일마다 내가 왜 그렇게 실천했는지 여부를 엄격하게 점검하자.76)
수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바램은 바로 이렇듯 반복적인 의식 속에서도 꾸준히 영적상태를 점검하여 항상 거룩하고 새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거룩함의 아름다움"을 알고 있었다.77) 또한 예배에 참여하는 자들의 마음가짐이 준비되어야한다는 것이고 예배를 통해 감화된 영성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감화시키는 증인들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었다. 이런 의미에서 박명수는 에드워즈가 인간의 한계를 명백하게 인식하면서도 성령을 통해 변화를 받고 거룩한 삶을 사는 것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설명한다. 즉 "성령의 역사를 통한 거룩한 삶"이 에드워즈 신학의 진수라는 것이다.78) 물론 현대 예배학의 시각에서 평가한다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이 지나치게 개인의 구원에 치우친다는 느낌을 받게 되지만 그러나 그가 개인적 헌신 즉 수직적 만남이 수평적인 이웃과의 만남으로 실현되는 흔치 않은 모델중 하나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커다란 배움을 갖게 된다.
다음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찬신학이 매우 잘 드러난 부분이다.
어떻게 여러분 중 몇몇은 주님의 만찬이라는 성스러운 예식에 심각하게 준비하는 자세 없이, 아무런 주의 없이 하찮게 여기는 마음으로, 많은 경우 그저 전해 내려온 전통이니까 참여하십니까? 여러분은 감히 예수님의 살과 피를 상징하는 성스러운 상징들을 여러분의 입에 넣으면서 동시에 죄악 가운데 살고 여전히 똑같이 악한 행실 가운데 사십니까? 어떻게 형제에 대하여 악한 마음을 품고 주님의 성찬에 참여하기 위해 앉아계십니까? 주의 자녀들의 사랑의 잔치에 어떻게 악하고 질투의 마음으로 오셔서 스스로 주의 심판을 먹고 마시고 계십니까?79)
오늘의 한국교회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기독교인들이 성찬의 깊은 영성을 향유하고 있는가? 예배시간이 길어질 것이라는 불안감에 팽배한 성도들을 위해 정해진 시간 내에 공장에서 찍어 내듯 치러지는 요식행위 속에서 함께 떡을 떼고 삶과 죽음의 갈래길 에서 예수그리스도를 기념하던 카타콤의 성만찬 정신은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친교와 이웃과의 수평적 친교 중 그 어느 것도 달성되지 못하는 이 엄연한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조나단 에드워즈의 이상주의가 하나의 답안지가 되어주는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5. 나오는 말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관은 그의 다른 신학적인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그의 신학적 입장들이 거의 그대로 녹아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청교도의 끝자락을 장식하는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영성의 회복, 인간의 내면의 변화와 그것의 공적인 고백 혹은 결단과 같은 덕목을 예배 속에서 실현하려고 했던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예배는 개인적인 헌신을 결단한 자들이 모여서 성찬을 통해 그 결단을 확인하고 새 힘을 얻는 매우 실용적이면서도 진지한 예식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세례와 성찬에 대하여 풍부한 신학적 안목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현대예배신학의 시각으로 그의 성찬이나 세례신학을 본다면 양적인 면이나 질적인 면에서 부족함을 느낄지도 모른다.80)
조나단 에드워즈의 예배에 대한 입장은 다소 개인적인 구원에 치우쳐 있기도 하고 특별히 성찬에 있어서 매우 엄격한 참여조건을 주장했다. 선택된 자 만이 구별된 행동을 통해서 증거하고, 그들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배타적인 모임, 그러나 그러한 배타성이 세상을 등지고 이기적인 자기안위에 치우치는 옹졸함이 아닌 나의 변화로 세계를 변화시키겠다는 복음에의 열정 때문에 빚어진 배타성이라면 수용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면에서 에드워즈는 고집스럽다고 할 만큼 일관성이 있고 또한 탁월하며 이는 21세기 한국의 예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별히 구원을 향한 그의 열정과 예배정신의 회복에 대한 그의 이상주의는 결코 폄하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예배구조와 순서의 융통성(Flexibility)은 후대의 기독교인들보다 오히려 더 열려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이상주의자의 미덕과 한계를 동시에 소유하고 있다. 성찬 참여자격문제는 화해로 승화시키지 못했으나 그렇다고 그를 완벽주의자, 편벽의 상징으로 몰아세울 수는 없다. 오히려 성찬이 지닌 거룩성과 진지함을 그를 통해 배울 수 있다. 양낙홍은 조나단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사이의 성찬으로 인한 갈등을 정리하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입장을 매우 긍정적인 시각에서 평가하고 있다.
교회의 순결과 성찬의 거룩함을 유지하고자 하던 에드워즈의 열심에 자극을 받아 한국교회도 실제로 여러면에서 최소한의 기준을 회복해야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영예, 교회의 영예, 그리고 복음의 영광을 지킬수 있다. 그것이 에드워즈와 노샘프턴 교회사이의 논쟁에서 우리가 얻어야 하는 교훈이다.81)
조나단 에드워즈의 성찬논쟁과 그의 배타성을 염두에 둔다 해도 양낙흥의 이러한 평가는 매우 정확하며 시의적절하다. 예배의 진지성과 신실함을 회복하기 위한 조나단 에드워즈의 노력은 그의 목회에서의 갈등을 덮고도 남을 만큼 숭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예배에 대한 이해를 통해 한국교회는 21세기의 만만치 않은 순례의 길에서 귀한 동반자를 만난 셈이다. 시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그가 우리에게 강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예배정신의 회복이라는 명제는 그래서 거스를 수 없는 묵직한 조언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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