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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5

by 【고동엽】 2013. 2. 5.
예수사랑이란 무엇인가 5
이제까지 우리는 2 세기 교부에서부터 시작해서 아우구스티누스와 위디오니시우스로부터 기독교에 유입된 그리스의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의한 선(善)을 추구하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기독교의 뿌리인 유대교의 공로를 쌓기 위한 사랑과 이웃을 제한하는 사랑에 대해 살펴 봅니다.
6. 유대교의 사랑
ㄱ. 공로를 쌓기 위한 사랑
40 여년 간의 포로생활에서 페르시아 문명을 경험하고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선(善) 사상을 수용합니다. 이것은 선으로 공덕을 쌓아서 신에게로 가는 사상인데, 선조들의 어록 3 장 5 부에는 다음의 어록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예지豫智되며 자유의지는 주어진다. 세상은 선善으로 심판된다. 모든 것은 행함의 양量에 따른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선하시고 인간은 선행을 한 양量에 따라 심판받는다.(조철수 선조들의 어록 132p)
이것은 은혜의 하나님이었던 유대교가 최고의 선善 하나님인 신플라톤주의 신관으로 전환된 것을 말합니다. 기독교는 선善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의 하나님이고요.
바리새인들의 사랑이 공로를 쌓기 위한 사랑임을 알 수 있는 이야기 입니다.
갈릴리 사람 요새 랍비에게 나쁜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이혼했고, 아내가 재혼했는데 그후 재혼한 남편이 장님이 되었습니다. 이들은 구걸하며 돌아다녔는데, 요새 랍비는 전 부인 부부가 자기 동네로 구걸오자 이들을 자기가 소유한 방에서 살게 하고 여생을 먹여 살렸습니다. 더욱 공덕을 쌓도록 좋은 일이 생겼으니 요새 랍비는 공덕을 쌓아 천국에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조철수 창세신화 201-202p)
심온 벤 라카쉬 랍비의 말 입니다.
만일 사람이 (율법에 의해) 공덕을 쌓으면 하나님이 너는 너를 시중드는 천사들보다 앞섰다고 말하지만, 공덕을 쌓지 못하면 파리가 너를 앞섰고, 벌레가 너를 앞섰으며 구더기가 너를 앞섰다고 말한다.(조철수 창세신화 130p)
유대인들의 삶의 목표는 공덕 쌓기 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신앙하는 방법으로 선善을 쌓는 것은 악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스스로 즐기기를 원하며 그 자신이 경배받기를 원하기 때문에, 누군가 행하는 신앙을 통한 선한행위는 교만의 동기가 되기 때문 입니다.(베른하르트 로제, 마틴 루터의 신학 348 - 350p)
신앙인이 아닌 사람이 선행을 하고 폼좀 잡는 건 괜찮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있으니까요. 선행을 신앙과 연계하는 게 무섭습니다. 왜냐하면 자기의 선행에 동참하지 않거나 지지하지 않는 사람, 자기와 같지 않은 신앙생활하는 사람을 증오하고 배제하기 때문 입니다. 결국 신앙으로 선행하는 사람은 예수가 가장 싫어하는 정죄하는 죄를 짓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로 가기위해 선善을 쌓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교만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알고들 행하는지 모릅니다만, 지금 한국에서 유대인 사랑의 철학자 레비나스에 관한 강연이 한창 입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철학자 레비나스도 유대인이기 때문에 팔레스타인을 이웃으로 삼는 걸 거절 합니다. 그들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게 이유 입니다.(베른하르트 타우렉, 레비나스 32 -38p)
ㄴ. 이웃을 제한하는 사랑
교만은 본성상 경쟁적이고, 교만 그 자체가 적대감 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의 증오를 주목합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이기 때문 입니다. 신앙을, 하나님은 자신들을 다른 사람보다 낫게 해주며 자신들의 우월함을 신이 인정해 준다는 의미로 하기 때문 입니다.
니체는 교만이란 가장된 겉치례의 극치라고 합니다.(프리드리히 니체, 아침놀 277, 291p)
초대 교부인 히에로니무스는(Jerom 345-419) 바리새인들의 질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합니다.(이상훈 옮김, 초기라틴신학 437p)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이 행한 구제에 반응하지 않고 예수 설교에 열광한데 대한 질투 입니다
질투는 교만한 사람이 나타내는 분열의 표징 입니다.
신앙인의 교만은 믿음의 타락이고, 비신앙인보다 더 악질적인 인간성의 퇴보 입니다.
유대인들은 5 세기 말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했습니다. 이때 에스라는 모든 사람을 모아놓고 모세의 율법책을 낭송했습니다.(느혜8장) 이렇한 장중한 낭송이후에 이스라엘은 공식적으로 성스런 문서를 소유하게 되었고 유대교가 경전종교로 발돋움 하게 되었습니다.(미르체아 엘리아데, 세계종교 사상사 2, 353p)
그런데 1 세기에 와서 모세의 법은 그 엄격함으로 더 이상 신앙생활의 모든 것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율법 준수와 함께 회개와 사랑이 신앙의 기준이 됐습니다. 이들에게 사랑은 선행 입니다. 회개와 선행의 요구 그리고 법의 준수는 그들의 명예 입니다.(알프레드 에더스하임 메시아 2, 488p)
자신들의 명예에 유익이 되는 사람만 용납해 나갔고 방해가 되는 사람은 차별하고 배제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구제와 사랑을 계명으로 삼았음에도 가난한 사람들과 분리해 나갔고 이웃을 제한했습니다.
랍비들은 히브리인(이브리)인이라는 히브리어를 탐구할 때 아브라함이 우상을 파괴한 것에 주목합니다. 그가 우상을 파괴할 때 한 쪽에 서 있었다고 할 때의 한 쪽이 히브리어로 '에베르' 입니다. 그래서 '이브리'와 '에베르'의 발음이 비슷함으로 자기 민족은 한 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결론을 얻었습나다. 자신들은 거룩한 백성들로 세계와 구별된 백성이고, 그 어떤 것과도 타협하지 않고 순응하지 않으며 아무리 외로워도 자신의 길을 가는 사람들 입니다.
(마이클 카츠외, 모세오경 미드라쉬 랍비들의 설교 104p)
바리새라는 말이 다른 사람과 분리한다는 뜻 입니다. 유대인들은 외국인을 개라고 불렀습니다. 급기야 이스라엘 안에서도 여러 분파로 갈리어 서로 적대합니다.
엣세내파 사람들은 사두개파는 로마 앞잡이고, 바리새파는 율법을 입맛대로 부드럽게 만든다고 저들은 어둠의 자식들이고 자신들은 빛의 자식들이라고 합니다.
자신과 신앙이 같지 않은 사람을 분리해 나가면 결국 자기 혼자 남습니다.
C S 루이스는 '스쿠르테이프 편지'에서 지옥을 설명합니다. 큰 죄를 지은 사람일 수록 큰 도시에서 혼자 삽니다. 작은 죄를 지은 사람은 차로 1 시간 가야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는데 큰 죄를 지은 사람은 10 시간을 가야 사람을 만납니다.
혼자가 좋다는 사람은 상처받고 지친 사람 입니다. 신의 위로는 사람을 통해 옵니다.
자조적으로 혼밥, 혼술이 칭송되지만 사랑하는 사람, 벗들과 막걸리 한 잔하는 즐거움을 어디에 견주겠습니까.
계속 이어집니다.
여러분과 가정에 평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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