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분노
성수대교 붕괴 후에 서울시 기술 공무원들은 "관리와 보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건축물을 가능한 원래의 상태로 관리, 보수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지금 일부 교회에서는 개혁을 부르짖습니다. "개혁"은 무엇을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래의 모습을 찾기 위해 관리하고 보수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교회와 복음을 성경에서 말하는 원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 개혁의 바른 정신입니다.
마틴루터는 처음부터 로마 카톨릭 자체를 반대해서 종교개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오직 원래의 말씀으로만 돌아가자는 취지였습니다.
세례요한의 등장을 알리는 누가복음 3장에는 이 시대에 우리가 돌아가야 할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세례요한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때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사방에서 포진하던 시기입니다. 즉 황제 디베료 가이사, 총독인 빌라도, 유대 각지방의 분봉왕들인 헤롯과 빌립 그리고 루사니아,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가야바가 바로 그들입니다. 왜 이들은 세례 요한의 출현에 앞서 기록되고 있을까요? 그것은 세례요한의 등장이 그만큼 볼품 없는 극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세력들은 자신들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도 백성들에게 아무런 희망을 심어주지 못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지금 겪는 상황과 조금도 다를바 없었습니다. 우리 국민들은 민주화되면 낙원이 오는 줄 알았습니다. 또 GNP 3만불만 넘으면 무지개가 뜨는 줄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정치와 경제는 위기상황으로 치닫고 있고 북한의 남침위협은 여전하고, 시대의 소망은 화려한 가이사의 궁전이나, 막강한 로마 정부의 군사력에 있지 않았습니다. 물론 종교지도자들에게도 그 해답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기대도 관심도 두지 않았던, 빈들의 요한에게서 그 해답을 준비하셨습니다. 광야에 묻혀서 이름도 없이 살아가던 한 청년의 입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박사학위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탁월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좋은 인상이나 인간미, 교양을 갖춘 자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광야에 묻혀서 한 순간의 쓰임을 위하여 준비되었던 하나님의 그릇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모든 것을 넘치게 갖추었습니다. 웅장한 건물, 풍부한 재정, 그리고 세상적으로도 힘과 세력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선거 때만 되면 기관장들이 와서 굽실거립니다. 목회자는 최소한 박사학위를 가지고 있어야만 담임목사로 청빙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입니다. "개혁"을 부르짖는 사람들도 '세력화'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힘의 논리입니다. 세상의 철학입니다. 우리는 이런 때일수록 여리고와 아이성의 전투를 기억해야 합니다. 가나안의 전쟁은 세력과 힘으로 하는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교회는 힘의 철학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대세보다는 대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힘과 권력에 편승하지 않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궁이나 위엄이 가득한 성전에서가 아닌 텅빈 빈들에서 시대의 난국을 헤쳐갈 해답을 준비하신 것입니다. 강단은 이제 달콤한 음녀의 속삭임을 그쳐야 합니다. 백성들의 필요와 시대의 필요를 따라서 편의적으로 설교를 하는 것도 좋으나 지금은 거룩한 분노가 필요한 때입니다. 교회에 들어온 세속의 오물들을 먼저 걷어내고 빈들을 만들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당 푸닥거리를 중지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너희는 이것을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너희가 무익한 거짓말을 의뢰하는 도다"(렘7:4-8)
'제로-베이스'운동이란 용어는 기업에서 한창 적용 중인 경제용어입니다. 이 단어에는 두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모든 것을 원점에서 다시 보자는 운동이며 둘째, 모든 것을 본질에서 다시 보자는 운동입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원점'에서 그리고 '본질'에서 다시 보는 영적인 제로베이스 운동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목회자들이 먼저 성경을 다시 보고, 바로 읽기를 시작해야합니다.
성경은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반드시 역사하는 힘이 있습니다. 좌우에 날선 검이 되어 운동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탐욕스런 눈이 바뀌어야 합니다 위선과 타협과 허세와 허수 그리고 기복을 걷어내고 먼저 교회를 빈들로 만들어야 합니다. 회개하지 않는 새상이 문제가 아니라 회심하지 않는 교회가 문제가 있습니다. 이 시간도 하나님은 찬란한 교회에서가 아니라 빈들에서 하나님의 엘리야들을 찾고 있습니다. 거룩한 분노를 함께 할 기도의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대단한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헌신된 이름없는 무리들이 필요합니다.
한국 교회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잠자는 교회, 변질된 복음을 가지고 어찌 이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출 수 있겠습니까? 기드온의 300명 용사들처럼 교회의 개혁을 위해 나팔과 횃불을 높이들 십자가의 군병들은 모여야 합니다.(삿7장)
주의 일에 전심코자 하는 형제들은 함께 모여야 합니다. 작은 물방울처럼 모여 예수의 큰 강을 이뤄야 합니다.
성경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해야 할것입니다"(요2: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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