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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온전하라(마5:38~4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일본 화가가 그린 「바보 예수」란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일반적으로 보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 그림에 대해 전문가이신 이 연호 목사님의 해설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림에 나타난 예수님의 눈은, 사람들을 너무 불쌍히 여겨서 눈물에 찌들려 한쪽 눈이 찌그러졌고 입술은 메말라 터져 있으며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 있는 볼품없는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 사랑한 나머지 가장 초라하고 불쌍한 모습을 하고 있는 예수님을 그린 것입니다. 정말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의 모습은 바보로 비쳐질 수밖에 없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순종입니까? 능력이 없거나 지혜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십자가를 피하려고만 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성경의 맥락을 살펴보면 우선 유월절에 갈릴리에 그대로 계시기만 했더라도 십자가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 당시 정치․종교 지도자들과 정면으로 충돌만 하지 않았어도 피해갈 수 있었고, 더욱이 빌라도 법정에서 단 한마디의 변명만 했었어도 생명은 보장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아주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썼지만 예수님은 전혀 이 일에 협조하지 않으시고 말없이 죽어갔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그 당시 예수님은 33세로 한창 일할 나이입니다. 복음을 전하기 시작한지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제자들이 무지하고 한심한 형편 속에서 어찌 그대로 죽을 수 있단 말입니까? 어쩌면 이번 기회만 좀 피했다가 한 30년간 더 복음을 전하시고 60이 넘은 다음에 십자가를 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별로 된 일도 없는 것 같은 그런 시간에 모순된 빌라도 재판을 받으시고 그렇게 돌아가실 수 있느냐 말입니다. 어쩌면 예수님 바로 옆에서 십자가에 달렸던 회개하지 않은 강도의 말이 합리적이고 우리 인간의 생각을 가장 잘 대변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능력 있는 분이 아닙니까? 십자가에서 내려와 당신도 살고 나도 구해 주시오."----옳은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은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일부입니다. 이 말씀 이대로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사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마 5:39-42).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그 말씀대로 사셨습니다. 그는 자기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용서하고 기도하시며 그리고 바보처럼 십자가에서 죽어 갔습니다. 자,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진리가 무너진 것은 아닙니까? 육신은 죽어도 명예는 살아야겠는데, 누명을 쓰고 이렇게 짓밟혀 죽어서야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습니까? 앞으로 하나님의 사업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그 당시로서는 정말 답답한 이야기였습니다.
악은 악으로 갚고 이는 이로 갚으며 눈은 눈으로 갚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것이 공의(公義)입니다. 그래야 진리가 서고 정의가 이기고, 무엇인가 바로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박애주의에다 무저항주의로 나가서 과연 진리와 공의와 정의가 세워지는 것입니까? 어쩌면 나 하나쯤은 손해보아도 좋고 희생해도 좋으나 진리가 무너지고 하나님의 공의가 무너지는 것은 누가 보상합니까? 간혹 보면 나 하나 손해보는 것은 괜찮지만 하나님의 뜻이 무너지고 공의가 무너지기 때문에 참을 수 없다고 자기 나름대로의 얄팍한 논리를 폅니다만, 사실 주님의 십자가의 일은 심각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대로 돌아가시면 진리는 영원히 땅에 묻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에 보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라고 사도 바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그 속에 하나님의 전지전능(全知全能)이 있고 무소불능(無所不能)이 있음을 믿습니까? 우주를 창조하시고 만백성을 구원하는 지혜가 바로 거기에 나타나 있다고 믿으십니까? 전쟁은 전쟁으로 종식시키지 못합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합니다. 원수를 갚으면 또 다른 원수가 나옵니다. 미움받았다고 미워하면 미움에서 자유할 수 없습니다. 싸움은 또 다른 싸움을 일으키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유발시킵니다. 이 무서운 악순환은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습니까? 무슨 문제이든 언제라도 사랑만이 해결의 길이요 근본적인 해답입니다. 이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진리요 성경이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증오와 한을 이기는 길은 사랑뿐입니다. 한을 품고 억울해하며 분통해하는 한은 그 속에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사망이 있을 뿐입니다. 언제라도 한이 사랑으로 바뀔 때에만 문제의 해결이 있고, 증오가 믿음으로 바뀔 때에만 문제의 해결이 있음을 알아야겠습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악을 이기는 길은 또 다른 악이 아니라 선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이 말씀들을 살펴보면 마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라…… 구걸하는 자를 거절치 말며 달라는 것은 다 주라."---과연 이래서 되는 것입니까? 가장 어리석은 이야기 같으나 사실은 최고의 지혜입니다. 가장 무능한 것 같으나 가장 위대한 힘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만 아내에게 못할 짓을 많이 하고 술도 많이 먹는 남편이 술취하여 미안한 마음으로 늦게 집으로 오는데 아내가 문을 열면서부터 죽느니 사느니 하고 싸우자고 대어들면 그 술꾼은 기분이 좋다고 합니다. 자기도 나쁜 남편이지만 아내도 좋은 아내는 아니니 궁합이 맞는다는 것입니다. 만약 남편이 못할 짓을 하고 들어오는데 아내는 늘 천사처럼 남편을 위하고 사랑하며 진정으로 받아주면, 그 남편은 얼마나 미안해지겠습니까? 자, 어느 쪽이 강한 아내입니까? 잘못하고 있는 사람에게 큰소리로 야단치고 윽박지르면 고쳐질 것 같지만 사실은 용서처럼 강한 설득력은 없습니다. 용서란 때로 악을 조장할까 하는 염려도 있습니다만 이것은 우리가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분명히 용서는 악을 제어하고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때로는 이렇게 당하기만 하고 억울하게 손해만 보아서 되겠는가고 인내의 한계를 느낍니다만 사람은 사랑의 쇠사슬로 묶을 때에만 정복이 가능합니다. 옛말에도 때린 자는 잠을 못자고 맞은 자는 다리를 쭉 펴고 잘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빼앗은 자는 잠을 잘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빼앗긴 사람은 더 이상 걱정이 없습니다. 혹 여러분의 마음속에 번민이 있고 고통이 있습니까? 빼앗았거나 빼앗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거해야만 자기를 이기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참 평화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결론으로 "온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완전하라는 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아심을 가집니다. 저는 가끔 성도들에게 우리들이 완전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대개가 사람은 완전할 수 없다고 똑같이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 온전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어째서 온전할 수 없느냐고 다시 물으면 그제야 절반쯤은 온전할 수 있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할 수 있기에 온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도저히 온전할 수 없는데 온전하라고 하셨다면 예수님이 잘못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온전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온전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선 온전에 대한 개념부터 바로 해야겠습니다. 온전이란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이거나 율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형식적인 어떤 공로나 선행을 기준하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즉 하늘 아버지의 그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는 자녀를 사랑하시되 악한 자녀도 사랑하시고 선한 자녀도 사랑하십니다. 탕자의 아버지처럼 유치한 자녀도 사랑하고 못난 자녀도 사랑하십니다. 이런 아버지의 마음으로 너희도 사랑하여 그 아버지의 아들이 되어 아버지처럼 온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아버지와 아들이 동등해진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유사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닮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아들은 닮습니다. 걸음걸이에서부터 말하는 것, 심지어는 자는 모습도 닮습니다. 함께 살지 않고 멀리 떨어져 살아도 그 아버지와 아들은 그렇게 닮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 닮은 것이 하나도 없다면, 어찌 그의 아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까? 닮은 곳이 없다면 그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주시는 말씀도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은 그런 유사한 온전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됨의 능력과 권세는 하나님을 닮는 데서부터 생깁니다. 이 온전함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으로,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첫째, 적극적인 사랑의 의미가 있습니다. 기다리는 마음(reaction)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가는 마음(response)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가서 보면, 오 리를 가자고 할 때에 십 리를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음 오 리는 억지로 갔는데, 가다가 보니 그가 불쌍합니다. 혼자 버려 두었다가는 길을 잃어버릴 염려가 있어서 나머지 오 리는 자원해서 내가 가 주는 것입니다. 속옷을 달라고 했는데 형편을 보니 속옷만 가지고는 안 될 것 같아 겉옷까지 챙겨서 주어야겠다는 마음입니다. 처음 오 리는 억지로 갔지만 남은 오 리는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원해서 가라는 적극적인 내용입니다.
자녀들에게 용돈을 주거나 구제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왕 주는 것을 억지로 빼앗기는 기분으로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돈은 받아도 고맙지 않습니다. 무엇을 주든 빼앗기는 마음이 아니라 주는 마음으로 하고 억지로가 아니라 자원해서 해야 합니다. 이 길만이 우리가 살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절대적인 사랑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나에게 어떻게 했든 상관할 것 없습니다. 내가 할 일은 사랑뿐입니다. 저는 결혼 주례를 하면서 신랑 신부에게 오늘로 부부 됨을 서약했으니 이제부터 하는 사랑은 절대적인 것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합니다. 사랑하는 데 이유 있고 사랑하지 않는 데 이유가 따로 있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남편이 돈을 벌든 못 벌든, 아내가 건강하든 약하든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랑해야 하는 것이 결혼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 이유 있습니까? 공부 잘하면 사랑하고 공부를 못하면 사랑하지 않습니까? 이 사랑은 절대적인 사랑입니다. 셋째는, 창조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어디서부터이건 사랑으로 시작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 주도적인 동기가 되어서 출발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넷째는, 신앙적 사랑으로,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나를 사랑했고 이 사랑에 응답하여 오늘 내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수직적 사랑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인류를 사랑하시고 아비가 자식을 사랑하는 이와 같은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향적인 사랑으로, 자비와 긍휼입니다.
본문은 끝부분에서 예를 들어가면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원수 사랑은 사랑의 극치가 아니라 기독교 사랑의 기초입니다. 우리도 이 원수 사랑 안에서 구원받았는데 내가 누구를 원수라고 하며 미워하겠습니까? 로마서 5장에 보면 내가 하나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어 구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원수 사랑이 당연한 사랑이요 기독교인의 기본 윤리임을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첫째, 원수란 내게 있어서 원수이지 객관적으로 그가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한 가지 사건으로 그와 내가 걸렸을 뿐 전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미워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둘째, 내가 심판주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수갚는 것은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말씀하셨으니 미움은 우리가 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사랑할 뿐이지 미워할 권리가 없습니다. 셋째,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용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용서가 바로 원수 사랑 아닙니까? 원수 사랑을 해야 할 절대 적인 이유는 원수 사랑으로 내가 구원받았고 오늘 내가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내가 백 데나리온으로 시비를 벌일 수 있습니까? 넷째, 내가 원수라고 생각하는 그도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녀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그 형제를 내가 미워할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할 뿐입니다. 거듭 말하지만 원수 사랑은 최고의 사랑이 아니라 기본적인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적극적입니다.
우리는 원수 사랑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되는 길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됨의 모습이 있습니다. 혹시 이 도덕률이 너무 높아서 나는 할 수 없다고 아예 포기할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미리 겁을 내어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옛말에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제는 고쳐야 합니다. 쳐다보면서 올라가노라면 언젠가는 오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제 원수 사랑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 사랑을 통해서만 화평이 있고 승리가 있고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하신대로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니 세상이 주는 평안과 다르다"는 이 평안은 바로 이 원수 사랑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 평안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조우라는 충성된 노예가 있었습니다. 주인은 모든 일을 그와 의논하고 그에게 많은 일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인은 조우와 함께 또 다른 노예를 사기 위해 노예 시장에 갔습니다. 많은 노예들이 상품처럼 진열되어 있는데 유달리 늙고 힘없는 한 노예가 끼어 있었습니다. 주인은 힘이 좋고 젊은 노예를 사려는데 조우가 병든 노예를 사자고 주장해서 주인은 조우의 말대로 그 노예를 사 왔습니다. 병든 노예는 집에 와서도 별로 일을 하지 못했지만 조우는 열심히 그를 간호하고 잘 돌보아 주었습니다. 주인은 조우에게 일도 못하는 그 노예를 무엇 때문에 그토록 극진히 돌보는 가고 물었습니다. 조우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저 노예는 나의 원수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 나를 유괴해서 노예 상인에게 팔아 지금의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저 사람도 노예가 되어 병들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제 저분이 세상 떠날 때까지 사랑할 것입니다."---여러분, 여기에 평안이 있고 승리가 있고 문제의 해결이 있습니다. "너희 하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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