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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문화 명령 (창세기 1장 24-31절)

by 【고동엽】 2023. 1. 7.

하나님의 문화 명령 (창세기 1장 24-31절) < 사람 창조와 관련된 사실 >

 하나님은 창조 6번째 날에 육지동물, 즉 가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창조하셨다(24절). 뱀은 원래 기는 것이 아닌 말하는 들짐승으로 창조되었다(창 3:1). 그러다가 저주 받아 배로 기게 되었다(창 3:14). 그렇게 육지동물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후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 창조와 관련된 4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1.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본문 26절에 묘사된 형상(첼렘)과 모양(데무트)은 비슷한 단어인데 굳이 구분하면 형상은 ‘전체적인 속성’을 뜻하고 모양은 ‘외양적인 모습’을 뜻한다. 유사한 두 단어의 반복은 사람이 하나님과 외모와 속성은 물론 분위기도 닮았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사람을 만들고”라는 표현에서 ‘사람’에 대한 히브리어 ‘아담’이란 표현은 ‘일반적인 사람’을 뜻하는 일반명사의 뜻도 있고 ‘최초의 사람인 아담’을 뜻하는 고유명사의 뜻도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다(27절). 그 말씀은 사람의 존엄성과 남녀의 평등성을 잘 묘사한다. 결국 모든 사람은 존중되어야 하고 모든 민족도 결국 한 혈통에서 생겨났기에 서로 귀히 여겨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 자체를 미워하지 말라. 사람 자체를 미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미워하는 셈이다.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말고 그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돕고 기도하라.

 타락 전 사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이 얼마나 복되고 놀라운 것인지를 알 수 없다. 다만 죄로 타락했어도 현재처럼 놀라운 문화를 만든 것을 보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타락 전의 상태가 얼마나 뛰어난 상태였는지 대략 짐작된다. 반면에 지금처럼 문화가 엄청나게 발전했어도 그 이면에 뿌리 깊은 모순들이 무수히 많은 것을 생각할 때 사람에게 침투한 원죄가 얼마나 치명적인 것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2. 만물을 다스리는 책무가 있다

 본문 26절 하반부를 보라.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사람에게 맡겨진 본질적 책무는 땅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또한 사람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창조되었다. 결국 사람이 땅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잘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반면에 물질과 환경에 의해 다스려지는 것은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환경이 어렵다고 성품이 변하거나 감사와 헌신을 잃는 것처럼 환경의 온도에 따라 삶의 온도가 영향을 받게 하지 말라. 더 나아가 내 죄와 허물과 잘못에 대해 환경 핑계를 대지 말라. 어떤 학생은 공부방이 없어 공부를 못했다고 핑계 대지만 단칸방에 살면서도 대입 수학능력 시험에서 수석한 학생도 있다. 가끔 살인범이 자란 환경을 탓하지만 그보다 더 나쁜 환경에서 자랐으면서도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다.

 환경을 탓하는 것은 인간 창조의 가치를 훼손하고 하나님을 크게 욕되게 하지만 환경을 잘 다스리고 극복하면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신다. 없어도 평안을 잃지 말고 있어도 교만에 빠지지 말라. 사도 바울처럼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고백하며 환경을 극복할 때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고 다른 능력도 더해주신다.

3. 행복 이상의 복이 주어졌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보면 복의 개념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여기고 외적인 복을 경시하지만 ‘마음의 행복’과 ‘성경적인 복’은 다르다. 성경적인 복에는 마음의 행복 이상의 외적인 복도 포함된다. 그것은 기복신앙이 아니다. 기복신앙은 인격적인 믿음과 땀도 없이 복만 추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참된 복의 개념을 가지고 물질적인 영역과 환경적인 영역도 정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창세기 1장 22절을 보면 하나님이 다섯째 날에 물고기와 새를 창조할 때 성경에 처음으로 ‘복’이란 말이 나온다. 그때 마음이 없는 물고기와 새들에게 복을 주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고 하셨다. 복은 ‘마음의 행복’ 이상의 의미라는 암시다. 그 다음에 사람이 창조된 후 두 번째로 ‘복’이란 말이 나온다. 본문 28절을 보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정복하고 다스리는 복’을 주신 일이다. 기독교의 복은 마음의 행복 이상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이고 환경적인 번성의 역사를 추구하라. 불신자에게 뒤쳐진 채 “그래도 나는 행복해.”라고 자랑하지 말라. 세상에 정복당하고 다스려진 채 빌빌거리거나 비웃음을 사서 하나님도 비웃음을 받게 한다면 불충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런 모습이 없도록 거룩한 비전을 따라 최선을 다하면 하나님이 기억해주시고 복된 길도 열어주실 것이다.

< 하나님의 문화 명령 >

 본문 28절에는 5가지의 명령형 동사가 있다. “생육하라. 번성하라. 충만하라. 정복하라. 다스리라.”는 명령이다.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은 포악한 정복자처럼 자연 만물을 남용해도 된다는 명령이 아니라 자연을 선하게 개발하고 경작하고 활용하라는 문화 명령이다. 이 명령은 사람에게 내려진 첫째 명령으로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라는 명령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고 최초로 주신 복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이었다. 성경은 자녀의 축복에 대해 무수히 언급한다. 그것을 생각할 때 저 출산 현상은 심각한 문제다. 현재의 추세라면 2055년엔 우리나라 인구가 약 3500만 명이 된다. 2300년경엔 약 30만 명만 남고 2950년쯤에는 한민족은 지구상에서 거의 멸종된다. 그 현상을 누가 제일 즐기는가? 사탄이다. 하나님의 첫째 명령이 생육하고 번성하는 복을 주시는 것이라면 사탄의 첫째 계략은 생육과 번성을 막아 화를 부르는 것이다. 사탄은 생육과 번성을 막으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 핵심 전략 중 하나가 가정 파괴 전략이다. 사탄은 남성주의 혹은 여성주의로 내면에 이성에 대한 증오심을 품게 해 결혼도 덜하고 결혼생활도 순탄하지 않게 해서 번성을 막는다. 그 전략이 더 교묘해져 이성에 대한 증오심 유발로 끝나지 않고 동성에 대한 성적 애정을 부추겨서 더 짜릿한 일탈적인 쾌락을 제공하며 번성을 막는다. 인권 존중을 내세워 동성애자를 성 소수자로 여기자고 금기의 빗장을 풀면 사탄은 신나서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런 원리라면 학대 성애자, 수간 성애자, 아동 성애자, 시체 성애자, 로봇 성애자도 성 소수자인가?

 참된 인권 존중과 사탄의 인본주의는 다른 것이다. 사탄의 인본주의는 이단 사상만큼 나쁜 것이다. 가정 관계와 이성 관계를 깨뜨리려고 교묘하게 자유와 인권을 빙자해 침투하는 사탄의 인본주의를 잘 걸러내야 생육과 번성의 복을 얻는다. 인본주의자들은 낙태의 완전한 자유를 허락하라고 연일 데모한다. 자유를 찾아주는 척 하면서 영혼을 사탄의 사슬로 사로잡고 생육과 번성을 막으려는 사탄의 뻔한 전략에 속지 말라.

 하나님이 없는 세상은 암흑 세상이 된다. 하나님이 있다고 믿기에 죽는 길이 사는 길이고 절제의 길이 황제의 길이라고 믿고 헌신하고 절제하는 것이다. 인본주의 사상은 자기만 생각하라는 사상이다. 무속신앙이 헌신이 없는 복을 약속하니까 참된 복을 빼앗는 무서운 이단이 되듯이 인본주의 사상은 헌신이 없는 자유를 약속하니까 참된 자유를 빼앗는 무서운 사상이 된다. 헌신이 없는 사회와 교회와 가정이 잘 지켜지기 힘들다.

 인본주의 사상에는 ‘헌신’이란 개념은 없고 ‘자기’란 개념만 충만하다. 그러나 헌신이 있어야 가정과 사회가 지켜진다. 인본주의 사상이 멋지게 보이지만 장밋빛 쇠사슬처럼 점차 영혼과 마음과 육체를 무섭게 옭아맨다. 광명의 천사를 가장한 사탄의 사상인 인본주의에 미혹되지 말라. 생육과 번성을 막는 인본주의 사상을 제일 막는 것이 무엇인가? 교회다. 그래서 사탄은 매스컴을 활용해 교회와 목회자와 신실한 성도를 무너뜨리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그 사탄의 전략에 넘어가지 말라. 이해하는 것과 미혹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예전에 A 선교사가 와서 주일 오후 성경공부 때 약간 유머를 섞어 말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이를 5명 이상 낳으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40년 전에는 그 말씀대로 성도들이 정말로 아이를 더 낳았다. 20년 전에는 그 말씀이 메시지가 담긴 유머로 알고 활짝 웃었다. 요새는 그런 말씀을 들으면 눈살을 찌푸리고 심지어는 “이성 감수성이 부족하다.”라고 여기면서 시험에 들기도 한다.

 저도 그 말을 듣고 잠깐 염려했지만 곧 편안해졌다. 증오를 부추기는 사상에 물들어 세련됨이 없는 사소한 말을 가지고 따지듯이 시험에 들 정도의 교회 수준은 아님을 믿었기 때문이다. A 선교사의 편하게 말한 세련되지 못한 표현이 여성에 대한 몰이해의 증거는 아니다. 그는 세 딸을 사랑하고 아내를 누구보다 존중하고 부부 사이도 좋다. 그 표현이 이성 감수성은 약간 부족해도 이해 못할 표현은 아니다. 5명 이하를 낳은 사람이 잘못되었다는 정죄가 아니라 성경적인 생육과 번성을 복을 강조한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은 이성 감수성이 점차 중시된다. 이성 감수성을 더 키우라. 다만 이성 감수성이 “내가 이성 감수성을 좀 더 키우자.”는 배려의 삶을 바탕으로 형성되면 이성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새록새록 커지지만 “당신 이성 감수성이 없어. 나 기분 나빠.”라는 정죄의 삶을 바탕으로 형성되면 이성을 미워하고 배타하는 마음이 스멀스멀 퍼진다. 전자의 삶은 신본적인 삶으로 번성의 복을 낳지만 후자의 삶은 인본적인 삶으로 번성의 복을 막는다. 사소한 말로 미워하지도 말고 미움도 받지 않도록 힘쓰면서 생육과 번성에 힘써 일조하라.

2.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명령

 현재 몸담은 분야에서 불신자보다 능력을 발휘해서 정복하고 다스리는 위치에 있으면서 정복당하고 뒤쳐진 인생이 되지 않게 하라. 욕심 충복보다 사명 이행을 위해 머리가 되는 축복도 소원하고 그것을 위해 힘써 땀을 흘리라. 높은 위치에 있으면서도 군림하지 않고 겸손하게 섬기면 사람들에게 더 감동을 줄 수 있는데 낮은 데서 계속 만족해 있으면 감동은커녕 자칫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쉽다.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잘 이행하려고 하라. 하나님은 지금도 다방면에서 나를 돕기에 하나님을 앞세워 일하면 복된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이 도와주시면 길이 없는 곳에서도 길을 열리고 지혜의 문도 열린다. 하나님은 내 모든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고 복된 존재로 만들려고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명령을 주셨을 때 하나님은 모든 분야에서 “내가 너를 도우리라”는 약속도 함께 주신 것이다.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지혜와 능력과 창조성을 구하되 과시적인 허황된 능력을 좇지는 말라. 가장 위대한 능력 중의 하나가 ‘거룩한 노력’이다. 힘써 땀을 흘리라. 노동은 죄의 결과나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다. 타락이 노동을 부패시켰지만 타락 이전에도 “정복하라! 다스리라!”고 하며 하나님은 일을 권고하셨다. 일하는 것이 복이다. 일은 자기 위치에 대한 확신을 준다. 그런 확신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면 얼마든지 쓰임 받는 인생이 될 수 있다.

 왜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자신감이 넘쳤는가? 평소에 목동 일을 잘했기 때문이다. 그는 맹수로부터 양을 보호하면서 실력과 자신감을 키웠기에 골리앗을 보고도 곰과 사자를 물리쳤을 때를 생각하며 두려움 없이 나아가 결국 골리앗을 넘어뜨렸다. 일을 통해 그런 자신감을 키우라. 자기 확신과 존중은 로또에 당첨되어 해변에서 편히 쉴 때 생기지 않고 의미 있는 노동을 추구할 때 생긴다. 그때 하나님은 필요도 넉넉하게 채워주실 것이다(29-30).

 최초 인간과 동물에겐 채식만 허용되었다. 육식은 타락 후 노아 홍수 사건 직후에 허용되었다(창 9:3). 마지막 때 새 하늘과 새 땅이 회복되면 원래의 먹이사슬 체계도 회복되어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다(사 65:25). 하나님은 피 흘림을 원하지 않으신다. 피 흘림이 없는 세상을 만들려고 힘쓰라.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 용서하고 사랑하며 환경을 잘 다스림으로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라. 사람이기에 싸울 수는 있지만 싸워도 화해하는 마음을 잊지 말고 멀리해도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

 한 젊은 부부가 결혼해 처음 몇 달간은 행복하게 지냈다. 어느 날 사소한 일로 감정이 격해지면서 싸움이 커졌다. 부부 싸움도 하다 보면 노하우가 생겨 “이 싸움은 며칠 가겠네.”라고 느끼면서 적절한 시점에 화해하려고 하지만 처음 싸울 때는 세상이 무너진 것 같고 신뢰가 다 깨진 것 같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서로 다른 사람이 맞춰가는 과정에서 싸움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때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이해의 폭을 넓히며 화해의 때를 기다리면 은혜의 때는 찾아온다.

 그 젊은 부부가 그것을 잘 못했다. 특히 아내가 부부싸움 후 밥도 해주지 않고 말도 하지 않고 냉대했다. 그렇게 3일째 되던 날 남편이 귀가 중에 버스에서 내리다 뇌출혈로 쓰러져 죽었다. 싸워도 자기 할 일은 다하고 여전히 서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지라. 그러면 어느새 화해가 이뤄지면서 더욱 성숙하고 복된 가정의 두 주인공이 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잘 이행하고 어디서든지 화해의 기운을 전파해 천국 가기 전에 이 땅에서의 천국 구현에 힘쓰고 천국 평안과 행복을 누리며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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