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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로 향하는 바울 (사도행전 27:1- 20 )

by 【고동엽】 2021. 7. 8.

 로마로 향하는 바울 (사도행전 27:1- 20 )

사도바울은 예루살렘을 떠나 로마로 가게 됩니다. 이제는 배를 타게 되는데, 지금까지 고생
했으면 이제는 대가가 주어질만한데 그는 나이가 들어서 또다시 정처없이 떠나게 됩니다. 그
의 모습은 영광스럽고 자유스러운 모습이 아니라 죄인의 모습으로서 백부장의 호송을 받으며
쇠사슬을 맨채 떠나야 합니다.

1-2절,
바울 혼자만 호송된 것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었던 죄수들과 함께 한 팀이 되어서 한 배를
잡아가지고 로마로 가는 것입니다. 백부장 율리오라는 사람이 호송책임자로 선택이 되었습니
다.
바울이 그때 소유한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집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 아무 것도 없습
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쇠사슬뿐입니다. 그는 가고싶은 곳에 마음대로 가지 못합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소유한, 그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사람이었고 그의 마음에는 기쁨이 충만했던 사람입니다. 바울
이 탄배는 죄수들을 호송하는 특수한 배가 아니었고 아시아의 해변에 각 곳에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짐을 실어 나르는 그런 운항선이었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죄수들 뿐만 있는 것이 아
니라 많은 장사하는 사람들이나, 많은 왕래하는 사람들, 약 273명의 사람들이 같이 한 배에 탔
습니다.

2절에 보니까 작은 위로가 되는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마게도냐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도 함께 간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9:29에 보면
에베소에서 대소동이 일어날 때입니다. 바울이 피신을 해나가는데 대신 잡힌 사람이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입니다. 크게는 안나타나는데 작게 나타납니다. 이 사람은 사도행전 20:4에도 핍박
이 왔을 때 두로아에 미리 가서 바울의 길을 마련해 줍니다. 유일하게 아리스다고가 바울이
호송되어 가는 그 배에 같이 타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바울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었겠습니
까?

3절,
이러한 바울에게 또 하나의 위로가 있었는데 그것은 가이사를 떠나 시돈에 잠깐 머물게 되
었는데 거기서 전도했던 사람, 안면 있던 사람들, 그리스도인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큰 위로를 얻었을 것입니다. 사랑을 크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보일듯 말듯하게, 잠간
돕는 것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 여행은 굉장히 나쁜 여행입니다. 왜냐하면 기후가 나쁜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절
기를 마치고 겨울이 닥치는 시기입니다.

4-6절,
이 배는 정상적인 항해를 하지 못하고 구브로 해안 쪽으로 항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라라고 하는 곳에서 배를 바꿔 타고 있습니다. 이제 드디어 로마로 가는 큰 배 알렉산드리
아호를 탑니다.

7-8절,
배가 정상적으로 가지 못하고 바람 때문에 여러 날을 걸려서 간신히 니도 맞은 편에 이르
게 되었습니다. 7절과 8절, 16절에 보면 간신히, 간신히 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것은 풍랑 때
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를 볼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은 육지의 경험도 많았지만 비교적 바다의 경험도 많았습니다. 3차 전도 여행을 통해
서 수없이 들락날락 했는데 고린도후서 11:25에 보면 자기가 3번 파선했다는 경험이 있다고
말합니다. 풍랑 때문에 배가 깨진 경험을 3번씩이나 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바다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지금 날씨가 굉장히 안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9-10절,
바울의 경험과 그의 신앙적인 통찰력으로 보면 이번 여행은 위태하다는 느낌을 받은겁니
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여기에 조금 있다가 여행을 하자고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권면을 하지만 그의 신분이 뭡니까? 죄인입니다. '죄인이 무슨 말이 많아.' 죄인의
의견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그의 의견은 묵살을 당합니다. 바울은 자기의 배의
경험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만 이 말속에는 예언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결국 바울이 예감한
대로 이 배는 큰 광풍을 만나서 배가 깨어지고 모든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는 심각한 경험을
실제로 하게 됩니다. 바울의 의견을 백부장 율리오는 듣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11절,
'백부장이 바울의 말보다 선주의 말을 더 믿러라'
또 그럴듯한 말입니다. 또 그래야 합니다. 사실 바다와 기후에 대해서 선장과 선주만큼 아
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세상 말로 그들은 전문가입니다. 여러분, 모든 얘기를 전문가의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보다는 바다의 경험이 많은 산장과 선주의 전문가의 말
을 듣는 것이 백부장으로서는 올바른 선택이었고 사리분별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는 죄수요 외
모도 별볼일 없는 바울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는 것은 바울이 착한 사람이기는 하지만
별로 그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뭘알아?

12절,
그들은 선장과 선주의 충고에 따라 뵈닉스 그레데 항구에 가서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을 합
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동북을, 한편으로는 동남을 향하는 곳이었습니다. 드디어 선장과 선
주의 말을 듣고 배는 떠납니다. 떠나는 날 아침, 남풍이 순하게 불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
니다. '역시 노련한 전문가의 말이 맞구나. 우리는 그 사람의 충고를 받아들인 것이 얼마나 잘
한것인가?'

13-15절,
그러나 순풍은 영원한 순풍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축복을 받았는데 그것이 영원한
축복인 것으로 압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반대로 고난도 영원한 고난은 없습니다. 고난이나 축
복은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을 때 축복이 축복이 되는 것입니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었을 때에 고난도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순풍에 돛을 달고 그들은 항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왠 일입니까? 얼마 가지 못해서
섬 한 가운데서 유라굴로라고 하는 한 광풍을 만나게 됩니다. 배가 밀려가고 자기 맘대로 갈
수가 없습니다. 바람에 맞추어 갈 수 없어 가는대로 쫓겨가더라.
인생이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가는 대로 가는게 인생입니다.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끌고 가는 것이 인생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안죽어도 될거에요. 그러
나 우리는 죽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의 사업이 잘 되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관관계가 생각대
로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인생은 내가 끌고 가는 것처럼 보여요. 그러나 아닙니다. 내 인
생은 내가 결정하고 사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래 그렇게 생각할수록 불행은 계속됩
니다. 빨리 돌아와야 합니다. 내 인생은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가
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난 이 배처럼 우리는 할 수없이 끌려가고 있
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왜 이사람들이 이런 고난 안에 있
게 되었는가?
첫째는 하나님의 사람의 권고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사람의 말에 따르기가
어려울지 모르겠습니다. 비전문가이기 때문에. 죄수가 무엇을 알랴, 선장과 선주의 말보다 더
좋은 충고가 어디 있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왜 그들이 바울의 충고를 듣지 않았을까? 세상 사
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을 보는 눈
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야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이 있어
야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사람을 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발견하는
눈이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리오라는 백부장은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
는 눈이 없었습니다. 그의 충고는 보통사람의 충고라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누구와 의논을 하십니까? 우리는 잘
못된 충고를 받아들여서 패가망신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전문
가의 이야기를 열심히 듣습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세상에 잘갈까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훨씬 좋아져야할 것입니다. 전문가가 꼭 필요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이 함
께 있어야합니다. 정치, 교육, 사회 경제의 모든 부분에서 목사가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귀를 기울여야 하는 사실 하나는 전문적 지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충고때문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뭘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영적분별을 하기 때문에
여러분이 그 영적 분멸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의 관계요, 곧
믿음의 선택이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누구를 의지하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과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새벽마다 무릎꿇고 1년만 기도하세요. 그러면 아
무리 미련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은 알려주실 것입니다. 시집을 가고 장가를 가는데 1년을 기도
하지도 않고 어떻게 한 번에 단순하게 결정할 수가 있습니까? 그것은 무서운 일이지요.
또한 하나님의 사람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그 사람이 전문적이지 않아도 좋아요. 그
사람이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순풍에 속았다는 것입니다. 방향을 돌리는 순간에 순풍이
순하게 불었다. 사람들이 모두 좋아했습니다. 역시 전문가가 다르구나.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
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시적인 승리가 영원한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라랍니다. 모든 것이 잘 되어
간다고 교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입니다. 그것이 잘됐나, 못됐나 보다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했나, 안합했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모든 일이 잘되어간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 라고 생각된다면 그일은 다시 해야 합니다.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십시오. 사람들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사람부터 찾습니다. 나중에 심각한 상황에
들어서면 그때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내가 해볼만 하면 내가 다 해버립니다. 이것저것 다해 보
고 나중에 오는 곳이 하나님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 오셔서 축복받기를 바랍니다. 순풍에
속지 마십시오.

세 번째는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생은 순풍에 돛단 것이 아닙
니다. 인생 자체가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는 삶입니다. 인생은 결코 잠잠한 호수가 아닙니
다. 예수 믿으면 안죽습니까? 죽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병이 안듭니까? 병듭니다. 그러나 바울
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산다고 했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이고,
하나님 나라입니다. 폭풍과 광풍이 몰아쳤을 때 배에 있던 사람들이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
입니까? 그들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죽게 되었구나하는 공포만이 있었
습니다. 광풍을 만난 사람들에게는 어떤 운명이 주어집니까? 무력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15절,
노젓는대로 안갑니다. 방향 잡는대로 잡히지 않습니다. 인생의 시련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 노력으로 예수 믿어지지 않습니다. 내 방법대로 예수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에 들어가는 길입니다. 둘째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사람은 내 노력이 소용이 없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16-17절,
가우다라는 작은 섬에 소망을 거는 겁니다. 거루는 거룻배입니다. 작은 배를 이용해서 배에
다 동아줄로 배를 묶는 작업을 합니다. 스루디스는 암초입니다. 돛을 내리지만 안되고 그래서
쫓겨갑니다. 이제는 선장의 기술도 백부장의 명령도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나의 노력이 더 거
치장스러울 뿐입니다. 이제는 배안에 모든 짐을 버려야 합니다.

18-19절,
제일먼저 무엇을 버립니까? 짐.
아까워서 어떻해요? 그래도 다 버려야 합니다. 짐을 다 버려야 합니다. 우선 살아야 되니
까. 짐만 버리는 것이 아니라 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소중하게
생각하고 벌었던 것들을 다 버려야 합니다. 암에 걸린 사람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옷도 소
용없고, 자동차도 소용없고, 다 내던져야 합니다. 이런 걸 알면서도 우리는 열심히 이런 것들
을 끼고 삽니다.
여기보면 짐도 버리고, 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버렸다고 말합니다. 소유는 무거운 짐입니
다. 소유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물질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예수 그
리스도의 소유만이 우리를 영원히 행복하게 합니다.
배가 밀려 가는대로 가더라. 15절, 18-19절, 이것도 버리고 저것도 버렸다.

20절,
절망입니다. 칠흑같은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어두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폭풍은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의 본질입니다.

이런 때에 하나님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님,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손끝하나
움직일 수 없습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
이것이 구원의 시작입니다. 여기에서 부터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시작이 일어납니다.

주님앞에 엎드리십시오. 겸손하고 온유하게 항복하십시오. 그리하여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내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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