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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회심

회심 P1 갈6:15~17, 눅19:8~9

by 【고동엽】 2024. 12. 31.

<원본의 초기 20분 녹취, 나머지는 P2에서 녹취 예정>

 

이 시간은 용어정리 50번째 강의가 되겠습니다.

<회심> 이라고 하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 하겠습니다.

 

최근 들어서 한국교회에 '회심'이라고 하는 용어를 자주 듣게됩니다.

'나는 이러 이러한 사건을 통해서 회심하게 됐습니다'

'제가 신앙생활 하면서 비로소 회심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회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예전보다 좀 더 많이 보게 됩니다.

 

 

이런 신학적인 용어를 사용하게 되는 건 좋은 현상입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용어를 정확하게 개념을 알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면

안하느니만 못 합니다.

 

항상 우리는 개념을 정확하게 알고 정확하게 적용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종교개혁은 사실은 용어에 대한 개혁에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로마 가톨릭의 타락을 개혁자들은 무엇이라고 봤냐면

용어의 오용 에서 나온 것이라 봤습니다.

 

그래서 잘못 오용 되어진 용어들을 다시 개념을 정리해 주고

그리고 신자들이 그 개념을 정확하게 알게 되면서

그들이 개혁 되어지고 그들의 경건이 회복되었습니다.

 

이것을 신학의 개혁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신학'하게 되면,

어떤 엄청난 어떤 신학적 구조만을, 조직신학의 구조를 주로 떠올리는 경향이 있는데

 

신학을 얘기할 때 신학에 가장 중요한 기초는 뭐냐면

신학에 사용되어지는 용어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이 종교개혁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은

끊임없이 칭의, 성화, 양자 그리고 구원

이런 용어들을 다 정리를 하고 그 용어의 개념을 정리하는 가운데

개혁이 일어났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계신 것처럼 종교개혁이 일어나게 되는데 아주 중요한 용어 개혁은

사실은 '칭의'라는 용어의 개혁이었습니다.

 

'칭의'라는 이 용어의 재발견을 통해서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용어를 정확하게 사용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의 문제를 루터는 도덕성의 문제라고 진단 하지 않고 신학의 문제라고 봤습니다.

 

여기엔 예외가 없습니다.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의미를 바로 알고 정확하고 신중하게 사용해야 교회가 개혁됩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가톨릭에 의해 오용되었던 용어를

다시 성경적으로 되찾아오는 역사.. 라고 한다면

그 이후에도 부흥도 또한 그런 것들이었습니다.

오용 되었던 용어들을 다시 되찾아 오는 것!

 

이걸 우린 '재발견'이라고 얘기합니다.

이걸 재발견함으로써 교회가 다시 개혁 되어지고, 부흥이 일어나곤 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날 그릇된 회심관은

신자들의 도덕적 방종과 교회 타락의 원흉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죄악의 문제는

다 용어가 왜곡되어졌고 용어를 잘못 이해함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18세기 영적대각성운동도

<칭의 이론의 재발견>을 통해서 영적대각성이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평양대부흥도 주로 칭의론 설교를 통해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그러니까 용어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통해서 개혁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근데 이 회심관도 그렇습니다

잘못된 회심관 때문에 한국교회 어떤 현상이 나타났느냐면

구원의 확신에 대한 오류가 발생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도덕적 방종이 발생합니다.

 

.......................................

 

이 문제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종교개혁시대 때도 청교도 시대 때도

이 '회심'이라고 하는 용어에 대한 오해가, 오류가

도덕적 방종과 그리고 신앙적인 오류로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때문에 개혁자들이나 청교도들은

이 문제를 정확하게 가르치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썼습니다.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요

이 '회심' 이라고 하는 단어를 항상 잘못 알고있는 사람들이 만연되어 있었어요.

 

 

그러면 성경이 가르치는 회심이란 무엇일까요?

회심 이라고 하는 단어를 한자로 이렇게 번역을 했죠.

돌이킬 회回자에 마음 심心 자를 썼습니다. 무슨 얘기죠?

 

마음을 돌이키는 겁니다.

행동을 바꾸기 이전에 마음을 돌이키는 겁니다.

 

마음이 세상에 향해 있다가 그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된 겁니다.

마음의 방향이 달라지니까 자동적으로 행동이 달라지는 거죠.

 

마음이 달라지고 행동이 바뀌는 것

그래서 이것을 영어로 conversion 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한국말로 번역하면 변환 전환 이렇게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조직신학에서 회심은 중생 뒤에 따라서 일어나는 것을 회심 이라고 합니다.

중생이 일어나면.. 마음이 달라지잖아요.

 

중생을 통해서 마음이 달라지면 당연히 행동이 달라지는 거죠.

 

 

그래서 조직신학에서는 회심하게 되면 항상 두 가지 용어를 같이 떠올리도록 합니다.

회개와 신앙입니다. repentance & faith

 

 

회심과 회개는 다른 겁니다.

회심의 구성요소는 회개와 신앙입니다.

 

존 머레이 교수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구원적 신앙은 회개와 결합되어 있고

회개는 신앙과 결합되어 있다.

 

회심을 했다고 하지만..

어떤 사람 회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회개가 없다면 그건 참된 회심이 아니죠.

 

또 어떤 사람은 회개가 있다고 해요.

회개가 있는데 그 회개가 신앙에 의해서 나온 것이 아닌 거예요.

의무감이나 교회적 분위기, 자기 가치관의 동의에 의해서 나온 거라고 한다면

그것조차도 회심 이라고 규정하지 않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가 예를 들어서

행위가 바뀌었다.. 내가 옛적 삶을 청산했다 ..

근데 청산 했는데 사실 그것이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교육에서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죠.

 

오늘날 교회 안에서 소위 회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회개 repentace 나 신앙 faith 가운데 하나가 결여되어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교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 핵심입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점은, 회심이 중생에 뒤따라 일어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자의 회심이, 내면 본성의 본질적 변화에 의해서 나타나는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회심을 교육이나 트레이닝 훈련을 통해서 만들어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사실입니다.

 

교육이나 훈련의 결과에 의해 되어진 점진적 변화는

본성 자체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나타난 회심이 아닙니다.

 

이건 근본적으로 그 변화가 다릅니다.

물론 겉으로 보여지는 양태는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야 저 사람 교회에 나오면서 예전에 그렇게 방탕하던 삶 다 청산했대'

'저 사람이 예수 믿고 나서 술 담배 다 끊었대'

'저 사람 교회 나오면서 주일성수를 철저히 하게 됐대'

 

근데 그 철저하게 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거나

하나님을 사랑하게 돼서 그런 것이 아닐경우에는

이것은 위선으로 가는 겁니다. 이것이 가짜 회심 이라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착각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 사람 회심 했다'

그래서 쉽게 회심 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아 저 사람 우리 교회에 와서 언제 회심 했어!'

 

 

그래서 저는 '회심'이라는 단어를 너무 남발하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우려스럽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봤을 때는 회심한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 않거든요.

근데 행동이 조금 바뀌고, 종교적으로 조금 열심을 내면

자꾸 회심했다 라는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합니다.

 

회심 이라는 용어를 신중하게 사용하고 가치있게 사용해야 되는데

이 단어를 너무 쉽게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교육이나 훈련으로 변화된 사람들은요

사실은 세상과 구별됨이 (대체로) 없습니다.

 

제가 이거를 뭐라고 표현하냐면

본질이 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땅속에서 석유를 채취 하잖아요.

석유를 채취해 가지고 다양한 걸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휘발유 경유 플라스틱을 만들기도 하고 나일론 옷감도 만들어내기도 하고요

비닐도 만들어 냅니다.

 

근데 여러분 겉으로 보여지는 양태는 다른데 본질은 같죠.

본질은 다 석유(원유)에서 나오는 거예요.

 

본질이 같다 보니까 이 본질이 가져다주는 결과가 같아요.

 

어떤 사람은 나일론 섬유로 된 옷을 입고 있고

어떤 사람은 면 성분으로 된 옷을 입은 사람이 있죠.

겉으로 봤을 때는 별로 티가 나지 않아요.

 

옷감이 시간이 가면서 어느 쪽으로 그 성질이 기울어져 갑니까?

자기 본질로 회귀해 가는 것으로 기울어져 가죠.

 

교육이나 훈련에 의해서 본질이 안 바뀐 사람은

옛적 성질로 자꾸 되돌아갑니다.

타락한 성질로 자꾸 돌아가요.

 

교육을 그토록, 훈련을 많이 받았는데도

옛적 성질로 자꾸 되돌아갑니다.

바리새인들 같은 사람들이죠. 이런 사람들이 그런 케이스죠.

 

근데 본성이 바뀐 사람들은 이 본질이 달라졌기 때문에

어느 쪽으로 자꾸 바뀌어 가냐면 그리스도에게로 자꾸 바뀌어져 갑니다

 

이것을 성화 라고 합니다.

더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성격이 별로 안 좋아도 더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쪽으로 갑니다.

여러분들이 내 본질이 바뀌었는가/ 본질이 바뀌지 않았는가 라고 하는 부분은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분이 어느 쪽으로 점점 더 기울어져 가는 것을 보고 알 수 있습니다.

 

제가 본성이 바뀌지 않은 사람들을 대하 때 굉장히 힘들어 하는 게 뭐냐면

마치 고무줄 같습니다

 

힘들게 하나님 말씀으로 살도록 이렇게 끌어당겨도요

손을 딱 놓으면 다시 원상 복귀해요.

그 죄악된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만 만들어지면

곧바로 그 상태로 되돌아가버려요.

 

근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완전히 본질이 바뀐 사람은

어려움과 환경의 제약이 있어도 꿋꿋이 그리스도를 향해서 계속적으로 나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의 본질이 바뀌었는지 / 바뀌지 안않는지는

시간을 두고서 지켜보는 것이.. 그것이 더 정확합니다.

 

오늘날 제자 훈련 또 성경 공부로 양육된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상당수의 목회자들이 착각하는 것이 뭐냐면

제자훈련, 성경공부.. 이런 과정을 거치면

이 사람이 중직자가 될 수 있고, 이 사람이 안수집사 장로의 직분을 받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이런 시스템을 안 만든 이유가 뭐냐면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명분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사람은 훈련으로 변화 되지 않습니다. 잠깐 바뀌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점점 그 자기 본질로 다시 회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회심한 사람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주님을 닮아 갑니다.

이것을 신학적 영어로 뭐라고 한다고요? Sanctification 성화라고 얘기합니다.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갑니다.

 

어떤 분, 그렇게 얘기 하지 않나요? '나도 젊었을 때는 정말 열심이었어!

젊었을 때는 나도 정말 꼿꼿하게 살았지..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너희가 마귀를 닮아간다' 하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점점 세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속에 있는 본질이 어느 쪽에 있는가에 대해서 질문을 던질 필요성이 있죠.

우리의 본질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바뀌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다음 시간에 '양자 교리'를 배우게 될 텐데

양자로 입양된 사람은 세상으로 돌아가는 게 허락이 안 돼요.

 

그냥 그분이 우리 아버지 되시기 때문에

내 아버지가 하나님이 아니니까

자꾸 마귀를 닮아가는 것 아닌가요?

 

이 부분에 대해서 사람들이 동의를 잘 안 합니다.

항상 다수결에 의해서 이것을 합리화 시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회심은 점진적이기 보다는

극적인 어떤 변화를 보여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성화는 점진적입니다.

근데 회심은 극적인 경향이 많이 있습니다. (*한 번 극적인 변화의 모멘트)

 

뿐만 아니라 그들은 회개와 신앙이 지속적으로 나타납니다.

단회에 그치지 않습니다.

 

환경 가운데서도 영적 성장이 멈추지 않는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은 의지의 결과가 아닙니다. 은혜의 결과입니다.

 

 

제가 왜 회심이 단회적이고 극적인 경향이 많다고 얘기하냐면

회심은 중생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태어나는 것은 단회적이고 극적이고 그리고 거의 즉흥적입니다.

그래서 회심은 어느 날 한 순간에 회심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얘기를 하는 게 있어요.

어떤 사람을 굉장히 고심하는 가운데 회심 하던데요?

맞아요 고심하는 가운데에 회심하죠.

 

이것은 마치 뭐와 같냐면 10개월 동안 임신을 하고

그리고 진통하는 가운데 한 순간에 아기가 태어나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이 부분을 우리가 바르게 인식해야 돼요.

우리는 소위 회심 또는 중생이 가볍게 쉽게 일어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중생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부모님들이 항상 똑같이 하는 말씀이 있어요.

'내가 너를 어떻게 낳았는지 알아? 배 아파서 낳았어!'

배 안 아파서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이게 회심의 원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중생의 원리에요.

 

근데 교회 안에 그런 어떤 진통, 해산의 진통없이 회심했다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이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 사람들의 회심을 믿지 않습니다.

성경적이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성경은 우리의 회심이 산고를 거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눅19장 에서 삭개오는 회심한 사람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삭개오는 제자 훈련이나 어떤 교육을 통해서 많은 교육을 통해서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즉각적으로 회심을 합니다.

굉장히 극적이죠.

말씀을 듣고서 삭개오가 이렇게 반응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이것은 중생함으로 말미암아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한 즉각적 (회심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뭐가 나타나죠? 회개와 믿음으로 나타납니다.

 

 

자 이제 '믿음'이라는 단어를 '신앙'이라는 단어와 같이 교차해서 사용할 거니까

여러분들은 오해하지 말고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신앙 faith 에 의한 회개가 일어났다는 얘기죠.

 

 

성경에서 이렇게 회개와 믿음으로 반응하는 외적 열매를 뭐라고 표현했냐면

표징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구약에서 언약의 표징이 뭐였죠? 할례였습니다.

신약에서 언약의 표징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은 할례 문제를 다루면서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음을 받은 것만이 중요하니라'

고 말씀합니다.

 

새로 지음 받은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바울은 그다음 갈6:17절에서 '예수의 흔적'이라고 얘기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 받은 자의 표징이 뭐로 나타난다고요?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십자가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

 

왜 자랑할 것이 없다는 거죠?

십자가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표징이기 때문에 그래요.

 

다른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의 자녀된 표징을 십자가 외에 다른 것으로 자꾸 자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다른 것으로 자랑합니까.

 

'나는 저 사람 같이 나는 간음하지 않습니다. 난 도둑질 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떻습니다' 로 자랑하면서

자기 자신의 구원의 표징을 자꾸 자랑하려 들었던 거예요.

 

사도 바울이 그렇게 얘기하는 합니다.

'나는 그걸로 자랑하지 않겠다. 내가 자랑하는 것은 십자가 밖에 없다.

나에게 표정이란 십자가 밖에 없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들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십자가 지는 것이 없다고 얘기한다면

여러분들은 도대체 무엇으로 표징을 삼겠습니까?

성경에는 '없다' 입니다.

 

우리가 표징으로 삼아야 될 가장 명확한 표징은 십자가라고 사도 바울이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흔적' 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예수의 흔적'이 뭡니까? 십자가의 흔적이죠.

 

아버지의 영과 진리로 인해서 고난 받는 그 흔적

날마다 회개와 신앙으로 열매 맺는 삶

 

바울은 회개와 신앙으로 반응한 자신의 열매가 바로

중생된 표징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다른 걸 다 배설물처럼 똥처럼 여긴다는 겁니다.

 

 

이것은 교육과 훈련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은 교육과 훈련으로 나름대로 신앙을 만들어냈다고 생각했다는 사람들이

얼마나 헛짓거리 하고 돌아 다니고 있습니까. 가짜라는 거예요.

 

열매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늘날 무슨 영성 훈련이다 뭐다.. 그런 성경적이지도 않은 발언을 함부로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신앙은 훈련이 아닙니다. 영성은 훈련이 아니에요. 은혜이지요. (그 다음에 훈련)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떠올려볼까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그 분 곁에는 두 사람의 죄인도 좌우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2명의 죄인 가운데 1명은 회심했고 한 명은 회심하지 않았습니다.

근데 회심했다고 하는 그 사람도 처음에는 예수님을 반대했고 예수님을 멸시했습니다.

 

마태복음은 이 얘기를 잘 얘기해 주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가 뭐냐면 비포 와 에프터 의 차이예요.

 

초기에 한 편 강도도 회심하기 전에는 동일하게 이런 발언을 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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