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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 죤스-거짓선지자들

by 【고동엽】 2008. 6.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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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선지자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장21절).

 

 

주님은 15-16절에서와 본 장 말미에까지 한 가지 큰 원리, 한 가지 큰 메시지에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주님은 단 한 가지, 좁은 문으로 들어감의 중요성과 우리가 참으로 좁은 길을 따라 걷고 있는가를 확실히 할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13-14절 말씀에 대한 일종의 강화인 것입니다. 13-14절에서는 초대 또는 권면의 형식으로, 우리가 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계속해서 걸어 가야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것을 정교화(精巧化)하여 세부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 일을 시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마주쳐 오는 위험과 장애와 방해물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내 중요한 이 원리, 즉 복음은 귀를 기울이는 것에서 끝나거나, 찬양을 받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적용되어야 할 것임을 계속 강조하고 계십니다. 야고보가 표현한 대로, 저 완전한 율법의 거울을 끈기 있게 바라보고 그것을 기억하고 실천에 옮기는 대신, 그 거울을 들여다보고 나서 우리가 본 바를 즉시 잊어버리는 것에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께서 산상설교 말미까지 줄곧 강조하신 주제입니다. 우선 주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마주쳐 오는 두 가지 특정 위험의 형태로 나타내셨습니다. 주님은 이 위험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으며, 이 위험들을 알아본 후에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수 있는가 그 방법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처리하시고 나서 주님은 논증의 끝을 맺으시며, 두 집(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의 관점에서 명료하고 단도직입적이며, 꾸미지 않은 그대로의 진실로 나타내시고 산상설교를 끝맺으셨습니다. 그러나 주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주제요, 포괄적 진술 속에 들어 있는 공통점은, 심판의 사실에 관한 무서운 경고입니다. 이것은 마태복음 7장을 일관하는 주제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일은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난제와 문제의 대부분의 원인은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너무나 일반화된 경박하고 피상적인 복음전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우리들 대다수에게 있어 성결과 성화된 삶이 부족함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눈이 우리 위에 계심과 우리 모두 최후 심판의 방향으로 착실하고 확실히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이것을 계속 반복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이것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긴 하셨지만, 내내 심판의 사실과 심판의 성격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피상적인 검토나 단순히 외부적인 것들을 검토하는 것이 아니요, 마음을 탐사하고 전 성품을 검토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님은 심판의 최종성과 심판에 이어올 결과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이미 13절과 14절에서 어째서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인즉, 다른 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은 문이요, 이 멸망은 최종 심판 후에 불경건인에게 따라오는 멸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에 너무 심려하신 나머지 계속해서 반복하고 계십니다. 이 점은 다시 교사로서의 그분의 방법의 완벽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반복의 중요성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얼마나 둔하며, 얼마나 더딘가를 아십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는데, 우리가 어떤 일을 안다고 생각하기가 얼마나 쉬우며,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실을 변함없이 상기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아셨습니다. 이 사활적으로 중요한 원리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기가 어려운 것을 우리 모두 아는 터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일들을 다시 상기시켜 주고 계신데, 무엇보다 두 특수경고를 우리 앞에 제시함으로서 그렇게 하십니다. 첫째 경고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우리 마음속에 그려보아야 할 장면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우리는 말하자면, 이 좁은 문 밖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산상설교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권면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해야할지 생각 중입니다. 우리 주님은 결국 ‘자, 이 지점에서 너희가 가장 주의해야 할 것 한 가지는, 거짓 선지자들에게 귀를 기울이는 위험이다. 거짓 선지자들은 거기에 항상 있다. 그들은 항상 저 좁은 문 바로 밖에 서 있다. 그곳이 그들이 애용하는 장소이다. 만일 그들에게 귀 기울이기 시작한다면 너희는 전적으로 파멸이다. 그들은 너희를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좁은 길을 걷지 못하게 설득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한 말을 듣지 못하도록 너희를 단념시키려 애쓸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즉 그 특유의 교활한 유혹을 가지고 오는 거짓 선지자의 위험을 항상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즉각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 거짓 선지자들은 어떤 자들인가?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의 정체를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언뜻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 해석은 흥미와 매혹으로 가득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에 관한 본문을 놓고 교회사상 두 해석학파로 갈라져 있습니다. 각 학파에는 교회사상 위대한 인물들이 들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학파는 본문이 거짓 선지자들의 교훈만을 언급하는 것이라 말하는 학파입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열매는 교훈과 교리를 가리킨다. 열매는 오직 이것만을 가리킨다.’는 말을 우리는 듣는 것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의 의미를 이것에만 제한시켜 풀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부류에 속하는 프로테스탄트 해석가들은 대체로 이것의 최고의 실례를 로마교회로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는 이것과 전적으로 의견이 달랐습니다. 이 부류는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말씀이 교훈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이 사람들이 어떤 유의 삶을 사는가 하는, 순전히 ‘그들의 삶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알렉산더 맥클라렌 박사와 같은 잘 알려진 해석가는 ‘본문은 이단들을 탐색해 내는 시금석이 아니요, 위선자들 특히 무의식적 위선자들의 가면을 벗겨내는 시금석’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해석을 따르는 사람이 많거니와 그의 논증인즉, 본문은 교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에게 온통 문제되는 것은, 그들의 가르침은 옳으나 그들의 생활은 잘못되어 있고, 자기네가 위선자들임을 그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두 해석학파가 있습니다. 본문에 대하여 그들의 상이한 두 가지 해석에 마주 대해야 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둘 중 어느 해석을 믿을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두 해석은 둘 다 옳은 동시에 둘 다 잘못되었으며, 잘못은 둘 중의 어느 한 해석이 바르다고 말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타협한다는 말이 아니요, 두 요소를 포함하지 않고는 본문을 만족스럽게 해석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만 교훈이 문제요, 이단적 교훈만을 가리키는 말씀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단의 가르침을 탐색해 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분별력을 조금이라도 갖고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단을 알아낼 수 있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강단에 올라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설교를 하고, 그리스도의 신성과 이적을 부인한다면, 여러분은 그가 이단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런 것은 어려울 것도, 미묘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묘사하신 말씀을 보면 이것에 어려움이 있고, 이것에 미묘한 것이 있다는 암시가 있습니다. 주께서 양의 가죽을 묘사하실 때 사용하신 용어를 주목해 보십시오. 주님은 이런 유의 거짓 선지자에게 문제되는 것은, 처음에는 그가 그런 자라고 결코 상상할 수도 없다는 점을 암시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극히 미묘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것에 잘못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이것을 어떻게 나타냈는지 주목하실 것입니다. “이 자들은 이단을 가만히 몰래 끌어들인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른 사람들 같아 보입니다. 그들은 양의 가죽을 입고 옵니다. 아무도 거짓된 것을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런데 신구약 성경은 거짓 선지자의 이런 성격을 늘 나타내고 있습니다.

 

 

위험한 것은 실로 그의 미묘함입니다. 그러므로 이 가르침을 바로 해석하려면 이 특정 요소를 참작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이유로 이것을 이단과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로만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다른 편 해석에도 역시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행위에 어떤 극악 무도한 것이 있지 않는 것은 분명합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행위로 나타난다면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미묘하지도 어렵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우리에게 오는 사람이요, 처음에는 바람직한 것을 모두 갖춘 외모로 오는 사람입니다. 그는 마음에 들고, 붙임성 있고 유쾌합니다. 그는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보이며, 옳은 것들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대체로 아주 옳고 참된 기독교인 교사가 마땅히 사용해야 하고, 또 사용하는 용어들을 구사합니다. 하나님을 논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논하고, 십자가를 말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하는 등, 기독교인이 마땅히 해야할 말을 모두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활방식도 일치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도 잘못된 곳이 있음을 여러분은 눈치채지 못합니다. 즉각 여러분의 주목을 끌거나 혐의를 일으키거나 눈에 거슬리게 잘못된 것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즉 그런 사람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으며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이 사람은 가르침에서나 생활에서나 모두 잘못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뒤에 가서 보겠거니와 이 두 가지는 항상 불가분리적으로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은 이것을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란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가르침과 생활은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어떤 모양 어떤 형태로든 잘못이 있는 곳에는 어느 점에선가 잘못된 생활 유형으로 인도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서술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의 가르침에 잘못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을 대답하는 가장 편리한 방법은 그 속에 ‘좁은 문’이, 그 속에 ‘좁은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은 그런 대로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내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가르침이며, 그 거짓됨은 그들이 ‘논하는 것’에 있지 않고, ‘말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황의 미묘함을 자각하는 것도 바로 이 점에서 인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 기독교인이 옳은 것들을 말하는 것 같으면서도 사활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제외시키는 사람을 색출할 수 없노라고 말하는 것은, 부당하고 냉혹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과오란 크게 잘못된 것만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라는 관념을 우리는 아무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사람은 옳은 것들을 강조하지 않는 사람들임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본문의 거짓 선지자들을 바로 이해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방법이 있음을 말씀드렸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그의 복음에 '좁은 문과 좁은 길‘을 갖고 있지를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연인에게 거슬리는 것은 하나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그는 양의 가죽을 입고 옵니다. 보기에 너무나 매력적이요, 너무나 붙임성 있고, 너무나 마음에 듭니다. 그는 너무나 멋지고 기분 좋게 위로가 되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그는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며, 모든 사람이 그를 좋게 말합니다. 그는 결코 설교 때문에 박해를 받는 일이 없으며, 호되게 비판을 받는 일도 결코 없습니다. 그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현대주의자들에게도 찬양을 받으며, 복음주의자들에게도 칭찬을 받습니다. 그는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이른바 약방의 감초 격입니다. 그에게는 ’좁은 문‘이 없으며, 그의 메시지는 ‘좁은 길’이 없으며,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없습니다.


 

 

 

이상이 거짓 선지자에 대한 대략적 서술이라면 이런 질문을 던져 볼만합니다. ‘이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의 설교에 거슬리는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라고 말입니다. 그 대답으로 구약성경을 인용하는 것이 가장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베드로후서 2장에서 어떻게 논증하고 있는가 기억하실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러나 민간(구약 이스라엘 백성)에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 났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2:1)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으로 돌아가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기록을 읽어봐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유형은 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기에 항상 있었습니다. 예레미야나 그와 같은 참 선지자가 올 때마다 거짓 선지자들은 항상 거기 있어서 그를 문제삼고, 그를 적대하고 탄핵하고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무엇과 같았습니까? 그들에 대한 서술을 보기로 합시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가볍게, 피상적으로)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8:11). 거짓 선지자는 항상 매우 위로 적인, 기분 좋은 설교자입니다. 그에게 귀를 기울이면 그는 여러분에게 항상 잘못된 것이 별로 없다는 인상을 줍니다. 물론 그도 잘못이 약간은 있는 것을 인정합니다. 잘못이 조금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바보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만사가 괜찮으며 잘 되어 나갈 것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와 같은 사람의 말을 듣지 말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는 편협된 사람이요, 이단을 추적하는 사냥꾼이요, 그는 비협조적이다. 그의 말을 듣지 말아라. 모든 것이 잘 돼 나간다.’고 말합니다.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고치며 평강이 없는데도 평강하다 평강하다”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종교적인 사람들에 대한 무서운 진상으로써 놀랍게도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렘5:31)란 말씀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결코 불안케 하거나 언짢게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전과 같이 계속합니다. 여러분은 만사가 괜찮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이나 이런 저런 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이렇게 양의 가죽을 쓰고 있는 거짓 선지자는 항상 속 편하게 하며, 매우 안심을 줍니다. 그는 항상 악의가 없고 기분 좋고, 항상 변함없이 매혹적이어서 마음을 끄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모양으로 정체를 들어냅니까? 전체로써 그 메시지에 교리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고 저는 말씀드립니다. 그의 메지시는 항상 모호하고 일반적인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의 메시지는 교리를 특수화하여 하나 하나 상세히 열거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교리적 설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의 설교는 항상 매우 모호합니다. 그러나 ‘교리를 특수화하여 자세히 열거한다는 말은 무슨 소리이며, 좁은 문과 좁은 길은 어디서 들어갑니까?’라고 물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대답은 거짓 선지자는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와 진노에 대해서는 매우 드물게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말하나 그 밖의 일들은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우리들이 모두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거룩하고 존귀한 분에 대해 설교할 때, 그 아무도 두려워 떨게 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가 이 진리들을 믿지 않는다고 입밖에 내지는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말썽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썽인 것은 그가 이것들을 조금도 말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전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대체로 하나님에 대한 진리 하나만을 강조하는 데 곧 사랑입니다. 그는 성경에 두드러진 기타 진리들은 말하지를 않습니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곳은 바로 여기입니다. 그는 분명히 잘못된 것들을 말하지 않으며, 분명히 옳고 참된 것들을 말하지 않고 피합니다. 그가 거짓 선지자인 것도 이 때문입니다. 진리를 감추는 것은 철저한 이단을 전파하는 것만큼이나 괘심하고 저주받을 일입니다. 그런 가르침의 결과를 ‘노략질하는 이리’의 결과로 비유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기분 좋게 하고 붙임성 있는 것이지만, 사람들을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성결과 의와 공의를 직면케 하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결코 강조하지 않는 또 다른 교리는, 최후 심판과 버림받은 자들의 영원한 운명입니다. 지난 50-60년 동안 최후심판에 대한 설교는 많지 않았습니다. 지옥과 악한 자들의 ‘영원한 파멸’에 대한 설교도 거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베드로후서와 같은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베드로후서의 정경성을 부정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교리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장(章)은 성경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는 그토록 강하고, 그토록 폭발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후서는 거기 있습니다. 그것은 여기 산상설교에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 자신의 입에서 나온 것입니다. 양의 가죽을 입었으나 노략질하는 이리들인 거짓 선지자들에 대해 말씀하신 이는 주님이십니다. 그들을 썩고 악한 나무로 서술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바울이 벨릭스와 드루실라에게 “의와 절제와 장차 올 심판”을 설교했을 때(행24:24-25)와 꼭 같이 심판을 다루고 있습니다.

 

 

동시에 거짓 선지자의 교훈은, 죄의 사악성과 인간 스스로의 구원이 전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실로 죄가 있음을 믿지도 않으며, 그 사악성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모두 완전하다고 말하지는 않으나 죄가 그리 중대한 문제는 아니라고 암시합니다. 그는 죄에 대해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개별적이거나 어떤 특정 죄에 대해서만 말할 뿐입니다. 그는 타락한 인생에 대해서나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하여 버림받고 부패했다고 말하지를 않습니다. 그는 전 인류가 죄의 연대책임을 지게 된 것과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는 신약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바 ‘죄의 사악성’(롬7:13)의 교리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허물과 죄로 죽었고’, 철저히 무력하고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렇게 할 필요성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가 강조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이런 것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말을 듣는 순수한 신자들이 그가 이런 것을 믿고 있는 것이라 착각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그런 거짓 선생들과 관련해서 제기되는 문제는, ‘그들이 이런 것을 믿고 있는가?’입니다. 그 대답은 물론 ‘아니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것을 설교하며 가르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런데 속죄에는 보상적인 면이 있으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이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도 ‘예수’에 대해서 말은 합니다. 그도 예수의 십자가와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이 죽음에 대한 그의 견해가 어떤 것인가? 십자가에 대한 견해는 어떤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철저하게 이단적이며, 기독교 신앙을 부정하는 견해가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시험하는 시금석 하나를 소개합니다.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 죽은 것은, 이것만이 죄를 위한 보상이요, 화해의 유일한 방법임을 그가 진정으로 믿고 있는가? 그리스도가 그를 위해 대속물로서 거기 십자가에 달리신 것, 그가 ‘나무에 달리시므로’ 그의 죄책과 죄책에 대한 형벌을 떠맡으신 것을 그가 진정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십자가 위에 그리스도의 몸으로 그의 죄를 처형하시지 않았다면, 존경하는 생각을 품고 말씀드리거니와 하나님이 그를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함을 그가 믿고 있는가?

 

 

하나님이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롬3:25-26) 하실 수 있음은,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물로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보내심으로만 가능했던 것을 그가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것이 성경의 대속적 속죄론인가? 하고 묻는 것이 거짓 선지자를 시험하는 방법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런 것들을 말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대해 말은 합니다. 십자가 주변에 있던 사람들에 대해서도 말하며, 우리 주님에 대해 감상에 젖기는 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십자가의 거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의 십자가 설교는 “헬라인들에게 어리석음”이 아니요, ‘유대인들에게 거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십자가를 ’그의 철학을 통해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십자가를 아름다운 것으로 경이로운 사랑의 철학으로, 무관심한 세상 때문에 애끓는 마음을 자아내는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는 십자가를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거대하고 성스러운 계약으로 본 일이 없습니다. 이 계약에서 아버지는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죄’가 되게 하셨고, 우리의 죄를 아들에게 지우셨던 것입니다. 그의 설교와 가르침에는 이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거짓된 것도 이 때문인 것입니다.

 

 

 

 

동시에 그는 어떤 의미에서든 회개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그의 교훈에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매우 큰문과 천국으로 인도하는 매우 넓은 길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죄성에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검은 것을 대수롭게 여길 필요가 없어집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해 결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무리들과 함께 달려나가고, 여러분의 이름이 기입되고 신문에 보도되는 많은 ‘결정’한 사람 중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청교도나 조지 휫필드나 기타 인물들의 전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의 전도는 사람들로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게 했고, 가끔 영혼들로 하여금 며칠, 몇 주, 몇 개월간이나 고뇌하게 했습니다. 요한 번연은 그의 「은혜가 넘치다」란 책에서 자기가 18개월 간 회개의 고통을 당한 것을 말했습니다. 오늘에는 이를 위한 여지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회개는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죄책이 있고, 악하고,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을 받아야 할 것과 지옥가게 되어 있는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란 죄라 불리는 이것이 여러분 속에 있음과 여러분이 그것을 제거하려 갈망하며, 어느 모양, 어느 형태로든 그것에 등을 돌릴 것을 자각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세상을 버리되, 실제생활에서는 물론 생각과 전망으로도 세상을 버리며,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라갑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가깝고 가장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온 세상은 여러분을 바보라고 하거나 여러분이 종교광이 되었다고 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관없으며,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거짓 선지자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치료하며, 모두 괜찮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와서, 예수를 따르고, 또는 기독교인이 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거짓 선지자는 좁은 문을 들어가며, 좁은 길은 걸어가야 할 절대적 필요성을 강조하지 않는다.’라고 말입니다. 그는 산상설교를 실천해야 한다고 말해주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실천하지 않고 이 설교에 귀만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산상설교를 비평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일어나서 심판을 선고하며 우리를 정죄할 것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참된 성결, 성경적 성결에 관심이 없습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바리새인이 가졌던 것과 같은 성결관에 집착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네가 짓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어떤 죄들을 끄집어 내가지고 여러분이 이 죄들을 짓지 않는 한 모두 괜찮다고 한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오늘에도 얼마나 많습니까! 성결은 서너 가지 무엇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문제로 격하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성결을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요일2:15-16)의 관점에서 생각하지를 않습니다. 이생의 자랑은 교회의 가장 큰 저주거리의 하나입니다. 거짓 가르침은 바리새적인 성결을 소원합니다. 거짓 가르침은 우리들 자신이 행하지 않기로 동의한 어떤 조목들의 문제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조목들은 특별한 호소력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성결을 안이한 그 무엇으로 격하시켜 버렸습니다. 우리는 넓은 길로 밀려들어가 넓은 길을 실천하려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상으로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오는 거짓 선지자들의 특징의 일부를 말씀드렸습니다. 그들은 안이한 구원과 안이한 생활 유형을 항상 제의합니다. 그들은 자기 검토를 훼방놓습니다. 자기 검토에 거의 이단이라는 느낌마저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의 영혼을 검토해 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예수를 바라봐야’하고, 여러분의 죄를 찾기 위해 여러분 자신을 보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을 검토하고 우리 자신을 시험해 보고, 우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한 산상설교의 이 마지막 대목을 똑바로 보라는 권면을 훼방놓습니다.

 

 

그들은 청교도들과 18세기의 위대한 지도자들 곧 휫필드나 웨슬레나 요나단 에드워즈뿐 아니라, 잠자리에 들기 전 매일 밤 열두 가지 질문을 자문해본 성도, 요한 플렛쳐와 같은 사람들이 가르친 자기 검토와 죄의 억제 과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유쾌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안이한 구원이요, 안이한 기독교 생활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지고 탄식하는 것은”(고후5:4)이라 말할 때의 기분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바울이 “우리가 싸우는 것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악마의 지배와 권력과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무 것도 모릅니다. 그들은 이것의 진의를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전신갑주의 필요를 보지 못하는 것은 이 문제를 본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이처럼 온통 안이한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거짓 선지자들을 공격하는 이런 유의 가르침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는 한 그를 형제로 여기고, 함께 교제를 계속해야 한다고 말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대답인즉 주님은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를 무섭게 쏘아보는 이 경고들이 신약성경에 들어있는 까닭은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려 온 바와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비판적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렇다고 친절과 정중함을 성도다움으로 오인해서도 안되겠습니다. 그것은 인격이나 개성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 사람들을 멸시해서도 안되겠습니다. 사실, 알렉산더 맥클라렌 박사가 그들이 무의식적 위선자들이라고 한말은 옳습니다. 그들이 마음에 들지 않고, 붙임성 없고 유쾌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대하기가 기분 좋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이 그들의 가장 위험한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을 위험의 근원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주님에 의하면 우리는 이것에 항상 직면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 있는데도 거짓 선지자는 멸망을 믿지를 않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고찰해 온 바로 이것이 오늘의 교회상태라 말한다면 지나친 말이겠습니까? 교회가 어째서 이처럼 허약하고, 무능하며 무력해졌습니까? 그 원인은 지난 세기의 고등비평운동의 결과로 온 설교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에 저는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철저하게 정죄 받은 설교인 것입니다. 그 옹호자들은 도덕과 일반적인 정신앙양을 설교했습니다. 그들은 설교의 실례를 문학과 시에서 끄집어 내왔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하나님을 운운합니다. 그들은 아직도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운운합니다. 그래도 그들이 명백한 이단으로 인정된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받는 데 절대 중요한 기타의 사항들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막연한 메시지만 전했습니다. 그들은 인기감식력에 딱 들어맞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너무나도 많이 보고 있는 텅 빈 교회들과 저질의 기독교 생활이 온 것입니다. 이렇게 된 데는 우리들 대다수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입맛 떨어지고 불쾌한 일입니다. 여러분이 싫어하든 좋아하든 나는 정직히 고백합니다.

 

 

만일 내가 이처럼 산상설교를 설교하기로 서약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말씀들을 설교 본문으로 택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이전에는 이것에 대해 설교한 일이 없습니다. 여러분 가운데도 그렇게 한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 생각해 봅니다. 이 설교를 좋아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비위에 거슬립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만을 택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것을 말씀하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것을 심판과 멸망의 문맥 속에 집어넣으신 이는 그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 이단 사냥꾼으로 알려지는 위험을 무릅쓰고, 또는 자기 형제들과 다른 모든 사람 위에 심판자로 앉아있는 괴짜요, 괴팍한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무릅쓰고, 정직하게 성경을 풀이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불멸의 영혼과 이 영원한 운명을 평가하고 값을 매길 때, 여러분은 하나님 존전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기를 간곡히 권면하는 바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7장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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