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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 명설교편◑/이정익목사 명설교(385편)

기다림이 있는 사람들 (2)

by 【고동엽】 2024. 11. 20.

기다림이 있는 사람들 (2)

 

 

 

 

             2:25-33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

 

            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

 

 

 

 

 오늘 본문은 시므온이라는 어느 노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유대사회에 시므온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의 김씨처럼 많은 이름입니다. 어느 주석자는 여기 나오는 이 시므온이 AD 13년에 산헤드린의회 의장을 지낸 가말리엘의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시므온은 평생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메시야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았던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사야가 700년 전에 장차 세상에 메시야가 탄생할 것을 예고했습니다. 그때는 예언자가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를 전해 주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300년 후 말라기가 예언자로 활동을 마치고 주님이 태어나실 때까지 400년 동안 선지자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400년간을 영적 암흑기라고 부릅니다. 여기 시므온은 그런 400년 동안 영적 암흑시대를 살면서도 메시야의 오심을 확신하면서 기다렸던 그 시대의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시므온이 확실하게 메시야를 기다렸던 이유가 2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메시야를 만나보고 죽으리라”는 계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고대하며 기다렸겠습니까. 그러다 마침내 태어나신 예수께서 결례를 받으러 성전에 왔을 때 만나게 됩니다. 결례는 남자아이는 태어난 지 40일 만에 여자 아이는 80일 만에 제사장에게 가서 번제와 속죄제를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산모가 해산하면 몸이 부정해지기 때문에 율법적으로 산모와 아이가 깨끗해졌다는 확정을 받는 예식이 정결예식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리던 그 예수가 태어난 지 40일 만에 시므온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때 시므온이 아기를 받아 안고 노래합니다(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또 36절을 보면 아셀 지파의 비누엘의 딸 안나라는 여인도 그런 경우입니다. 이 안나는 시므온과 달리 지파명까지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 아셀지파는 야곱의 여덟 번째 아들 이름입니다. 비누엘은 야곱이 얍복강에서 천사와 씨름하여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고 그 곳에 붙인 브니엘이라는 지명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그리고 안나는 히브리어로 한나라는 이름과 동일한 이름입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는 조혼했습니다. 그래서 여기 안나도 14세를 전후해서 결혼하였을 것으로 봅니다. 그러니까 14세에 결혼해서 7년 남편과 살았고 남편과 사별하고 84년을 혼자 살았으니까 지금 안나의 나이가 105세쯤 됩니다. 이 여인은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야로 금식하며 주의 오심을 기다렸습니다. 그 여인은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찬송 부를 때 그 소리를 듣고 뛰어 나가 아기 예수를 보고 사람들에게 이 아기는 이스라엘을 속량하기 위해서 오신 메시야라고 증거 하였다는 것입니다. 기다림이 있으면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장차 예수께서 오실 것을 예언하고 선포하고 공개하였습니다. 그 후 많은 유대인들이 메시야의 오심을 대망했습니다. 기다렸습니다. 학수고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시므온과 안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결국 예수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기다림에도 종류가 있었습니다.  

 

 

 

 

 

신앙적 기다림

 

 

 

 

사람들은 메시야가 탄생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처럼 이제나 저제나 기도하며 기다렸을 것입니다. 그들은 말씀 그대로 예수께서 오시면 이 세상이 회복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며 위로가 주어질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이사야가 외친 것처럼 메시야가 오시면 창을 녹여서 쟁기를 만들고 어린 아이가 맹수들과 함께 놀며 뱀의 구멍에 손을 넣는 그런 회복의 세상이 올 줄 알았습니다. 그러면서 진정한 평화를 기대하였습니다. 이 세상은 진정한 평화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결과 갈등과 고뇌와 불화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메시야가 오시기만 하면 이 모든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기다림이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이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기다림이 있다는 것은 약속이 있다는 말이고 미래가 있다는 말입니다. 미래에 대한 기다림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계시록 13절을 보면 “이 계시의 말씀을 듣고 믿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좋은 소식이나 뉴스도 믿지 않으면 헛것입니다. 소돔성이 심판받기 바로 직전, 유황불이 쏟아지기 직전에 롯이 사위들에게 빨리 피하라 곧 재앙이 쏟아진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랬더니 사위들이 농담인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노아시대에 홍수 심판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갔을 때 노아가 그냥 있었겠습니까. 노아는 황급히 돌아다니며 준비하라, 이리로 들어오라 이제 심판이 시작되었다고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모두 비웃었을 것입니다. 비웃으면 헛수고 입니다. 그래서 이 믿는다는 일이 복된 일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이 불행입니다. 믿음을 갖고 싶은데 믿어지지 않아서 불행입니다. 여기 시므온이 예수를 만나고 죽으리라는 성령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 말은 예수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을 철하게 믿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예수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선물입니다.

 

 

 

 

정치적 기다림

 

 

 

 

 

개중에는 신앙적으로 메시야를 기다렸지만 또 대다수 유대인들은 정치적으로 예수를 기다렸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로부터 압제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로마는 상대하기가 너무 컸습니다. 로마가 몇 년 안에 무너지거나 망할 것이라는 징후는 전무했습니다. 그래서 낙심이 더 컸습니다. 우리민족이 일제 때 일본이 너무 강하고 커서 낙심이 더 컸습니다. 똑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때 유대인들에게 희망의 끈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이 장차 메시야가 오시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현재 상황이 더 열악하니까 유대인들은 그 메시야의 오심을 더 기다리고 대망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하나의 꿈이 있었습니다. 그 메시야가 오기만 하면 잃어버린 다윗시대의 영화를 회복하고 화려함이 그대로 재현되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빈들에 5천명이나 모였습니다. 어린아이 노년 여인들까지 포함하면 2,3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던 해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수십만 인파가 모였습니다. 왜 모였는가 하면 근래 기적을 행하는 젊은이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예수라는 젊은이가 나타나서 52어를 행하고 물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고 나병환자를 고치고 장님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을 행하고 돌아다닙니다. 사람들은 모두 큰 기대를 하였습니다. 이 사람이 혹시 메시야가 아닌가 해서 가는 곳 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은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힘과 능력을 가지고 로마로부터 해방시켜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고대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리고 장차 오시겠다는 메시야는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라고 기대하며 기다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때 모두 그런 기대를 하였습니다. 일본이 망하라고 기도 많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빨리 재림하셔서 일본의 천황부터 심판하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성결교단은 재림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에 성결교회가 제일 먼저 교회 문을 폐쇄당하는 핍박을 받았습니다. 당시 유대인들도 로마 압제로부터 해방되기를 기원하면서 기다렸습니다. 그때 기다린 메시야는 힘을 가진 초능력을 발휘하는 메시야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를 무찌르고 우리 민족을 구원해 주실 메시야를 고대하였습니다. 목표를 갖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데 그 목표의 초점이 잘못되거나 왜곡되었다면 무서운 결과를 낳습니다. 장차 오실 것이라고 예언된 예수는 구원자 예수입니다. 평화의 예수, 구속의 예수, 하나님의 속량의 역사를 펼치러 오시는 예수입니다. 무력과 해방과 로마를 무찌르는 메시야와는 상관도 없는 예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로마를 무찔러 이기는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기대가 어긋날 때 유대인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쳐댔던 것입니다. 곡해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를 곡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내 삶을 이익 지향적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대합니다. 내게 유리한 대로 이루게 하고 복을 주시는 예수로 해석합니다. 내 삶에 형통을 주고 고침을 주고 성공하게 하는 예수를 기대합니다. 유대인들이 정치적 메시야로 해석하는 것과 똑같은 해석입니다. 모두 정치적인 예수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예수는 우리의 삶에 형통을 주시려고 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오셔서 로마로부터 압제에서 정치적으로 해방하는 일들은 생각도 없으십니다. 사람들이 왕을 삼으려고 했을 때 도피하고 다녔습니다. 왕이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로마로부터 민족을 해방시키고 능력을 발휘했으면 국민적 영웅이 되고 세상에 유명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자들 모두가 그렇게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내 두 아들을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을 하였습니다. 그것이 가룟 유다가 가장 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것에는 관심도 없고 개의치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실망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는 실망한 나머지 예수를 배반한 것이고 유대인들도 모두 실망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강도를 풀어주라고 소리를 지른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예수께 기대를 하고 복을 달라 하고 건강을 달라 하고 입시에 아이들이 붙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런데 나타난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때 모두 유대인들이 실망한 것과 마찬가지로 실망하게 됩니다. 그 결과 가룟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듯이 모두 실망하고 어떤 사람은 시험에 들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믿어도 별수 없다 하고 떨어져 나가기도 합니다. 모두 정치적 예수를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예수에 대해서 곡해한 것입니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은 목표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더 무서울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될 대로 되라 하고 포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될 대로 되라, 이 포기에서 오는 결과는 무서운 짓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거지는 자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먹고 살아야한다는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살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먹고 살만한데 살아야 할 이유도 목적도 없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입니다. 무의미나 허무가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목표가 없다는 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로마치하에서도 목적이 있는 사람들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곡해이기는 했지만 분명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날을 기다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때 주님이 재림하기를 고대했었습니다. 그래서 고난을 참고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신앙을 지키고 기다리며 고난을 이겨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목표가 없고 기다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목표가 없으니까 때로 쉽게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기다림이 없고 목표가 없기 때문에 친일파가 되어 미래를 현실로 바꾸어 살았습니다. 민족을 이간하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민족을 팔아먹기도 하였습니다. 목표가 없으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나치시대에 레지스탕스로 활약하다가 잡혀 들어온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불이 났습니다. 빛이 났습니다. 사명감에 불탔습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장사하며 삶을 살아가다가 붙잡혀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항의했습니다. “나는 아무 짓도 안했다, 억울하다, 나는 나치에 대항하지도 않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그때 레지스탕스가 눈을 부릅뜨고 한마디 했습니다. “당신은 왜 아무 짓도 안했는가, 지금 민족이 다 죽어가고 피 흘리고 신음하고 있는데 당신은 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단 말인가.” 목표가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하긴 했습니다. 그것은 자기 이익 챙기는 일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는 그래도 희망이 있습니다. 지난해 보훈처에서 청소년들의 의식을 조사했는데 오늘 젊은이들이 아주 대견했습니다. 한국 일본 미국 중국에서 각각 젊은이 600명씩 모두 2,400명에게 물었습니다. 전쟁이 나면 참전하겠는가 하고 물었더니 중국 74.8 % 미국 49.7% 일본 29.3% 한국 56.3%가 나왔습니다. 또 우방과 관계발전의 의지를 물었습니다. 중국 78.9 %  미국 70.3% 일본 67.1 % 한국 80.1%가 나왔습니다. 또 다문화인들의 사회 기여도를 물었더니 한국이 단연 최고 수치로 나타났습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들은 아주 건강한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국민은 때로는 불평도 많고 요구도 많습니다. 때로는 이기적일 만큼 자기를 챙기는 면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희망이 있습니다. 데모하는 것을 보십시오. 얼마나 치열하게 열심히 합니까. 그것을 나쁘게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만큼 우리민족이 열정이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도 뭔가를 해 내는 것입니다. 교육열을 보십시오.  입시 때가 되면 산속 절간 추운 곳에서 하루 수백 번씩 앉았다 일어났다 하며 정성을 다해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목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금식기도를 왜 합니까.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이 금식하는 일입니다. 일주일만 금식해 보십시오. 세상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 것인가를 실감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왜 금식을 하는가 하면 당면한 일을 해결하기 위한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금식기도가 순수하게 영적 삶을 위해서 한다면 더욱 뜻이 깊은 기도가 될 것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금식기도 한다면 더더욱 소중한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진리가 세상에 이루어지기를 위해서 기도한다면 주님이 더욱 기뻐하실 기도입니다. 내가 좀 더 깊은 영적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 내가 좀 더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금식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가 얼마나 순수하겠습니까. 그런 기도를 하나님이 외면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퓨 리서치가 오늘 미국인의 성인 1,546명을 대상으로 신앙의식을 조사한 통계를 보면 오늘 미국도 희망이 있는 나라입니다. 조사에 의하면 미국인 10명중 4명이 2050년 안으로 주님이 오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응답했습니다. 미국인 41%는 향후 40년 안에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미국인 중 58% 나는 기독교인이라고 응답하였고 32% 나는 가톨릭교인 이라고 응답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인 전체에서 기독교인이 90%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장차 세상에 아들 예수를 보내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람들이 그 약속을 믿고 이제나 저제나 기다렸습니다. 시므온은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고 안나는 금식하며 기다렸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매일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기다렸고 목자들은 양을 치면서 주의 오심을 고대하였습니다. 얼마나 행복하였겠습니까. 기다리는 사람은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던 날 동방박사들에게, 목자들에게, 시므온에게, 안나에게 사전에 알려주셨던 것입니다. 이다음 주님의 재림의 날에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날 것입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기다림 자체가 없이 어느 날 그날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 목적이 없으니까 방종하고 무질서하게 살고 까마득히 잊어버린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들이어야 합니다. 그렇게 기다리다가 어느 날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날 시므온이 주님을 맞이하듯이 안나가 주님을 맞이하듯이 그렇게 만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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