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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천국 열쇠(마태복음 16 : 15 - 19)

by 【고동엽】 2022. 11.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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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열쇠(마태복음 16 : 15 - 19)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본문 말씀은 매우 뜻 깊은 귀한 말씀임과 동시에 문제도 많고 그 해석도 다양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천국 열쇠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천국 열쇠란 정말 신기한 것이면서도 반드시 그 뜻을 알아야겠다고 생각이 드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이는 왜냐 하면 우리의 궁극적 목적이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잘 살고 못 살고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오래 살고 일찍 가고도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건강하고 병들고도 중요한 게 아니요, 문제는 천국 열쇠입니다. 천국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느냐? 또한 내가 천국 열쇠로 천국문을 열고 들어가느냐가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이 열쇠라는 말을 요즈음 쓰는 티켓(ticket)이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하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즈음 같이 철저히 잠그고 사는 세상에 이 열쇠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천국 가는 티켓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나는 지금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가지고 있다! 천국 가는 기차표를, 혹은 비행기표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19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내가 천국 열쇠를 내게 주리니"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미 주었다는 것도 아니요, 당장 준다는 것도 아닌 "주리라"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게 천국 열쇠를 주리라! 이는 참으로 엄청난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이 축복이 바로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러나 바라고 믿는대로는 비단 베드로만의 것이 아니라 이제는 베드로의 후예들,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 믿고 있습니다. 어느 경지, 즉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 앞에서 도달했던 경지와 같은 신앙적 상태, 그 경건의 수준에 도달하게 될 때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누구에게나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리라"고 말씀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문제는 천국 열쇠요, 따라서 천국 열쇠의 의미와 누구에게,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 열쇠가 주어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신경을 써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다른 것은 다 못 가지고 놓쳐도 천국 열쇠만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 허락은 받은 처지에서 우리의 생을 살아가야 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메시지를 지나치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마는 적어도 성경적 신앙의 입장에서 보는 바의 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또한 비유로 말씀하시는 그 첫마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전부가 천국입니다. 말씀의 주제도 천국이요, 그 모든 사역의 궁극적 목적도 천국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편견 없이 성경을 읽노라면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설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급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그 뜻을 알고 의미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야 다 모르면 어떻습니까? 들어만 가면 그만이지요. 우리가 그것 다 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거기에 가면 어떨까? 누구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하면서 너무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겠다고 신경 많이 쓰지를 마십시다. 그러한 이야기는 저만큼 접어두고 관심을 집중적으로 돌려 문제는 내가 거기 들어가느냐, 못 가느냐?에 두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다른 문제, 다른 관심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니라"(24:40-41) 또한 마태 복음 25장에 기록된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다섯은 들어갔으나 나머지 다섯은 못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성경 속에 나타난 이러한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천국 열쇠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이것이 바로 천국 열쇠라고 하는 비유로 나타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실제적이며, 매우 시급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일은 다 잊어버려도 이 문제만은 반드시 기억해야 될 뿐만 아니라 깊이 이해하고 깨달음으로 여기에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천국 문은 일단 닫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쇠를 가진 자에게만 열린다고 하는 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닫혀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에게만 열리어집니다. 이와 같이 천국 문이 열려지는 그러한 조건을 예수님께서는 천국 열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고 하시는 말씀은 간단하게 말하여 너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먼저 그 배경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 보십시다. 본문에 앞서 1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지방으로부터 25마일 동북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여기는 유대 땅이 아닌 곳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대지경을 넘어 유대 사람이 없는 곳, 흔히 말한 대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없고 수 천 명이 따라 다니는 것도 아니며 아마도 거기까지는 병을 고치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저 잠깐 평화롭게 국경을 넘어서 조용히 제자들만 데리고 가시면서 저들에게 교훈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모습으로 피곤케 하는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국경을 넘어 지경을 들어서고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바알신을 섬기는 신전이 열 네 개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헤롯이 흔히 가이사라고도 하는 로마 황제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그 신전과 조상들을 여기 저기에 우뚝 우뚝 세워 놓고 있는 곳이요, 뿐만 아니라 당시에 팔레스타인 근방을 지배하던 로마의 군인들의 막사가 쭉 늘어서 있고 그들의 화려한 행렬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하는 그러한 곳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러한 곳이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을 지나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짐작입니다마는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열 두 제자들이 이 곳을 지나면서 마음이 착잡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우상의 신전들과 기세 당당한 로마 군인들의 진지 등을 내려다보면 서 부러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정치적인 독립을 해서 살수가 있을까? 또 나아가서는 남의 나라에까지 저렇게 점령을 하면서 왕권을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을까? 우리 이스라엘 나라! 다윗의 왕국은 언제 회복되려나! 하는 마음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에게 물으십니다. 이 순간이 참으로 중요한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저들은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한다"며 이야기합니다. 이 대답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여기에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이 대답을 들으신 후 예수님께서는 매우 직설적으로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이것은 중요합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앞장을 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을 하게 됩니다. 이 대답에 앞서 예수님의 질문에 암시된 내용을 생각해 보면 로마인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세상 나라 권세에 대하여 그렇게 연연해할 것이 없다. 내가 메시야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같은 대답은 먼저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이런 분으로 믿습니다라고 하는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 것이요, 동시에 이것은 위대한 발견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고치시는 분으로, 혹은 마술사로, 랍비로, 훌륭한 선생님으로 알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갈릴리의 한 목수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잡다하고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위대한 발견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깨달은 예수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계시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점을 알리시기 위하여 오늘까지 3년 동안에 제자들을 가르쳐 오신 것입니다. 말씀은 물론 병을 고치신 것도, 5천 명, 4천 명을 먹이시는 그 근본도 다 이 계시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 이 고백이 있어지기를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려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수준에 도달하여 고맙게도 베드로의 입에서 예수님께서 바라시고 기다리셨던 그 고백이 나왔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아마도 이 고백을 드리는 순간 예수님의 마음에 큰 기쁨을 드렸다고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만족하게 생각하셨어요. 이제야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가르치고 보여 주시고자 하셨던 바를 바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계시의 이해! 이것이 바로 이 순간에 되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계시를 바로 이해하는 수준급에 도달하였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천국 열쇠를 주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고백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 할 때에 먼저는 당신은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을 붓는다는 뜻이요, 따라서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러한 직능적인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도 되시고 왕도 되시며 선지자도 되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메시야를 기다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그분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믿고 성경적으로 대망하던 메시야가 바로 당신입니다. 이 말 한 마디 속에 성서적 고백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야가 바로 당신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기독론이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예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이요, 누구보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얼굴과 얼굴로 딱 만나지는 순간에 그가 빛을 보듯 환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그 분이 바로 이 분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 경황 중에도 "주여 뉘시오니까?"하고 묻는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고 대답하실 때에 그의 마음속에는 확증이 옵니다. 내가 오랜 세월을 공부하고 기다리며, 기도해 온 대망의 메시야가 바로 그 분이었구나! 이제는 메시야를 기다릴 것이 아니다. 메시야는 이미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그의 성서적 지식의 전부가 거기에 집중되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되풀이되고 맙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다시피 약속에 대해서는 그 성취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이면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이 신랑의 나이가 한 삼십 되었는데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어떤 처녀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얼굴은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고, 성품은 취미는 어떻고 하면서 전부를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가운데 지금까지 기다려 왔었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오늘 여기서 이루어질까? 혹은 몇 퍼센트나 이루어졌을까 하는 그런 걱정을 조금 하게 됩니다. 바라기야 내가 기다리며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 요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는 그렇지를 못하고 10분의 1도 해당 사항이 없는 가운데 시작을 하게 되니 그게 싹수가 노오란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사실이 그렇지를 않습니까? 오랫동안 머리 속에 이상적으로 그려왔던 그 분이 바로 이분이다 하게 되면 그거야 더 말할 것이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야 대망은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수 천 년 동안! 창세기에서부터 아브라함에게 예언되어지고 이삭으로 상징되어졌던 그 메시야! 시대를 따라 예언과, 상징과, 예표와 증거로 계속 메시야가 오리라, 오리라, 하다가 이제 딱 왔는데 바로 당신이 그 메시야란 말입니다. 이 이상의 다른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는 예언에 대한 성취요, 대망에 대한 완성이며, 그리고 예표에 대한 본체입니다. 그 동안에는 한 그림자로만 보아 왔는데 이제는 본체를 만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당신은,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데에는 아주 유쾌하고도 만족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아들이라고 하는 말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아들이라는 용어는 초대교회 때부터 많이 혼란과 어려움을 야기시켜 온 낱말입니다. 오늘도 이 언어의 문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복잡한 것입니다마는 특별히 문화 신학에 있어서 이 언어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똑같은 하나의 마음임에도 이것을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가만히 보면 "보기 싫어 죽겠다"고 하는가 하면 "몰라요"하기도 하고 "아이고 시시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듣기가 참 힘든단 말입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진짜 사랑한다고 말은 꼭 가짜같이 들려지기까지 하니 문제란 말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다르게 표현하는 말들이 알고 보면 마음으로는 진짜인데 표현이 다르다 보니 그 해독이 힘이 듭니다. 이와 같이 언어란 언제나 혼잡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하는 자는 듣는 자 편에서 말하고 듣는 자는 말하는 자 편에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 때문에 여기에서도 언어의 부족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예수는 누구냐 할 때에 여기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름 위해 우선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비교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중요하게 깊이 다룬 용어가 "말씀"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는 곧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1 : 14)고 하는 이 "말씀"은 헬라적 표현입니다. 말씀, 다시 말하면 헬라의 철학적 용어인 '로고스'를 기독교적으로 수용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히브리 사람은 주로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으로 놀라우리만큼 철저하게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만일에 한 분 아닌 두 분이라고 하였다가는 당장에 맞아 죽는 겁니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며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저들은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문제는 그러고도 맞아 죽지를 않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는 왜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오묘한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으나 그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하기는 요한 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시자 돌을 들어 치려고 한 적도 있고 보면 이것도 문제는 됩니다마는 어쨌든 유일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초대교회가 끝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도 무사함과 동시에 전달이 되고 소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라는 말은 언제 났다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동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하나님과 같은 한 분이라는 의미에서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아들"이라는 말은 아주 신비스러운 말로써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하나의 상징적 표현으로 쓰여진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예수님을 전부 ""로 부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이 표현은 이방 사람에게서 고백되어진 예수님에 대한 칭호입니다. 왜냐 하면 이방 사람, 특별히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수없이 많아요. 저들은 보통 웬만큼 잘난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제사장도 하나님의 아들이며, 심지어 시인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이니 그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 홍수가 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렇게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있어서 가장 높여 쓰는 말은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당시에 노예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특별히 히브리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대칭 하는 말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 오묘하게 쓰인 말이 ""라는 표현이며, 사도행전에서는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말씀",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 이 세 가지의 다른 표현은 사실상은 같은 내용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자요, 하나님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로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자들에게는 이런 의미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 천국문을 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요, 나의 메시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요즈음 우리 주위에도 보면 자동차 뒤에 물고기를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 안에는 물고기라는 뜻의 헬라어 '잌서스'가 쓰여져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물고기가 초대교회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상징이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이 물고기라고 하는 잌서스의 다섯 알파벳이 각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고 하는 말의 첫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의 머리 글자 다섯만 빼내어 읽으면 잌서스(물고기)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문에 물고기를 기독교인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며 이는 곧 신앙 고백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이냐를 말한다면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또한 전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전도요, 이것이 신앙의 골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본문 말씀 17절에 의하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는 참으로 오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또한 고린도 전서 12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 지식을 가질 사람도 없고 해독할 사람도 없어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가르치거나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받은 자에게만 있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해석을 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로 오신 자를 아는 것은 성령의 계시적 역사에 의해서만 알아볼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새 이름으로 주시면서 베드로라고 부르십니다. 이 베드로는 헬라 원어로는 '페트로스'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시는데 이 반석이란 헬라 원어는 '페트라'라고 합니다. 이 말들을 문법적으로 설명하자면 페트로스는 남성 명사이고 페트라는 여성 명사입니다. 그리고 굳이 의미상으로 구분을 하자면 페트로스는 하나의 바위, 그러니까 바위 중에 하나가 되겠고 페트라는 바위로 되어 있는, 즉 말하자면 본질적 의미에서의 큰 바위를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아무튼 여기에서의 이 바위, 곧 반석이라는 말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기초적이요, 근본적이며, 거기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 반석이라는 말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다"라는 말씀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32:4, 31; 삼상 2:2; 삼하 22:2; 시편 18:2; 시편 18:31 ).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반석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이어 "이 반석 위에"라는 말이 뒤따르게 되는데 그러면 이 두 반석이 각각 따로인 것이냐? 아니면 하나이냐? 그렇지 않으면 서로 연관이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반석이다"라고 하셨다면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바로 너 위에다가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냐하는 문제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농담삼아 말하기를 그렇다면 베드로의 잔등에다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냐며 한마디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사도 베드로를 제 1대 교황으로 고집을 합니다마는 그것은 아무래도 좀 지나친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부 어거스틴은 "이 반석 위에"라고 할 때의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에 고린도 전서 311절 말씀을 보면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베드로인 반석과 "이 반석 위"에 라고 할 때의 반석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아니면 서로 연관이 있는 것이냐 하는 이 세 가지의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마는 여기에서 그 신학적인 문제를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베드로를 향해서 베드로라고 하신 반석은 페트로스이고 "이 반석 위에"라고 하실 때의 반석은 페트라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는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넓게 생각한다는 입장에서 이것은 진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마는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권위 있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이것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다"라고 하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고백을 하게 될 때에 그 고백을 들으심으로 "너는 베드로라"고 하셨으며 그리고 이 반석, 이 신앙 고백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세우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내 교회를,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해석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에서 조금 더 추가된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의 초대교회적인 역할과 그 인격적 관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여유 있는 해석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부르신 것과 이 신앙 고백 위에다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을 완전히 별개로 보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러한 고백을 한 이상 베드로가 베드로요, 반석이며, 그리고 그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되 베드로의 귀중한 초대교회에서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교회의 기초인 동시에 참 신앙 고백의 시작이 베드로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요, 교회 설립에 큰 공헌이 있고 기초와 시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특별히 조심할 것은 "세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이 반석 위에!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그의 수고를 함께 의미합니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곧 이 고백으로 세워진 교회는 내가 지키겠다! 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그 교회의 장래는 내가 친히 지켜 주겠다고 하시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잘 아는 대로 열쇠란 문을 여는 도구입니다. 이것은 상징이요, 특별한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주인이 청지기에게 열쇠를 맡긴다는 것이나 지난날 우리 가정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광 열쇠를 넘겨준다는 일은 사실을 알고 보면 굉장한 권위의 이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광 열쇠를 넘겨주는 그 날은 며느리에게 있어서는 큰 벼슬을 하는 날입니다. 그와 같이 이 열쇠란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을 수 있고, 내가 문을 여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질 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어질 때, 그 때에 가서 비로소 이 열쇠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수준에 도달했을 때에 주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열쇠라는 말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7절에 보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 역시 다윗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할 때에 이를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먼저 오순절 초대교회에 있었던 베드로의 역할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행전 241절의 말씀을 보면 이 날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며 세례를 받은 사람이 무려 3천 명이나 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천국 열쇠를 가진 것이요, 바로 이것이 교회에 있어서의 베드로의 역할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대로 고넬료의 집, 즉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함으로 그들에게 천국문을 열어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에게는 이방인을 위한 열쇠도 주어져 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 15장에 보면은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는 멍에를 왜 이방 사람들에게 메게 하려느냐며 이방 사람들을 위해 자유로운 복음의 문을 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 또한 베드로의 큰 역할이었습니다.

이제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을 구약적 맥락에 의해서 해석하였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의 설교는 전부가 구약을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과정에 있어서도 그는 천국문을 여는 귀중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오늘 여기 본문을 보면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이 "맨다"고 하는 말은 규범이나 계명에 의한 구속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도행전 1510절에서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며 이방인들도 할례 받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 있어서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베드로가 풀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기독교인의 생활 규범을 베드로가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있어서도 교회가 가진 참으로 큰 권위입니다. 물론 성경적 권위에 의해서 되어집니다마는 교회가 이 권위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에게 엄청난 사도권적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베드로가 옳다고 하면은 그것은 옳은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도 베드로가 풀고 매는 것을 인정하시고 그것과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하십니다. 분명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 열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 고백과 함께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천국 열쇠를 여기에 놓고 생각해 보십시다. 이것은 신앙 고백이 바로 이루어질 때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특권을 의미하는 것이요, 성령이 그 마음을 감동시켜 신앙을 고백케 하는 일에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 열쇠는 베드로에게 처음 주셨고, 이후에 그와 같은 고백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며, 베드로에게 처음 권한이 주어진 것처럼 교회와 함께 계계승승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고!  

천국 열쇠(마태복음 16 : 15 - 19)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들이시니이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하시고.

 

이 본문 말씀은 매우 뜻 깊은 귀한 말씀임과 동시에 문제도 많고 그 해석도 다양한 비유의 말씀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는 천국 열쇠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천국 열쇠란 정말 신기한 것이면서도 반드시 그 뜻을 알아야겠다고 생각이 드는 그러한 말씀입니다. 이는 왜냐 하면 우리의 궁극적 목적이 천국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여 잘 살고 못 살고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오래 살고 일찍 가고도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건강하고 병들고도 중요한 게 아니요, 문제는 천국 열쇠입니다. 천국 열쇠를 손에 쥐고 있느냐? 또한 내가 천국 열쇠로 천국문을 열고 들어가느냐가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이 열쇠라는 말을 요즈음 쓰는 티켓(ticket)이라는 말로 바꾸어 생각하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요즈음 같이 철저히 잠그고 사는 세상에 이 열쇠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천국 가는 티켓이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나는 지금 천국으로 가는 티켓을 가지고 있다! 천국 가는 기차표를, 혹은 비행기표를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이 표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은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19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내가 천국 열쇠를 내게 주리니"라는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이미 주었다는 것도 아니요, 당장 준다는 것도 아닌 "주리라"하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게 천국 열쇠를 주리라! 이는 참으로 엄청난 축복이요, 특권입니다. 이 축복이 바로 베드로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그러나 바라고 믿는대로는 비단 베드로만의 것이 아니라 이제는 베드로의 후예들,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말씀이라 믿고 있습니다. 어느 경지, 즉 베드로가 지금 예수님 앞에서 도달했던 경지와 같은 신앙적 상태, 그 경건의 수준에 도달하게 될 때 주님께서는 언제나, 그 누구에게나 "내가 네게 천국 열쇠를 주리라"고 말씀하실 것으로 믿습니다. 문제는 천국 열쇠요, 따라서 천국 열쇠의 의미와 누구에게,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 열쇠가 주어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신경을 써서 알아야 하겠습니다. 이제 다른 것은 다 못 가지고 놓쳐도 천국 열쇠만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이 허락은 받은 처지에서 우리의 생을 살아가야 되리라 믿습니다.

여러분께서 잘 아시는 대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메시지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메시지를 지나치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는 분들이 많습니다마는 적어도 성경적 신앙의 입장에서 보는 바의 그 주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또한 비유로 말씀하시는 그 첫마디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으니"로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저 전부가 천국입니다. 말씀의 주제도 천국이요, 그 모든 사역의 궁극적 목적도 천국에 있었습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편견 없이 성경을 읽노라면 예수님은 분명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설명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있어서 급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것인지 그 뜻을 알고 의미를 깨닫는 것도 중요하지마는 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의 문제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야 다 모르면 어떻습니까? 들어만 가면 그만이지요. 우리가 그것 다 알고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거기에 가면 어떨까? 누구를 알아볼 수 있을까? 하면서 너무 그렇게 구체적으로 알겠다고 신경 많이 쓰지를 마십시다. 그러한 이야기는 저만큼 접어두고 관심을 집중적으로 돌려 문제는 내가 거기 들어가느냐, 못 가느냐?에 두는 것입니다. 그 이상의 다른 문제, 다른 관심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심각하게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는 버려 둠을 당할 것이니라"(24:40-41) 또한 마태 복음 25장에 기록된 열 처녀의 비유에서도 다섯은 들어갔으나 나머지 다섯은 못 들어가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성경 속에 나타난 이러한 이야기는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천국 열쇠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 이것이 바로 천국 열쇠라고 하는 비유로 나타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가장 귀중하고 가장 실제적이며, 매우 시급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다른 일은 다 잊어버려도 이 문제만은 반드시 기억해야 될 뿐만 아니라 깊이 이해하고 깨달음으로 여기에 도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천국 문은 일단 닫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쇠를 가진 자에게만 열린다고 하는 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비유의 내용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닫혀 있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에게만 열리어집니다. 이와 같이 천국 문이 열려지는 그러한 조건을 예수님께서는 천국 열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고 하시는 말씀은 간단하게 말하여 너는 천국에 들어간다고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먼저 그 배경에 대하여 조금 생각해 보십시다. 본문에 앞서 13절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을 지나가셨다고 하였습니다. 이 가이사랴 빌립보는 갈릴리 지방으로부터 25마일 동북쪽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여기는 유대 땅이 아닌 곳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대지경을 넘어 유대 사람이 없는 곳, 흔히 말한 대로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을 괴롭히는 사람들도 없고 수 천 명이 따라 다니는 것도 아니며 아마도 거기까지는 병을 고치기 위해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저 잠깐 평화롭게 국경을 넘어서 조용히 제자들만 데리고 가시면서 저들에게 교훈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모습으로 피곤케 하는 사람들이 따라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국경을 넘어 지경을 들어서고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가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 가이사랴 빌립보에는 바알신을 섬기는 신전이 열 네 개 이상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헤롯이 흔히 가이사라고도 하는 로마 황제에게 아첨하기 위하여 그 신전과 조상들을 여기 저기에 우뚝 우뚝 세워 놓고 있는 곳이요, 뿐만 아니라 당시에 팔레스타인 근방을 지배하던 로마의 군인들의 막사가 쭉 늘어서 있고 그들의 화려한 행렬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하는 그러한 곳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러한 곳이 내려다보이는 언덕길을 지나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짐작입니다마는 그러나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열 두 제자들이 이 곳을 지나면서 마음이 착잡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많은 우상의 신전들과 기세 당당한 로마 군인들의 진지 등을 내려다보면 서 부러운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쯤이나 정치적인 독립을 해서 살수가 있을까? 또 나아가서는 남의 나라에까지 저렇게 점령을 하면서 왕권을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을까? 우리 이스라엘 나라! 다윗의 왕국은 언제 회복되려나! 하는 마음에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에게 물으십니다. 이 순간이 참으로 중요한 시간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저들은 대답하기를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한다"며 이야기합니다. 이 대답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여기에서 드리지 않겠습니다. 아무튼 이 대답을 들으신 후 예수님께서는 매우 직설적으로 다시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이것은 중요합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앞장을 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대답을 하게 됩니다. 이 대답에 앞서 예수님의 질문에 암시된 내용을 생각해 보면 로마인을 부러워하거나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세상 나라 권세에 대하여 그렇게 연연해할 것이 없다. 내가 메시야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이 같은 대답은 먼저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나는 주님을 이런 분으로 믿습니다라고 하는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 것이요, 동시에 이것은 위대한 발견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병을 고치시는 분으로, 혹은 마술사로, 랍비로, 훌륭한 선생님으로 알 뿐만 아니라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갈릴리의 한 목수로 알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잡다하고도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위대한 발견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가 깨달은 예수를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계시에 대한 이해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점을 알리시기 위하여 오늘까지 3년 동안에 제자들을 가르쳐 오신 것입니다. 말씀은 물론 병을 고치신 것도, 5천 명, 4천 명을 먹이시는 그 근본도 다 이 계시를 보여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마음 속에 이 고백이 있어지기를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려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수준에 도달하여 고맙게도 베드로의 입에서 예수님께서 바라시고 기다리셨던 그 고백이 나왔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이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나이다! 아마도 이 고백을 드리는 순간 예수님의 마음에 큰 기쁨을 드렸다고 생각을 합니다. 참으로 만족하게 생각하셨어요. 이제야 예수님께서 저들에게 가르치고 보여 주시고자 하셨던 바를 바로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계시의 이해! 이것이 바로 이 순간에 되어진 것입니다. 말하자면 계시를 바로 이해하는 수준급에 도달하였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럴 때에 예수님께서 천국 열쇠를 주겠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이 고백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인가 할 때에 먼저는 당신은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기름을 붓는다는 뜻이요, 따라서 예수님에게 있어서 그러한 직능적인 의미가 있음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제사장도 되시고 왕도 되시며 선지자도 되신다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문제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렸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메시야를 기다리기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메시야를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기다릴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바로 그분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경적으로 믿고 성경적으로 대망하던 메시야가 바로 당신입니다. 이 말 한 마디 속에 성서적 고백이 다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메시야가 바로 당신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의 기독론이 그러합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예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이요, 누구보다도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고자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얼굴과 얼굴로 딱 만나지는 순간에 그가 빛을 보듯 환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그 분이 바로 이 분이다 하고 말입니다. 그 경황 중에도 "주여 뉘시오니까?"하고 묻는 그에게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하고 대답하실 때에 그의 마음속에는 확증이 옵니다. 내가 오랜 세월을 공부하고 기다리며, 기도해 온 대망의 메시야가 바로 그 분이었구나! 이제는 메시야를 기다릴 것이 아니다. 메시야는 이미 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그의 성서적 지식의 전부가 거기에 집중되어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되풀이되고 맙니다.

여러분께서 아시다시피 약속에 대해서는 그 성취가 중요한 것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할 때이면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이 신랑의 나이가 한 삼십 되었는데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어떤 처녀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얼굴은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고, 성품은 취미는 어떻고 하면서 전부를 생각해 보았을 것입니다. 이는 신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가운데 지금까지 기다려 왔었겠지요. 그런데 그것이 오늘 여기서 이루어질까? 혹은 몇 퍼센트나 이루어졌을까 하는 그런 걱정을 조금 하게 됩니다. 바라기야 내가 기다리며 생각했던 사람이 바로 당신이 요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문제는 그렇지를 못하고 10분의 1도 해당 사항이 없는 가운데 시작을 하게 되니 그게 싹수가 노오란 것이란 말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사실이 그렇지를 않습니까? 오랫동안 머리 속에 이상적으로 그려왔던 그 분이 바로 이분이다 하게 되면 그거야 더 말할 것이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야 대망은 그런 정도가 아니란 말입니다. 수 천 년 동안! 창세기에서부터 아브라함에게 예언되어지고 이삭으로 상징되어졌던 그 메시야! 시대를 따라 예언과, 상징과, 예표와 증거로 계속 메시야가 오리라, 오리라, 하다가 이제 딱 왔는데 바로 당신이 그 메시야란 말입니다. 이 이상의 다른 말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는 예언에 대한 성취요, 대망에 대한 완성이며, 그리고 예표에 대한 본체입니다. 그 동안에는 한 그림자로만 보아 왔는데 이제는 본체를 만난 것입니다. 이와 같이 당신은,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하는 데에는 아주 유쾌하고도 만족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이 아들이라고 하는 말에는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 아들이라는 용어는 초대교회 때부터 많이 혼란과 어려움을 야기시켜 온 낱말입니다. 오늘도 이 언어의 문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복잡한 것입니다마는 특별히 문화 신학에 있어서 이 언어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똑같은 하나의 마음임에도 이것을 무슨 말로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인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가만히 보면 "보기 싫어 죽겠다"고 하는가 하면 "몰라요"하기도 하고 "아이고 시시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사랑한다는 것을 알아듣기가 참 힘든단 말입니다. 그 때문에 오히려 진짜 사랑한다고 말은 꼭 가짜같이 들려지기까지 하니 문제란 말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다르게 표현하는 말들이 알고 보면 마음으로는 진짜인데 표현이 다르다 보니 그 해독이 힘이 듭니다. 이와 같이 언어란 언제나 혼잡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말하는 자는 듣는 자 편에서 말하고 듣는 자는 말하는 자 편에서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그 때문에 여기에서도 언어의 부족을 느끼게 됩니다.

이제 예수는 누구냐 할 때에 여기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름 위해 우선 성경에 나타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비교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가장 중요하게 깊이 다룬 용어가 "말씀"이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예수는 곧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1 : 14)고 하는 이 "말씀"은 헬라적 표현입니다. 말씀, 다시 말하면 헬라의 철학적 용어인 '로고스'를 기독교적으로 수용하여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히브리 사람은 주로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참으로 놀라우리만큼 철저하게 유일신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며 만일에 한 분 아닌 두 분이라고 하였다가는 당장에 맞아 죽는 겁니다. 이와 같이 엄격하게 유일신 사상을 주장하며 오직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저들은 또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합니다. 문제는 그러고도 맞아 죽지를 않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는 왜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오묘한 뜻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있으나 그 하나님은 아들 하나님이란 말입니다. 하기는 요한 복음 8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하나님을 내 아버지라고 하시자 돌을 들어 치려고 한 적도 있고 보면 이것도 문제는 됩니다마는 어쨌든 유일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초대교회가 끝까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고도 무사함과 동시에 전달이 되고 소화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라는 말은 언제 났다는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동질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은 하나님과 같은 한 분이라는 의미에서 "아들"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아들"이라는 말은 아주 신비스러운 말로써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하나의 상징적 표현으로 쓰여진 말입니다.

그 다음에는 ""라고 하는 표현입니다. 우리가 사도행전을 읽어 내려가노라면 예수님을 전부 ""로 부르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라고 하는 이 표현은 이방 사람에게서 고백되어진 예수님에 대한 칭호입니다. 왜냐 하면 이방 사람, 특별히 헬라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수없이 많아요. 저들은 보통 웬만큼 잘난 사람은 다 하나님의 아들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도 하나님의 아들이요, 제사장도 하나님의 아들이며, 심지어 시인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정도이니 그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 홍수가 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그렇게 좋은 이름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있어서 가장 높여 쓰는 말은 ""라는 말입니다. 그것은 당시에 노예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은 특별히 히브리적인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을 대칭 하는 말입니다. 이런 배경 하에 오묘하게 쓰인 말이 ""라는 표현이며, 사도행전에서는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예수님을 주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말씀",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 이 세 가지의 다른 표현은 사실상은 같은 내용의 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하나님의 계시자요, 하나님의 자신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의미로서 고백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난 자들에게는 이런 의미의 고백이 있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바로 천국문을 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의 주요, 나의 메시야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래서 요즈음 우리 주위에도 보면 자동차 뒤에 물고기를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볼 수가 있는데 그 안에는 물고기라는 뜻의 헬라어 '잌서스'가 쓰여져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물고기가 초대교회에 있어서 기독교인의 상징이었던 것은 공교롭게도 이 물고기라고 하는 잌서스의 다섯 알파벳이 각각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고 하는 말의 첫글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바꾸어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의 머리 글자 다섯만 빼내어 읽으면 잌서스(물고기)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때문에 물고기를 기독교인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며 이는 곧 신앙 고백의 상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이냐를 말한다면 예수를 주요,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또한 전도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구주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 전도요, 이것이 신앙의 골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알게 하는 것이 성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본문 말씀 17절에 의하면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하는 참으로 오묘한 말씀을 하십니다. 또한 고린도 전서 123절에 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를 막론하고 이 지식을 가질 사람도 없고 해독할 사람도 없어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것은 가르치거나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을 받은 자에게만 있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는 해석을 붙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계시로 오신 자를 아는 것은 성령의 계시적 역사에 의해서만 알아볼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새 이름으로 주시면서 베드로라고 부르십니다. 이 베드로는 헬라 원어로는 '페트로스'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하시는데 이 반석이란 헬라 원어는 '페트라'라고 합니다. 이 말들을 문법적으로 설명하자면 페트로스는 남성 명사이고 페트라는 여성 명사입니다. 그리고 굳이 의미상으로 구분을 하자면 페트로스는 하나의 바위, 그러니까 바위 중에 하나가 되겠고 페트라는 바위로 되어 있는, 즉 말하자면 본질적 의미에서의 큰 바위를 말하는 것이 되겠습니다. 아무튼 여기에서의 이 바위, 곧 반석이라는 말은 하나의 비유입니다. 이것은 기초적이요, 근본적이며, 거기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 반석이라는 말이 하나님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어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석이시다"라는 말씀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32:4, 31; 삼상 2:2; 삼하 22:2; 시편 18:2; 시편 18:31 ).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반석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에 이어 "이 반석 위에"라는 말이 뒤따르게 되는데 그러면 이 두 반석이 각각 따로인 것이냐? 아니면 하나이냐? 그렇지 않으면 서로 연관이 있는 것이냐?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너는 반석이다"라고 하셨다면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바로 너 위에다가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냐하는 문제를 낳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농담삼아 말하기를 그렇다면 베드로의 잔등에다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냐며 한마디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사도 베드로를 제 1대 교황으로 고집을 합니다마는 그것은 아무래도 좀 지나친 해석이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부 어거스틴은 "이 반석 위에"라고 할 때의 이 반석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에 고린도 전서 311절 말씀을 보면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베드로인 반석과 "이 반석 위"에 라고 할 때의 반석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 아니면 서로 연관이 있는 것이냐 하는 이 세 가지의 복잡한 문제가 있습니다마는 여기에서 그 신학적인 문제를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이제 분명한 것은 베드로를 향해서 베드로라고 하신 반석은 페트로스이고 "이 반석 위에"라고 하실 때의 반석은 페트라라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관련이 있다 하더라도 서로는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넓게 생각한다는 입장에서 이것은 진리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마는 오늘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권위 있는 해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은 "이것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다"라고 하는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하는 고백을 하게 될 때에 그 고백을 들으심으로 "너는 베드로라"고 하셨으며 그리고 이 반석, 이 신앙 고백 위에 내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세우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내가 내 교회를, 즉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리라는 해석입니다.

그런가 하면 여기에서 조금 더 추가된 해석이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자신의 초대교회적인 역할과 그 인격적 관계도 포함되어 있다고 하는 여유 있는 해석입니다. 이 말의 뜻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반석이라고 부르신 것과 이 신앙 고백 위에다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말을 완전히 별개로 보지는 않는다. 적어도 이러한 고백을 한 이상 베드로가 베드로요, 반석이며, 그리고 그 신앙 고백 위에 교회가 세워지되 베드로의 귀중한 초대교회에서의 역할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교회의 기초인 동시에 참 신앙 고백의 시작이 베드로로부터 온 것이라는 의미요, 교회 설립에 큰 공헌이 있고 기초와 시작이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 특별히 조심할 것은 "세운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만 이 반석 위에!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그의 수고를 함께 의미합니다. 그리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말씀은 곧 이 고백으로 세워진 교회는 내가 지키겠다! 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그 교회의 장래는 내가 친히 지켜 주겠다고 하시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천국 열쇠를 네게 주겠다고 하십니다. 누구나 잘 아는 대로 열쇠란 문을 여는 도구입니다. 이것은 상징이요, 특별한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주인이 청지기에게 열쇠를 맡긴다는 것이나 지난날 우리 가정에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광 열쇠를 넘겨준다는 일은 사실을 알고 보면 굉장한 권위의 이양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광 열쇠를 넘겨주는 그 날은 며느리에게 있어서는 큰 벼슬을 하는 날입니다. 그와 같이 이 열쇠란 아무에게나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을 수 있고, 내가 문을 여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질 만한 자격이 있다고 믿어질 때, 그 때에 가서 비로소 이 열쇠를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수준에 도달했을 때에 주어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천국 열쇠라는 말은 천국에 들어가는 자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7절에 보면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 역시 다윗의 권세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베드로가 천국 열쇠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 할 때에 이를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생각해 보면 먼저 오순절 초대교회에 있었던 베드로의 역할입니다. 이를 위해 사도행전 241절의 말씀을 보면 이 날에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며 세례를 받은 사람이 무려 3천 명이나 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그리고 교회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천국 열쇠를 가진 것이요, 바로 이것이 교회에 있어서의 베드로의 역할입니다. 그 다음에는 사도행전 10장에 기록된 대로 고넬료의 집, 즉 이방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함으로 그들에게 천국문을 열어 준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에게는 이방인을 위한 열쇠도 주어져 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도행전 15장에 보면은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는 멍에를 왜 이방 사람들에게 메게 하려느냐며 이방 사람들을 위해 자유로운 복음의 문을 여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 또한 베드로의 큰 역할이었습니다.

이제 더욱 중요한 것은 성경을 구약적 맥락에 의해서 해석하였다는 점입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의 설교는 전부가 구약을 인용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신학적 과정에 있어서도 그는 천국문을 여는 귀중한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오늘 여기 본문을 보면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라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이 "맨다"고 하는 말은 규범이나 계명에 의한 구속력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미 말씀드린 대로 사도행전 1510절에서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며 이방인들도 할례 받지 않고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에 있어서 굉장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이것을 베드로가 풀었습니다. 그리고 보면 기독교인의 생활 규범을 베드로가 매기도 하고 풀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에 있어서도 교회가 가진 참으로 큰 권위입니다. 물론 성경적 권위에 의해서 되어집니다마는 교회가 이 권위를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하여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신 것은 베드로에게 엄청난 사도권적 권위를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는 베드로가 옳다고 하면은 그것은 옳은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도 베드로가 풀고 매는 것을 인정하시고 그것과 함께 하시겠다는 말씀하십니다. 분명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 열쇠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베드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 고백과 함께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한번 천국 열쇠를 여기에 놓고 생각해 보십시다. 이것은 신앙 고백이 바로 이루어질 때 그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특권을 의미하는 것이요, 성령이 그 마음을 감동시켜 신앙을 고백케 하는 일에 나타나는 역사입니다. 그리고 이 천국 열쇠는 베드로에게 처음 주셨고, 이후에 그와 같은 고백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며, 베드로에게 처음 권한이 주어진 것처럼 교회와 함께 계계승승 구원의 역사와 더불어 이어져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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