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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히 쯔빙글리 (Ulrich Zwingli, 1484-1531)

by 【고동엽】 2009. 4. 1.
1. 쯔빙글리의 성장과 교육


울리히 쯔빙글리(Ulich(Huldreich) Zwingli)는 독일어권 스위스의 주도적인 개혁자로 1484년 1월1일 빌트하우스에서 태어났다. 거기서 그의 아버지는 마을의 행정관이었고 유복한 환경이었다. 베젠의 참사회장인 그의 아저씨가 1496년부터 1498년까지 바젤과 베른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베른에서는 인문주의자 하인리히뵈플린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500년부터 1502년까지 2년동안 콘라드 켈티스가 고전학 대가로 있었던 비엔나대학에서 공부하였고, 1502년에서 1506년까지는 바젤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하여 1504년 인문학 학사로 졸업하고 2년후 석사학위를 받았다. 바젤에서 그는 인문주의자 토마스 비텐바하(Thomas Wyttenbach, 1472-1526)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쯔빙글리는 그가 성서의 유일한 권위와 그리스도의 죽음이 죄용서의 유일한 대가라는 것과 면죄부의 무용함을 가르쳐 주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가르침 아래 쯔빙글리는 자연스럽게 기독교 믿음의 초기 원천으로 돌아갈 것을 열망하고 일반적으로 미신이라 생각하는 것을 비판하는 인문주의자가 되었다.


2.글라루스(1506-1516 )와 아인지델른(Einsiedeln: 1516-1518)의 쯔빙글리


1506년 쯔빙글리는 글라루스 도시의 교구 사제가 되었다. 글라루스에서 그는 바젤의 마지막 무렵에 느꼈던 환경의 영향력을 버리지 않고서 인문주의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헬라어를 공부했고 히브리어를 시작했으며 에라스무스 작품에 몰두했다. 그는 열심히 고전, 성경, 교회 교부들을 공부했다. 그는 영향력 있는 설교자가 되었고 북부 소수 인문주의자 그룹의 존경받는 일원이 되었다. 글라루스에서 그는 글라루스 파견대의 군종사제로서 1512, 1513, 1515년 세차례에 걸쳐 자기 지역 출신들과 함께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였다.


그 대가로 그는 교황 보좌 군종사제라는 직함을 얻었고 교황 연금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전투의 참여경험은 스위스인들이 고용되어서 다른 나라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이 제도의 위해성에 대해서 확신을 갖게 하였고, 그러한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죄악임을 확신하게 되자 그는 용병관례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스위스 군인들을 쓰기 원하는 프랑스가 글라루스 교구 활동을 방해하여, 그는 자리를 사임하지 않는 채 1516년 아인지델른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여기서 그는 설교자와 학자로서 그 명성이 더욱 커졌다. 또한 여기서 그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베른하르트 잔존(Bernhard Sanson)에 의한 면죄부 판매에 완강하게 반대했다. 이제 그는 진지한 히브리어 뿐만 아니라 알프스 북부 최고 헬라어 학자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항상 루터에게 빚진 것을 인정하기 꺼려한 그는 후에 복음적 입장을 수용한 것을 아인지델른 체류기간으로 돌렸다. 1518년 그는 교황의 지도 신부 임명을 곧장 수락하였으나, 당시 그의 사생활은 순결서약을 깼다는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3.취리히에서의 쯔빙글리


쯔빙글리의 용병 파병 반대와 설교자와 학자의 명성에 힘입어, 그는 1518년 취리히에 있는 대 민스터교회의 유급사제로 선출되어 1519년 1월1일 취임하였다. 그는 곧 전통적(스콜라)해석에 의지하지 않고 한절한절 마태복음부터 주석을 시작하였다. 1519년 9월 그는 전염병으로 거의 죽을 뻔 했는데, 이 체험은 진지한 자기 성찰을 일으켰고, 하나님의 사명에 대한 강한 의식을 일으켰다. 그의 영적 생활은 1520년 사랑하는 그의 동생과의 사별을 통해 더 깊어졌고 같은 해 교황의 연금을 사절했다. 1521년 그는 루터의 저작을 세세히 연구했으며, 계속 용병제도에 강하게 반발하는 설교를 했고 취리히시는 결국 1523년 1월 이를 폐지했다.


이러한 개혁으로의 깨달음은 독일의 개혁가처럼 번민과 고통에 찬 여로는 아니었다. 이는 인문주의자들의 방법론에 의한 부지런한 성경 연구, 교회 성직자들의 부정과 부패 및 용병제도에 대한 비판정신의 결과였다. 이렇게 쯔빙글리가 오랫동안 개혁 운동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가 강력하게 개혁운동을 시작한 것은 1522년이었다. 그 해 3월 일부 시민들이 성서의 유일한 권위를 주장한 쯔빙글리의 말을 인용하면서 사순절금식을 지키지 않았다. 이들은 쯔빙글리의 가르침을 따랐을 뿐이라고 말함으로서 자신들을 정당화시켰는데, 이들에 의하면 쯔빙글리가 성경에서 명령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기독교인이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쳤다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즉시 이들을 방어하는 글을 썼다. 즉,「음식에 관한 선택과 자유; 범법성과물의; 특정한 기간 동안에 고기를 금지시킬 권위가 있는 것인가」(1522년4월16일)를 통해서 그는 그러한 문제에 있어서 책임은 개인에게 있으며, 개인은 공개적인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범위내에서 자유를 사용할 수있다고 선언하였다. 취리히를 관할하고 있던 콘스탄츠 주교는 혁신을 억누르기 위해 사절을 보냈다. 주의 시 정부는 신약성서는 금식을 의무로 하지 않았으나 좋은 의식으로서 준수되어야 한다고 판결하였다. 그러나 쯔빙글리는 성경을 증거로 히여 자기 주장의 정당성을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계속 설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 후 얼마 안 되어서 보다 비판의 범위를 넓혀 성직자들의 독신제도가 비성경적일 뿐 아니라 이를 명령하는 자들 자체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다고 선언하였다. 게다가 쯔빙글리가 취리히 주 정부가 제안된 종교정책의 변화를 수용하면 그 권위가 더 강화될 것이라고 하며 설득하자, 주 정부는 그가 제시한 변화를 점차 도입하였고,1523년1월 성경만을 표준으로 하는 공개토론을 명령했다. 이 토론을 위해 쯔빙글리는 짧은 형식의 67개 조항을 준비했는데, 이것은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함을 확인하고,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 선행의 구원적 효과, 중재자로서 성자의 가치, 수도원 서약의 구속성, 연옥의 존재등을 부정했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가 교회의유일한 머리임을 선언했고 성직자의 결혼을 옹호했다. 토론의 결과 시장이 쯔빙글리의 가르침은 정당성이 있으며, 따라서 그는 이단이 아니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취리히 자치주는 이렇게 해서 실제적으로 쯔빙글리의 견해를 채택했으며, 개혁자는 더욱 확신있게 개혁을 추진하라는 격려를 받았다. 몇몇 성상 파괴 폭동을 포함하여 도시 안에 긴장이 고조되자, 쯔빙글리와 그의 동료 목사 레오 쥬드(Leo Jud,1482-1542)는 미사와 성상의 사용을 다루는 또 다른 공개토론을 제의했고, 이 두 번째 토론은 1523년 10월 심의회 형식으로 열렸다. 쯔빙글리와 쥬드는 성상숭배를 공격하고, 미사의 희생제사적 성격을 부인하고, 평신도에게 떡과 잔을 다 주는 것에 대한 성서적 근거를 제시하고, 모국어 예배를 주장했다.


심의회는 신중하게 움직여, 라틴어 미사와 떡만 주는 것을 고수하고, 교회로부터 개인 소유 성상만 조용히 제거할 것을 허락했다. 로마와 공개적으로 분리하게 된 결정적 변화는 1524년과 1525년에 왔다. 1524년 6월과 7월에 노동자들은 시의회의 명령을 받아 성상, 유물을 교회에서 제거했고 대 뮌스터(Gro m nster) 교회에서 오르간을 벽으로 봉했다. 그 해 12월에는 거의 저항없이 수도원들이 해체되었고, 그 재산은 교육과 빈민 구제를 위해 쓰여졌다. 미사도 1525년 수난주간까지 계속되다가 폐지되었고, 떡과 잔을 다 주는 단순한 모국어 예배가 확립되었으며, 주교의 사법권은 폐기되었으고, 예배는 설교를 중심한 독일어로 드려졌다.


옛 예배의 교리와 의식은 제거되었고, 쯔빙글리는 그의 주저「참 종교와 거짓종교 해설」(The Commentary on True and False Religion)에서 이러한 변화를 설명하고 정당화 하였다. 그 동안 쯔빙글리는 1524년 4월 2일 1522년 초 비밀리에 결혼한 바 있는 과부 안나 라인하르트와 공식적으로 결혼하였다. 쯔빙글리는 또한 스위스 다른 지방과 인접 독일 지역의 교회개혁에 열정적으로 참여하여 힘껏 협조하였다. 바젤은 주로 1522년부터 거기서 계속 활동한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Johannes Oecolampadius, 1482-1531)에 의해 점차 복음주의로 전향해, 1529년 미사를 페지했다. 스위스 캔톤 중 가장 큰 베른은 복음주의의 많은 준비와 노력, 그리고 쯔빙글리가 주도한 공개토론에 힘입어 1528년 개혁에 성공했다.


그러나 우리, 슈비츠, 운터발덴, 쭈그 등의 오랜 자치주들은 아주 보수적이었고 취리히의 변화에 반대했다. 1524년 그들은 이단에 대항하는 연맹을 결성했고, 1526년 스위스 연방은 바덴에서 종교토론을 개최했지만 쯔빙글리는 참석을 거절했다. 이 때 취리히를 제외한 모든 캔톤은 아직 공식적으로 카톨릭이었고, 토론 결과 카톨릭이 승리했다. 취리히는 당분간 고립되었지만 베른이 1528년 공식적으로 개신교화하자, 취리히, 콘스탄스,베른등 개혁파 도시들은 그 해 6월 "기독교 시민 동맹"을 출범시켰다. 이로 인해 스위스 연합이 분열되었고, 보수적인 로마 캔톤들은 "기독교 연맹"을 결성하여 대항했다. 1529년 6월 25일 카펠에서 강화조약이 취리히와쯔빙글리파에게 유리하게 체결되었지만 평화는 단지 휴전에 불과했다.


1531년 취리히가 곡물수송을 금지하며, 로마 캔톤들에게 복음주의 설교를 강요하자 전쟁이 재개되었다. 취리히는 쯔빙글리의 권면에도 불구하고 전쟁준비를 제대로 못해, 1531년 10월 로마 캔톤들은 카펠에서 취리히 군대를 대파했고 쯔빙글리도 여기서 전사했다. 그는 카톨릭 고해신부의 도움을 거절한 후 죽었는데, 그의 육체는 그의 재가 개신교 성자 유골로 수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능지처참되어 불에 태워진 후 똥과 함께 섞였다. 전쟁의 패배와 쯔빙글리의 죽음으로, 취리히는 개신교 자치주들의 지도력을 상실하였으며 종교개혁의 주도권은 점점 베른과 제네바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제네바는 연맹의 동맹으로는 활약했으나 회원국은 아니었다.


뒤이은 강화조약(제2차 카펠 평화조약)에서 취리히는 동맹을 포기했고, 각 자치주에서 내부의 종교문제를 규정할 완전한 권리가 주어졌다. 따라서 독일처럼 스위스도 종교개혁은 파괴되지 않았으나 나라 전체를 석권하지 못한 채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도들이 자치주를 분할해서 서로서로 사이좋게 살아가는 형국이었다. 취리히 교회의 리더쉽은 쯔빙글리의 정치적 야망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유능하고 화해적인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에 의해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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