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바른 이해편◑/신학.목회.혁신

종말론적 예수의 가능성

by 【고동엽】 2025. 1. 19.
【종말론적 설교의 핵심 증언 】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이 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영혼을 살리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

   Memento moritis【죽음을기억하라】
   Memento domini【주님을기억하라】  
   Eschatologicus vitae【종말론적인 삶】

인간은 어리석게도 가시적이고 시간적인것만을 붙잡기 때문에 불가시의적이고
영원한것을 놓치므로서 하나님의 역사는 침묵하게 되었고(시83:1),  
세상적인 모든 온갖것들이 무가치의 법칙 아래로 들어오게 됐다(사2:22).
.
인간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거룩성을 낚아채 자신들의 척도에 알맞게 치수를 맞추고
(시42:2),  온갖 심혈을 기울여 보이지 않는 기념비를 세우며 자신들의 치적에 날개를 단다(고전1:29).

그러나 하나님의 영원성은 모든 시간성의 원천이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할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시간의 유한성을 언젠가는 죽음으로서 필히 경험한다(히9:27).
죽음은 유한한 인간 생명의 시간성의 끝이면서도 박탈이다.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감히 누구도 넘볼수 없는 이세상의 최고법으로서 해소불가한 대립이요,
우리삶의 지울수없는 표지이며, 우리의 현존과 상존이 지니고있는 수수께끼의 본질이요 총체이다.
왜냐하면 누구도 비켜갈수도 없는 신적인 정지로서,
우리삶의 법으로서 죽음은 항상 우리보다 먼저 현장에 와있기 때문이다.

죽음에서 인간이 만나는 것은 죽음자체가 아니라
 죽음자체를 넘어 삶과 죽음의 主인이시요 시간의 주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두려워 할 것은 죽음에서 우리를 만나시는 하나님이시다(요5:45).

허지만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소망하고 확신하고 무한히 기뻐해야 할 것은
유한한 인간이 생의 종말을 맞이한 이후 생명의 주이신 하나님이  
인간을 영원한 시간 속으로 받아주시고 새로운 시간성으로 덧입혀주시는 그 은혜로운 초청 때문이다(요14:3).
 이 은혜로운 초청에 내 영혼은 벅찬감격속 전률함이다 【 사 61:10 】 .

인간은 어느 누구나 할것없이 생의 애착가운데 영원의 연장을 갈구한다.  
인간은 이 세계의 권좌에 하나님을 높이 올려 놓은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자기 자신을 염두에 두고 있고 인간 자신을 정당화하고 즐기고 숭배하고 있다(살후2:4) .
실지 한국교회 1만명이상 출석하는 19개의 교회도 또 그 이하교회들도 이 치적영광에서 자유롭지 못한다.
.
율법안에 사로잡힌 너 한국교회는 어디에 나의 가시면류관과 십자가와 못과 채찍을 갖고 있느냐?'
하나님은 오늘도 질문하신다. 교회콘크리트건물의 거룩성의 공간화된 성전, 레위인의 십분의 일 등.
십자가를 우회하며  비켜가면서까지 옛 언약인 율법 통한 더 많은것, 더 높은것,
더 나은 물질적 풍요로운 축복만을 갈망하고 목적한다면 결국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나치게 될것이고,
지금 누리고 있는 그 은혜로움도 지나쳐 버리고 결국에는 하나님에게까지도 멀어지게 될것이다.
오직 율법이란 계시 자체가 아니라 단지 세상적으로 제약된 부정적인 계시의 각인(הרושם)일 뿐이다.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겉모습이란 있을 수가 없고
하나님은 가면도 보지도 않으시며
하나님은 여기에 속지도 않으시며, 그리고 또 그리스도는 연출의 대상도 될수 없다.
하늘과 땅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이 일단 입을 열면 하늘이  갈라지고, 무덤들이 입을 벌리고(마27:52),
태양은 기베아에 머무르고, 달은 아얄론 골짜기에 머무른다(수10:12).

하나님의 통치역사에 있어서 세상 안에서의 구원,
심판가운데서의 무죄선고,
시간속에서의 영원,
죽음 가운데에서의 새생명,
 이 모든것들에 대한 복음의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터(고후3:11) 닦아져 있기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으로서 이미 오래전에 선포되어졌던 것이며,
 역사의 의미로서 무르익은 수확이며,
 영원의 씨앗으로써 성취된 예언이다(렘33:2).
 한방울의 영원이라고 하는것은 시간의 지배아래있는 사물들의 망망대해보다 더 무게가 있다(단7:18).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이 갈라진 사이를 연결시키는 그리스도의 선물로써 존재한다(엡2:8).
이 복음은 자칭 자신 스스로 진리들이라고 하는 그 어떤 다른것들과 나란히 병존하는
또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오로지 이 은혜의 복음은 그것들을 질문대 앞에 이끌어 세워 놓는다(계2:2).
 결국 예수 구원자로부터 소외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결코 비켜갈수 없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인간에게 향해진 하나님의 말씀이요,
하나님에게 향해진 질문이면서, 하나님의 대답이다.
예수그리스도는 우리 삶의 한계를 넘어서는 발걸음이요,
우리 삶이 갖고 있는 의미의 전도이고,
새롭게 창조된 참된 우리 자신의 현실성의 표출이다.
아담이 서 있는 그 곳은 언제나 그리스도의 빛에 관한 증언이다(행20:21).

인간이 제시하는 선과악 저편에 하나님의 팔이 움직이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편에 서 계시지 않으면 온갖 무가치한것들이 우리를 대항한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은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골3:3).
부활은 계시이며 그리스도 예수의 발견이고 하나님의 현현이며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 앎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필연성의 등장이고
예수 안에서 알려지지 않은자, 예수를 시간의 끝으로서, 승리이다(요11:25).

부활 가운데서 성령의 새 세계는 육의 옛 세계와 접촉한다. 마지막 심판후 부활의 그 날은,
인간의 새로운날, 곧 이 빛을 가져다 주는 그리스도 예수의 날이다(막13:19).

그날은 모든 시간으로 하여금 영원으로 전환하게 하며, 인간의 감취어진것을 드러내고,
우리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들여다 보여졌다는 것을 계시하는 날이기도하다.
하나님의 심판은 역사의 끝이지 또 하나의 새로운 두번째 역사의 시작이 아니다

십자가앞에서 율법적 모든 행위야말로 인간에게 그 어떤 안전 보장도, 평안도, 변명도, 가능하게 하지 않는다.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가 이를 증언한다.
율법은 바로 그 율법 아래 있는 있는 자들을  창조주와 피조물사이에,
영과 육 사이에 입을 벌리고 있는 심연앞에 이끌어 내고 있을뿐이다(갈5:4).

휴~~~!  이 신비롭고도 최초인 창조적인 발걸음,  곧 아브라함이 힘 있게 내디뎠던 그 발걸음,
오직 하나님만이 할수있는 그 믿음의 발걸음, 저 심연을 넘어
옛 창조로부터 새로운 창조로서의 발걸음으로 내딛게 한다.
그리스도 바로 그가, 새로운 인간인 우리 곧 우리가 서 있을수 있는 그 곳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옮겨 놓으셨기 때문이다(골3:10).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의 바로 저편 넘어
 곧 율법이 지시하는 성전, 안식일, 제사장, 할례, 제물, 레위인, 거제인 십일조까지도  
 여러 다양한 옛것들의 모든 것 저편에서 시작되는 나라이다(골2:14).

 예수의 발걸음은 본질적으로 이 모든 옛 것들을 사열하며 지나가는 발걸음이고,
 근본적으로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곧 죽음이라고 하는 관점아래
 전방배치된 모든 몽학 선생인것들의 열병이다(히 7:18.19).

예수그리스도는 이 땅에 여러 모든 가능성들 가운데 있는 가능성이며,
불가능한것들의 모든 징후들를 자신안에 운반하고 있다.
역사가운데 역사적이고, 시간가운데 시간적이고, 인간가운데 인간적인것이 그의 생애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은 의미로 가득찬 역사요, 근원과 종말에 대한 지시로 가득찬 사물성이요,
영원에 대한 기억으로 가득찬 시간성이요, 말씀하시는 신성으로 가득찬 인간성이다.

 어떤 것이 하늘의 세계로부터 유리되어 빛을 주니 이것이 한밤중에 비추인다.
이로서 하늘에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는 기뻐하는 자들가운데 화평이다.

옛 인간과 새로운 인간의 동일성은 역사적인 십자가 사건에서 성취되었고,
그 안에서 새롭게 창조된 나는 피할수없이 그의 그늘밑에서,
그의 세계를 접촉하는 창조의 힘, 구속의 힘으로서  하나님나라를 소유한다(딛3:5).

하나님만이 바로 우리의 본질이요 총수이시며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우리의 모든 각개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변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안에 계시로 인해서, 유대인에게는 꺼리낌이 되셨고,
헨라인에게는 미련한것 처럼 보이셨지만(고전1:23),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안에서  영원히 침묵하는자로서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믿음은 하나님앞에 서있는자의 회개이며, 값진 진주를 얻기 위하여 가난하게 된자,
그리고 예수 때문에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자의 근본적인 새로운 방향설정이기도하다.

 그리고 믿음은 그 신실 자체이다. 믿음은 거듭거듭 하나님앞에 마주하며,
모든 인간적인 긍정과 신념과 업적과 배후, 그런것들 위에 있다.

 따라서 믿음은 결코 종결되지 않으며, 손에 쥐어지는것도 아니고 보장 되어져 있는것도 아니다.
믿음은 심리학의 견지에서 볼때 새롭게 불확실한 것 텅빈공중으로의 도약이다.
혈과육이 그것을 우리에게 지시하지 않는다(마16:17).
그런 의미에서 어제 내가 듣게 되었던 그 말씀을 오늘 새롭게 듣게되며,
내일 또 다시 새롭게 들어야만 할 것이다(롬10:17).

믿음은 항상 최초의 것 곧 유대인나 헬라인, 남녀노소 할것없이, 많이 배운자나 못배운자,
설교하는자나 설교듣는자, 교회내의 항존직이나 비항존직 누구든지 공동의것으로서  종교,
도덕,  삶의 경험,  견식과 사회적위치, 이 모든 것들의 차이를 가로질러 뚫고 나간다.

믿음은 누구에게나 쉽고도 어렵다.
믿음이 모든사람에게 가능한 것은 그것이 또한 모든사람에게 대하여 똑같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율법 곧 성전, 안식일, 제사장, 할례, 제물, 레위인, 거제인 십일조까지도 포함하는  
 여러 다양한 옛것들이 우리믿음 한가운데 개입해서 우리의 생활속 프리즘안에서
 깊게 굴절되고 채색된채 신적인 현재와 계시의 빛으로 대다수 한국교회에 깊이 자리하고 있다.

 허지만 하나님은 창조자와 구속자로서 항상 자신의 현존과 상존의 근원과 목표
 그리고 의미와 궁극적 현실과의 관계가운데서 모든 각개질문에 대한 완전한 답변이시며
 영원한 가치가 시간적 현상가운데 비추이고, 신적인 광채가 인간적인 본질에 비추이는 세계이시다.

 그리스도 죽음을 통하여 인간은 새롭게 창조되었고 현실적인 삶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 새롭게 된 인간은 율법이라고하는 쇠사슬에 결코 묶여져 있어야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되어야한다.

성령의 역사는 믿음안에서 이뤄지는 하나님의 역사요.
마치건배를 위해 잔을 서로 부딧치듯이 가까이 다가와서
믿음안에서 인간과 그의 세계를 접촉하는 창조의 힘이요 구속의 힘으로서 곧 하늘나라의 힘이된다.

 하나님과 맺고있는 인간의 평화는 모든 이성보다 높다.마찬가지로 감히파악할 수 없는
 그분에대한 사랑도 그와같다. 이 사랑안에 기초를 둔 인간의 소망역시 그와같고,
소망 하는자로서 존재 한다고하는 그의 자랑역시 마찬가지로 모든 이성보다 월등하다.

 새로운 이 인간은 성령에 의해 살기때문에 믿음에 의해산다.그러나 성령은 그에게 믿음에 의해 주어진다.
오직 믿음으로서만이 새로운 인간인 나는 하나님의 가능성안에 놓여 있기때문이다(행13:1).

아~~! 종말론적 성취~~!(Eschatologicum factum ~~~!),
이 믿음가운데 서있는 새로운 인간인 나!
오늘도 나는 이 결코 겉잡을수 없는 아주신나고도 매우 벅찬 감격을 누린다.

'◑ 바른 이해편◑ > 신학.목회.혁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상에서(203편)  (0) 2022.10.11
목회 289편  (0) 2022.02.24
개혁{349편)  (0) 2022.02.24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