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신학은 비성경적․ 언어유희-서철원 교수(총신대신대원))
현대 후기 세계와 새 신학의 시도
이성을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지도자로 삼기를 그렇게 열망했던 이성 신봉이 무너져 내렸다. 모든 것은 역사의 산물이어서 상대적이므로 절대적이고 불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르네상스 이래 쌓아온 근세의 세계가 무너져 내려 해체에 이르렀다. 초월의 세계는 완전히 단절되어 하나님은 인류의 생활에서 완전히 거세되었다.
근세 세계가 해체된 상태가 포스트모던 세계이다. 아직 새로운 세계는 옛 세계를 대치하도록 완전히 출현하지 않았다. 이 근세 후기 혹은 현대 후기 상황에서 시도되는 신학이 포스트모던 신학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형태의 신학은 시도는 되었어도 아직 체계는 형성하지 못하였다. 포스트모던 신학은 기독교 신학을 전체로 번역할 철학 체계를 만나지 못한 상황에서 체계 구성보다는 현대 사회 생활에서 문제시되는 구체적 상황을 신학 작업의 대상으로 삼는다. 체계 구성의 해체가 포스트모던주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현대 신학은 18세기 이래 복음을 철학 체계에로의 번역을 신학 작업의 원칙으로 삼아 20세기 중엽 실존주의에로 번역까지 복음의 번역을 반복하였다. 이 번역으로 합리적 신학을 목표하여 초자연의 요소를 전부 배제하고 재해석하므로 자연주의 신학을 계속하였다. 포스트모던 신학도 자유주의 신학의 연속이다.
포스트모던 신학은 체계적 번역은 아니어도 현대세계의 주요 지적 틀을 이용하여 새해석을 시도해 언어분석과 개념의 형태, 여성해방을 위한 해방 신학적 성경 해석, 과정 신학의 연속과 종교다원주의 상황을 위한 종교신학 등으로 표현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포스트모던 신학을 규정지을 수 없으므로 이 새 신학이 전개되는 신학적 상황을 살피므로 새 신학에 접근할 수 있다.
비신화화 기반에서 진행된 신학
근세 신학은 칸트 철학의 규제 아래 본격적으로 내재 신학이 되었다. 칸트 후에 신학 활동을 시작한 슐라이어 막허는 기독교 신학 내용을 전적으로 새롭게 해석하여 불트만의 용어대로 비신화화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으로서 성육신하신 것이 아니고 무한한 신의식을 가졌으므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그 본질에 있어서 예수는 한낱 사람일 뿐이다. 19세기의 모든 신학은 다 이 내재화의 길을 걸어 기독교에서 초월의 요소를 다 제거하였다. 전세기 마지막 대신학자라고 할 릿츌은 예수가 그의 완전한 윤리 때문에 하나님으로 가치 판단되었다고 주장한다.
20세기에 이르러서 비신화화 작업은 더 깊게 계속되었다. 브룬너는 하나님의 성육신이 불가능함을 강조하였다. 동정녀 탄생은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하고 또 두 보모에게서 출생하지 않으면 불완전한 인성이기 때문에 예수는 한낱 인간으로 출생한 사람이다. 칼 발트에게 있어서 성육신은 변증법적으로 성립된다. 예수는 일정한 시간과 공간에 나서 살고 활동하다 죽은 사람이다. 그는 한낱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있었다는 것이 다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땅에 내려와 여인의 몸에 들어가 열달 있다가 나왔고, 세상 죄를 지고 십자가에 죽었다가 삼일만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시체가 살아났다는 것은 다 신화라는 것이다. 단지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은 사실로 받는다. 부활은 사실로 객관적 세계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고 예수의 부활을 선포하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그 믿음으로 부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서 나아가 틸리히는 기독교 신학을 하이덱거의 존재론에도 번역하여 하나님을 존재의 근원, 존재의 세력, 혹은 존재 자체라고 하므로 인격적 하나님을 완전히 거세하였다. 틸리히는 이 자기의 신이 기독교 하나님과 다른 신들을 다 합친 것보다 크다고 주장하는데 종교다원주의자들과 포스트모던 신학도 다 이 신관에 포함된다. 틸리히는 이런 신학의 변용으로 60년대 사신 신학을 출산하였는데, 현금 새 신학자들도 동일한 신관을 견지한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의 신은 동일하고 모든 종교들은 구원에 이르는 길들이라고 주장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연장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18세기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전통적 기독교 신학을 이성에 맞게 재해석하여 합리적 신학이 됨으로써 기독교에서 초자연적 요소를 다 제거하였다. 첫째로 삼위일체를 거부하여 구약의 유일신 교리로 돌아갔다. 그리하여 삼위일체를 말할 때는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로서 인간 예수, 그의 죽음에서 나온 감화력으로서 영을 말한다.
또 그리스도의 양성 교리를 배척하여 그리스도의 인간성이 그의 인격이므로 하나님일 수 없다고 하였다. 현금 새 신학은 예수는 사람일 뿐이고 그에게서 그리스도 곧 구세주가 구현됐다고 본다. 그만이 유일한 구세주가 아니고, 더 더구나 하나님의 성육신으로서 그리스도는 그들의 언어밖에 속하는 신화이다.
또 자유주의 신학은 대속교리를 배척한다. 죄용서가 하나님의 은혜이면 죄과를 지불할 필요가 없고 죄과를 지불하면 하나님의 용서일 수 없다. 예수의 죽음은 단지 도덕적 감화를 위한 일일뿐이다. 지금 현대 후기 신학에서 대속교리는 아무런 쓸모없는 사변일 뿐이다. 불트만의 주장대로 예수의 피가 무슨 마력이 있어서 죄를 씼느냐는 것이 이들의 입장이다.
근세 신학이 맨 먼저 공격한 것이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이다. 성경도 다른 책과 동일한 역사적 산물이므로 동일한 역사적 비평방법을 적용해야 한다.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진보한 이방 종교 사상들을 정화하여 담고 있는 것뿐이다. 특별 계시를 부인하므로 이성 일반에 접근 가능한 일반 계시를 취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도 다 하나님의 계시란 전제로 포스트모던 신학이 신학하며 종교간의 대화와 공생을 목표한다. 절대 종교란 없다. 자유주의가 성경적 기독교가 아님은 동이 서에서 먼것처럼 멀다.
18세기 이래 자유주의 신학은 당대의 주도적 사상 체계 곧 철학으로 기독교를 번역하여 문화 산물의 일부로 만드는 것을 그 근본으로 삼았다. 사상 체계로 기독교를 전체로 번역하여 새 신학 체계를 세우는 일은 포스트모던 신학이 시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차이 외에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홍정수의 포스트모던 신학이 보수 신학일 수 있다는 주장은 무식한 궤변이다.
언어게임의 일종
후기 빗트겐슈타인은 언어가 대상과 상응해서 실재의 상이어야 한다는 초기 주장에서 돌이켜 언어는 생활 체계에서 사용되므로 생명을 갖는다고 하여 종교, 예술, 윤리적 언어들에게도 자리를 배정해 주었다. 그러므로 종교․언어는 진위를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그 언어를 사용하는 종교 공동체가 있으므로 생존권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종교 공동체가 사용하는 언어는 그 언어가 지시하는 것으로 보이는 실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포스트모던 신학이 노리는 것은 언어놀이일 뿐이다.
예일대의 죠오지 린드벡은 그의 「교리의 본성」에서 이것을 분명히 한다. 교리는 교회의 언어 사용을 규제해 주는 규칙일 뿐이다. 삼위일체 교리와 기독론 교리는 그 교리들이 말하는 실재와는 무관하다. 모든 종교는 다 동일하며 하나의 궁극적 실재에 이르는 길인데, 그런 교회 주장들이 언어 밖을 벗어나서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인가?
단지 신학이 할 일은 서구인들의 문화의 근본을 이룬 성경 언어를 다시 말하도록 하는 일을 그 임무로 삼는다는 것이다. 성경 언어를 사용하는 인구를 늘림으로 기독교 인구를 늘린다는 것이다. 내가 성경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또 내가 논어와 맹자들의 언어를 많이 활용한다고 유교인이 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주 예수를 믿는 믿음과 변화 없이 언어만 사용해도 기독교인이 된다면 나는 하나의 교양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일 뿐이다.
홍정수가 이 언어 놀이에 근거하여 성경 언어와 과학 언어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하는 주장은 칸트의 현상계와 예지계의 두 세계를 바꿔 말한 것뿐이다. 기독교는 역사적 종교이다. 창조와 역사 내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 어찌하여 과학만 실재에 대해서 마하고 성경은 실재에 대해서 분명하고 확실한 지식을 말하지 않는가? 성경은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 해석이다. 현금에 이르러 과학은 과학자들의 공동체의 언어일 뿐이지 실재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홍정수의 부활론은 후기 불트만 학파의 언어 사건을 넘어서서 부활 선포와도 상관없는 순전한 언어유희이다. 어떤 서구 신학자의 ㅂ활 해석이 바른 양 그대로 받아들여, 한역적을 부활시켜 선인들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본다는 괴이한 언어 놀이를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예수의 부활은 객관적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도 아니고 자유주의자들의 일반 견해 곧 언어에 의한 주관적 사건도 거부하고, 해괴한 말장난을 한다. 그런 말장난으로 천지개벽이 일어나는가? 불교도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을 그렇게 훼방할 수 있겠는가?
여성 해방신학으로 표현
여성 신학자들에 의하면 성경이 가부장제 시대에 기록되었고 또 그런 자들에 의해 형성되었으므로 성경이 여성 억압적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남성 우위와 여성의 압제를 정당화하는데 성경이 큰 몫을 하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아버지로 표현된 남성적 상징들을 여성하나님으로 바꾸고, 예수도 어머니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스도도 크리스타(Christa)로 바꾸므로 여성 해방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가부장제는 성경만의 일이 아니고 모든 종족들의 생활체계이다. 기독교가 여성 해방을 가져와 반노예적 신분에서 남성과 동등 인격으로 대접하게 되었다. 이 여성 해방은 기독교가 인류에게 가져온 혁명이다. 그런데 여성이 가정에서 돕는 배필이 된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의해 섭리된 것으로 인류 사회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이다. 현금 진행되는 여성해방운동과 신학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전적으로 배치된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대로 살 때에 참 여성 해방이 가능하다. 예수는 여성 해방을 가져왔지만 해방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가정 제도를 성화하여 바른 인류 사회가 되게 하셨다. 그것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심으로 이룬 결과이다.
포스트모던 신학은 종교 신학으로 진행
종교 다원주의는 바티칸 제 2공의회에서 타종교들과의 대화를 시작하기로 결정하므로 본격화되었다. 종교 다원주의는 절대적인 종교나 유일한 구원 종교는 하나도 없고 ㄷ 상대적이며 본질에 있어서는 모든 종교들이 다 동일하다는 주장으로 집약할 수 있다.
종교 신학은 한국에서 변선환이 주장해 불교에도 구원이 있고 부처도 구세주라고 고백되었다.
유동식은 기독교를 한국의 무교로 번역하기 위해 풍류도에 호소한다. 풍류도는 무당 종교이다. 유불선 종교를 합친 것인데, 기독교에 의해 한 멋진 삶의 풍류도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무교는 귀신들의 역사로 이루어진 종교인데 기독교로 이 무당에서 나온 풍류도를 이루어 한국적 시학을 한다고 주장하는 어처구니가 신학이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60년대 삼위일체 교리를 단군 신화로 풀은 윤성범의 발상과 동일하다. 그리스도와 벨리알을 동일선상에 놓는 만용이다.
홍정수는 종교 신학으로 증산교의 해원상생과 원불교의 일원상 사상이 기독교의 화해와 동일한 사상이므로 상생 신학이 한국 신학이 나갈 길이라고 주장한다. 유사한 것을 동일한 것으로 아는 착각이 성경의 기독교를 한국의 토착 사상과 일치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우리 기독교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육신이고, 그러므로 세상의 유일한 구주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자신을 창조주로 계시하신 하나님이 실제 세상의 창조주이시고 구속주이심을 믿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최종 계시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참 구원이고 그리스도만이 세상의 유일한 구주이다.
이 글은 1992. 10.3*제 946호) 기독신보, 특별기획, 종교다원주의․ 포스트모던 신학의 실상을 파헤친다②를 발췌한 것입니다.
출처: 보길예송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김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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