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말씀설교 108편

사람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살전2:13~20

by 【고동엽】 2025. 1. 15.

사람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살전2:13~20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사람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이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사람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려면…’

이게 문제지요,

 

목사님들이 설교를 하시면 앉아서 들으면서,

좀 교회를 오래 다닌 교인들일수록 목사님의 설교에 대해서

꼭 그렇게 의도적으로는 하지 않아도

‘에이, 이 말씀은 좀 이상하다, 이 말씀은 목사님의 개인적인 성향이 많이 묻어나는

그런 말씀인 것 같다’ 이런 판단 아닌 판단을 하게 되고 떠올리게 되는 일이 많잖아요?

 

그렇지 않더라도 예배시간에 아멘, 아멘! 하고 다 받아들였지만

교회 바깥에 나가서는 그 말씀이 다 잊혀 진 채로 망각 속에 묻힌다면

그건 그 설교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귀로 들은 것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람이 과연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언급할 수 있느냐?

더군다나 그 사람이 죄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장악된 사람으로서

십자가의 죄 사함을 받았다고 해도,

그 죄의 성향과 습성이 그대로 남아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거룩하시고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설교)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요?

 

그래서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는

설교와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는 신학이라는 것을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말합니다.

 

근데 제가 보기에는 이거보다 더한 불가능한 가능성은 뭐냐 하면,

똑같은 죄의 습성과 성향이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목사님들이나 전도자들이 하는 말씀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더 불가능한 것 같아요.

 

어떻게 한 인간이 전하는 말씀이, 그리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여전히 죄인 된 모습이 남아있는 목사님, 전도자들로부터 나오는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는 겁니다.

 

이거 보통문제가 아니에요.

 

◑그래서 오늘은,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가기 위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게 말씀을 전하는 자가 있어서 전하고,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으로써 신앙생활이 하루하루 이어져나가는 것인데,

신앙생활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베이스 아닙니까?

 

이 점을 한 번 근본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겠다는 겁니다.

 

어떻게 사람이 하는 설교를 창조주이시고 절대주권자이시고 거룩하신

그 하나님이 하시는 말씀으로 받을 수가 있겠느냐?

 

본문 13절 말씀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그 감사함의 이유가 뭐냐 하면,

‘너희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사도바울이나 디모데나 실라 등이 전한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것을 사람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이 너희 가운데 역사한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시는 그런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의 질문은 도대체 사람이 전하게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무엇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왜냐하면 분명히 안수 받은 목사님들이고 사명을 받았고 위탁받은 전도자들이라고 하지만,

거짓전도자도 있고 거짓선지자도 있고, 그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는,

아첨의 말씀 같이, 인간들이 마음속에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을 끌어들임으로써

 

그 끌어들인 그림자 뒤에 사탄이 똬리를 틀고 있는 상태를

묵인하고 인정하고 긍정하면서 전하는 그런 아첨의 말씀,

그렇게 아첨을 부리면서 설교를 하는 이유가 탐심이라는 거예요,

 

내가 하는 교회에 사람이 많이 오게 하려고,

그렇게 사람의 마음에 맞춤으로써 give & take 의 어떤 현실을 실현시키려고.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 뭔가를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무조건 목사라는 타이틀이 전도자라는 타이틀이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절대로.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냐?

여러분,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지금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얘기하고 있잖아요?

 

말씀드렸듯이 사도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에서는 그렇게 충분한 기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근데 그 충분치 못한 기간 동안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교회가 설립되었고,

선택받았다고 하는 걸 확증할 정도로 증거가 나타날 만큼 그 말씀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극심한 환란 가운데서도.

 

그러면 여러분 생각에는 그 말씀이 뭐겠어요? 한 번 답해보세요.

그 말씀의 핵심적 내용이 뭡니까바로 십자가에요.

 

그 당시는 우리가 성경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까지 공부하듯이

성경공부 할 수 있도록 성경이 주어져 있지를 않았습니다.

 

성경 66권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이 말씀을 하나님말씀으로 받고 교회가 설립되었고

교인들이 교인답게 살았습니다.

그 말씀이 뭐겠어요? 십자가 말씀입니다.

 

왜 성경 66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구약성경은 주님의 십자가사건과 부활사건을 향해서 가는 말씀들이고,

그러므로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십자가와 연관되지 않은 말씀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처럼 향해서 가는 것이고, 신약의 모든 말씀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을

뒤로 바라보면서 나가고 있는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교회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뒤로 바라보면서

예수님 재림 때까지 나가는 것입니다, 그게 교회의 삶의 기간입니다.

 

그러니까 성경 66권이 없어도 십자가사건 하나를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 말씀 전체를 붙들고 있는 것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거예요.

 

지금 우리가 성경 66권을 순서대로 밟아가는 것은,

그 모든 성경말씀에서 십자가 연관성을 찾아내는 겁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사님들도 그렇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도 그렇고

꼭 생각해야 될 것은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2장에서 한 결심,

‘내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아는 것을 전하는 거니까,

그것만 알기로 작정했다는 이 사도바울의 결심은

사도바울만의 특별한 성향에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성경전체, 신학전체의 논리적인 귀결인 거예요.

 

마땅히 그리스도와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 말고는

알면 안 되고, 전하면 안 되는 겁니다.

 

이 결심이 사도바울의 특성이 아니라는 것을 꼭 기억하세요.

보편적으로 절대적으로 인정되어야 되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십자가가 빠진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종교적 강의요, 교훈이요,

훈계고, 또 많은 경우 아첨의 말씀이고, 그 뿌리는 사람의 탐심에 있는 겁니다.

말씀을 듣는 자들로 하여금

설교자가 원하는 쪽으로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말씀인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서 십자가 연관성이 빠져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아도 됩니다.

 

반드시 십자가 연관성을 품고 있다고 하는 이 전제하에서,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다고 하는 일이

어떻게 진행되는 것인가를 알아야 되겠어요.

 

하나님의 말씀은 그겁니다, 모든 성경구절에서 십자가 연관성을 논리적으로 찾아내는 것,

논리가 없는 게 아니에요.

 

이 세상 육체적인 삶에서 영적인 세계로 가는 게 비약이고 그게 믿음이지,

일단 영적인 세계로 들어가면, 모든 말씀 속에 논리적으로 십자가가 숨어있습니다.

 

그 연관성을 찾아내는 게 성경의 해석이고, 설교가 되는 거예요.

 

▲자, 이러한 십자가복음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십자가복음을 듣게 되는 사람들의 상황은

삶에 대해서 진공상태에 있는 게 아닙니다,

삶으로부터 격리돼있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을 전하기 위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삶의 문제에 마음이 연루되어 있습니다,

자기 삶의 문제에 마음이 묶여있는 상태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우리가 꼭 염두에 둬야 될 하나의 큰 전제가 나타납니다.

 

그 전제가 뭘까요?

십자가사건은 말씀드린 대로 역사적으로 한번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십자가사건이 우리에게 요청하는 바가 있어요.

 

역사적으로 한번 일어난 그 사건이

설교말씀을 듣는 순간에, 지금의 사건으로 재현되기를 요청하는 겁니다.

 

지금 십자가 말씀을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되나 하면,

 

언어로서 들리고 있는 십자가 사건이

지금 내 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이라고 보는 겁니다.

이게 바로 역사적인 십자가사건이 신앙적인 사건으로 바뀌는 순간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1절에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된 것은, 주님이 돌아가시고 약 20년 뒤입니다. AD 50년경

 

그런데 그들이 예수 믿는 것과 관련지어서

‘너희 눈앞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사건이 밝히 보인다’고 얘기합니다.

 

밝히 보인다, 현재 보인다는 거예요.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됩니까?

 

십자가복음만이 하나님의 말씀인데, 그 말씀을 듣는 순간에

우리는 두 가지 현재의 사건에 샌드위치처럼 끼게 됩니다.

 

2000년 전에 일어났던 십자가 사건이 들리는 순간

오늘 내 눈앞에 일어나는 현재의 사건이 됨과 동시에,

또 하나의 현재의 사건은,

삶에서 내 마음을 뺏어가고 있는 문제들이 현재의 사건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즉, 두 가지 현재의 사건이 내 앞에 등장하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받아들여지는데,

삶에서 십자가를 기억하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십자가도 현재의 사건이 되고 내 마음을 뺏는 것도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이 세상의 일, 돈 버는 일, 사업, 건강, 직장문제, 결혼문제 등

수없이 많은 문제들이 있지 않습니까?

 

이 모든 문제들이 십자가사건과 동일한 현재의 사건으로 두 개가 맞부딪치고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이걸 어떻게 해결합니까?

 

이게 갈등 없이 받아들여지려면

내가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이 현실 문제들에 대해서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이 주시는 해답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렇게 삶의 문제를 십자가에 거는 (못 박는) 거예요,

그래야 하나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여기 13절에서 아주 중요한 점은 뭐냐 하면,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 이렇게 얘기합니다, 무슨 얘깁니까?

 

예배당에서 목사님들이 하시는 십자가 설교를 듣는 것은

아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게 아니에요.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 했고 공감했지만 그건 듣는 과정입니다,

아직 받은 게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삶의 현장’에서만 받을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짜 인간으로서 목사님이 하시는 그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지 안 받는지를 어떻게 아느냐 하면,

내 삶을 거기(십자가)에다 거느냐 안 거느냐’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는 거예요.

 

예배당 안에서 예배시간에만 아멘, 아멘 하고

삶에 나가서 그 말씀에 내 삶을 걸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다면서

어떻게 내 삶을 걸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지금 내 마음이 돈 문제에 빼앗겨 있는데,

십자가에서 주님이 지금 내 앞에서 죽으십니다.

 

그게 뭘 말하는 거겠습니까?

돈 문제에 대한 해답이

주님의 죽으심의 십자가사건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거라는 거예요.

 

내가 지금 자녀 문제 때문에 고민하고 현실적으로 마음이 뺏겨있는 가운데

주님께서 내 앞에서 지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자녀 문제에 대한 해답이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에 의해 주어진다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녀문제에 대한 해답이 십자가라는 겁니다.

 

이걸 이해해야, 설교를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삶의 진공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인들이 예배당 안에서는 아멘, 아멘! 하며 살면서

세상 삶으로 나가면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말씀으로 받는 게 아니고 듣기만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믿지 않는 자들도 다 들어요.

 

▲그처럼 하나님 말씀을 받는다는 것은 지금 십자가에서의 주님이 현재의 사건이고,

내가 돈 문제 때문에 마음을 뺏기는 것도 현재의 사건입니다.

 

두 문제가 서로 갈등을 겪지 않으려면

‘아, 이 돈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답이 바로 이 십자가사건이다,

그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주님이 죽으신 것은 주님 자신이 죽어야 될 이유가 있는 게 아닌데,

내가 지금 마음을 돈 문제에 뺏기고 있는 그 사실 때문에

주님이 지금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겁니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마음을 돈 문제에 뺏기고 있는 그게 죄니까.

내가 지금 마음을 자식 문제에 뺏기고 있는 그게 죄니까.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지금 죽으시는 거예요,

 

‘네가 지금 마음을 돈 문제에 다 뺏기고 있구나!

마음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온전한 상태인데,

그게 마음이 빗나가지 않는 건데,

 

네 마음이 지금 빗나가고 있어서 마음이 더럽혀지고 있고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있구나,

그래서 내 God 가 지금, 네가 돈 문제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 이 순간에 죽는다!’

라고 말씀하시고 그 아들을 죽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문제는 돈 문제가 아니라

돈 문제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 내가 문제라는 겁니다.

 

돈 문제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다 제자리를 잡아가게 돼있었어요, 원래가.

많거나 적거나 돈 문제가 문제 안 되도록 하나님의 계획 속에 다 있었습니다.

 

자녀문제도 내가 키우는 동안에 그 자녀가 문제가 안 되도록

하나님께서 계획 속에 갖고 계셨는데, 왜 문제가 됐느냐?

내가 마음을 자녀에게 붙이므로, 내가 마음을 돈에 붙이므로,

내가 마음을 내 사업에 붙이고, 이 세상 문제에 붙이므로 문제가 돼버린 거니까,

 

진짜 문제는 내가 지금 마음을 하나님 말고 다른 것에 붙이고 있는 게 문제라는 거고,

그 모든 문제는 하나님이 내 아버지시고 나를 알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 속에 다 있고, 그 다음 단계, 다음 단계, 다 정해져 있는 거예요.

 

돈을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내가 문제니까

주님의 십자가사건이 지금 내 앞에 일어나고 있는 거고,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사건을 말씀으로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은

‘아, 내가 지금 세상 것에 마음이 끌려가고 있는 이 상태가 죄이기 때문에

주님이 지금 내 앞에서 죽으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내가 죽은 자라고 여기는 것... 이것이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대고 관심 갖고 염려할 것은

내가 어떻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갈 것인가,

어떻게 하나님을 더 많이 받아들여 하나님 부자가 될 것인가만 염려하면

그게 내 일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될 때 말씀이 역사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면,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서,

이 육체와 마음이 조합이 된 상태에서 세상 문제를 느끼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나’가

죽었다고 인정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내 마음에서 세상 문제를 느끼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을 느끼는 거예요, 보이지도 않으시는데.

그게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감각이 되어주셔서 보이지도 않는 하나님을 느끼고

하나님으로 부자가 되게 해주시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일에 대해 온전히 죽어서 하나님을 그렇게 느끼고 충만해질 때,

이 일에 대해서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내 안에서 나를 통해서 역사를 하시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손을 대지만 내가 손대는 게 아닌 거예요,

나는 장갑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으로 끼고 그 일을 하시는 거니까,

우리가 장갑 끼고 일할 때 누가 장갑이 일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장갑을 낀 그 사람이 일을 했다고 말하는 거지.

 

그러니까 손을 뗀다는 얘기는 내가 하나님의 장갑이 되어드린다는 거예요.

어떻게? 십자가의 주님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어디서?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일이 뭡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이 전하는데, 십자가복음을 사람이 전하고 있는데,

그 사람이 전하는 십자가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거예요,

단순히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게 바로 사람이 전하는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거죠.

그걸 안 받아들이면 어떻게 됩니까?

 

▲오늘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가 그 위에 머물게 된다는 거예요.

유대인들이 안 받아들인 이유가 뭐예요?

십자가사건에 가장 친숙할 수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어요.

 

왜냐하면 십자가사건은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성전 중심의 생활,

그 성전 중심의 생활의 핵심인 번제와 상번제를 실현시킨 사건이거든요.

 

그건 예표였어요, 예표, 앞으로 이런 내용의 일들이 진짜 일어나게 될 것이라는 예표로

번제와 상번제.

 

누구보다도 친숙할 수 있는데 왜 이들이 십자가를 안 받아들입니까?

내가 지금 돈 문제로 걱정하고 있는데 마음에서 돈 문제를 놓기가 싫은 거예요.

마음에서 돈 문제를 놓기 싫으면 십자가를 거부하게 돼있어요.

번제와 상번제의 의미가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자식 문제가 있는데, 내가 지금 마음에서 자식 문제를 놓고

마음으로 하나님께 가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십자가를 거부하는 겁니다.

‘갈라디아 교인들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에 밝히 보이거늘…’

 

이걸 응용하면 어떻게 됩니까?

‘대한민국에 있는 교인들아, 미국에 있는 교인들아,

너희 눈앞에 지금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 마음의 시선을 다른 곳에 두도록 꾀더냐?’

 

현재의 두 가지 사건, 십자가사건과 내 마음을 끄는 이 사건,

이 사건이 갈등 없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이 문제는 하나님의 문제가 되게 하는 것,

이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십자가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는 것이죠.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전 세계 기독교회의 설교들이 진정으로

십자가 연관성에서 떠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게 하시며,

그 말씀을 듣고 세상 삶 속으로 나가서 주님과 함께 삶 속에서 죽으므로

그 말씀에 인생과 삶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역사가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출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