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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모세의 불 신앙! (민 20:7-13)

by 【고동엽】 2024.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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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불 신앙! (민 20:7-13)

 

성경을 읽어갈 때 대부분 납득이 되기도 하고 잘 이해가 될 때가 있습니다만은 우리의 작은
이성의 비판에 의해서 쉽게 납득이 잘 안되는 그러한 말씀들도 많이 있습니다. 제가 개인적
으로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말씀이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구약성경에서 모세가 어째서 가
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는지 그것이 늘 의문입니다. 모세는 어쩌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의 전부가 훈련이요, 그리고 하나님의 역
사를 위한 모든 과정이었습니다. 어찌 생각하면 다른 사람 다 못 들어가도 모세는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인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
고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고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 가구요 비
스가산 언덕에서 요단강 건너편으로 멀리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느보산에서 죽었습니다. 어
찌 이런 일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 뿐 아니라 그가 나이 많아서 120세나 됐으니까 나이 많
아서 기진해서 조상에게로 돌아갔다, 이렇게 기록되었다면은 그런대로 납득을 하겠습니다만
은 그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이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너는 나의 거
룩함을 드러내지 아니했다. 너는 나를 거역했다" 말씀하시고 "너는 이 백성을 가나안으로
인도하지 못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찌 이렇게 가혹한 심판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 첫째요.
두 번째는 신약에 와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혼탁한 교회가 아닙니다.
세속화되고 타락한 교회가 아니라 초대교회의 성령이 충만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그런
교회예요. 그 교회에 어찌 옥의 티와 같이 아나니아와 삽비라 같은 그런 사건이 있단 말입
니까? 그 사건 자체가 마음에 안 들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래 거짓말 한 번 했다고
해서 당장 내외간이 다 죽었습니다. 어찌 이렇게까지 가혹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것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이제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두고두고 생각하고 명상하고 이해해야할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모세가 훌륭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한 평생 큰 업적을 남겼습니
다만은 그 업적과 모세 자신의 문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이걸 알아야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서 순종한 사환이요. 하나의 머슴일 뿐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모세,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사람에게 집행합니다. 그 가운데서 그는 너무너무 높임을 받
게 되고 백성들 앞에는 하나님과 같이 높은 존경과 추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은 그의 사
역과 그 자신, 그의 업적과 모세라고 하는 사람의 관계는 전혀 무관한 것이올시다. 그런고로
그가 가나안에 들어가고 안 들어가는 것은 그의 업적의 문제가 아니요. 그걸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동시에 오늘 여기에 주신 말씀 가운데 보면 자,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말입
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의 교회를 창설하는 이 거룩한 역사 앞에 이런 거짓과 불의와 위
선, 이것은 용납할 수가 없다 하는 교회론적인 중요한 의미가 그 속에 있는 줄로 압니다.
모세는 지금 도덕적으로 죄를 지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도덕적 죄가 아니고 신앙적 죄를
지었습니다. 한 백성의 죄의 문제가 아니라 지도자 하나님을 대신해서 역사하는 한 지도자
의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이올시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게 될 때 열가지 재앙을 내려서 자, 애굽으로 하여금 항복하게 하
고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홍해를 건너 광야로 나오게 합니다. 이 모든 역사에 모세가 중간
에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이 같은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자 그런데 광야에 나온 사람들이
그대로 가나안으로 가지를 못 하고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그 죽은
죄목을 성경을 이렇게 말합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원망죄"입니다. 원망죄. 이 원망이라
고 하는 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걸 우리는 까맣게 잊고 있습니다. 살인과 도적질, 거짓
말, 간음, 이것만 죄인 줄 알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원망,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데
대해서는 우리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걸 생각해야 합니다. 그 야고보서
에서도 말하고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말합니다.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이 하나님
을 원망하다가 죽었느니라. 그런고로 너희는 원망하지 말라. 교회를 향해서 이렇게 사도바울
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원망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인의 죄 가운데
중심부에 원망이라고 하는 죄가 있는 것이올시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신 광야,
가데스에 있을 때 물이 없어서 하나님을 원망했다, 그런 내용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
로 이스라엘 백성은 그 출애굽 때에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을 보지 않았습니까? 불기둥과 구
름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요. 어쩌면 지금도 구름기둥 속에 있고 불기둥 속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아침마다 내리시는 만나를 먹고사는 거예요. 그런데 잠시 물이 없다고 해서
목이 좀 타기로서니 이제 이거 원망 할 수 있는 겁니까? 기다리는 마음이 부족해요.
Waiting Faith, 기다리는 믿음이 없어요. 조용히 기다리는 믿음이 없어요. 조급하고 초조하
고 그리고 쉽게 하나님을 원망했더라는 말씀이죠. 다 하나님께서 역사해요.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어떤 때에 조급해가지고 원망하고 뭐 망한다, 위기다, 총체다, 이렇게 호들갑을 떨다
가 또 문제가 잘 풀립니다. 그러고 나면은 오히려 그 일로 인해서 잘 되거든요. 그 때가서
아이고 원망하지 말았어야 될 걸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우리는 이같은 쓸데없는 원망
을 많이 해 버렸지요. 말이 많아. 호들갑을 떨어요. 왜 이렇게 초조하고 잠시도 조그마한 일
도 견디지 못 하는지, 이것이 우리의 결정적인 약점이요. 좀 느긋하게 '하나님 알아서 하시
겠지. 아 우린 고백대로 말하면 하나님 합동하여 선을 이룰 것이고 우리를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엄연한 역사가 여기 있는데 우리가 뭐 그렇게 원망할 게 아니' 라고
조용히 기다렸으면 얼마나 얼마나 좋았을 겁니까?
이것들의 원망하는 내용을 한 번 보십시다. 원망이라는 것은 원래 그 성격상 에스칼레이팅
하기 마련이예요. 상승작용을 합니다. 그래 조그마한 일 원망하다 보면 커지고 커지기 시작
하면 뒤에서 마귀가 작용을 합니다. '너 잘한다. 맘대로 원망해라' 이거요. 뒤에서 이렇게 동
요를 하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부모 탓하고 재산 탓하고 정치 탓하고 마지막에는 하나님
원망하죠. 모든 원망은 결국은 하나님께까지 그렇게 상승하게, 그러기 마련이올시다. 그래
오늘 성경에 보니까 이 사람들이 하는 말이 "죽었으면 좋았을 걸" 그렇게 말합니다. 이스라
엘 백성들이 범죄해서 하나님 앞에 우상 섬기고 간음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광야에서 이미
죽었거든요. "그들이 죽을 때 우리도 죽었으면 좋았을 걸" 했더란 말입니다. 이게 무슨 망언
입니까? 또 이렇게 함으로써 모든 은혜를 다 부정하는 것이에요.
그 다음엔 또 "왜 우리를 인도해 냈느냐?" 이게 할 말입니까? 어째서 우리를 이 광야로 인
도해 냈느냐고 출애굽의 거룩한 역사 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거예요. 생각해보면 그들은
이 원망하는 시간, 물 하나 없다는 이 하나의 사건 속에서 마침내 과거에 받은 그 많은 은
혜를 다 부정하고 있어요. 여러분, 혹 현실이 조금 괴롭더라도 지난날에 받은 많은 은혜, 그
걸 잊어서는 안되죠. 그걸 망각해서는 안되죠.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고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습니까? 그 과거에 주신 은혜 이 순간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될 것이구요.
그 다음에 저 가나안에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어쨌든 하나님께서 약속한 약속의 땅 가나안
이 저 앞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로 인도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모든 과
정을 통해서 그러면 그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 그리고 그 믿음이 있어야지요. 이것까지 다,
다 그대로 부인해 버리는 거예요. 과거의 은혜, 미래의 약속 다 부정해 버리고 오늘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었단 말이죠.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이 원망하는 백성 앞에, 이 위기 상황에서 모세가 위기를 어떻게 대처했느냐? 위기
대처 능력이 오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이 광경을 보면서 이 순간 어떻게 했느냐
는 것이죠. 오늘 본문에 보면은 세가지로 그가 반응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패역한 너희여"
하고 저주를 합니다. 이건 절망이올시다. 패역하다란 말은 반역자라는 뜻입니다. 배반자란
뜻입니다. 인간이 가진 죄 중에 가장 나쁜 죄가 배신하는 죄입니다. 배반하는 죄입니다. 그
런데 이같은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패역한 너희여, 하고 저주하게 됩니다. 원망하는 백성
을 보면서 자기도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리고 그만 정신 획가닥했어요. 그대로 저주해버렸어
요. 이게 모세가 잘못한 것이에요. 여러분, 원망이 마지막에 분노로 폭발했습니다. 분노로 폭
발하는 시간이에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어쨌든 하나님이 인도한 백성입니다. 큰 권능으로
구원하신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모세가 심판하고 저주할 권리가 없습니다. 다른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하나님의 위치에 올라서는 안됩니다. 소망이 있느니 없느니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에요.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신앙적으로 반응해야 되는 것이올시
다. 근데 모세가 이 순간에 신앙을 저버리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원망하는 백성을 원망하고
저주하게 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거예요. 모세가 이러구 저
러구 말하게 돼있는 게 아닙니다. 그 이상한 게 있습디다요. 여러분 혹 여러분의 자녀가 뭘
잘못하더라도 내가 나무랄 수는 있어도 다른 사람이 나무라면 기분 나빠요 그게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그 부부간에도 이것 때문에 싸울 때가 많아요. 엄연히 자식 잘되라고 하는
건데도 그 아내가 아이들을 뭐 나무라고 뭐 어쩌고 하면은 남편이 가만 안있어요. "그 왜
아이를 가지고 나무래?" 이러다가 싸우지 않습니까? 또 그런가 하면 남편이 어떤 때 아이들
에게 심하게 하면은 아내가 또 "당신이 잘못해놓고 왜 아이를 가지고 그러냐"고 이러다가
또 한 바탕 하는 것이거든요. 이게 다 뭡니까? 사랑하는데 내가 사랑할 때 내가 책망할 수
는 있지만 제3자 그 누군가가 책망하고 비판하는 건 영 못 참는 거예요. 하나님도 마찬가지
예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지 제가 뭔데 소망이 있느니 없느니 하노.
이거 아주 건방진 생각이에요. 그 불신앙적 생각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 우리
가 시비를 벌이지 마세요. 그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요. 우리는 사랑할 의무가 있고 용서할
의무가 있을 뿐이지 우리가 비판할 권리도 권력도 아니에요.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모세가 여기서 실수하고요.
또 한가지는 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얼마나 어려운 순간입니
까? 그 백성들이 창으로 찌르고 조소를 하고 머리를 흔들고 저주하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대 제사장 가야바가 그 앞에 앉아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원인이 여기에 있습니다. 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
어요. 그 순간 하나님을 생각했어요. 하나님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여 이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순간 가야바를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백성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 저
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이것이 신앙적인 바른 자세올시다. 또 우리가 잘 아는 스데반도 그
렇지 않습니까? 헬라파 유대인들, 바로 엊그제까지 친구요. 이 사람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돌
을 던집니다. 이를 갈며 돌을 던집니다. "이럴 수 있느냐? 너희가 이럴 수 있느냐?" 원망할
수 있겠죠. "세상이 어찌 이렇다는 말인가?" 절망할 수 있겠죠. 아니에요. 그는 하늘을 우러
러보았어요. 하나님을 쳐다보았어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눈과 눈이 마주치게 될 때,
그에게는 원수가 없어요. 뿐만 아니라 "그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이 되었다." 얼마나 귀한
얘기입니까? 모세가 이 순간 바로 그 신앙을 갖지 못했더라는 겁니다. "패역한 너희여" 원
망 불평한 결과, 이것이 불신앙이었습니다.
또한 성경에 보니까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하고 말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세
요. 모세가 언제 물 낸 일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내셨고 자기는 심부름을 했지. 하나님이 "
반석을 쳐라" 하면 쳤고, "그 지팡이를 들어 쳐라" 하면 쳐서 홍해가 갈라졌는데 거 하나님
이 하신 것이지 모세가 한 겁니까? 모세는 자그마한 심부름을 한 것뿐이에요. 그런데 이것
또한 40년 동안 그럭저럭 계속 이적을 향하고 표적을 향하고 보니깐 사람들이 모세를 높이
높이 하나님처럼 존경하게 되고 높임을 받게 되고 이 사람이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렸어요.
요새말로 간이 부었어요. 착각을 합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당신이 언제
물 내린 일이 있냐 이거예요. 당신이 한 일이 뭔데? 아무것도 아니거든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심부름 한 것뿐이죠. 그런데 오늘 이 시간에는 그가 큰 실수를 합니다. "우리가" 즉 "
내가 물을 내랴?" 하고 소리를 지르면서 반석을 치게 됩니다. 여기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자기 위치도 잃어버렸어요. 능력 안에 살면서 자기가 능력의 사람인 줄
로 착각하고 있었어요. 하나님의 능력,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이었을 뿐인데 어느 사이에 이
렇게 교만하고 오만한 시간이 왔더란 말입니다.
또 하나는 반석을 두 번 쳤다, 하는 실수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치라"
했어요. 거기 몇 번 치라는 건 없겠죠. "쳐라" 했는데 전과 달리 두 번을 칩니다. 어쩌면 이
래해야 되겠죠. "원망하는 너희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사 오늘도 너희들에게 물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라. 할렐루야" 하고 반석을 딱 하고 쳐야되는 거거든요. 이 사람이 지금 화
가 나다보니까 하나님이 치래서 치기는 치는데 '땅땅' 하고 쳤거든요. 하나님의 일에 물리적
으로는 순종했지만 마음으로는 반항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분노가 있었단 말이에
요. 이건 순종이 아니에요. 가끔 우리는 그런 경우가 있죠. 애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오늘
어디 좀 갔다와라 그럴 때 "네 가겠습니다" 벌떡 일어나면은 얼마나 좋겠습니다만은 요새
아이들 그렇지 않거든요. "네" 해놓고는 안 가거든요. "갈꺼냐, 안 갈꺼냐?" 그러면 마지막에
는 "가요 가." 그러면 이쪽에서는 "그만 둬. 그런 마음으로 가지 마." 물리적으로 순종했다고
순종입니까? 마음이 있어야지, 정성이 있어야지. 정성없는 그것이 어떻게 순종입니까? 그런
고로 오늘 여기 보니까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섞어 가지고 혼합하고 있는 거예요. 여
기서 그가 큰 실수를 하게 됩니다.
하바드 대학에서 내놓은 연구발표가 있습니다. 거기 보면요, 1600명을 상대로 잘 조사해 보
았더니요 '사람이 분노가 있는데 이 분노를 가만히 삭이려고 하면은 참 어려움이 있다. 이
병에 걸릴거다' 그런 생각만 했어요. 그래서 이걸 발산을 해야된다 이거예요. 아 이거 폭발
을 해야 차라리 이게 낫다, 이런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분노를 가만히 놔
두면 차라리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이것을 폭발시키면은 심장에 무리가 오고 심근경색이 온
답니다. 그런 줄 아세요. 폭발하면 뭐든 지 되는 줄 아는데 다른 사람에게 나쁜 건 말할 것
없고 자기 심장이 녹아난다는 거예요. 이게 연구 결과입니다. 그러면 어찌하면 좋으냐. 분노
가 솟아오르면 겸손하게 제 3자를 찾아가서 조용하게 이 문제를 가지고 의논하고 의논하면
서 조용조용 계단계단 이렇게 한계단 한계단 내려서면서 이것의 문제를 해결해야지 폭발시
키는 것은 잘못이다 이거예요. 그건 치유가 아니다. 그렇게 요새 발표가 나왔습니다.
여러분 오늘 모세가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어요. 자, 이 문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이제 심판
하십니다. "너는 나를 믿지 아니하고" 그랬습니다. 믿지 않았다고. 모세는 믿음의 사람입니
다. 모세가 하나님을 안 믿었다면 누가 믿었다는 얘기입니까? 어디에 믿음이 있다는 얘기입
니까? 그러나 분명히 말합니다. "너는 나를 믿지 않았다." 그 속에 믿음이 없었어요. 너는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은 딱 구분되는 거예요.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일답게 해야지 네가 거기에 분노를 섞어가지고 네 마음대로는 안된다는 거
죠. 거룩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또한 너는 나를 거역했다." 모세는 한평생 하나님께 순종했
어요. 그러나 오늘 이 시간은 반항을 하고 있는 거예요.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습니다. 도
덕경을 쓴 노자라고 하는 학자가 있죠. 그런데 그는 성창이라고 하는 스승으로부터 배워서
이런 도덕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성창 스승께서 임종이 가까웠다고 하는 말을 듣고
나이 많아서 세상을 떠나는 데 스승을 찾아가서 보니 정말 임종이 다 된 줄 알고 "스승님
아무래도 세상을 하직하게 될 거 같구만요. 그런데 마지막 가르침을 제게 주십시오." 성창은
이 노자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하는 말이 자네 내 얼굴 좀 보게. "내가 지금 이빨이 있나?"
하고 물었습니다. "없구만요" 이빨이 다 빠져서 없어요. "그래 혀는 있나?" "혀는 있구만요."
"됐어 그거야." 제자는 "잘 알았습니다"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날카로운 이빨은 없어져요. 부
드러운 혀는 남는다 이말이요. 강한 자는 부러져요. 온유한 자는 남는다 이말이요. 마지막
교훈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교훈을 총정리해 보면 네가지로 요약된다고 합니다. "어려서는 겸손하라. 젊어
서는 온화하라. 장년에는 공정하라. 늙어서는 신중하라." 모세가 신중치 못했어요. 그리고 12
절과 24절을 보면 엄청난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말씀하시
고 24절에는 아론을 향하여 그 영화로운 "제사장의 옷을 벗기라" 그랬어요. 옷을 벗기는 순
간 그는 죽었어요. 아마도 이 충동을 아론이 더 크게 주도했던 것 같습니다.
여러분, 원망하는 죄가 얼마나 큰 죄인 것을 아십니까? 가장 높은 덕은 감사하는 것이고 원
망을 듣되 대신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원망하는 자가 되어도, 세상이 온통 엉망이 되어 가도
우리는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믿으니까. 온유한 마음으로 겸손한 마음으로 섬길뿐
더러 오직 믿음으로 믿음의 사람의 길을 어엿이 가야하는 것이올시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주시고 주 앞에 경배하게 됨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
나님을 섬기노라고 하나 아직도 나 자신을 섬길 때가 많고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은 믿음
을 떠날 때가 많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믿음의 사람이 되고 거룩함의 사람이 되
고 온유 순종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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