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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문제 -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by 【고동엽】 2008. 6. 21.
 

              한국교회 문제 - 한국교회의 무속적 요소들
예수 믿는 것과 물질 축복을 정비례한다는 기복신앙

 

현재 21세기의 한국사회는 무속으로 어울려진 희귀한 문화현상을 보이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인 예술인 백남준의 예술이 샤머니즘과 통한다는 논의가 일고 있다. 우리 사회는 무속이 마치 오늘날 미풍양속인 것처럼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로 우리의 시선을 속이고 있다. 이런 모습들은 국제회의 및 제 의식 그리고 대중매체를 통한 전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몇 년 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주최한 샤머니즘 국제대회에서 학자들이 샤먼 유산의 마지막 발견이 한국이 있음을 직시하면서 한국의 샤머니즘의 보존을 위한 연구가 심도 있게 발표되었다. 과거 역사 속에서 무속으로 종교화된 한민족 삶이 포스트모던 시대에 새로운 문화를 입고 서서히 부활하고 있다.

 

안타까운 현실은 한국의 사회 단체들의 행사에서 진혼굿이 자연스럽게 수행한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일간지들이 미신을 조장하는 무속광고를 여과 없이 자유롭게 싣는다. 심지어 휴대전화나 무선 인터넷 서비스를 통한 무속인들의 활동은 어떤 상담자보다도 인기가 대단하다. 서울 강남의 어떤 동네는 무속왕국으로서 심지어 신세대까지 무속인들이 공략하는 모습이 매스컴으로 통하여 방송되었다. 무속이 판치는 한국사회에서 교회는 미신을 타파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참된 진리를 바라보게 하며, 참된 하나님을 믿도록 역할을 할 시대가 되었다.

 

샤머니즘(Shamanism)에서 샤먼이란 말은 시베리아의 퉁그스족의 언어인 saman(주술사)에서 유래했는데, 무녀 예언자 및 의사를 뜻한다. 만주족의 살만과 인도의 sramana(산스크리트어로 승려)은 동일 계열의 어원으로 알려졌다. 샤먼의 역할은 병마를 축출하고 재난과 불행을 예방하는데 주목적이 있다. 결국 현재적인 실리 본위의 원시적 종교형태이다.

 

한국 무속의 기원이 언제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주 오랜 고대사회 때부터 한민족의 주요한 신앙형태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학자들에 의하면 국조 단군이 무당이라는 설도 있다. 무속이 문헌상에 분명히 나타나는 것은 삼국시대로서, 김대문에 의하면 신라 2대왕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은 왕호(王號)이자 무칭(巫稱)을 의미하며, 이 외에도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단편적으로 백재, 고려의 왕들이 무당을 이용한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이 한민족의 오랜 역사를 가진 무속은 오랜 세월의 흐름에도 불구하고, 한때 멸종한 듯 하다가 최근에 한국의 불황과 직업의 불안정 속에서 대다수 사람들과 특히 신세대 젊은이들 속에서 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런 무속이 난무하는 시대 속에서 이런 무속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운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이런 요소는 전도에서 나타난다. 전도에 있어서 기독교를 기복적인 종교로 오해시켜서는 안 된다. '예수 믿고 복 받읍시다'라는 말을 흔히 듣는데,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많다. 마치 기독교가 물질적인 축복을 제공하는 샤머니즘적 종교로 인식되기 쉽다. 성경이 말하는 내용은 예수를 믿으면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올바른 관계가 형성되어 이웃과 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호의 무속적인 위험은 예수를 믿는 것이 물질적인 축복과 정비례한다는 믿음이다. 예수를 잘 믿으며 잘 살고 내 영혼이 매사에 잘된다는 의미로 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런 신앙은 현세 중심적 기복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종류의 축복을 강조하는 신앙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따라오는 영혼의 투쟁, 질병을 통한 하나님의 섭리, 가난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찾아 볼 수 없다. 영적이며 종말론적인 신앙을 강조한 바울의 경우는 이런 모습들이 오히려 더 많이 나타난다.

 

어떤 교회들은 성령의 역사와 샤머니즘적 형태와 차이점이 힘들다. 성령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으로서 인격적이시며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카리스마를 강조하는 교회에서는 주로 성령은 병을 고치며 신비한 은사를 제공하는 영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분으로만 이해한다. 무당의 역할이 병든 자를 고치는 주된 임무와 마찬가지로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병 고치는 일에만 제한시킨다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성령이 오셔서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제한하는 것이 된다. 이런 성령 하나님의 제한은 성령의 충만함이 인격적이며 형제를 사랑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로 이어지는 것을 망각하게 한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일을 기복적 신앙으로 강조하는 경향이 많다. 이런 배경은 목회자가 건전한 신학을 알지 못하는데서 기원한다. 만일 어떤 성도가 교회에서 물질적 드림이나 봉사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이 물질적 축복이 자신을 위하여 임한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에 가깝다. 아무 조건 없이 감사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참된 헌신이다. 어떤 대가를 기대하면서 자연에 속한 물질을 드린다면 로마 카톨릭교회의 실수를 다시 한번 하는 것이요 제물을 통하여 현세에서 복을 얻으려는 무속적 기복신앙이다.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과 봉사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건설을 위한 일이다.

 

안명준 교수 / 평택대학교 신학전문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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