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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by 【고동엽】 2011. 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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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목 차

 

Ⅰ. 들어가는 말
Ⅱ. 삼위일체론의 기초
1. 삼위일체론의 성서적 근거
2. 삼위일체론의 출발점으로서의 계시
3. 삼위일체의 흔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Ⅲ.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의미
1. 하나님의 일체성 - 셋 안에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
2. 하나님의 삼위성 - 하나 안에 셋으로 계시는 하나님
3.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 삼중적으로 반복되는 한 분이신 하나님
Ⅳ. 삼위일체론의 구분
1. 내재적 삼위일체론
1) 영원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2) 영원한 아들로서의 하나님
3) 영원한 성령으로서의 하나님
2. 경세적 삼위일체론
1)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2) 화해자로서의 하나님
3)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3.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관계
Ⅴ.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평가
Ⅵ. 나오는 말

 

 

 

Ⅰ. 들어가는 말

 

교회는 역사에 현존하고 인간을 포함한 세계의 구원을 위해 활동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삼위일체론은 거의 사변적인 교리로만 취급되어질 뿐 실제적인 신앙생활에서는 실용성이 없는 이론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매일 고백하는 하나님은 사변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에게 주님으로 오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다. 칼 바르트(Karl Barth)는 우리에게 인격적으로 오시는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서 삼위일체적 기능을 행사하신다고 생각하였다. 바르트는 하나님은 '절대정신' 등의 하나의 '관념' 혹은 '실체' 즉 '세력'이나 '능력'이 아니라 인격을 지닌 '주님'으로 이해하였다. 우리도 역시 바르트와 같이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중성적이거나 비인격적인 어떤 세력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이신 것을 믿는다. 그리고 그 인격적인 하나님은 영원한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으로서 우리의 창조자, 화해자 그리고 구원자가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를 도출하는 작업이 역사 이래로 여러 모양으로 시도되었지만 만족할 만한 수준에 이르지 못하였다.


기독교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은 신에 관한 단순한 교리가 아니라 기독교 신앙 전반에 관련된 근본적인 교리로 이해되고 있다. 하나님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계시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 결과는 무엇인가? 바르트는 이러한 물음에 대한 대답은 삼위일체론과 직결된다고 보았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신의 현실성을 무시하고서는 하나님의 본질에 관한 문제는 철학적 공론 내지 일종의 형이상학적 사변에 불과할 것으로 보고, 유대교나 모하메트교에서와 같은 '유일신론'과 일반 철학으로 본 '일신론'과 구별되며 삼신론으로 떨어지지 않는 전통적인 기독교 신관을 제시하려고 하였다.


삼위일체론은 바르트의 전체 교의학에서 핵심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론이야말로 기독교의 신관과 계시관을 잘 드러내주고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의 신관을 다른 신관과 구별하고 기독교의 계시관의 특수성"을 나타낸다. 바르트는 어느 신학자 보다 교의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선행적인 교리는 삼위일체론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는 그의 『교회 교의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이어 삼위일체론을 다루고 있다. 이는 그가 얼마나 삼위일체론을 중시하고 있는가를 시사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교회 교의학』에 나타나는 신학적 체계는 삼위일체론적 사고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바르트 신학의 출발점이 되는 계시에 대한 이해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전개되고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바르트의 신학에서 삼위일체론의 비중과 위치를 중시하고 바르트가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하였는지를 고찰하고 그의 삼위일체론의 강점과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 삼위일체론의 기초

 

1. 삼위일체론의 성서적 근거: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이 어떤 논리적이고 추상적인 사유의 결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성서의 계시 안에 그 근거가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위해 바르트는 초대교회 시절의 세례는 삼위일체론 형식을 사용했음을 기술한다. 그리고 이 때의 신(神)은 세 신적 대상을 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지적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삼위일체론의 기초는 계시이다. 계시가 삼위일체론의 기초라는 말은 계시 안에 있는 신(神)에 대한 성서적 증언과 삼위일체 교리는 일치한다는 말이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리는 비성서적 교리가 아니라 성서적 근거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교리라고 말한다. 그는 고후 13:13("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은 삼위일체 사상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본다. 물론 성서에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한 곳은 없다. 그러나 성서에는 삼위일체 사상을 세우고 지원한 개념을 여러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바르트는 삼위일체 교리의 기초를 성서에서 찾아내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한 본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삼위일체론의 기초라고 한다.


삼위일체론은 성서기자들이 체계화한 교리는 아니다. 이것은 교회의 신학적 반성에서 얻은 신(神) 이해요 따라서 교회의 신앙 고백의 산물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비성서적이거나 성서와 무관한 사변적 창작물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이 교리는 성서에 기초를 두고 교회에 의해서 발전되어 온 교리라고 보아야 한다.

 

 

2. 삼위일체론의 출발점으로서의 계시

바르트는 삼위일체론이 하나의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추상론이라는 생각을 벗어 던지고 이 교리를 계시와 연결시켜 삼위일체론이 단순한 추상론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즉 삼위일체 교리는 인간의 언어 즉 피조물의 어떤 수단을 통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에서 설명될 수 있음을 주장한다. 바르트 신학의 출발은 계시 즉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바르트에게 삼위일체론은 신론의 기본전제가 된다. 바르트가 예수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생각하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을 그의 『교회 교의학』의 서두에서 시작한 것은 이런 사고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계시는 삼위일체 神 자신의 사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계시 안에 神이 취하신 神 형식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神 이해는 계시에서 출발해야 한다. 하나님이 계시하시는 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계시는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은 계시하심에 있어서 계시자인 동시에 계시 자체이다. 이 세상에 계시된 계시 자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따라서 바르트의 삼위일체 신론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하나님은 영으로 자신을 계시하는데 단지 하나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 아버지와 아들의 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바르트는 계시의 내용을 고찰하므로써 삼위일체론의 근거를 밝히려고 한다. 그는 성서적 계시 이외에 어떤 다른 계시를 삼위일체의 기초로 생각하지 않는다.


바르트 신학에서 계시는 삼위일체론의 뿌리이자 기초가 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출발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계시의 사건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의 동시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교회의 이해의 문서이다. 그러나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해석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는 하나님 자신의 해석"이기도 하다. 삼위일체론은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를 인간에게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다.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론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신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삼위일체론적 계시의 해석이다. 그러므로 계시를 바르게 해석하는 작업은 삼위일체론에 이르는 작업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계시란 무엇인가? 계시는 죄인인 인간에게 하나님 자신이 말을 걸어 오시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행동을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 오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는 삼위일체론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왜냐하면 계시하시는 하나님은 삼위일체적 구조를 가지고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르트에 의하면 계시는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표명 혹은 자기폭로(노출)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계시된 말씀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쓰여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성서, 그리고 선포되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증언의 세가지 형식을 취한다. 이 계시의 사건이 먼저 선행한 다음에 인간의 신학이(계시에 대한 인간의 해석) 발생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에 있어서 계시는 신학의 출발점이 됨과 동시에 삼위일체론의 출발점이 된다.


계시는 삼위일체론적 구조를 갖는다. 이 말의 의미는 계시를 인간학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사건으로부터 이해한다는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사건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본질상 인간에게 알려질 수 없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인간에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시하신다. 이런 점에서 삼위일체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출발한다.

 

 

3. 삼위일체의 흔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삼위일체의 흔적은 피조 세계와 다른 종교에서 그리고 인간의 의식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찾아 볼 수 있을 지라도 그 神은 창조신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론의 흔적은 삼위일체 자신이 우리의 언어와 세계와 인간성을 취한 형식인 계시 속에서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르트의 계시론이 첫째로 중시하는 바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사항은 계시자는 계시되는 자와 동일하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계시자의 본질과 행동은 계시되는 자의 본질과 행동이 동일해야 한다. 계시자는 계시를 통하여 자기자신과 구별되면서도 그 자신이 아닌 다른 자기자신으로 존재하신다. 즉 하나님은 자기 자신의 또다른 자기자신으로 존재하여 자신의 본성을 우리에게 계시하신다. 이런 계시의 원형을 우리는 아버지 하나님인 동시에 아들 하나님으로 존재하여 바로 이 아들의 신분을 통하여 아버지의 신분을 드러내는 계시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둘째로 바르트는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자신을 숨기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아들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자신을 계시하면서도 자신을 감추시는 분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하나님은 인간에게는 파악될 수 없는 분이다. 본질적으로 계시는 은폐되어 있어서 인간적인 사고와 활동에 의하여 인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자유와 계시하지 않을 절대적인 자유를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시면서도 동시에 숨어계신다. 따라서 계시는 언제나 인간에게 항존하여 자연적으로 접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구체적 인간들에 대한 구체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언제나 하나의 새로운 사건으로 주어지는 기적의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세째로 중요한 점은 계시는 인간의 보편적 수단을 통해서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특수한 사건과 특수한 사람들을 통하여 전달된다. 물론 특수한 사건과 특수한 사람은 초월적인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건이요 세상의 사람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상적인 사람과 사건을 기적적으로 잡으셔서 신의 사람과 신적인 사건으로 만드신다. 이 점에 관하여 바르트가 의미하는 바는 세상의 주권이 하나님의 주권을 침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주권이 기적적으로 세상의 주권에 임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래로부터가 아닌 위로부터의 계시를 말하며,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고귀한 신분에서 천한 신분으로, 곧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는 성육신을 의미하는 것이다.


상술한 세 가지 논점을 통하여 바르트가 보다 강력하게 주장하고자 한 것은 삼위일체의 근거는 인간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로부터는 찾아볼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만 참된 삼위일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가 생각하는 삼위일체의 논리는 계시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론의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상기한 계시자와 계시되는 자와의 일치, 숨어계신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과의 일치는 성육신의 사건에서 드러난다. 이 성육신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자신의 흔적을 취하셨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나타난다는 이해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흔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만 찾아질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삼위일체론의 흔적과 기초가 된다.

 

 

Ⅲ.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의미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삼위성과 일체성에 관한 지식을 말하는 것이며,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삼위에 있어서의 일체성과 삼위성을 표현하는 개념이다. 다른 표현으로 삼위일체론은 "하나 안에 셋이, 셋 안에 하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삼위일체론은 먼저 하나님의 삼위성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삼위성은 하나님의 본체가 셋임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기독교의 일신론을 표명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표명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서 세 가지 구별이 있다는 개념을 포함한다.


바르트도 삼위일체란 셋 안에 하나로 계시고, 하나 안에 셋으로 계시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개념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바르트가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동시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셋 안에서의 하나'(oneness in threeness)로, '하나 안에서의 셋'(threeness in oneness)으로 계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하는데 있다. 먼저 하나님의 삼위일체가 지니고 있는 일체성의 특성을 고찰해 보고자 한자.

 

 

1. 하나님의 일체성: 셋 안에 하나로 계시는 하나님

바르트는 신의 통일성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는 신의 주권(lordship)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그는 하나님의 위격을 세 위격(three persons)과 연결시키지 않고 단일적인 하나님의 본질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이 삼중적이 아니라 삼중적으로 된 하나로 본다. 즉 "하나님은 삼중적으로 반복되는 한 분의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바르트는 신의 통일성을 통재론(perichoresis)이란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개념은 세 분이 다같이 상호관계 안에서 존재하며, 스스로 영원에서 영원토록 존재하는 한 하나님과 공동적으로 존재하며, 한 분은 다른 두분과 함께 존재하지 않고는 그 중 어느 분도, 심지어 아버지 조차도 그 분 나름대로의 존재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 중 어느 분도 한 특별한 개별적 존재로 있을 수 없다. 통재론은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그들 사이에서 하나라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이것은 세 위격의 존재 양태가 서로 동일하다는 의미는 없고 서로의 안에 공재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바르트는 통재론을 단순히 공재로 오해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옆에 같이 있다"와 "사이에 같이 있다"와 "안에 같이 있다"를 함께 말해야 된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이런 통재론을 통하여 계시 속에 나타난 하나님은 셋 안에서 알 수 있으며, 셋은 한 분의 하나님으로 알려지며, "셋 중 어느 하나도 다른 둘 없이는 알 수 없으며 셋 중 하나는 다른 둘에 의해서 알려진다"고 하였다.


바르트는 삼위를 말한다고 해서 신의 본체가 셋이라거나 또는 삼중적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고 신을 세번 반복해서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반복한다고 해서 세 분의 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셋이 하나가 된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종합이나 수적인 합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격성에 있어서 하나라는 뜻이다. 이것은 또한 삼위일체 안에 인격성을 가진 세 신이 있다는 말도 아니고, 세가지 신적 자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오히려 한 신적 자아에 대한 세 차례의 반복을 의미한다

 

 

2. 하나님의 삼위성: 하나 안에 셋으로 계시는 하나님

바르트는 하나님의 일체성에 이어 하나님의 삼위성을 기술한다. 여기서 중시할 점은 일체성을 말한다고 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구별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포함한다. 그 구별을 우리는 세 인격(persona) 즉, 삼위(drei Personen; three person)라고 부르고 있으나 바르트는 인격 대신에 '존재양식'(Seinsweise)이란 말로 대치하여 사용하기를 제안한다. 그 이유는 '가면'과 '신분'을 뜻하는 persona라는 용어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가면 이외에 숨어있는 제4의 인격을 생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존재양식'이란 말을 제안함으로써 persona가 가지고 있는 그런 오해를 벗어보려고 의도적으로 persona란 말을 거부하였다.


그러나 바르트는 persona란 용어를 포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Seinswise(modus)라는 말이 persona 보다는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사용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 가지 존재 양태 안에서 하나다. 한분의 인격적인 하나님이 한 존재 양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아들, 성령의 양태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특유하고 구별된 하나님의 존재의 개별적 양태를 설명하려면 'Seinsweise(modus)'란 말을 써야 한다고 했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막연하게 삼위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고유하고 독특한 존재양태를 가진다. 바르트는 이것을 신 안의 세 존재 양태(der drei Seinsweisen)라고 부른다. 물론 세 존재 양태를 가지신 하나님은 대내외적으로 한 분으로 존재하신다. 그러나 한 분의 존재 양태와 다른 분의 존재 양태를 혼동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 한 분인 하나님은 세 번 스스로 타자가 되는 그러한 방법으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세번 스스로 타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존재 양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요소이며, 절대로 제거할 수 없는 존재 양식이다. 따라서 바르트는 세 존재 양태의 개별성은 말소할 수 없는 요소임을 강조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 양태에서 구별성을 부인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버지, 아들, 성령의 특성을 부인할 수 밖에 없다. 역으로 우리가 그 구별성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부르는 것을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을 바르트는 계시자, 계시, 계시된 것(Offenbarer, Offenbarung, Offenbarsein)이라고 부른다. 이 점에 관하여 바르트가 우리에게 주의를 주고자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 존재양식으로(서로 혼동될 수 없는 각 존재양식의 고유한 양식으로) 존재한다고 해서 세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3.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삼중적으로 반복되는 한 분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삼위성과 일체성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성을 말하게 한다. 왜냐하면 '셋 안에 하나로 계시는 신'과 '하나 안에 셋으로 계시는 신'이라는 표현은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바르트는 하나이며 셋이라는 삼일성(Dreieinigkeit)이란 표현을 쓴다. 바르트가 사용하는 삼일성은 다음의 인용을 의미한다;"나는 하나를 생각할 때 즉시 셋의 광채에 포위당하지 않을 수 없다. 또는 셋을 생각할 때 곧 하나로 되돌아가지 않고는 셋을 이해할 수 없다." 위의 인용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삼일성이란 셋이 하나이며 하나가 셋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말은 "하나의 하나님은 다만 셋 안에서 알 수 있으며, 이 셋은 하나로서의 셋을 의미한다.


신이 역사하실 때 신은 세 가지 다른 양태로 역사 하신다. 계시자, 계시, 계시된 것으로, 또는 창조자, 화목자, 구속자로 역사하신다. 이런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의 존재 양태에 이런 구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구별은 그의 속성에서 들어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역에서 드러난 구별이다. 이런 차원에서 십자가, 부활 성령강림의 사건은 한 사역이라는 것과 그의 세 존재 양태에 있어서 동시적이고 통일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의 세 가지 존재양식은 서로 혼동되거나 혼합될 수 없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존재양식은 각자의 양식 즉 아버지의 양식, 아들의 양식, 성령의 양식을 지닌다. 그리고 이 세 존재양식을 지닌다고 해서 하나님이 세분으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세 존재양식 안에서 한 분으로 계신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종속설과 양태론을 거부한다. 바르트는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와 동등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에 종속되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종속론에 반대하여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유일하고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주장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들은 하나님이 나타나는 양식에 해당하여 아버지와 같이 신적 존재에 속하지 않는다는 양태론을 거부한다. 혹자는 바르트가 존재양태(Modus of existence)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때문에 양태론을 지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는데 바르트는 양태론의 오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셋이 하나요, 하나가 셋이라는 논리 구조를 철저하게 따르기 때문에 종속설과 양태론의 시비에 말려들지 않는다.(바르트 연구, 71)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을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 가지 신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 번의 반복 가운데서 단 한 분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바르트는 삼위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사용하여 온 '인격', '위격' 또는 '품격'이라는 개념을 쓰지 않고 '반복'이란 개념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세 인격들의 본질적인 수적인 일체성을 강조하고자 하였다. 이는 자신의 삼위일체론이 삼신론 또는 양태론적 방향에 서 있지 않음을 표현한 처사라 볼 수 있다.


'인격'의 뜻을 가진 'persona'는 '가면' 또는 '신분'이라는 두가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가면'이라는 뜻만을 가진 것으로 왜곡되어, 가면들 뒤에 있는 다른 인격까지 생각하게 함으로써 양태론에 빠질 수 있음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에 바르트는 의도적으로 'persona'란 용어 대신에 존재양식(Seinswise)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자신의 삼위일체론이 이단적인 삼위일체론인 양태론으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격이란 말대신 존재양식(Seinswise)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서 바르트는 자신이 피하려고 했던 양태론에 빠지게 되었다고 몰트만은 비판하고 있다.


바르트는 persona대신 modus라는 용어를 쓰고 있지만 어떻게 삼(三)이 일(一)이며 일(一)이 삼(三)이 되는지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계시된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는 세 존재 양태로 실재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것의 가능한 논리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단지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아들로서의 하나님, 영으로서의 하나님이라고 세 번 부르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정당한 부름이라는 진술만이 있을 뿐이다. 三이 一이고 一이 三이라는 논리는 우리 자연 세계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리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 인간을 포함한 자연 세계에서는 기적 또는 비밀에 해당되는 진리일 것이다. 신학은 이 기적과 "비밀에 대한 합리적인 노력"을 하는 것이다.


상고한 바르트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인간과 세계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자유로운 자기개방(자기노출)인 계시에 의해서 인간과 세계에 알려지는 것이다. 이에 대한 분부한 논의가 있으나 크게 내재적 삼위일체론(Immanent Trinity)과 경세적 삼위일체론(Economic Trinity)으로 구분할 수 있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삼위의 내적인 관계(활동)를 말하는 삼위일체이다. 경세적 삼위일체는 하나님 내적인 관계가 아닌 하나님의 인간 구원활동을 통해서 나타나는 삼위일체를 말한다. 바르트는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세적 삼위일체론을 모두 받아들인다. 하나님은 내재적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존재하시면서 동시에 계시를 통하여 자신을 창조자, 화해자, 구원자로서 인간과 세계에 나타내신다.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론을 경세적 삼위일체론과 내재적 삼위일체론으로 구분하여 논한다. 바르트는 이러한 구분을 따른다. 이제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구분에 의한 삼위의 존재양식과 그 특성을 논하고자 한다.

 

 

Ⅳ. 삼위일체론의 구분

 

바르트는 아버지, 아들,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하여 각각 창조자, 화해자, 구원자로서 말하면서 각각의 인격은 그의 사역 이전에 본성적으로 영원한 아버지, 영원한 아들, 영원한 성령으로 존재했음을 말한다. 이는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근거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먼저 내재적 삼위일체론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1. 내재적 삼위일체론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상응한다. 내재적 삼위일체는 계시되기 이전에 이미 전제되어 있는 삼위일체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사건을 이야기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내적 가능성 즉 계시의 사건이 성취되기 이전에 하나님 자신 안에 있는 내적 가능성 곧 내재적 삼위일체를 전제한다.

 

1) 영원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무엇 보다도 먼저 바르트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버지성을 언급한다. 바르트가 하나님을 영원한 아버지로서 전제하는 이유는 다음의 논리에 근거한다; 하나님이 그를 아버지로 계시하실 수 있는 것은 그가 우리의 아버지요 우리의 창조자이시기 이전에 이미 그 자신 안에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의 창조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그는 그 자신 안에서 이미 영원한 아버지로 계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영원한 아버지 되심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아버지로 부터 인식하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비록 우리가 아버지를 계시로부터 인식한다 할지라도, 하나님 아버지는 계시되기 이전에 이미 그의 내적 가능성에 의하여 영원한 아버지로 존재하신다는 점을 먼저 인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는 것은 계시를 통해서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계시 이전에 그의 본질 속에서 그는 아버지로 계시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에게 아버지로서 창조자로서 계시하실 수 있는 것은 그 자신 안에 영원 전부터 가지고 있는 가능성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하나님의 사역이 나오고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으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본질과 사역은 분리될 수 없다고 하여 경세적 삼위일체론이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분리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이 양자가 분리될 수는 없어도 구분될 수 있다고 하여 계시 사건 이전에 계시 사건에 대한 내적 가능성이 있음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근거가(또는 원인이) 된다는 인상을 지울 수 가 없다. 따라서 바르트는 영원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아들과 성령의 원인자로 계신다고 보았다. 그러나 원인자로 계시다고 해서 아들과 성령이 아버지에 종속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 나타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사건 이전에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서 그의 영원한 존재 안에 이미 근거되어 있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하나님 자신 안에 하나의 내적 가능성으로 존재하는 것의 반복에 불과하다. 하나님 자신 안에서 하나의 내적 가능성은 다른 가능성(아들과 성령) 보다 최초의 근원적인 가능성을 가진다. 바르트는 이 최초의 근원적 가능성을 영원한 아버지라고 이해하였다. 여기서 최초의 근원적 가능성은 다른 가능성의 원인자가 되고 다른 가능성은 최초의 근원적 가능성의 반복에 불과하다. 이것은 경세적 삼위일체 이전에 내재적 삼위일체를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내적 가능성은 하나님의 내적인 삼위적 구조의 존재를 의미한다. 영원한 아버지는 그 스스로 홀로 계시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자신인 아들과 성령으로도 존재한다. 이 말은 아들과 성령은 아버지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유출은 종속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아버지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삼위의 존재양식으로서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진다. 이 삼위 하나님은 자신의 역활과 인격(그 자신됨의 신분)을 가지고 있어서 각자의 고유한 구별을 점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 고유한 인격들은 서로 내적인 통일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상호 침투하여 교제를 나눈다. 그러므로 아버지만이 창조자가 아니라 아들과 성령도 창조자가 되시며 아들만이 화해자인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성령도 화해자이시며 또한 성령만이 구원자인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도 구원자인 것이다.

 

2) 영원한 아들로서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계시하실 수 있고 우리를 화해시킬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계시 사건을 통하여 비로서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되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라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논리는 그가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기 때문에 그는 그의 아버지를 계시하실 수 있고 그의 아버지와 우리 인간과의 화해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계시와 화해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있는 그의 신성이 계시와 화해를 형성한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되는 하나님의 아들은 계시의 사건을 무시하더라도 이미 그 자신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이미 자기 자신 안에서 아들이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이전에 이미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을 전제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의 반복에 해당된다고 하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명제는 그의 신성과 선재성 그리고 하나님과의 동질성과 동일성의 근거가 된다.


그리스도는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영원 전부터 그 자신 안에서 아들로서 존재한다. 그리스도가 영원한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은 그의 아버지가 영원한 것과 같이 그도 영원한 아들이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는 영원한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영원한 아들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바르트는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나누어지지 않고 포함된다. 계시의 시간은 영원한 시간 안에 있는 것이고 또한 영원한 시간은 계시의 시간과 나누어지지 않고 계시의 시간을 포함한다. 바르트에 있어서 역사의 그리스도와 선재하는 그리스도는 구분될 수 있으나 나누어 질 수 없다. 이것은 곧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구분될 수 있으나 나누어 질 수 없다는 말과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이다.

 

3) 영원한 성령으로서의 하나님

바르트는 아버지와 아들과 마찬가지로 성령도 계시의 사건을 통하여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계시사건 이전에 자기 자신 안에서 영으로 존재한 것으로 본다. 이런 사상은 성령은 피조물적인 존재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과 마찬가지로 영원 전부터 존재하는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그러나 성령은 아들과 구분되는 한 독립적인 존재임을 바르트는 강조한다. 바르트는 성령을 아버지의 존재 양식과 아들의 존재양식 사이의 공통적인 것 곧 아버지와 아들의 교제로 본다.


바르트는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 공통적으로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이라고 하여 성령을 사귐 즉 사랑으로 본다. 성령의 사역 안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아버지로서, 아들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나타난다. 따라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양식 속에 들어 있는 공통적 요인으로서 아버지와 아들과의 교제(communion)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서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연결해 주는 제3의 신적 존재양식으로 나타난다. 바르트의 생각대로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의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공통적인 요인으로 취급된다면 제3의 인격으로서의 성령의 인격적 요인은 손상될 것이다. 실제로 "성령이 주님으로 불리워 지지만, 형용사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중성으로 호칭된다. 이것은 바르트에게 성령의 존재양식이 '중성적'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바르트는 세 존재 양식의 균형을 위해서 "성령도 하나의 독립된 신적 존재양식"이라고 표명하고 있으나 성령을 인격적인 면에서 아버지와 아들과는 달리 취급하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영원한 아버지, 아들, 영으로서의 하나님은 창조자, 화해자, 구원자가 되신다. 하나님의 본질이 하나인 것과 같이 하나님의 사역도 나누어 질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사역이 나누어지지는 않는다 해도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 영으로 구분되는 것과 같이 구분되어진다. 그리고 구분되어 진다고 해서 통일성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를 우리는 'perichoresis(통재. 순환, 상호침투,상호관련)'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존재양식은 서로의 고유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서로 침투하여 서로 다른 존재 양식에 참여하고 그 안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2. 경세적 삼위일체론

상고한 내재적 삼위일체론의 하나님(영원한 아버지, 영원한 아들, 영원한 성령으로서의 하나님)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하나님의 내용을 결정한다. 왜냐하면 내재적 삼위일체론의 하나님의 사역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하나님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하나님을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화해자로서의 하나님,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으로 고찰한다.

 

1)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우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을 뜻한다." 영원한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의 사역은 창조의 사역이다. 영원한 아버지로서의 창조의 하나님은 세상과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을 새롭게 창조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 예수가 아버지로 계시하시는 분은 예수 자신의 죽음에서 알려진다. 이 말은 하나님은 인간의 죽음에서 인간을 지배하시고, 또한 죽음을 넘어서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실존의 원천이시며 우리의 실존을 지탱하시며 우리의 실존을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창조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우리의 아버지가 되심을 알게 된다.

 

2) 화해자로서의 하나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는 아버지를 계시하신다는 명제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자신이라는 명제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 이외에 그누구도 자신을 계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또 하나의 명제를 받아들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인간이라는 명제이다. 이것은 인간은 하나님의 적이 아니라 그와 친분을 갖고 교제를 나눈다는 사실을 가르키는 명제이다. 실제로 예수는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의 정황을 이해하시고 우리의 구원의 도리를 이야기해주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에 의해 파괴된 인간과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시키는 화해자로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셔서 우리를 적대하지 않고 인간과 교제를 나눈 것은 하나님의 화해의 사건이다.


화해는 인간에 의하여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뜻한다. 바르트는 아들로서의 하나님은 우리의 화해자가 되신다고 믿는다. 아들의 사역은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곧 화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하여 우리가 파괴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고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관계가 친구의 관계로 바뀌게 되었기 때문이다.


화해는 창조보다 먼저 올 수 없다. 창조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화해가 있다. 그러나 창조와 화해는 서로 다른 존재 양식이 아니라 하나의 신적 주체가 행하는 두 가지 행위에 불과하다. 이 창조와 화해는 하나의 하나님의 첫째 행위와 둘째 행위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안에서 화해자로서의 하나님을 알 수 있고, 역으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화해자로서 사역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창조자로서의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바르트는 예수의 주권과 하나님의 주권이 동일하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예수의 주권이 창조자로서의 주권과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다. 창조와 화해는 우리에게 전적으로 다른 두가지 사건이다. 그러나 그 근원에선 완전히 결합되어 있다. 창조자와 화해자 사이에는 선후의 차이가 있다 그러나 주권에서 분리되거나 존재에 있어서 다른 존재가 아니다.


3) 구원자로서의 하나님

성령의 주된 사역은 인간을 구원하는 일이다. 인간의 구원을 성취하시는 분은 성령이다. 성령은 피조물에게 나타나서 피조물과의 관계를 통하여 피조물의 생명을 회복시킨다. 인간은 생명을 회복시키는 성령을 통하여 참 생명을 얻게된다. 그러므로 성령은 구원의 하나님이다. 이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는 구분이 되지만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동일한 본질을 가지고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버지, 아들과는 구분이 된다.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인 성령은 인간이 계시에 참여하게 하고, 계시의 말씀을 가르치고, 계시가 현재화되게 하는 능력을 행사하여 인간을 구원한다. 성령은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분이 아니라 아들 안에서 나타난 계시의 실현자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하고 구원을 얻게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이다. 이런 측면에서 성령은 구원자인 것이다.


바르트는 계시를 역사화하는 일 즉 하나님이 예수를 통하여 계시한 대로 인간에게 예수를 주라 확신시키는 일은 성령의 사역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성령의 사역을 하나님의 사역으로 돌린다.

 

3)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세적 삼위일체론의 관계

지금까지 살펴본 내재적 삼위일체론과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상호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가를 고찰하는 것은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을 보다 명확히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제일먼저 이 양자 사이에 대한 바르트의 근본적인 신학적 통찰은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분리시키지 않고 신중하게 구별하는 것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는 동일시되거나 분리되거나 혼동되거나 종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구분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론이요,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이라는 공리를 세운, 현대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는 경세적 삼위일체론과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분리해서 취급하는 것은 잘못된 방법이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경세적 삼위일체론과 내재적 삼위일체론이 하나로 이해되어야 만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사건은 그 사건 이전에 전제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를 계시하는 것으로 이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는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의 반복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반복이라는 말과 일치 한다. 바르트는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반복이라고 말함으로서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세적 삼위일체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사건을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의 계시 사건으로 이해하고, 역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계시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이해한다. 이런 바르트의 이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경세적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이해되고 경세적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내재적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의 이해를 형성하게 되어 그가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를 분리시키고 있다는 의구심을 벗어 던지게 한다.


또한 바르트는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경세적 삼위일체성의 전개의 과정 속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경세적 삼위일체성의 삶의 자리(Sitz im Leben)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된다. 그러므로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삶의 자리로 하고 있는 경세적 삼위일체성 안에 있게 된다. 이 점에 관하여 김균진 교수는 내재적 삼위일체는 경험적 시간 이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적 시간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경세적 삼위일체성은 내재적 삼위일체성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논리를 세워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바르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은 하나님의 존재 밖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 안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된다고 하였다.


둘째로 나타나는 통찰은 바르트는 밖을 향한 계시의 삼위적 구조인 경세적 삼위일체 보다는 신의 본질적이며 내적인 삼위적 구조를 표명하는 내재적 삼위일체를 보다 중시한다는 점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으로 시작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론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재적 삼위일체론에서 시작하여 경세적 삼위일체론에 이르게 됨으로서 위로부터의 신학적 방향을 택하고 있다. 바르트의 삼위일체 신론은 인간의 교만에 의하여 하나님을 현미경에 올려놓고 분석하려는 신학을 거부한다. 이런 그의 신학적 방향은 위로부터의 삼위일체론을 지나치게 추구하고 아래로부터의 삼위일체론을 경시하고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어느 한쪽을 지나치게 경시하거나 추구하는 일은 보다 넓고 깊은 차원에서의 하나님 이해를 위하여 장애가 될 수 있다. 어느 한쪽만을 인정하거나 경시하면 성서적 삼위일체론에서 떠나 이단적 삼위일체론이 되기 쉽다. 예를 들어, 유일신론을 너무 강조하다 보면 아들과 영의 신성을 부인할 가능성이 있게되고, 유일신론을 너무 비판하다 보면 삼신론에 빠지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둘을 시간적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된다. 이 둘은 언제나 동시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사역과 존재 안에서의 구별이다.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역사적으로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에 기초하여 있기 때문에 바르트의 하나님은 형이상학이나 신비주의의 대상이 아니라 역사의 지식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재적 삼위일체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자와 화해자와 구속자로 나타난 경세적 삼위일체론도 인정해야 한다.


몰트만은 경험으로부터 신학을 시작한다. 그는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우리로부터, 우리를 위하여 고통을 겪으신다고 말한다. 이런 하나님의 경험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하신다. 방법론적으로 몰트만의 사고는 변함없이 일반적인 것에서 특별한 것으로 이동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자연신학을 신학에 필요한 서론으로 수용하고, 창조의 의미를 하나님의 직접적인 지식으로부터 연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연으로부터 연역한다. 몰트만에게 하나님은 세계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하나님이 사랑이라면 그는 사랑하기 위하여 고통을 요구한다. 하나님은 세계와 인간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세계에 대한 아이디어는 이미 아들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에 본래부터 있는 것이다. 몰트만의 전반적인 신학은 상호조건의 원리에 의해서 좌우된다. 십자가의 사건 속에서 경세적 삼위일체와 내재적 삼위일체는 동일시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통을 극복할 수 없다. 왜냐하면 고통 그 자체가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을 둘러싸고 있는 원리이기 때문이다.


몰트만도 원칙적으로 라너의 공리에 동의한다. 몰트만은 "삼위일체가 가지고 있는 내재와 경세의 구분은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 안에 있어야 하며, 자신에 의하여 그 구분이 이루어져야지 밖에서 강요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다 몰트만은 이 양자간의 관계를 종말론적으로 이해한다;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구원의 경험이 완결되고 완성될 때, 그 자체가 내재적 삼위일체로 완성된다.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될 때, 경세적 삼위일체론은 내재적 삼위일체 안으로 승화되며 초월적인 것이 된다".


판넨베르크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을 한다. 그는 오늘날의 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을 전제할 수 없기 때문에 성육신은 기독론의 출발점이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런 생각은 전에 존재하던 내재적 삼위일체를 제거하는 것이다. 판넨베르크에게는 인간 예수로부터 떠나서 삼위일체의 이위((the Second Person of the Trinity)를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상상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재적 삼위일체는 단순히 선존재(pre-existence)로부터 실체(reality)를 구별하기 위한 보편적인 종교적 시도를 의미하는 은유(Metaphor)에 해당되며, 어떤 참된 의미도 지닐 수 없다고 본다.

 

 "예수와 하나님과의 일치도 소급적으로 예수의 부활에 대한 조망으로부터 결정된다. 예수의 부활 사건을 떠나서 하나님과 이 사람 예수와 일치한다는 것은 처음부터 진리일 수가 없는 것이다." 부활은 예수가 부활 전부터 그리고 영원부터 존재하였다는 것을 계시했다. 판넨베르크가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오늘날 기독론은 예수의 신성을 추정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판넨베르크에게는 계시와 부활은 성육신과 부활의 역사적 사건의 진정한 의미를 구술하는 원리가 된다. 이로서 참인간이시고 참 신이신 예수의 실체를 떠나 있는 어떠한 계시도 기독론의 진정한 의미를 얻지 못한다. 이런 판넨베르크의 입장은 내재적 삼위일체 없이 예수와 하나님과의 일치, 그러므로 경세적 삼위일체를 규정하고 이를 통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로 나아가고자 하는 것이다.


상술한 바와 같이, 라너, 몰트만, 판넨베르크는 기독론과 삼위일체론의 기초로서 어느 정도의 자연신학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르트는 신학의 표준이 그리스도라면 신학은 이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경험에서 출발될 수 없고 신학은 하나님의 선재를 새롭게 정의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로부터의 신학을 하는 바르트는 판넨베르크에 대하여 아래로부터의 신학 추구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고 비판하였다.

 

 

Ⅴ. 바르트의 삼위일체론 평가

 

바르트의 신학의 특징은 인간의 도덕과 역사 그리고 합리성에 근거한 신학을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에 근거를 둔 신학으로 전환한 것이다. 바르트는 역사주의, 윤리주의 실존주의를 중심으로 하는 인간 중심의 신학을 배격하고 신정통주의라 불리우는 하나님의 말씀 중심, 그리스도 중심, 계시 중심의 신학을 수용하여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강조하고 신학을 인간의 자연적 요소를 근거로 하는 아래로부터의 신학이 아닌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은혜와 믿음을 근거로 하는 위로부터의 신학을 확립하였다. 이런 신학적 방향으로 인하여 바르트는 자연신학을 수용한 그의 동료 신학자 에밀 부루너, 실존주의 신학자 불트만과 틸리히를 그의 신학 파트너로 삼지 못하였다.


바르트는 그의 삼위일체론도 그의 전반적인 신학의 흐름에 따라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스도 그리고 계시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려는데 봉사하는 교리라고 생각하여 인간의 사건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사건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는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없고 오직 하나님 측으로부터 먼저 자신을 개방하시는 사건에 의하여 하나님의 지식에 이른다는 생각에 치우쳐 인간 스스로 하나님의 지식에 이를 수 있다는 모든 신학적 통찰을 파기한다.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지나칠 정도로 강조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에 문제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첫째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일신론에 가깝다는 지적이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양태론적 단일군주론에 빠져들고 있다는 비판이 있다. 그는 인격이라는 말 대신에 존재양식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세번의 반복 가운데 있는 한 하나님을 강조하는 기독교적 일신론의 사상을 연상하게 한다. 즉 삼위성과 일체성 가운데서 일체성을 강조하는 신론이라는 비판을 받게된다. 특히 persona 대신 modus로 대치하여 사용한 것 때문에 그의 삼위일체론이 양태론적 군주론이라는 비판을 받게된다. 실제로 modus는 존재 양태를 설명하기는 하나 고유성과 독립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삼위가 하나의 본체를 가지고 있다는 subtantia의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기 때문에 modus라는 용어 사용에 많은 문제점을 남긴다.


바르트가 삼위일체론의 기초를 계시에 둔 것과 하나님의 일체성을 강조한 것 등을 통하여 나타나는 현상은 하나님의 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이다. 몰트만도 "바르트는 신적 주권을 삼위일체론에 앞에 두며, 삼위일체론을 그 주권 안에 있는 주체성을 확보하고 해석하기 위하여 사용한다"고 지적하였다. 비록 바르트 자신이 군주신론을 따르지 않고 있다고는 하나 그의 전체적인 삼위일체론의 경향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이 아들과 성령의 우위에 있다. 이러한 경향은 경세적 삼위일체론을 경시하고 내재적 삼위일체론을 우대하게 만든다.


분명히 바르트는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삼위일체 교리를 이용한다. 바르트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마치 삼위일체론이 하나님의 주권에 예속되는 것처럼 취급된다는 비판을 몰트만으로부터 받고있다. 이런 의미에서 몰트만은 바르트를 유일신론자로 본다.


둘째로,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의 사귐 혹은 사랑으로 취급하는 것은 성령의 인격성을 해친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실제로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을 공통적으로 관계 시키는 사랑 혹은 사귐으로 이해하게 될 때 성령은 하나의 힘 또는 관계시키는 능력이라는 이해를 유발시켜 성령이 하나의 인격체라고 보는데는 무리가 있게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바르트는 성령의 인격성을 보다 분명하게 밝히기 보다는 오히려 침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몰트만은 바르트의 이해와 같이 성령을 분리된 아버지와 아들을 관계시키는 사랑으로 이해할 때, 성령은 하나의 힘 내지 관계로 보게되어 성령을 인격으로 볼 수 없게 된다고 보면서 바르트의 삼위일체론은 삼위일체가 아니라 이위(二位)일체라고 비판한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을 하나되게 하는 신적인 존재의 양태이기도 하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신적인 사랑 안에 있다. 이 신적인 사랑 안에 있다는 것은 고립적이며 개인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적 관계에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 양자는 서로 종속되거나 대립하지 않으면서도 고유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이 동반자의 관계를 구체화시키는 세번째 양태가 성령이다. 이 성령은 아들의 십자가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을 증거하여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그 길로 인도한다.

Ⅵ. 나오는 말

 

바르트는 삼위일체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진리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신앙의 진리라고 본다. 즉 성령을 통한 신앙을 통해서 만이 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없이는 이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 그런 까닭에 이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이외에 다른 계시나 인간의 어떠한 노력을 가지고 터득할 수 없다.


바르트에게 신학은 이해를 추구하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성령에 의해 시작되고 발전되고 완성된다. 하나님은 역사적 예수를 따라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역사적 요소와 일치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신앙 안에서 현존하고 신앙 안에서 간접적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고 인식한다.


바르트에게 느끼는 인상은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를 강조하며 그리스도 계시로 시작해서 내재적 삼위일체를 기술하고 그 다음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의 반복이라고 하여서 이 양자를 구분은 하되 분리하지 않는다. 영원한 삼위일체 하나님을 계시한 그리스도의 계시가 세상과 인간에게 주어진 사건인 한, 이것은 지상의 사건이요 역사의 사건이다. 또한 역사와 세상의 사건인 한 이것은 이성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 된다. 따라서 내재적 삼위일체성은 경세적 삼위일체성으로부터 추론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에 의해 실행된 계시로부터 전개된 그의 삼위일체론은 상기한 추론의 방향성을 전혀 고려하고 있지 않다. 이런 위로부터의 신학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고 육성되어질 때 아래로부터의 신학은 그 자리를 잃게 될 것이다. 경세적 삼위일체론으로부터 내재적 삼위체론으로 가는 길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만약 불가능하다면 이런 방향에 서있는 신학은 기독교 신학에서 어떻게 자리 매김을 할 수 있을까?
기독교 역사를 통해서 신학은 이성과 신앙의 변증법적 논리에 의해서 발전하여 왔다. 한 명제는 다른 명제에 의하여 거부되고 종합되기도 하면서 새로운 명제로 변화하고 발전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경세적 삼위일체론이 경시되거나 무시되지 않고 오히려 촉진되고 발전되어질 때 내재적 삼위일체론은 그 신비성을 벗고 보편성의 옷을 입을 수 있게 된다. 이로서 성육신의 진리는 우리에게 더욱 친근하게 인지될 것이다.  김영선(협성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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