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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누가복음 5장17-26 / 중풍병자의 죄를 사하심-주님의 죄사함은 진정한 실제다.

by 【고동엽】 2022. 11. 19.
■2022년 11월1일(화)■
 
(누가복음 5장)
 
17 하루는 가르치실 때에 갈릴리의 각 마을과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이 앉았는데 병을 고치는 주의 능력이 예수와 함께 하더라
18 한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침상에 메고 와서 예수 앞에 들여놓고자 하였으나
19 무리 때문에 메고 들어갈 길을 얻지 못한지라 지붕에 올라가 기와를 벗기고 병자를 침상째 무리 가운데로 예수 앞에 달아 내리니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21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여 이르되 이 신성 모독 하는 자가 누구냐 오직 하나님 외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22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 마음에 무슨 생각을 하느냐
23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24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리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매
25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묵상/눅 5:17-26)


◆ 중풍병자 친구들의 믿음


(20)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이르시되 이 사람아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오늘 본문의 장소는 가버나움이다(막 2:1). 아마도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집일 것이다(눅 4:13). 가뜩이나 좁은 집에 갈릴리뿐 아니라 인근 마을과 심지어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이 왔으니 빈틈이 없었다(막 2:2).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그의 친구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의 집에 왔지만, 도저히 들어갈 수 없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서 지붕을 뜯어내고 병자를 달아내렸다.


자기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서 남의 지붕을 파손하고 새치기를 한 셈이다. 어떻게 이렇게 무례하고, 이기적인 사람들이 있는가? 충분히 짜증이 날만한 상황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일반인과 다른 시선으로 그들을 보았다. 그들의 무례함보다는 오히려 친구의 우정과 그들의 믿음을 기특하게 보셨다. 주님의 평가는 이처럼 다르다.


우리도 많은 부족함과 미숙함이 있지만, 그래도 주님께서는 중심에 믿음을 보시고 칭찬하신다. 이것을 잊지말아야한다.


가령 우리는 종종 내 방식과 다른 방식으로 전도하는 사람을 비판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들의 중심을 보시고 그들의 믿음을 칭찬하실 수 있음을 잊지말자.


◆  죄사함과 병고침


모든 병의 원인이 '죄'때문은 아니지만, 이 중풍병자의 병 원인은 '죄'였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자가 완전히 나으려면 죄를 용서받아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한다.
근본적인 죄 용서함 없이 병만 낫게하려는 것은 이방종교의 주술가들이나 하는 일이다.


주님께서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하셨다고 하자,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반발했다. 당시에 죄를 사함 받으려면 소나 양을 가지고 제사장에게 가서 속죄제를 부탁해야 한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생략하고 단 한마디로 사하시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스스로 하나님을 자처한 셈이다. 신성모독이다.
그리고 저렇게 말만 던져놓는 용서가 진짜인지 어떻게 안단 말인가?


이치적으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지적이 옳아보인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틀렸다. 인간의 논리는 그럴싸해도 오류가 많다. 오늘날 소위 학문이 깊다는 신학자들이 이런 식의 논리로 많은 신자를 엉뚱한 길로 이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은 질문을 던지신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23)


오랫동안 중풍으로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들에게는 일어나 걸어가라는 말보다는 죄 사함 받았다는 말이 백 배, 천 배 더 쉽다. 그거야 아무도 모르니 누구라도 그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중풍 병자에게 침대를 들고 걸어갈 것을 명령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제적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그들 앞에서 곧 일어나 그 누웠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25). 이는 주님의 죄사함의 선언이 허황된것이 아니라 실제적임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죄사함, 하나님과의 평화 등은 심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임하는 실재하는 은총이다. 주님께서는 이것의 완성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십자가의 대속은 우리가 살면서 누리는 은혜이며, 죽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최고의 은총이다. 도대체 십자가의 죄사함의 은총없이 어떻게 신앙생활이 가능하단 말인가?
주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셨다는 이 믿음을 갖자


이 믿음으로 우리는 한참 부족함에도 하나님께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다(엡 3:12).


주님,
죄사함의 은총을 제게 베푸셨음을 감사합니다.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시고 늘 주님의 선하심과 은혜를 전하는 자가 되게 해주십시요.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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