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제 목 :한 알의 밀의 신비
본 문 :요한복음 12 : 20 ∼ 26
지난 2월 28일 어느 신문에 깜짝 놀랄 그런 기사가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친일파 708명의 명단이 발표됐다고 하는 그것입니다. 이 친일파 계보를 보면서 저는 옛날 일이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이름을 대면 알만한 유명한 사람들, 교육계와 나라를 위해서도 크게 일 많이 하신 분들입니다. 그 유명인사 가운데에도 친일파가 있다는 것입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이 유명인사들이 우리가 지목하는, 지금 기억하고 있는 친일파라고 하는 사람들이 말입니다, 동네마다 다니면서 전쟁에 대해서 설명을 했습니다. 이 전쟁은 거룩한 전쟁이라고 심지어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이 전쟁에 나가서 죽는 것은 마치 순교와 같다고 했습니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들이 그 당시에 나온 신문에 그대로 기재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한국 젊은이들을 독려해서 무서운 다시 못 돌아오는 전쟁터로 내몰았습니다. 이 얼마나 답답한 이야기입니까? 이 일로 인하여 친일파라는 씻을 수 없는 이름을 가졌고 본인은 물론 그 자손들도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악몽 같은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어째서 이들은 이렇게 우리 젊은이들을 향하여 이 전쟁에 나가라고 돌아다니며 강연회를 하고 그렇게 독려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첫째는 8·15가 눈앞에 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이렇게 일본이 빨리 망할 것이라는 걸 몰랐습니다. 그렇게 빨리 망할 줄 알았으면 아니 미쳤다고 그러고 다니겠습니까? 역사 의식이 부족했습니다. 앞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일본이 이렇게 쉽게 빨리 망할 것을 모르고 일본 사람에게 붙어서 그 어처구니가 없는 말들을 하고 반민족적인 그러한 행동을 했더라는 얘기입니다. 또 한가지는 죽음이 무서웠습니다. 여러분, 목숨은 하나라고 하지 않습니까? 죽음, 살고 죽는 문제는 참 심각합니다. 그렇지만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죽음보다 더 귀한 것이 있습니다. 죽음보다 더 귀한 것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우선 살고 보자는 이런 이야기는 인간답지 못합니다. 보세요. 부끄럽게 살기가 죽는 것만 못합니다. 그 창피스럽게 부끄럽게 살아남아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차라리 죽는 것이 좋았는데요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면 이렇게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 자손들 가운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는 이 아버지 이름 때문에 장가도 못 가겠다 그랬어요. 한평생 그 이름이 따라다니니까요. 이 부끄러운 이름, 이걸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씻을 수 없는 거예요. 또 한가지는 죽음으로서 더 큰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그는 몰랐습니다. 죄송하지만 어차피 사람은 한번 갑니다. 그런데 잘 죽으면 산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가 있어요. 참 훌륭한 죽음은 많은 훌륭한 사람을 탄생케 하는 결과가 되거든요. 이걸 몰랐어요.
8·15 해방이 된 다음에 그 왜정 말기에 그 신사참배문제로 감옥에 들어갔다 나온 전도사님이 계시는데 신학 대학 간판도 못 보았답니다. 그러니까 신학교육을 못 받은 집사님인데 목사님 안 계시는 시골 교회에서 이분이 전도사로 일하다가 신사참배 반대하고 감옥에 들어가서 7년 동안 고생하고 산 순교자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래 출옥을 해서 나왔는데 이분을 모셔다가 저희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어요. 제가 어렸을 때 국민학교 5학년입니다. 그런데 그 전도사님이 그때 옷이 많지 않으니까 무명옷, 무명 하얀 무명 두루마기를 입고 오셔서 시간시간 일주일동안 설교하시는데 손을 딱 들고 “죽도록 충성하라.”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두가 감격 감격했습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리라, 그게 총 주제였어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러워했는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낮 공부 시간에 그때에 고생한 이야기를 하고 또 그 장로님들이 “한번 보여주세요. 보여주세요.” 아 이 옷을 벗고 배를 보여주는데요 이 가슴과 배가 만국지도 같아요. 인두로다가 지졌어요. 고문을 하면서 계속 지져서 여기가 전부 이렇게 데이고 그냥 막……. 만국지도 같다니까요. 정말 우러러 보이고 영광스럽게 보이더만요. 그 부흥회가 있은 후에 바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큰 교회에 있는 목사님은 바로 사표를 내고 먼 지방으로 가버렸어요. 왜요? 그 분은 부끄럽게도 신사참배 했거든요. 죽음이 무서워서 신사참배 했는데 목사가 신사 앞에 가서 꾸벅꾸벅 했다 그 말이에요. 이러고 나니 해방되니 이게 부끄러워 살수가 있어야지요. 여러분 오늘도 보면 뭐 누가 얼마를 뭐 횡령했느니 누가 얼마를 수뢰했느니……. 참 나는 사실여부를 알고싶지 않습니다. 왜 이렇게 부끄러운 짓들을 하고 있나. 아, 좀 가난하게 살면 안되나. 그 창피하게 이게 뭡니까? 이래놓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니는 이거이거이거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여러분, 생명보다 귀한 것이 명예입니다. 왜 이 생각을 못하고 부끄러운 짓들을 하고 있는 겁니까?
오늘 성경 말씀을 들어보세요.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느니라. 예수님은 이 진리를 이 생명의 진리를 말씀하셨고 이 생명의 진리를 믿었고 이 생명의 진리를 따라 그는 죽었습니다. 놀라운, 영광스러운 생명을 위하여 그는 한 알의 밀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이건 선택적인 죽음입니다. 안 죽으려고 이리저리 도망가다가 억지로 어떻게 되어서 죽었다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십니다. 당당하게 올라가셔서 십자가를 지신 겁니다. 왜요? 그는 저 앞에 있는 영광과 많은 열매를 맺는 저 미래를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죠. 그 결과를 알고 있기 때문이죠. 이것이 이 죽음의 끝이 아니요. 생명의 시작이요 죽음의 끝이 아니요. 이 죽음으로 인하여 많은 열매가 맺혀질 것을 알고있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에 헬라인이 예수님 앞에 와서 요청을 했다 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조금 해석을 드려야 됩니다. 누가 왔을까? 이 헬라인이 누굴까?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에게 간청해. 여기에 보니깐 ‘여짜온대’ 그랬어요. ‘가서 여짜온대’ 그런데 무얼 여쭈웠는지 내용이 없어요. 여기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그렇게 믿을 만한 얘기는 아닙니다마는 그래도 전설이 여기 해석을 주고 있습니다. 이 헬라사람이라는 것이 바로 에데스다 왕국의 사신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에데스다 왕의 아들이 지금 한센병 걸렸어요. 그래 죽어가니까 왕이 백방으로 애를 쓰다가 고칠 수가 없어서 소문을 듣자하니 유대 땅에 예수라고 하는 분이 있는데 그는 한센병도 고친다더라 하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냈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이 헬라문화에 가장 가까이 있는 분이 바로 빌립입니다. 그가 헬라 말을 했던 거 같습니다. 그래서 빌립을 만나서 얘기하고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님께 가서 여쭈었다는 거예요. 뭘 여쭈었느냐. 여기 계시지 말고 에데스다로 가십시다. 왕의 아들의 한센병만 고쳐주시면 우리가 평생토록 왕의 고문으로 추대해서 잘 모시겠습니다. 저들은 유대사람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까지 그 정보를 다 알고 왔다는 겁니다. 이 위험한데 계시지 마시고 우리 나라로 가십시다, 그랬다는 거예요. 어쩜 그럴 것도 같아요. 그래 예수님은 이 시간에 말씀합니다. 아주 전혀 다른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이 말은 이 돌연 말씀은 어디 뜻이 뭐냐 하면 이쪽에는 에데스다 나라에 가서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세속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이쪽에는 십자가의 권한이 있고 저 앞에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이 세속적인 영광과 영원한 영광 사이에서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는 그 순간입니다. 그런 결단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결심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로 굳게 결심하시고 십자가를 지기로 결심하는 바로 결단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역사의식이요. 예수님의 인생관이요 세계관이요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속 깊이 있었던 그의 소신이올시다. 십자가를 선택하시고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시는 영광의 아침을 바라보게 됩니다. 한 알의 밀이 죽지 아니하면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1865년 아주 추운 겨울에, 눈보라가 치는 날입니다. 한 여인이 영국의 사우스 웨일즈라고 하는 곳에 언덕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남편 없이 어린아이 하나를 데리고 지금 갓난아이를 안고 그리고 가던 길에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추위에 떨다떨다 못해서 이 어머니는 죽었습니다. 눈보라가 다 그친 다음에 사람들이 이 여자가 앉아서 죽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여자가 홀랑 벗고 있다는 겁니다. 자기가 안고있는 아이를 살리려고 자기는 하나씩 하나씩 옷을 자꾸 벗어서 그 아이를 감쌌던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죽었는데 아이는 살아 있습니다. 이 아이를 데려다가 착한 사람이 키웠는데 이 아이가 커서 1916년 영국수상이 됩니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라고 하는 수상입니다. 그는 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어렸을 적부터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위해서 죽었다고 내 대신 죽었다고 알몸으로 죽었다고. 그 뜨거운 사랑에 감격하고 한평생을 부모 없이 살았으나 그는 위대한 지도자가 됩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또 다른 사람을 살리고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오늘 죽으면 내일 삽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는 어느 분 하나 피아니스트를 압니다. 아주 훌륭해요. 남편도 훌륭해 보이는데 단란한 가정이에요. 그런데 밤낮 티격태격해요. 그리고 한번씩 별거했다가 또 만났다가 별거했다 만났다. 온 교회가 걱정을 해요 그 집 때문에. 그래 제가 한번 만나서 개인적으로 물어보았어요. 아니 행복하게 살아도 모자랄 세상에 우리가 보니 두 사람 다 좋은 여건인데 왜 그렇게,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고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했더니 대답이 재미있더라구요. “있지요.” “아, 있으면 그럽시다” 그랬더니 “뭔데요” 그랬더니 “내가 죽으면 되지요.” 여러분 내가 죽으면 됩니다. 별것도 아닌 거 살아 가지고 야단이요. 죽어버려 까짓 거. 어차피 죽을 건데 죽어버려. 어차피 끝난 건데 죽어버려. 그러면 되는 건데요. 왜 이렇게 별것도 아닌 것, 별것도 아닌 자존심, 다 없어진 그까짓 체면, 그 무얼 가지고 그럽니까. 툭툭 털어 버려. 그러면 살 길이 있어요.
오늘 죽으면 내일 삽니다.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립니다. 바르게 죽으면 영광의 아침이 옵니다. 이게 사는 길이지요. 죄짓고 부끄럽게 사는 것은 사는 길이 아닙니다. 나죽고 남 죽이는 겁니다. 여기 신비로운 말씀입니다. 신비가 있습니다. 죽으면 산다. 내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린다. 바르게 죽으면 영생이 있다. 오늘 죽고 미래에 사는 것입니다.
인도에 갠지스강이라고 하는 강이 있지요. 거기에 어떤 노인 하나가 강둑에 앉아서 조용히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조용히 보는데 아주 유리알 같이 맑은 물에 이렇게 흘러가는데 그래 보니까 꿈틀꿈틀 하는 게 보여요. 이게 뭔가 하면 전갈 하나가 지금 물에 떠내려가고 있어요. 떠내려가면서 육지로 나와 보려고 하는데 이게 헤엄을 잘 못 치거든요. 그래서 나뭇가지를 붙들고 하려는데 그 나뭇가지도 흘러가고 있어요. 이러 모로 이러 모로 그냥 살아보려고 바둥거리는 것을 보고 이 노인이 전갈을 건져주었어요. 건지자마자 물잖아요. 아 그 다음엔 유명한 전갈 꼬리로 쏘잖아요. 그 지나가던 사람이 “노인, 아 그 전갈은 살려줘서 뭘 하겠다고 그를 그렇게 구출하려고 하는 거요. 쏘이면서…….” 이 노인이 빙그레 웃으면서 하는 말이 “전갈은 쏘는 것이 본능이고 나는 구원하는 것이 본능이요.” 대상을 묻지 마세요. 나는 나대로 한 알의 밀이 되어 죽을 것이에요. 희생할 것이요. 자기 생명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네가 죽으면 많은 사람을 살리리라.
성도 여러분, 현재에 죽고 미래에 삽시다. 나 하나 죽고 많은 사람을 살립시다. 순간에 죽고 영원한 영광을 바라봅시다. 이것은 추상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것은 실제 상황입니다. 이 진리를 버렸기 때문에 나라도 망하고 세상도 망하고 부끄러운 생을 살고 저 가문도 망하는 거예요.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얻기 위해서는 주저없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길을 가야할 것입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한 알의 밀의 신비를 다시 생각합니다. 여기에 생명의 신비가 있고, 죽음의 신비가 있고, 영생의 신비가 있음을 압니다.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사, 이 진리를 따라 살고, 이 진리를 따라 가게 하시고, 앞에 약속된 영생을 얻을 뿐더러 나의 희생을 통해서 많은 열매를 거두는 그러한 영광된 삶과 영광된 미래를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क्वाक पास्टर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귀를 새롭게:마 13; 16 ∼ 23 (0) | 2023.01.28 |
---|---|
발걸음을 새롭게:롬 10 : 9 ∼ 15 (0) | 2023.01.28 |
십자가로 승리하시다 :골 2 : 8 ∼ 15 (0) | 2023.01.28 |
그리하여 주와 함께 있으리라 :살전 4 : 13 ∼ 18 (0) | 2023.01.28 |
그리하고 믿는 자가 되라 :요 20 : 24 ∼ 31 (0) | 2023.01.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