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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북미 개혁신학의 동향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의 특성과 그 기여를 중심으로

by 【고동엽】 2017.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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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북미 개혁신학의 동향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의 특성과 그 기여를 중심으로



이 승 구 박 사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제 1 부: 개요
"개혁 신학"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작업의 범위가 상당히 달라지게 될 것이다. "개혁 신학"이란 말에 대해서 크게 3가지 다른 용례가 있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하나는 가장 포괄적인 용례로 종교 개혁적 신학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16세기에 일어난 종교 개혁적 전통을 유지하는 모든 신학이 이에 포함될 것이다. 천주교 신학(Roman Catholic theology)과 동방 정교회의 신학(Greek Orthodox theology)와 대조되는 개혁파 신학, 루터파 신학, 성공회의 저교회파 신학, 심지어는 재침례파의 과격한 종교 개혁의 신학까지가 이에 포함될 것이다.
두 번째 용례는 종교 개혁적 신학들 가운데서 루터파나 과격한 종교 개혁파 신학과 대조되는 칼빈의 신학적 전통을 유지하거나 그 전통으로부터 나온 신학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경우이다. 이것은 전통을 따져 볼 때에 (즉, 어떤 신학이 과연 어떤 전통에서 나온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개혁 신학이라는 말이 사용되는 용례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칼 바르트나 에밀 부룬너의 신학은 이렇게 전통을 따질 때에는 천주교 신학도, 루터파 신학도 아니고 개혁파 신학의 전통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몰트만의 신학도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에 가깝게 서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톰 토랜스의 신학, 오토 웨버의 신학 등도 개혁 신학인 것이 된다. 그러나 우리는 "개혁 신학"이라는 말을 이런 용례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은 많은 오해를 낳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프레드 끌로스터가 잘 말하고 있듯이, 그들 나름의 독특성을 지닌 새로운 형태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이다.
우리가 이 용어를 사용하는 의미는 세 번째 용례에 따르는 것인데, 이는 전통적 개혁파의 전통에 서 있으면서 그 전통적 특성, 특히 성경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점, 제한 속죄를 받아들이는 점, 구원 사역에서의 하나님의 '독력주의'(monergism)를 받아들이는 점등을 포기하지 않고 그 특성을 계속 유지하려는 신학만을 개혁신학으로 부르려고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 후반을 살고 있는 20세기 전체에 걸쳐서 이런 의미의 개혁 신학이 어떤 발전과 기여를 하였는지를 일일이 다 검토한다는 것은 아주 커다란 작업이 될 것이다. 나에게 맡겨진 북미 개혁신학의 동향을 살피는 일만 해도 어떻게 그 작업을 다 할 수 있으려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챨스 핫지(Charles Hodge, 1797-1878), 제임스 헨리 똔웰(James Henry Thornwell, 1812-1862), 알키발드 알렉산더 핫지(A. A. Hodge, 1823-1886), 댑니(Robert Lewis Dabney, 1820-1898), 윌리엄 쉐드(William G. T. Shedd, 1820-1894) 등의 19세기 미국 개혁신학자들과 월필드(B. B. Warfield, 1851-1921), 게할더스 보스(Geerhardus Vos, 1962-1949),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 등과 같은 20세기 초반에 크게 활동했던 미국 개혁 신학의 거성들이 이루어 놓은 작업에 근거해서 20세기 후반, 즉 1950년대 이후 북미에서의 개혁 신학의 발전과 기여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만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제 2 부 :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 작업의 특색과 기여
기존의 개혁신학의 틀 안에서 개혁신학을 미국서 잘 발전시킨 20세기 후반의 신학자들로는 역시 웨스트민스터의 조직신학 교수였던 죤 머레이와 칼빈 신학교의 조직 신학 교수였던 안토니 후크마, 그리고 고오든-콘웰 신학교의 역사 신학과 조직 신학 교수인 데이비드 웰즈를 들 수 있다. 머레이는 학생들이 성경 이외의 체계에 붙잡히는 것이 두려워 독립적인 조직 신학 책을 쓰지 않았고, 후크마는 그의 칼빈 신학교 조직 신학 교수 시절 말년에 종말론에 대한『성경과 미래』를, 그리고 그가 은퇴한 후에야 인간론, 그리고 구원론에 해당하는 조직 신학 책을 써내었다. 머레이가 체계적인 조직 신학 책을 써주었거나, 후크마가 더 오래 살아서 조직 신학의 나머지 부분을 다 완성할 수 있었더라면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후크마는 비교적 머레이의 작업을 잘 반영하면서 작업하였다고 판단되므로 이하에서는 주로 후크마의 작업을 중심으로 논의하도록 하겠다.

물론 안토니 후크마의 신학에는 이전의 개혁 신학자들, 특히 칼빈과 계속해서 그의 정신적인 스승이요 그의 언약 사상을 박사 학위 주제로 삼았던 헤르만 바빙크나 그의 동료요 전임자인 벌코프의 깊은 영향력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신학을 진술하는 형태나 그의 새로운 주장들에는 이전의 신학자들과 비교할 때에 상대적으로 다음과 같은 독특성을 드러내면서 작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 비교적 성경에 대한 체계적 주해를 신학에 좀더 많이 반영하고, 주해에 좀더 철저한 작업을 한 것; (2) 신학적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좀더 성경의 용례를 중시한 점; (3) 신약학자들이 잘 밝혀 낸 하나님 나라 사상에 좀더 충실한 형태의 조직신학을 제시한 것; (4)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통적 개혁신학의 장점에 충실한 신학을 현대의 상황에서 창의적으로 제시한 점. 이와 같은 점에서 그의 조직신학적 작업은 20세기 개혁신학의 진정한 발전과 진보를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근자에 상당히 개혁파적 입장에 서서 조직신학 책을 저술한 그루뎀의 작업과 비교할 때, 후크마의 작업은 발전과 진보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는 데 비해서, 그루뎀의 작업은 좀더 현대에 작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점과 좀더 평이한 진술을 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신학에 좀더 친근히 접근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는 점 외에는 과연 현격한 진보의 이정표를 제시했다고 할 수 있으려는지 의문을 표하게 하는 것이다. 특히 성령의 사역 문제 등에 대한 입장 표명 등과 관련하여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는 과연 철저히 개혁파적인 입장을 드러내고 있는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 이점들을 차례로 검토해 보기로 하자.


1. 주해 과정을 드러내는 신학의 제시
이전의 신학자들도 주해에 근거한 신학을 하였다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특히 보스의 조직신학이 그러하리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벌코프의 신학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후크마는 이런 전통을 받아들이되 이를 더욱 분명히 했다고 할 수 있다. 즉, 일반적으로 이전 신학자들이 주해에 근거해 내린 결론을 중심으로 조직 신학을 제시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비해서, 후크마는 실제 신학을 진술할 때에 주석을 쓸 때와 같이 그 구절과 관련된 모든 점을 다 철저하게(comprehensively) 할 수는 없지만 이 주해의 과정을 필요한 만큼 드러내면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3부작 전체에서 이점이 잘 드러난다. 특히, 종말론과 구원론을 다루는 데서 이 점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제 그의 이런 주해 작업을 드러내면서 신학을 제시하는 몇몇 예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아담에게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에 대한 해석과 관련해서 후크마는 아담이 불순종한 날 죽지 않은 것에 대한 두 가지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첫째 견해는 죽음의 심판에 즉각 시행되지 않고 연기된 것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 때문이라고 보는 바빙크, 카이퍼, 알더스 등의 견해이다. 그리고 두 번째 견해는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표현하는 히브리어 관용어임에 주의를 환기시키는 게할더스 보스의 견해이다. 보스는 이 관용구의 다른 예로 왕상 2:37과 출 10:28을 든다. 이 두 절 모두에서 "~하는 날에는"이라는 말은 "~하면 반드시"란 뜻이라는 것이다. 후크마는 이 둘 모두가 가능한 해석이라고 보면서도 두 번째 견해가 더 개연성이 높은 듯하다고 한다(The Future, p. 81; God's Image, p. 138). 이처럼 후크마는 성경 주해에 좀더 유의함으로서 좀더 나은 입장을 제시할 수 있었다.
(2) 성경 주해를 드러내며 작업한 좀더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자면 중간상태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검토하면서 논의하는 빌립보서 1: 21-23에 대한 주해이다. 이 구절이 죽음에 대한 바울의 기대보다는 부활에 대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에 대한 결정적인 반론으로 23절에 나오는 "떠나서"라는 단어가 '아나루사이'( )로 죽음의 순간적 경험을 묘사하는 부정과거 부정사라는 것을 지적한다(The Future, p. 104). 또한 와 같이 두 동사가 한 관사와 연관되어 있는 것은 이 두 가지 부정사들이 나타내는 동작들이 한 가지 일의 두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는 문법학자들의 견해에 근거해서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그가 떠나서 죽는 순간이 곧 그리스도와 함께 있게 되는 순간이라고 후크마는 논의한다(The Future, p. 104). 후크마는 이처럼 구체적인 주해의 과정을 자세히 드러내어 논의를 분명히 하고 있다.
(3) 성경의 가르침을 고려할 때 인간을 영혼과 몸의 통일체로 보는 견해가 옳다는 것을 잘 드러낸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종말론을 쓸 때에는 베르까우어에 의존하며 그가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잘 강조하고 있다고 지적하던 그가(The Future, p. 95) 후에 인간론을 쓰면서 이 점을 아주 온전히 잘 드러내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을 영육 통일체(psychosomatic unity)라고 부르기를 즐겨 한다. 그는 자신의 이런 용법이 죤 머레이에게서 온 것임을 즐거이 밝히고, 브로밀리와 스톱도 같은 견해를 나타낸다고 밝히고 있다(God's Image, p. 217, n. 59). 그는 또한 이렇게 전인으로서의 인간을 이해하는 것의 실천적 의의도 잘 고찰하며 밝혀 내고 있다(God's Image, pp. 222-26). 이런 입장에 따라서 후크마는 바빙크와 리쳐드 마우에게 동의하면서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 총체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전체로서의 인류 안에서라는 것을 강조한다(God's Image, pp. 99-101). 이는 후에 구원론에서 카이퍼, 월터스 데이비드 모베르그, 리쳐드 마우 등에게 동의하면서 성화의 사회성을 강조하는 점(Saved by Grace, pp. 228-31)과도 잘 어울리는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4) 머레이의 논의에 의존하면서 주해 작업을 잘하여 우리의 이해를 크게 진작 시킨 예로 에베소서 4:22-24에 대한 후크마의 설명을 지적할 수 있다. 그는 이 문장 속의 세 가지 부정사(즉, "벗어버리다"는 뜻의 "아포떼스따이"[ ], "새롭게 되다"는 뜻의 '아나네우스따이'[ ], 그리고 "입다"는 뜻의 "엔두사스따이"[ ]를) 많은 영역 본이나 한글 개역과 같이 명령형으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머레이가 제시하는 것처럼 결과를 나타내는 부정사 혹은 설명형의 부정사로 보는 것이 더 옳다고 한다. 그래서 후크마는 이 세 부정사 모두가 주동사인 21절의 "너희가 가르침을 받았다"( )에 의존한다고 한다(God's Image, p. 26f.). 따라서 이 구절은 NIV와 같이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새롭게 되어 ...... 새사람을 입었다고 가르침을 받았다"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구원론에서는 이 문제를 좀더 길게 논의하면서 왜 머레이와 같은 해석을 하는 것이 더 옳은지를 잘 밝혀 주고 있다(Saved by Grace, pp. 209-13). 이는 결국 신자 안에 새사람과 옛 사람이 현존하고 있어서 싸움하고 있다는 다른 개혁 신학자들의 견해에 반하며, 이를 주해를 통해 교정하는 것이다.
후크마는 이렇게 주해에 근거해 작업하므로써 선배 신학자들의 견해를 잘 비판하고 수정하며 보다 성경적인 견해에로 이끌어 간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아주 조심스럽고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을 다 제시하면서 부드럽게 논의해 나가고 있다.후크마는 이렇게 주해에 근거해 작업하므로써 선배 신학자들의 견해를 잘 비판하고 수정하며 보다 성경적인 견해에로 이끌어 간 경우가 많이 있다. 그러나 그의 논의는 아주 조심스럽고 다양한 논의의 가능성을 다 제시하면서 부드럽게 논의해 나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적그리스도의 미래 실존성에 대한 베르까우어의 견해에 대한 비판이다. 베르까우어는 이렇게 말했었다: "신약에 묘사된 적그리스도가 역사의 종국에 있을 한 개인(a person)이라는 것을 신약에 근거해서 확실하게 주장할 이유가 없다." 이에 대해서 후크마는 유연하고도 간접적으로 이런 베르까우어의 입장보다는 최종적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막는 자"가 있다고 하는 바울의 말에 근거해서 최종적 적그리스도적 인물이 있음을 주장하는 헤르만 리델보스의 견해에 동의하면서, 역사의 과정 가운데 적그리스도적인 세력의 계속적인 출현과 함께 최종적 적그리스적 인물이 있을 것임을 확언한다(The Future, pp. 158-62, esp. p. p. 159, n. 31).
또한 전통적 개혁신학의 이중 형상관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넓은 의미의 하나님의 형상 개념을 제거해 보려는 베르까우어의 견해를 잘 소개하고 이를 주해에 근거해서 잘 비판하는 것도 후크마의 큰 공헌의 하나이다. 베르까우어는 타락한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임을 지칭한다고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창세기 9:6과 야고보서 3:9에 대한 스킬더, 슈만, 슈링크 등의 해석에 의존하면서 이는 인간의 현재 상태에 관해서 말하는 구절들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베르까우워는 이 구절들에 대한 자세한 주석을 제공하지 않고 있다고 후크마는 비판하면서(God's Image, p. 61), 이중 형상론을 부정하는 그의 입장에 대해 깊은 우려를 잘 표현하고 있다(God's Image, p. 64).
이에 속하는 또 하나의 예는 불경건한 자들이 중간 상태 동안에도 고통을 받고 있음을 분명히 확언하는 베드로 후서 2:9에 대한 해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주께서는 경건한 자를 시험에서 건지시며, 불의한 자를 계속되는 형벌 아래 두어 심판 날까지 지키시며."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칼빈이 "형벌 아래 두어"란 헬라어 분사 "칼라조메누스"( )가 현재 시제이지만 그것은 최후의 심판 때에 집행될 미래 형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후크마는 이를 잘 논의하면서 "만일 이것이 베드로가 뜻하는 바였더라면, 왜 베드로가 현재 시제를 사용했겠는가?"고 묻는 것이다(The Future, p. 102, n. 36).
주해에 유의해서 전통적이거나 일반적으로 오해하고 있는 어떤 입장을 잘 정리하고 있는 또 하나의 예로 사람들을 "자연인"( ), "신령한 사람"( ), 그리고 "육에 속한 사람"( , carnal Christian)으로 나누는 것에 대한 후크마의 논의를 들 수 있다. 스코필드 관주 성경과 C.C.C.의 "성령 충만한 삶의 비결"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이런 견해에 대해서, 후크마는 아주 강하게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에 대한 이러한 가르침은 성경 어느 곳에서도 인정하고 있지 않은 형태의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므로 명백히 배척되어야 한다고 말한다(Saved by Grace, p. 21). 물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여러 수준의 영적 성숙도가 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계속해서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야 함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하나의 분리된 범주로서의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개념은 오도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해롭기도 하다고 후크마는 선언한다(Saved by Grace, p. 21). 그는 고린도 전서 3:1-3에 대한 자세한 주해를 통해서 여기서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할 수 없다는 말이 고린도 교인들이 영적인 자들의 부류에 속한 자들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마치 세속적인 자들에게 하듯이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미숙함을 지적하면서 세속성에서 벗어나 그들이 신령한 자됨에 상응하게 행동하라는 뜻임을 밝혀 주고 있다(pp. 23-26).
이와 연관된 또 하나의 문제로 1737년 루터파 신학자 야곱 카르포프(Jacob Carpov)가 최초로 그런 용어를 써서 표현한 "구원의 서정"(ordo salutis)에 대한 이해 문제를 들 수 있다. 이에 대해서 후크마는 (1) 아주 철저한 구원의 서정을 말하는 죤 머레이의 입장을 (2) 구원의 서정을 비판하면서 구원의 서정이란 말보다는 구원의 길(way of salvation)이라는 말을 선호하는 베르까우어의 견해와 함께 극단적인 입장으로 부르면서 비판하고, (3) 그가 중간적인 입장이라고 부른 벌코프의 견해 보다 좀더 구원의 순서를 "연속적인 경험으로보다는 동시에 시작되어 지속되는 다양한 국면들을 포함하는 하나의 단일한 경험으로 보아야 한다"는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Saved by Grace, pp. 11-19, at p. 16).
그러나 그는 이런 입장이 이미 벌코프와 바빙크에 의해서 시사된 견해임을 분명히 한다. 예를 들자면,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개개인 죄인들에게 적용시키는 사역이 통일된 하나의 과정(a unitary process)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벌코프의 말을 인용하고, 또 구원에 수반되는 모든 축복들이 동시에 부여된다고 말하는 바빙크의 말도 인용하는 것이다. 바빙크는 이를 그의 교의학 제 3 판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이 축복들은 구별될 수는 있으되, 분리될 수는 없다. 믿음, 소망, 사랑처럼 그것들은 깨어질 수 없는 세 가지 줄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후크마는 바빙크와 벌코프의 견해를 좀더 성경적으로 발전시키는 입장에서 구원의 서정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 용어의 사용에 있어서 좀더 성경적 용례에 충실하게 된 예


2-1. 주해의 과정에 좀더 깊이 주의하면서 작업함으로써 후크마가 용어 사용에 있어서도 좀더 성경적인 용례에 접근해 간 대표적인 경우가 '스올'( , She'ol)이란 용어가 사용된 용례와 관련된 그의 논의이다. 이전에 벌코프는 이 용어가 일반적으로 3가지 용례를 가진다고 했었다. 그것은 (1) 죽음의 상태, (2) 무덤, (3) 그리고 지옥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후크마는 "스올이 죽음의 상태나 무덤을 의미한다는 것은 잘 성립될 수 있으나 지옥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은 의심스럽?quot;고 잘 지적하고(The Future, p. 96), 왜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지를 벌코프가 인용하고 있는 성구들에 대한 주해를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벌코프가 스올이 지옥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인용하는 각 구절에 대한 후크마의 논의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1) "악[한 자들]이 스올로 들어감이여 하나님을 잊어버린 모든 열방이 그러하리라"는 시편 9 : 17에 대해서 후크마는 여기서 시편 기자가 이 사악한 열방들( , gyim)의 모든 사람들이 당할 영원한 형벌을 예언하고 있다고 믿기 어렵다고 하면서, 이 때 스올을 이 단어의 일반적인 의미인 죽은 자들의 영역으로 번역하면 이 구절의 의미가 아주 잘 살아난다고 한다. 즉, 시편 기자는 불경건한 민족들이 비록 지금은 자신들의 힘을 자랑하고 있어도 죽음으로 깨끗이 제거되어 버리리라고 말한다는 것이다(The Future, pp. 96f.).

(2) "사망이 그들 위에 임하여 그들을 산채로 스올에 내려가게 할지어다"는 시편 55:15에 대해서도 병행법에 비추어 볼 때 이는 갑작스럽게 죽을 것을 의미하지, 반드시 영원한 형벌을 함의하는 것이 아님을 잘 드러내고 있다(The Future, p. 97).
(3) "지혜로운 자의 길은 위로 향한 생명 길로 말미암으므로[즉, 위로 향하여 생명에 이르므로] 그 아래 있는 음부를 떠나게 되느니라"는 잠언 15:24도 음부라는 말이 표현하는 죽음과 생명의 대조를 보여주는 말씀이라고 해석한다(The Future, p. 97).
이로부터 후크마는 "스올이 영원한 형벌의 장소를 지칭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수립되지 않았다"고 결론 짖는다(The Future, p. 97). 그러나 악한 자들의 사후 운명과 경건한 자들의 사후 운명이 같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구약에서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음을, 즉 경건한 자들에 대한 부활의 약속이 있음을 시편 49:14-15("양떼 같이 음부에 두기로 작정되었으니 죽음이 저희의 목자가 될 것이라,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부터 구속하시리니, 이는 그가 나를 영접하시리로다"), 시편 16 : 10("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시편 17 : 15("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보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그리고 시편 73 : 24("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등의 말씀으로 확증해 보려고 한다(The Future, pp. 97-99).
이처럼 후크마는 구약에서 음부( ,She'ol)라는 용어가 과연 구체적인 문맥 가운데서 어떤 용례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주해적으로 잘 살피는 과정에서 이전의 쉐드나 벌코프의 스올이 지옥이란 뜻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는 견해를 반박하며 수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야말로 구체적인 신학함이 어떻게 좀더 바르고 깊이 있는 주해에 근거해야 하는가를 잘 나타내 보여 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주해는 모든 신학함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논의의 과정 중에서 아직도 옛 견해에 대한 못내 아쉬움 같은 것도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자면, 구약에서 이미 부활에 대한 확신이 나타나고 있음을 밝히는 과정에서 후크마는 "경건한 자들이 이 영역에서 구출되는 반면에 경건치 못한 자들이 스올에 계속 남아 있다는 의미에서" "스올이 악인들을 위한 형벌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다는 최소한의 힌트를 보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The Future, p. 97, n. 29). 그러나 경건한 자들의 부활은 결국 죽음의 영역인 스올로부터의 부활이라고 본다면 여기사 형벌의 장소를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한 신약에서의 하데스( , Hades)의 용법을 검토하면서 후크마는 신약에서도 구약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사망 시에 멸절되지 않고 하데스( , Hades)나 아니면 때때로 낙원(Paradise) 또는 아브라함의 품(Abraham's bosom)으로 불린 지복의 장소에서 계속해서 존재한다고 가르친다"고 잘 지적하고 있다(The Future, p. 99). 또한 신약에서도 하데스( , Hades)는 일반적으로 죽은 자들의 영역을 지칭한다고 잘 지적한다(The Future, p. 99).
그런데 이 '하데스'( )란 단어가 단지 죽은 자들의 영역을 지칭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중간 상태 속에서의 고통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는 경우로서 사용되고 있는 예로 후크마는 누가복음 16: 19-31의 비유를 언급한다(p. 100). 이에 대한 후크마의 논의도 조심스러워 그는 최종 상태에서의 형벌의 장소를 가리키는 신약의 용어인 '게헨나'( , Gehenna), 즉 지옥과 이 부자가 고통 당하고 있는 곳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그는 아주 분명하게 "하데스와 연관된 고통과 아브라함의 품과 연관되어 있는 위안은 이 비유에서 묘사되고 있듯이, 중간상태에 국한되어 일어난다는 것이다"고 말하는 것이다(p. 101). 그러나 그는 아쉽게도 그가 중간 상태에서의 악한 자들의 고통의 장소인 '하데스'( , Hades)와 영원한 형벌의 장소인 지옥( , Gehenna)의 관계를 정확히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가 드러내는 입장으로 볼 때 그는 아마도 최후의 심판 이후에 지옥 형벌이 주어지기까지 악한 자들이 형벌을 당하고 있는 곳이 '하데스'라고 보는 요아킴 예레미아스나 윌리엄 헨드릭슨의 견해에와 같은 견해를 가진 듯하다. 그러나 그 자신의 명확한 진술은 주어져 있지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이런 견해들은 신약에서의 헤데스의 일반적인 용례와 비추어서 좀 낯선 한 구절, 그것도 해석에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는 한 구절에 근거해 제시한 논의라는 문제점이 있다.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누가복음 16:19-31의 비유의 근본적 의도에 유의하면서 여기서 중간상태에 대한 가르침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좀더 명확한 신약의 구절들에서 그리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하는 래드 등의 견해와 깊이 있게 비교하며 논의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들에 대한 보다 깊은 논의와 고찰이 후크마 이후에 개혁신학을 하는 이들에게 부과된 신학적 과제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이와 연관해서 중간 상태가 없다고 부인하는 반 데 류[G. Der Leeuw, 1890-1950]나 알트하우스[Paul Althaus, 1888-1966]에 반해서 고전적 개혁신학자들과 함께 후크마가 성경적 중간 상태 개념을 잘 설명해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 한가지 언급을 해야 할 일 이 있다. 그것은 주의해서 잘 살펴보지 않으면 우리말 역본이 줄 수 있는 한 가지 오해에 대한 것이다. 먼저 우리말 역본에 있는 다음 같은 말을 보라.

이러한 주장에 대해 답변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몇 가지 사실을 인정한다. 성경은 중간 상태에 관해 거의 침묵을 지키고 있으며, 성경이 중간 상태에 관해 기꺼이 말하고 있는 것도 육체의 부활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인간의 미래에 관한 종말론적 메시지에 연관되어 부차적으로 언급되고 있을 뿐이다.......우리는 또한 중간 상태에 관해 인간학적 묘사나 이론적 설명을 신약성경이 거의 제공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개혁주의 종말론』, pp. 131f.).
이 부분만 문맥에 대한 고려 없이 읽으면 마치 후크마가 중간 상태를 부인하는 듯한 인상을 받을 수 있다. 필자 자신도 우리말 역본에 이 부분을 읽을 때 그런 인상을 받아서 영어 원본을 읽을 때와 다르다는 느낌이 들어서 상세히 비교하는 작업을 했던 것이다. 물론 이 부분 뒤에 후크마의 다음과 같은 말을 잘 번역해서 후크마가 중간 상태를 부인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말 역본도 잘 전달한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 인간은 파멸되는 것이 아니며, 신자는 결코 그리스도로부터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충분히 주장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성경의 증거들이 있다는 사실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개혁주의 종말론』, p. 132). 그러나 사실 위에서 인용한 부분도 그 원문은 우리가 오해하도록 진술되어 있지는 않다. 이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 부분을 다시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런 반론들에 대한 대답에서 성경은 중간상태에 대해서 아주 적게 말하고 있다는 것과 성경이 중간 상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몸에 부활이라는 사람의 미래의 관한 성경의 주된 종말론적 메시지를 말하면서 부가적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한다.(p. 94).
그러므로 후크마는 다른 고전적 개혁신학자들과 함께 그의 논의의 결론에서나 그 논의에 과정에서도 중간 상태를 부인하는 일이 전혀 없는 것이다.)
2-2. 성경의 용례에 부합하도록 용어를 수정하는 또 하나의 예로 후크마가 성화라는 주제를 다룰 때 죤 머레이를 따르면서 성경적으로 보면 "점진적인 성화"(progressive santification)와 함께 "즉각적인 성화"(definitive santification)를 말하여야 한다고 하며, 이를 명확히 한 일을 들 수 있다. 죤 머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신약에서 성화에 대해서 언급하는 거의 모든 특징적인 용어들은 어떤 진행 과정이 아니라, 단번에 완성되는 행동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이점을 자주 간과한다." 이 "즉각적인 성화"를 표현하는 예로 후크마가 언급하는 구절은 고린도 전서 1:2, 6:11, 사도행전 20:32, 26:18; 로마서 6:2, 4, 6, 14, 17, 에베소서 2:4-6, 골로새서 3:1, 고린도후서 5:17 등이다. 그리고 후크마는 이런 의미로 사용한다면 이를 세대주의자들이 애호하는 용어인 "신분적 성화"(positional santification)로 부를 수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적 성화를 "전가"나 "선언" 등의 개념과 같이 사용하면 이는 성화와 칭의를 구별하지 않게 할 수도 있으므로 유의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후크마는 "즉각적 성화"가 "칭의"와 비슷하게 이해되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이다.
이렇게 성화도 성경의 용례에 근거해서 성경의 용법을 반영하면서 "즉각적 성화"와 "점진적 성화"를 다 잘 소개하고 그에 충실하려는 노력은 성경 주해에 근거해서 교의학을 하는 좋은 예로 언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이 "즉각적 성화"와 "칭의"의 관계를 정확히 밝히는 일이 남겨진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 신약 성경의 하나님 나라 사상에 충실한 신학의 제시
이점은 신약 종말론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그 종말론에 근거한 신학을 제시한 점이다. 후크마는 신약 종말론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1) 구약 예언된 커다란 종말론적 사건이 이미 발생했다; (2) 구약의 저자들이 하나의 운동으로 묘사한 것이 이제는 두 단계, 즉, 현세적 성취와 미래 세대를 함의한다; (3) 이 두 가지 종말론적 단계들의 관계는 현세에 실현된 축복이 장차 올 더 큰복들의 약속과 보증이다(The Future, pp. 21f.). 이를 그는 "도입된 종말론"(Inagurated Eschatology)이란 제목으로 제시한다.
물론 이전에 벌코프도 보스 등이 제시한 하나님 나라 개념을 반영하면서 그의 신학을 제시하였으나 후크마에서 처럼 좀더 포괄적인 체계로 하나님 나라 사상을 중심으로 신학을 제시하지는 못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서 후크마는 현세에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우리에게 임하여 와서 현세 역사 가운데서 진행되다가 그리스도의 재림에서 그 극치에 이르는 하나님 나라의 사상을 중시하며 신학을 드러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좀더 강조하고 우리가 그런 사상에 깊이 뿌리 박기 위해서 후크마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몇몇 진술과 인용 등을 인용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공간적이고 정태적인 실재(a spatial or static entity)를 생각해서는 안되고, 오히려 실제적으로 그리고 유효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왕으로서의 통치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행위를 생각해야만 한다.......요한과 예수님께서 선포한 천국은 무엇보다 먼저 역동적 성격의 과정이다...... 왜냐 하며 천국의 임함은 종말의 역사의 위대한 드라마의 초기 단계(the intial stage of the great drama of the history of the end)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간 역사 가운데서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통치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 목표는 하나님의 백성을 죄와 마귀적 세력들로부터 구속하는 것이고, 종국적으로는 새하늘과 새 땅을 수립하는 것이다(The Future, p. 45).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왕이시며, 역사 가운데서 역사를 하나님께서 지향해 가시는 목표로 이끌어 가시기 위해서 행동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님의 통치를 수립하시기 위해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구속적 통치이다; 이 세대 끝에 묵시문학적 행위로 나타나게 될 이 나라는 악을 극복하고, 사람들을 악의 세력으로부터 구해내며,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을 가져다주는 예수님의 인격과 사명 가운데서 인류 역사 안에로 이미 들어 왔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두 가지 커다란 운동(two great movements)을 포괄한다: 역사 안에서의 성취(fulfillment within history)와 역사 끝에 있을 극치에 이름(consummation at the end of history)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는 지금 현세에서(at the present time) 하나님 나라 안에 있으며, 그 복을 누리고 그 책임을 공유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는 그 나라가 현재는 잠정적이고 불완전한 상태로만(only in a provisional and incomplete state) 현존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세대 끝에 있을 그 나라의 최종 극치에 이름을 기대하는 것이다(The Future, p. 51).
이와 같은 인용문과 후크마의 진술이 분명히 하듯이 하나님 나라는 예수께서 그의 인격과 사명 안에서 이 세상 역사 안에서 현세에로 도입시키신 후로 이 세상 역사 가운데서 진행되다가, 그가 재림하실 때에 그 나라의 극치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모든 실존과 작업이 다 그 나라의 성취 안에 있다. 우리는 이런 입장에 굳게 서는 하나님 나라에 충실 한 신학을 더욱 발전시켜 가야 할 것이다. 그런 일차적인 작업을 후크마가 우리 앞에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4. 전통적 개혁신학에 대한 충실성
이 모든 점과 함께 후크마의 신학의 특성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말해야 하는 것은 그가 전통적 개혁신학의 장점에 충실한 신학을 현대의 상황 가운데서 잘 제시해 주었다는 점이다. 이제 몇 가지 예를 들어서 어떤 점에서 그의 신학이 전통적 개혁신학의 장점에 충실한 신학인지를 제시해 보도록 하겠다.
그 첫째 예는 창조와 역사적 아담, 그리고 타락 등에 대해서 그 역사성을 부인하는 입장에서 신학을 전개하는 이들에 대해서 바르게 비판하면서 그의 신학을 제시하고 있는 데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창세기 3:1-7을 사화(史話, Saga)라고 말하면서 아담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 그를 뒤따르는 모든 사람들의 모형적인 대표자라고 하는, 따라서 인간은 죄인이 아닌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하는 칼 바르트와 현대인은 더 이상 아담의 역사성을 받아들일 수 없음을 당연시하고 신학을 전개하는 에밀 부룬너, 그리고 아담과 그의 타락 이야기를 모든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사건의 한 예증으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과 실제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예증으로 이해하면서 "가르침의 모델"(teaching model)이라고 보는 카이털트의 견해 등을 열거하면서,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단호한 입장을 표명한다: "아담과 화와가 한 때 이 땅 위에 살았던 실제적 인물들(actual persons)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나 그들을 상징들(symbols)이나 '가르침의 모델'(teaching models)로 이해하는 것들은 성경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 기초한다는 것이 나의 확신이다"(God's Image, p. 113).
그리고 그는 (1) 역대상 1장의 계보, (2) 누가복음 3장의 계보, (3) 이혼 문제에 대한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마 19:4-6; 막 10: 6-8), (4) 여인들의 교회에서의 역할에 대한 바울의 말(딤전 2:13), (5) 사망과 부활의 기원을 대조하는 바울의 말(고전 15:21-22), 또한 (6) 대표의 원리에 대한 바울의 말(롬 5:12-21)에 대한 주해에 근거해서 이 모든 구절들이 역사적 아담과 그의 역사적 타락을 실제로 말하고 있다고 논의한다(pp. 113-16). 이처럼 후크마는 창조와 아담의 역사성을 말하고 강조하는 점에 있어서 전통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전통적 입장에 충실하게 신학을 전개한 두 번째 예는 성령의 사역에 대한 후크마의 견해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후크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되어야 할 은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전 교회가 다 카리스마틱하다"는 입장을 잘 표현한다(Saved by Grace, p. 32). 그러나 성령의 비기적적 은사는 지금도 오늘날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데 비하여, 병고침의 은사와 방언의 은사와 같은 성령의 기적적 은사들은 더 이상 현재의 교회 가운데서 기대되어져서는 안된다는 전통적 개혁신학의 입장을 잘 논증하고 있다(Saved by Grace, pp. 33-43). 그러나 하나님은 지금도 때를 따라서 그의 백성들의 기도를 기적적인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병고침의 은사는 더 이상 없지만 "당신님의 뜻이면 치료를 허락하옵소서"라는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주께서 기적적 치료를 허락하실 수도 있음을 강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연관해서 사람들이 흔히 하는 세 가지 오해도 잘 지적하고 비판하고 있다. 그 하나는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언제든지 육체적인 치료가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Saved by Grace, p. 40. Cf. 딤후 4:20, 빌 2:27, 고후 12:7-10). 둘째는 기도에도 불구하고 치료가 되지 않은 경우에 믿음의 부족을 생각하거나 말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p. 41). 그리고 셋째는 육체의 병고침이 결코 예배의 주요 목적이나 교회의 주된 사역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p. 41).
전통적 개혁 신학에 충실한 세 번째 예로 이와 연관된 또 하나의 문제인 소위 성령세례 문제에 대한 후크마의 논의를 들 수 있다. 이 문제에서도 후크마는 죤 스토트에게 동의하면서 전통적 개혁신학의 입장과 같이 성령세례는 중생이라는 견해를 그에 반하는 다른 견해들과 대조하면서 잘 논의하고 있다(Saved by Grace, pp 47-49).
넷째로 현대에 들어와서 다시 많이 논의되고 있는 구원의 확신 문제에 있어서 후크마는 칼빈의 입장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 그리고 도르트 신조의 입장을 잘 소개하고 이에 충실히 따르면서 이상적으로는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되는 일이지만 아직 확신이 없는 이들의 신앙을 신앙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는 점을 잘 논의하였다. 그러므로 참신자들도 때때로 확신이 부족할 수 있고, 더 큰 확신으로 성숙해 가야 한다는 것이다(Saved by Grace, pp. 146-51).
다섯째로 전통적 개혁신학 내에 아주 명확히 내포된 가르침이지만 별로 유의하지 않고 강조되지 않는 점 하나를 후크마는 한 곳에서 아주 잘 지적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어려움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훈육" 또는 징계(fatherly discipline)라는 것에 대한 지적이다 그는 히브리서 12: 5-11을 인용하면서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Saved by Grace, p. 187).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는 죽음도 더 이상 형벌이 아니다. 후크마가 성경과 미래에서 잘 말하고 있듯이 "죽음은 그리스도에게는 저주의 일부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축복의 원천인 것이다"(The Future, p. 84).
여섯째로 소위 '때의 징조들'이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 시기를 특징 지우는 것임을 강조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이점을 드러냄에 있어서 후크마는 베르까우어의 논의에 많이 의존하면서 논의한다. 또한 후크마는 '때의 징조들'은 재림의 정확한 시기를 찾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재림의 확실성을 알려 주려고 한다는 것을 베르까우워와 함께 강조한다.(The Future, p. 131).
그러나 이렇게 전통적 개혁파의 입장에 충실 할 때에도 후크마는 다른 입장의 사람들에 대한 입장을 비교적 자세하게 제시하고 논의하며 공평하게 판단한 근거에서 그리하고 있다. 이점에 있어서는 후크마와 깊은 논의에 근거한 신학적 논의의 좋은 모범을 제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우리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칭의론을 자세히 논의하고 논박한 것(Saved by Grace, pp. 163-69), 완전주의와 웨슬리의 성화론의 입장을 충분히 검토하고 그것을 논박하는 것(Saved by Grace, pp. 214-25), 하나님 형상론을 논의하면서 바르트와 부룬너, 베르까우어의 견해를 충분히 논의하고 비판하는 것(God's Image, pp. 49-65) 등을 들 수 있다.


5. 다시 고려할 점
이와 같은 특징을 드러내는 후크마는 몇몇 문제에 있어서도 전통적 입장에 대한 비슷한 비평과 변경을 시도하고 있으나 때로는 "이것이야-저것이냐?"(either/or)의 입장보다는 "둘 다(both-and)"의 입장을 취해야 할 경우에도 어떤 한쪽만을 취하여 좀 지나치게 나아가는 입장을 드러내는 때도 있다. 이제 그런 것의 몇 가지 예를 생각해 보도록 하겠다.
첫째로, "영혼의 불멸성"(the immortality of the soul)이란 용어와 그 개념에 대한 후크마의 논의를 생각해 보자. 그는 칼빈, 알키발드 알렉산더 핫지, 윌리엄 쉐드, 벌코프 등의 영혼 불멸 개념이 성경의 가르침과 잘 조화된다는 입장 보다는 이 개념이 계시보다는 이성에 의해서 증명되는 혼합된 조항(an articulus mixtus)이라는 바빙크의 입장과 이에 동의하면서 영혼 불멸 개념이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개념임을 거부하는 베르까우워에게 동의하면서 "영혼 불멸 개념은 독특하게 기독교적인 개념은 아니다"고 결론 내린다(The Future, p. 91). 그는 어떤 경우에는 "영혼 불멸"이란 표현이 "성경의 강조 점에 공정하지 못할 뿐만이 아니라, 실제로 성경의 강조 점에 반대될 수도 있다"고 한다(The Future, p. 91, n. 14).
후크마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논의에 근거해서 자신의 입장을 주장한다. (1) 성경은 "영혼 불멸"이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p. 89). (2) 성경은 영혼 자체의 본래적 불파멸성 때문에 영혼이 계속해서 존재하게 되리라고 가르치지 않는다(p. 90). (3) 성경은 죽음 이후의 영혼의 게속적인 존재가 아주 소망할 만한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서의 삶이 사람의 최고선이라고 가르친다(p. 90). (4) 사람의 미래에 대한 성경의 중심적 메시지는 몸의 부활이다(p. 91).
후크마의 이런 논의는 상당히 좋은 논의이고, 이는 기본적으로 옳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후크마의 이 논의가 영혼 불멸이란 개념과 용어가 기독교적 개념으로 사용되지 못할 결정적인 이유를 제시하는 논의일 수는 없다. 전통적인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영혼 불멸 개념(예를 들어서, 환생하는 인간과 구천을 떠도는 귀신 개념)과 플라톤주의자들이 생각하는 영혼 불멸 개념은 분명히 기독교적 영혼 불멸 개념과 다르다. 그러므로 분명한 기독교적 성격을 유지하면서 영혼 불멸 개념을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칼빈, 벌코프 등이 이 용어를 사용했을 때 그들은 바로 이런 의도를 가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칼빈이 영혼의 불멸성은 영혼의 본성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영혼에 부여하신 성질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영혼 불멸이 성경의 가르침과 잘 조화된다고 했을 때 그것이 비성경적이라고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들의 영혼 불멸 개념은 플라톤주의자들의 개념과 연속성도 있지만 비연속성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후크마가 인용하고 있는 바빙크의 다음 말도 이 용어와 개념이 계속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영혼의 불멸]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말을 하지 않고 있다. 이 개념을 하나님의 계시로 선포하거나 이 개념을 전면에 내어놓지 않는다. 이 개념의 진리성을 논의하거나, 반대자들에 반해서 이 개념을 주장하는 일은 더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 불멸 개념이 성경의 강조점에 충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강조점과 반대되는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는 후크마의 말은 좀 지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의 강조점은 분명히 몸의 부활에 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궁극적으로 바라야 할 소망이다. 그리고 성경은 사람의 불멸을 가르친다(p. 91). 그러나 이는 기독교적 영혼 불멸 개념과 같이 있을 수 있는 것이지, 사람의 불멸과 몸의 부활에 대한 강조가 오스카 쿨만이 대조시키는 것과 같이 영혼 불멸과 꼭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불신자의 영혼이 멸절할 가능성을 시사하는 일이 많은 오늘날의 신학적 상황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좀더 조심스럽게 논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또 하나 후크마의 전통적 입장에 대한 개정 노력 중에서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라고 여겨지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대한 것이다. 벌코프는 그리스도와 신자 사이의 생명의 연합이 이미 구속 언약 가운데서 이상적으로(ideally) 수립되어 있었고, 개관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구속사역 안에서 실현되었으며, 성령의 역사로 개개인에게 주관적으로 실현된다는 입장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후크마는 주관적 연합 이외의 것은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투영된 연합에 대한 묘사라고 하면서, 그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명칭을 그리스도와 실존하는 사람들 사이에 실제적으로 유효화하는 것에만 적용하려고 하면서 이상적으로 실현된 연합을 연합의 "뿌리들"(the roots)이라고 하고 객관적인 연합을 연합의 "근거"(basis)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겠다고 수정 제의를 하며(Saved by Grace, p. 55, n. 4), 그의 설명을 해나갔다(pp. 56-67).
이는 벌코프와 후크마의 입장 모두가 상당히 의미 있는 것이고 따라서 두 입장 사이의 열매 있는 논의가 기대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두 분의 입장은 결정적으로 그렇게 다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벌코프는 주관적인 연합만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생각하던 루터파의 견해에 대한 반발로 그 연합은 성경에 의하면 이미 영원부터 있었다는 점을 잘 드러내었다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이를 연합의 뿌리와 근거로만 표현하면 과연 그 영원한 연합의 성격과 객관적인 성격이 충분히 표현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논의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벌코프의 표현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위의 각주에서 제시한대로 그의 첫째와 둘 째 것은 같은 것을 지칭하는 듯하고, 그래서 후크마는 그 둘을 하나로 묶어 논의하면서 연합의 "뿌리들"이라고 한 듯하다. 또한 그가 이를 "이상적으로 수립된 연합"(ideally established union)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플라톤주의적 표현 흔적도 있다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또 후크마와 같이 이상적 연합과 객관적 연합은 아직 진정한 연합이 아니라고 하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이 과연 더 유익할 것인가 하는 것은 더 깊은 사고를 요하는 문제라고 여겨진다.

비슷한 문제점의 하나로 나는 후크마가 베르까우워, 훜세마, 머레이 등의 의견에 부분적으로 동의하면서 "행위 언약"이란 용어를 피하고자 하는 논의를 한 것을 들 수 있다고 본다. 물론, 후크마는 베르까우워나 훜세마와 같이 전통적인 개혁 신학이 행위 언약으로 부르는 바와 사상과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행위 언약이란 개념 배후에 놓여 있는 교리상의 진리들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이 "시험적 명령"(probationary command)과 그것의 함의를 중요시한다(God's Image, p. 121). 단지 이를 "행위 언약"으로 부르는 것보다는 머레이와 같이 "아담적 경륜"(Adamic administration)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것같다. (그는 실제로 이 행위 언약에 대해서 무엇이라 불러야 한다고 제언하지 않는다. 클라인과 로벗슨이 "창조의 언약"이라고 부르기를 애호한다는 소개를 하고, 머레이가 "아담적 경륜"이라고 부르고 있음을 소개할 뿐이다. 그리고 단지 한 문장에서 이 개념을 말하면서 머레이를 따라 "아담적 경륜"으로 부르고 있다).

후크마가 "행위 언약"이란 용어에 반대하는 이유는 다음 네 가지로 제시되어 있다. (1) 이런 용어, 즉 "행위 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담적 경륜" 안에 들어온 은혜의 요소들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p. 119). (2) 성경이 이를 '언약'이라고 부르고 있지 않다(pp. 119f.). (3) 이를 언약으로 부를 수 있도록 하는 언약적 맹세(a covenant oath)와 재가의식(a ratification ceremony)이 없다(pp. 120f.). (4) 성경에 나타난 언약이란 단어는 언제나 구속과 관련하여 사용되고 있다(p. 121).
그러나 이 논의를 주의 깊게 읽어 본 이들은 누구나 느낄 수 있듯이 이는 아직 엄밀한 논의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네 가지 이유 제시와 관련해서 우리의 반대 논의를 제시해 보기로 하자.
(1)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해도 이 언약이 하나님의 매우 은혜로 우신 배려에서 나온 것임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고, 사실 과거의 선배들이 이런 용어를 썼을 때 "행위 언약"에는 전혀 은혜의 요소가 없다는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의 인격적이고 철저한 순종에 근거해서 그와 온 인류를 "더 높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의 상태로 옮기시겠다는 것에 이미 은혜의 요소가 있음을 과거의 신학자들이 모르거나 무시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서, 벌코프는 "아담이 그의 후예들에 대해 서는 자연적 관계에다 하나님께서는 은혜스럽게 (graciously) 몇 가지 적극적 요소들을 포함하는 언약적 관계를 더하셧"다고 하면서 행위 언약의 언약적 요소들을 설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통적 개혁 신학에서는 행위 언약에 이미 은헤의 요소가 있음을 분명히 햇었다. 단지 후에 그리스도를 통해 오는 은혜 언약과 비교해서 그 특징을 살려 이를 행위 언약을 명명한 것이다. 때때로 신학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제목만 보고서 그런 오해를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이 "행위 언약"이란 용어를 사용한 이들의 의도를 벗어난 오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른 용어가 더 낫다고 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 용어를 전혀 쓰지 말아야 한다는 논의를 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2) 물론 창세기에서는 이 아담적 경륜을 '언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창조 언약' 등의 용어도 쓰지 말아야 하는가? 그러나 또한 '아담적 경륜'이라고도 하지 않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창세기 1-2장에 있는 경륜을 '언약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벌코프가 잘 논의하고 있듯이 여기에 언약의 요소들이 있다면 이를 언약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호세아 6:7을 "저희는 아담처럼( ) 언약을 어기고"라고 이해한다면 이는 아담과의 관계도 언약적 관계로 표현하는 유일한 구절이 된다. 물론 호세아 6:7은 모호한 표현임에 틀림이 없다. 호세아 6:7의 이 문장은 세 가지 해석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1) "사람처럼, 사람들처럼(like men, in human fashion)"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KJV, ASV),
(2) 다른 사본 상의 증거에, 의지하여 "아담이란 곳에서( , at Adam) 언약을 어기고"로 해석할 수도 있으며(RSV, JB), 또한 (3) "아담처럼"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ARV, NIV).

'거기서'를 이스라엘 땅 전체로 보면, 다른 어떤 해석보다도 "아담처럼"으로 보는 것이 더 개연성 있는 것이 된다. 그렇게 볼 수 있다면 이는 '아담적 경륜'을 언약으로 언급하는 구절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벌코프는 위의 모든 해석 가능성을 언급한 후에 "결국 '아담처럼'이라고 옮기는 것이 최선이다(the best)"고 말하고 있다. 이런 입장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주석가는 카일이다. 그의 다음 같은 말을 보라:

'케아담'( )은 '사람들의 방식대로'('after the manner of men')나 '일반적인 사람들처럼'(like ordinary men)이라고 볼 수 없으니, 이런 설명은 '헤마'( )가 제사장들이나 선지자들을 지칭한다고 보거나, 시편 82:7에서와 같이 지배자들과 다른 사람들 사이의 대조가 나타나 있다고 할 때에만 받아들여질 수 있는 해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케아담'( )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어서는 안된다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아담처럼'으로 보아야 한다. 이 명령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와 맺으신 언약이었다(This command was actually a covenant, which God made with him). 왜냐하면 그 것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의 경우와 같이 주님과의 생명적 교제 가운데 아담을 보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욥기 Job 31:33과 이에 대한 Delitzsch의 주석을 보라).
또한 레온 우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담이 금해진 열매를 먹은 것과 같이 고의적으로 알면서 [언약을 어겼다]. '거기서'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으로 주신 이스라엘 땅을 언급한다. 특히 거짓된 제단에서 굉장한 죄들이 자행된 벧엘을 지칭하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하며, "그들이 아담과 같이 언약을 어겼다"고 번역한 NIV의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물론 다른 해석의 가능성을 알고 있으나 "인물이 훨씬 더 구체적이라고" 하면서 "아담은 하나님의 분명한 금령을 깨었다"고 한다. 물론 이 문장은 여러 해석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는 부차적인 고려 사항으로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벌코프나 전통적 개혁신학자들이 오직 이 구절에만 근거해서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3) 언약에 대한 맹세나 재가 의식이 없으면 언약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견해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창세기 12장에는 아직 아브람과의 언약에 대한 재가 의식이 없고, 이는 후에 15장에야 나타나지만 12장이 언약적이지 않다고 할 수 있을까? 더구나 과거의 개혁신학자들은 언약적 맹세는 창 2:16f.에 있다고들 생각했던 것이다.
(4) 언약은 항상 구속과만 관련된다는 논의도 의문스럽다. 항상 구속을 염두에 두고 있는 특별 계시에 대해서 "전구속적 특별 계시"(pre-redemptive special revelation)를 말할 수 있다면, "전구속적 언약"을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러므로 "행위 언약"이란 용어를 쓸 수 없다는 후크마의 논의는 그렇게 강한 것이 못된다. 오히려 우리는 "생명 언약", "에덴 언약" 등은 후의 은혜 언약에 대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근거에서 거절했던, 또 "자연 언약"이란 용어는 너무 포괄적이라고 보던 견해에 따라서 "창조 언약"도 그렇게 구체적이지 않다고 보면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용어를 사용한 벌코프를 존중하게 된다. 따라서 전통적으로 사용하던 "행위 언약"이라는 용어를 "아담적 경륜"의 의미로 사용하며, 그와 혼용할 수도 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신학적 용어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선배들의 견해를 유지하고, 새롭게 제시되는 용어는 그 전통적 용어의 의미를 더 밝히고 보완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쓸데없는 논의로 시간과 정력이 낭비되고, 잘못하면 오해들도 증폭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후크마는 때때로 전통적 용어의 의미를 더 잘 밝혀 주는 용어를 제안하고 병용하게 하기도 한다. 그 한 예로 전적 부패(Total depravity)라는 말을 유지하고 사용하면서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을 저어하여 "전반적 부패 또는 철저한 부패"(pervasive depravity)라고 부르기를 애호한다고 말하는 것을 들 수 있다(Image of God, p. 150). 또한 "그리스도의 적극적 순종"(the active obedience of Christ)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도 그 의미를 밝혀 "법을 순종하는 순종"(law-keeping obedience)이라고 하고, 수종적 순종(passive obedience, passiva obedientia)에 대해 "수난 받으시는 순종"(suffering obedience)이란 말을 사용하여 이 점에서 그리스도는 순전히 수동적이기만 하셨다고 생각하는 오해를 피하게 하고 그 의미를 더 밝혀 주는 용어를 사용한 것도 좋은 발전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Saved by Grace, p. 181).
이상에서 우리는 후크마의 신학의 특성들을 열거하고, 몇몇 문제점을 재검토해 보았다.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후크마가 보여준 선구적인 개혁 신학을 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의 학문적 태도를 신학 전 영역에 적용하되, 그보다 더 철저하게 그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귀한 선배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을 높이 사면서, 그의 작업을 다른 부분에도, 특히 그가 남겨 놓은 신론, 기독론, 교회론 부분에도 적용하고, 다시 새롭게 하는 신학 서론을 써서 그에 근거하여 더 충실한 신학을 제시하는 일이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선 이 땅의 개혁 신학도들의 큰 과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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