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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추천(가) 명설교 300편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

by 【고동엽】 2024. 12. 13.

이사야 51:4-6


신호범(미국명 폴신, 70세)한국인으로서 미국 워싱턴주 상원의원으로 3선을 하고, 워싱턴주 상원 부의장까지 한 신호범(미국명 폴신, 70세)씨는 “거리의 소년에서 상원의원까지”라는 자서전을 썼습니다. 그가 처음 워싱턴 주에서 상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지역 언론에서는 ‘그가 당선될 확률이 3%밖에 안된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한 일을 현실로 이루어냈습니다. 그는 약 31,000 가구나 되는 집을 일일이 방문하는 것으로 선거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선거유세로 운동화 4켤레가 닳았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 어려운 일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루는 어느 집에 벨을 눌렀는데, 한 백인이 나와서 그를 훑어보았습니다. 신호범씨는 자신을 하원의원에 출마한 폴 신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자 그 백인 남자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Go home.”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제하고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제가 이 에드먼드 시에서 25년을 살았고, 내 직장도 교회도 다 여기인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제 아내와 아이들이 미국에서 태어났고 저는 당신들의 자녀들을 대학에서 27년간을 가르쳤습니다.”
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백인에게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 나라는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당신들의 선조가 먼저 들어왔고 우리는 뒤따라 들어왔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담담히 말을 마치자, 그 백인의 표정이 바뀌었습니다. 그 백인은 신호범씨의 말을 듣고 나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당신을 돕겠습니다.”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신호범씨의 성실한 선거 참모가 되어 열심히 선거운동을 벌였고, 그 선거에서 신호범씨는 지금까지 의원이었던 백인을 10% 차이로 누르고 이겼습니다. 지금도 그는 워싱턴주 상원의원 부의장으로 많은 동양인들에게 희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서울역에서 구걸하던 신호범씨가 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해주는 사람이 된 것은 그의 피나는 노력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에 입양되었지만 영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19살에 초등학교 입학이 거부되기도 하고,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식당에서 쫓겨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불굴의 의지로 열심히 노력하여 워싱턴 주립대학을 나와, 메릴랜드 대학, 하와이 대학의 교수를 거쳤으며, 1992년 워싱턴주 하원의원을 시작으로 영향력있는 정치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금년을 마감하는 오늘 우리는 한 해 동안 최선을 다해서 살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면 반성과 자책 뿐입니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도 별 소득 없이 한 해를 보내야만 하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그러나 다가오는 새해에는 마음을 다잡고 새 출발을 기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처럼 최선을 다하되,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1.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사 51:6)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에서 실망과 좌절로 시간을 보낼 때, 제 2 이사야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위로의 메시지입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수치스러운 시대입니다.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기고, 그들의 꿈과 희망인 성전도 무너지고, 미래가 있는 젊은이들을 비롯한 이스라엘의 희망이 모두 포로로 끌려가 처참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원망하고 꿈과 희망도 잃어버린 채 자포자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제 2 이사야는 하나님의 위로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이사야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됩니다. 1장부터 39장까지는 주로 이스라엘과 열방의 죄에 대한 심판을 선포하는데, 이를 ‘제1이사야’라고 부릅니다. 40장부터 66장까지는 절망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는데, 이를 ‘제2이사야’라고 부릅니다. 오늘 본문은 ‘제2이사야’에 해당하는 본문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수치스러운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제2이사야의 위로의 메시지는 “하늘로 눈을 들라”는 것이었습니다(사 51:6). 우리의 도움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시편 121편에서도 우리의 도움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시 121:1).
옛 사람들은 어려울 때, 환난을 당했을 때, 시련이 왔을 때, 절망적일 때, 산을 향했습니다. 산에서 역사하는 그 어떤 이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도 산을 찾아 알지 못하는 산신령에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높고 신비스러운 산이라 할지라도 그런 곳에 우리를 도울 자는 없습니다. 오직 그 산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 만이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그곳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을까하여 재물의 산, 권력의 산, 지식의 산을 바라봅니다.

알프스 산을 넘어 전 유럽을 정복하였던 나폴레옹은 자신의 능력과 군대라는 산을 자신의 도움으로 삼고 천하를 호령하였지만, 마지막 세인트헬레나 섬에 유배되어, “나는 실패하고 나사렛 예수는 실패하는 것 같았으나 그는 영원히 승리하였다”고 고백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살길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그를 바라보고 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고, 성경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전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최고의 가치를 두어야 합니다. 여기에 행복이 있습니다.

2. 우리는 이 땅을 살펴야 합니다.(사 51:6)

본문에 보면,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라”고 하는 동시에 “아래의 땅을 살피라”(사 51:6)고 했습니다. 사이비 이단 종파 가운데는 어차피 지나가는 ‘이 세상’보다는 ‘저 세상’이 더 중요하니, 가족이나 직장이나 다 팽개치고 무슨 기도원이나, 교회에만 들어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치는 데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 높이 가지를 뻗은 나무는 그 만큼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처럼, 눈을 들어 하늘을 보기 위해서는 두 발로 튼튼하게 땅을 딛고 서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저 하늘이 아니라,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들어 하늘을 보는 것과 동시에, 이 땅을 살펴야 하는 것입니다.

하루는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는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셔서 모세와 엘리야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그 광경은 가히 인간이 체험할 수 없는 황홀하고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말하기를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 이곳에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고 했습니다(마 17:4, 막 9:5, 눅 9:33). 베드로는 당장 눈 앞에 하늘나라가 펼쳐지는 줄 알았습니다. 더 이상 고단하고 힘겨운 산 아래에 내려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주님과 함께,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시고, 세 제자를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산 아래는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간질병 소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아이를 고쳐주시고, 장차 자신이 이 땅에서 고난을 당하고 십자가의 희생을 치를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였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의 관심은 언제나 “이 세상”이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또한 현실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어둡고 아픈 현실을 치유하기 위해서, 이 땅에 정의의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관심가지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살펴보면 좋은 일도 많았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많았습니다. 긍정적인 일보다는 부정적인 일이 더 많았던 것 같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친북과 반북, 친미와 반미 등의 이념적 혼란을 겪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장기적인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또한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서민들은 집장만하기가 더 어렵게 되었고, 빈부격차가 심화되어 서민들의 삶은 그만큼 더 힘들어졌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모든 것이 실망 그 자체였고, 북핵문제는 한반도에 전쟁의 가능성을 증폭시켰습니다. 그 무엇하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없었습니다.
바벨론 포로로 끌려와 있는 이스라엘 민족처럼 우리 나라의 현실도 너무 어두워 앞이 잘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런 현실 앞에 ‘네 일은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면, “절망”이라는 단어 밖에는 떠오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그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내가 세울 정의가 홀연히 닥쳐오고 내가 베풀 구원이 빛처럼 쏟아져 오리라”(사 51:5)는 말씀처럼, 하늘과 땅을 함께 바라보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길을 열어 주십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직 하나님 뿐입니다.

3.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정의를 실현해야 합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땅을 살핀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는 것입니다. “내 백성이여 내게 주의하라. 내 나라여 내게 귀를 기울이라. 이는 율법이 내게서부터 발할 것임이라. 내가 내 공의를 만민의 빛으로 세우리라”(사 51:4)
하나님의 뜻은 어떤 경우에도 정의를 실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이 세상에 밝은 빛을 비추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교회 신자들은 이 부분이 약합니다. 개인적인 신앙은 정말 좋습니다. 교회마다 기도원마다 부르짖는 소리가 그치지를 않습니다. 사회복지에 관련해서도 많은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선하고 감동적인 사례가 끊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땅의 문제에는 우둔하고 정의로운 삶을 사는데는 무관심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믿음이란 감성적인 것도 아니고, 추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고 경험적인 것입니다. 구체적인 사랑과 나눔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마음의 경건이 없어서 나라가 망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간 것이 아닙니다. 아마 마음의 경건은 우리들보다 더 컸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성전에 와서 그 많은 소와 양의 번제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성전을 얼마나 사랑하고 안식일과 절기를 지키는데 생명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의 실천하는데 소홀하였습니다. 물질적인 축복만 바랄 뿐,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데는 인색하였습니다. 우리들도 이런 정의의 실천 면에서 너무 부족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처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기 전에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해야합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영국의 헨리 8세가 예배를 드리는데, 어느 주일날 래티머 주교(H.Latimer 1485-1555)가 설교를 하면서 왕의 비행을 비난하였습니다. 헨리 8세는 자신의 결혼 문제로 로마 교황과도 심각한 마찰을 빚어, 결국 로마가톨릭에서 벗어나 영국 국교회를 탄생하게 한 강력한 왕이어서 그의 권위는 대단했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헨리 8세는 래티머 주교를 불러 말했습니다. “오늘 그대의 설교는 있을 수 없는 설교요. 그러나 오늘은 관대하게 용서하겠으니 다음 주에는 성도들 앞에서 오늘의 설교 말씀을 취소해주시오. 만일 취소하지 않으면 그대는 살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이 말을 들은 래티머 주교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너는 내 종이 아니냐?”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뒤 그는 ‘나는 정의의 선지자가 되야지, 거짓 선지자가 되면 안된다’고 생각하고 그 다음 주일 예배 시간에, 또 다시 왕의 불의에 대해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왕은 불쾌한 얼굴로 주교를 불러서 말했습니다. “그대는 어찌하여 내 명령을 거역했는고?”
주교는 태연하게 말하기를 “나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대로 했으니, 왕의 처분대로 하겠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왕은 “그대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주교는 “하나님께 의무를 다하고 육신의 생명을 마친 후 천국의 무궁한 영광이 기다리고 있으니 오히려 기쁨이 넘칩니다.”라고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때 헨리 8세가 무릎을 치면서 하는 말이, “그대같은 위대한 성직자가 우리 나라에 있으니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요. 이제 나도 그대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 작정이요.”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래티머 주교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도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땅의 문제 또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정의를 실현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2006년의 마지막 날에, 새해를 맞이하기 전에, 지난 한 해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지 못하고 이웃을 돌보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2007년 새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 돌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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