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의 소망
삼하 7:1-3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나단
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 하니라.
다윗은 8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목동으로 성장하였고 다른 형제들에 비해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이새는 어느 날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아들을 다 모아놓으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중 한 아들을 왕으로 삼기 위하여 기름을 부으려 한다고 했습니다. 이새에게 8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그중 7명의 아들만 모아 놓았습니다. 그 7형제 모두가 왕감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시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또 없느냐” 고 물으니 “말째가 하나 더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보아도 말째는 왕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부르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급히 연락하여 들에서 양치 던 막내아들 다윗을 데려왔는데 그 “얼굴이 붉고 아름다웠다”(삼상 16:12)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다윗이 미동이었다는 말입니다. 즉 다윗은 왕감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미동은 배우나 탤런트는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장동건이나 배용준은 탤런트는 되지만 왕감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왕감은 노무현 같이 이명박 같이 생겨야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미동 다윗에게 기름을 부으라 하십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붓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이 성령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다윗이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지고 심부름을 갔습니다. 그때 전쟁터에서 골리앗을 보았습니다. 골리앗에게 하나님이 욕을 당하고 수치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속에서 의분과 분노가 솟아올랐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골리앗 앞으로 나아가 물맷돌을 던져 죽입니다. 그것은 다윗이 죽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그가 던진 물맷돌을 통해서 역사하심으로 죽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연도 재수 좋은 것도 다윗이 죽인 것도 아닙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였고 섭리였습니다. 다윗은 그때부터 영웅이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윗이 매스컴을 타기 시작하고 온 국민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때부터 기울기 시작하고 다윗의 위치는 점점 견고해져 사울시대는 지나가고 다윗이 왕이 되어 40년 동안 왕위에 있었습니다. 여기 다윗에게서 우리는 몇 가지 발견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사람
시편을 보십시오. 구구 절절이 다윗은 애절하게 하나님을 사모합니다. 하나님도 그런 다윗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다윗시대가 가장 융성했습니다. 오늘도 이스라엘 민족의 가장 큰 염원은 다윗 때를 재현하는 것이 꿈이고 최대의 기대입니다. 다윗의 일생가운데서 밧세바 사건만 빼면 다윗은 아주 완벽한 사람이었습니다. 밧세바 사건은 다윗도 인간임을 나타낸 유일한 실수였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시기를 “네가 나의 길을 가면 영원히 네 자손이 왕위에 오를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복이 어디 있습니까. 왕이 되는데 선출직도 아니고 자자손손이 자동적으로 그것도 임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평생 동안 왕족이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혈통에서 예수가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예수를 “다윗의 자손 예수“라고 불렀습니다. 세상에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충성자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를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언제나 은혜를 주시고 함께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안내하시고 형통을 주십니다. 오늘 자손들에게 집이나 돈을 물려주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이것은 당장은 별로인 것처럼 느껴지지만 시간이 흐른 후에는 그것이 최고의 복임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오늘은 사람들이 덜 중요한 것에 목을 매고 살아갑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닐 때 수단 방법을 다 동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술수를 전혀 쓰지 않았습니다. 사울을 여러 번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사울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인데 어떻게 내 손으로 그 몸에 손을 댈 수 있는가 하고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울을 직접 심판하실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그 후 사울은 하나님이 심판하셔서 자연스럽게 제거되고 다윗이 왕이 됩니다. 사람은 왕이 되기 전과 후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전과 후가 전혀 변함이 없이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오히려 다윗은 왕 된 후에 하나님에 대한 의존도가 더 깊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사무엘 때 이래로 기럇여아림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후 오벧에돔의 집에 3개월 안치했다가 예루살렘 성으로 모셔왔는데 초라하게 휘장 안에 안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다윗은 백향목으로 지은 왕궁에서 편히 지내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것이 늘 마음에 걸리고 자책감이 들어 나단 선지자 불러 탄식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2절을 보면 “왕이 나단 선지자에게 이르되 불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살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가운데 있도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나는 호화로운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데 하나님의 궤는 초라한 성전에 계시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그를 그토록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복은 심은 대로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한 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입게 됩니다.
다윗의 소원
그러자 선지자 나단이 대답했습니다. 3절에서 “나단이 왕께 아뢰되 여호와께서 왕과 함께 계시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행하소서”라고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를 안치하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마음의 소원이고 간절한 소망이었습니다. “나는 백향목으로 지은 궁에 거하고 하나님의 궤는 초라한 휘장 안에 거하시도다“ 그것이 늘 죄송했고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복을 받고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보실 때 다윗이 얼마나 대견하고 고맙고 예쁘게 보였겠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감탄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불러 그에게 계시하고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4절을 보면 “그 밤에 여호와의 말씀이 나단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가서 내 종 다윗에게 말하기를 ... 네가 나를 위하여 내가 살 집을 건축하겠느냐, 이제 내가 너와 함께 있어 이기게 하고 내가 네 이름을 위대하게 만들어 주리라(9),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낳을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12),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하셨다 하라”(16)
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영광이 어디 있습니까. 솔로몬이 왕이 되자마자 1천 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입었는데 다윗은 더 없는 영광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복을 받을 때는 받을 이유가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에는 외상이 없습니다. 심은 대로 받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한대로 받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좋아하고 복을 주실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 후로 하나님은 다윗이 가는 곳 마다 이기게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7장에서 그 일이 있고 난 후 가는 곳 마다 이기게 하시고 승리하게 하시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사무엘하 8장에 보면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을 쳐서 항복을 받고”(1) “모압을 쳐서 그들로 땅에 엎드러지게 하고 조공을 받으며(2)” “소바왕을 쳐서 .. 보병 2만 명을 사로잡고(3)” “아람사람이 다윗의 종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라, 다윗이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시니라”(6) “다윗이 어디로 가든지 여호와께 이기게 하셨더라”(14)고 했습니다. 그때 7장18절에서 다윗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누구이며 내 집은 무엇이기에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하셨나이까, 22절에서 그런즉 주 여호와여 주는 위대하시니 ....주와 같은 이가 없고 주 외에는 신이 없나이다.”
신앙도 희미한 신앙이 아니고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신에 차 있습니다. 이런 신앙자는 그 자체로서 복이고 은혜의 삶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평안한 것입니다. 한쪽으로 마음이 확실하게 기울면 마음이 평안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소속이 분명해야 합니다. 한 때 “경계인”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경계인이라는 말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양쪽을 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그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보통으로 말하자면 양다리 걸치는 모습입니다. 사람은 사랑도, 정치도, 신앙도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바알선지자들과 싸울 때 “너희는 어느 때까지 머뭇거리겠느냐 ... 바알이냐 여호와냐 속히 택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성령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경고하시기를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 아니면 내 입에서 내치리라“고 하셨습니다. 소속을 분명히 하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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