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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내게 충분한 은혜(고린도후서 12:7-10)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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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충분한 은혜(고린도후서 12:7-10)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지고하지 않게 하려 하십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악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니라

 

 

인간은 인간이기에 인간으로서 인간이 당하는 독특한 고통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불평, 불만 혹은 불안, 원망 이런 따위의 고통은 인간만이 지닌 고통입니다. 배고픔이 아니고 슬픔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프다는 얘기가 아니고 의롭다는 얘깁니다. 몸이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이 아프다는 말입니다. 물질에 손해를 본 것이 아니고 자존심에 손해를 보았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고통 이러한 아픔이 더 어렵고 괴로운 일들입니다.

왜 인간이 이런 고통을 지니고 살아야 하느냐? 그 이유를 굳이 따진다면 몇 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무지 때문입니다.

사람이 무얼 좀 안다고는 하지만 알고자 하는 만큼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죽을 날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모르고 있습니다. 내 앞에 어떤 일이 전개될는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생애, 이 의미의 깊이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건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말입니다.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불안합니다.

예수님의 제가 도마가 먼저 예수님께 이 사실을 물었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어디로 간다고 하시는 겁니까? 그 길을 어떻게 하면 알겠습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정말 우리는 끝내 풀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살아갑니다. 안다는 말을 다 거짓말입니다. 모르기 때문에 불안합니다. 또 그런가 하면 죄를 짓는 것도 그렇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십자가에 못을 박는 그 잔학무도한 무리들을 앞에 놓고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여 이들의 죄를 사해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것을 알면 돼 그 같은 죄를 짓겠습니까. 딴에는 안다고 하겠지만 사실은 무지가 죄입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무능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행해야 할대로 행하고, 부지런해야 할 시간에 부지런하고 자기의 이상, 자기가 이렇게 해야겠다고 하는 대로 다 살아 온 사람은 그런 대로 최선을 다한 긍지는 있습니다.

학생 때 공부해야 될 줄 알았으나 못 했습니다. 젊었을 때 좀더 해야 될 일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못 했습니다. 내가 해야 할 바대로, 가야 할 길대로, 내가 가고 있느냐 말입니다. 우리는 그대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것과 현실이 그렇지 않습니다. 못한 것이 아니라 안습니다.

누가 빼앗은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린 그 많은 좋은 기회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이제 괴로운 거입니다. 이것이 고통입니다. 우리에게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 괴로움 그것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남도 믿을 수 없고 물론 세상도 믿을 수 없고 나 자신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누구를 믿으란 말입니까? 내가 나를 못 믿는 바에 누구를 향해서 나무랄 것입니까? 다 불신, 이것 때문에 항상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신앙인의 신앙 생활도 살펴보면 마찬가지 맥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평, 불만, 원망이 심합니다. 보세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왜 이러해야 합니까? 왜 우리의 신앙 생활은 그렇게 시원하지 못하고 활짝 개인 날처럼 명랑하지 못하느냐 말입니다. 왜 하나님 앞에 나올 때마다 두려움이 있고 또 가슴에 사무친 그런 못 이룬 소원이 있어야 합니까.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다?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앞에 있는 기업, 소망과 그리고 내가 사는 이 생애, 그 깊은 면, 하나님이 나를 향하신 그 높은 뜻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복된 자라는 것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괴롭습니다.

에베소서 1:18 이하에 보면, 계속 우리의 소망, 우리의 기업, 이것을 바로만 알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생애, 생을 살 수 있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하나는 믿는다 하지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능력도 지혜도 그의 나를 향하신 사랑의 보증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에 빠져 들어가는 제자가 예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를 구해 달라고 합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하는 말씀이 "적게 믿는 자여 어찌 의심하느냐"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의심, 믿지 못하는 것으로 인해서 계속 고통은 뒤따르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의 소중한 간증을 들어보십시다. 그는 우리에게 오늘 본문을 통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이 말씀은 제가 제일 귀하게 여기고 소중히 여기는 말씀 중 하나입니다.

그에게 고통이 있었습니다. 이 어려운 고통을 제거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가 세 번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 세 번이라는 말은 그저 어떻게 세 번했다는 뜻으로 해석되지는 않습니다. 모름지기 특별한 기간을 두고 금식을 했는지 철야를 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어쨌든 특별 기간을 이 문제를 놓고 세 차례 기도했는데 이에 대한 응답이 없었습니다. 이 문제의 해결은 없었습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생을 위탁한 사람입니다. 온 생을, 온 운명을 하나님 앞에 깨끗하게 바쳐서 헌신하는 충실한 주의 종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복을 많이 주어야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는 넘치도록 축복하셔야 되는 게 아닙니까? 그런데 이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그가 받은 복이 뭡니까? 부귀는 없다 하더라도 건강은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건강마저 없었습니다. 가정은 없다 하더라도 명예는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명예조차 없었습니다. 만사 형통하는 일은 없다 하더라도 마음에 기쁨만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도 늘 그랬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고통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복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일반적 상식으로 말하는 그러한 복은 바울에게 없었습니다. 가정도 없고 건강도 없었습니다. 칭찬 대신에 많은 비난을 받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오해와 친구들의 오해와 많은 사람들의 비난 속에서, 그 오해 속에서 그리고 능욕 속에서 복음을 변증해야 했습니다.

여기에 결정적인 고민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 그것이 무엇이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몇 가지로 미루어 생각할 수는 있습니다. 먼저는 육체의 고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섧다 섧다 해도 내 몸 아픈 것이 설운 것입니다.

내 몸이 쓰리고 아플 때에 그 누가 나를 위로할 수 없습니다. 이 내 몸이 아픈 이 괴로움, 육체의 가시 이것이 계속 나를 찌르고 있습니다. 쑤시고 아프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고통입니다. 나가서는 이것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육체의 가시,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몸으로 인해서 마음도 아픕니다.

두 번째로는 사탄의 사자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모름지기 이 일이, 이 사건이 하나님의 사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사탄의 사자라고 부르게 된 줄로 압니다. 하나님의 일에 손해가 가기 때문입니다. 여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이 일은 꼭 해결되어야 하고 이 아픔은 없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는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미루어 생각해 본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안질이라고도 합니다. 그는 눈이 좋지 않아서 편지를 쓸 때마다 대필을 시켰습니다. 요새 같으면 돋보기 안경이 있었으면 될 뻔했습니다. 또 그 외에 이 사람에게는 주기적으로 오는 열병이 있었다고 하는 그런 전설도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성과의 문제였다고 풀이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어느 때에 특별히 이 문제에 대해서 여러 날 동안 연구를 해 보았는데 그 결과 마지막으로 찾아낸 것은 간질입니다. 왜냐하면, 간질을 별명으로 "사탄의 병" 이라고 부릅니다.

어째서 마귀의 병이라 하는가 하면 이 간질병에 걸려서 발작을 일으켜 본 사람들은 똑같이 간증하는 것이 있습니다. 누군가가 빨간 보자기를 머리에다 씌운다는 겁니다. 이걸 벗어 보려고 허우적거린다는 얘기를 한결같이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부터 이것은 사탄이 주는 병이다. 이것은 마귀가 주는 병이라고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탄의 사자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증명할 수 있는 하나의 요절이 있는데 갈라디아서 4:14에 보면 "너희 믿음을 시험할 만한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나를 업신여기지 않았다" 고 그는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시험할 만한 것이 무엇입니까? 눈이 나쁘다고 믿음이 시험될 것이 없습니다. 다리가 아프다고 해서 믿음에 손해볼 것까지는 없습니다. 그러나 간질은 다릅니다.

이것을 한 번 이렇게 연결해 보십시다. 갈라디아 교회에서 설교하다 말고 발작을 해서 그만 간질로 거품을 물고 쓰러졌다고 합시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피해가 됩니다. 남의 병을 다 고치는 큰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의 종이 저게 무슨 꼴입니까. 이 꼴을 보고 누가 예수를 믿겠습니까? 이것은 믿음에 크게 손해나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을 그리스도의 종으로 천사같이 영접해 준 데 대해서 그는 너무너무 고마워서 갈라디아 교회의 편지에 이 말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을 시험할 만한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나를 업신여기지 않은 것이 고맙다."

이렇게 미루어본다면, 제가 아는 대로 이것을 간질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저는 여러 해 전에 광주 제일교회에서 있었던 연합 집회에 참석해서 집회를 인도해 본 일이 있습니다. 그 집회를 인도하는 도중의 일입니다. 어느 날 저녁 설교를 하는 중에 바로 앞에 앉은 장로님 한 분이 간질병 발작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서서 이상한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허우적거립니다. 많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증세를 아니까 가만히 있더군요. 그래서 이걸 진정시키고 예배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거품을 물고 허우적거리고, 쓰러지고, 땀을 흘리고 얼마나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나 그대로 두었습니다. 예배가 끝난 다음에 그 장로님은 어디론가 사라졌는데, 그 후에 한 사흘 집회는 계속되었으나 그 장로님은 한 번도 나오시지 못했습니다. 너무 부끄러워서지요. 그 장로님은 그 연합 집회의 회계였습니다.

제가 광주를 떠날 때 비행기로 서울에 오게 되었는데, 그 장로님은 비행장에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안녕히 가십시오" 하며 제 손을 잡는 순간 그저 눈물만 흘립니다. 저는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무어라고 위로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비행기 안에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졌던 그 육체의 가시가 간질병이라면 그는 얼마나 괴로웠을까? 얼마나 쓰리고 아팠을까? 이렇게 생각하면서 내내 마음에서 이 그림자를 지워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마찬가지입니다.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느냐 말입니다. 이건 꼭 없어야만 될 일이기에 그는 이 뜻을 몰라서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간절히 구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병을 고쳐 주시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응답을 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매우 귀중한 말씀입니다. 내 은혜, 네게 준 내 은혜가 만족하다, 원문대로는 충분하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알았습니다. 또 믿었습니다.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은 믿었습니다. 충분한 것으로 믿었습니다. 이제 기뻐하고 하나님의 큰 역사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 충분한 은혜란 무엇입니까? 은혜를 더 많이 받을수록 가져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복을 많이 받을수록 그리고 은사를 많이 받을수록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은혜를 많이 받고 복을 많이 받으면 교만해집니다. 자기 자랑하기 쉽습니다. 진실하기 어렵습니다. 은혜는 반드시 사명을 낳아야 하고 아름다운 역사를 이루어야 하건만 은혜를 나 자신을 위한 것으로 돌려버리기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는 이 어려운 가시가 꼭 필요했습니다.

은혜 되게 하기 위하여, 받은 은혜가 사명으로 귀한 열매를 맺도록 하기 위해서 이같은 일은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바울은 받아들였습니다.

고린도전서 9:27에 보면 "내가 나를 쳐서 복종케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남에게 복음을 전한 다음에 나는 오히려 버림이 될까 두렵다, 실격자가 될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그런고로 나는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는 것입니다. "쳐서 복종케 한다"는 원문의 뜻은 "종으로 다스린다"는 말입니다. 종처럼 가혹하게 자기를 다스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를 알고 있습니다. 내 약점,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마음, 게으른 마음, 허영심, 교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나를 다스림에 있어서, 내 육체를 다스림에 있어서, 이 정욕적인 인간을 다스림에 있어서 그는 가혹하게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다스리려 했지만 말을 안 듣습니다. 내가 쳐서 복종케 하리라 했지만 내 몸이 나의 말을 안 듣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이 손을 댑니다. 내 스스로 겸손하려고 했지만 겸손하는 일에 실패했습니다. 하나님이 겸손하게 하십니다. 내가 나를 쳐서 복종케 못하니 오늘 본문에 주신 말씀과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쳐서 복종시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이 되도록 복종케 한다는 말입니다.

버려야 될 것을 내가 버리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버리게 하십니다.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할 때 하나님께서 끊어주십니다. 이것이 충분한 은혜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은혜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진 진실이요 그의 겸손입니다. 그는 나아가서 겸손의 축복을 알고 있었습니다. 복 중에 가장 귀한 복은 겸손의 복입니다. 겸손해서 은혜 받고, 겸손해서 은혜를 은혜로 알고, 겸손해서 은혜를 감당하고, 겸손해서 은혜를 지속하게 됩니다.

어떤 분이 말했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이요, 또 겸손은 은혜를 받는 한계라고 말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에게 백만 원을 줬다고 합시다. 백만 원을 받아 가지고 이 사람이 겸손했습니다. 천만 원을 줬더니 교만해집니다. 이 사람은 구백 만원짜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위를 주고 지식도 주었더니 겸손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주었더니 교만해집니다. 안하무인이 되고 맙니다. 이 사람은 높은 자리에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겸손의 그릇만큼 축복을 받습니다. 사실은 겸손한 만큼 지혜롭고, 겸손한 만큼 강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알고 있습니다. 겸손하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말입니다.

사람은 간사합니다. 변변치 않은 것을 가지고 교만합니다.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교만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사람은 겸손할 수밖에 없어야 겸손합니다. 그저 교만할 만한 그루터기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아주 달라집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알고 있습니다. 내가 겸손하기 위해서는, 정말 하나님의 종으로 깨끗하게 일해 나가기 위해서는 겸손해야 하겠고, 내가 겸손하기 위해서는 이 가시가 필요한 것이요, 이것도 없이 겸손할 수 없는 자기라고 하는 것을 그는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또한 그는 약할 때에 강한 비결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약해지고, 또 눈물 흘리고, 또 한 번 자복하고, 또 한 번 낮아질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고, 그리스도의 의가 나를 지배하고, 그리스도의 그 엄청난 사랑 안에 자기가 살아가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내가 약할 때에 강하다" 내가 약할 때에 강한 이 오묘한 비결을 깨달았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그 어느 때에 나에게 온전하게 나타나는가를 알았습니다. 내가 약할 때에 온전해지게 하시는 하나님이시오, 100퍼센트의 은혜로 100퍼센트의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한 자기가 됨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좀더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주관적인 간증입니다. 나에게는 이것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나는 내 미래를 모릅니다. 내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모릅니다. 내 운명도 모릅니다. 내 장차 나의 나 됨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내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나는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가 나를 잘 아십니다.

시편 139편에 보면 그가 나를 아는 것이 너무 신묘막측합니다. 내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그는 나를 잘 아십니다. 그러기에 그가 나에게 주는 것은 다 필요한 것이요, 충분한 것입니다.

부모 자식간에 말다툼이 있습니까? 그것은 뻔한 얘깁니다. 자식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자기를 제일 잘 안답니다. 내 운명도 알고, 세상도 알고, 그러기에 이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부모 입장에서 볼 때는 철없는 놈아 네가 너를 아는 게 아니라 내가 너를 아는 것이다. 그런고로 네게 필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고 이것이다. 그러기에 줄 수 없노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말다툼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도 있습니다. 딴에는 제가 잘 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것이 필요합니다. 저것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 안 주십니까 하며 갖은 원망을 다 해 봅니다. 이 어리석은 소리 좀 보세요. 그러나 지금 이대로가 다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쓰리고 아픈 괴로움이지만 육체의 가시, 사탄의 사자, 실패와 낙담과 절망, 이것이 다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나에게 있어서의 이 나약함과 이 비참함이 왜 있어야 하느냐 하십니까?

여러분, 좀더 높은 신앙을 가져 봅시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것이 네게 필요하다 하면 필요한 줄 알지 무슨 말이 많습니까? 과거에 몰랐듯이 미래도 모르면서 무슨 말이 그렇게 많습니까? 이제는 주신 말씀을 따라서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내게 필요한 은혜, 내게 꼭 있어야 할 은혜, 만족하지는 않지만 충분한 은혜, 구원받기에 충분하고, 진실하기에 충분하고, 겸손하기에 충분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에 충분한 은혜를 지금 내게, 이 내 현실적 생활 속에 주었으면 또 주실 것입니다.

납득하면 이대로 감사하고, 모르면 믿고 감사하십시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이 충분한 은혜에 감사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 : 납득할 수 없는 고통, 나만이 당하는 억울함, 모든 부조리와 불안에 시달리는 저희들을 오늘도 불러 주심을 감사합니다. 주여, 이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주의 주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와 겸손을 주시옵소서. 내게 주신 은혜가 내게 족한 것임을 알고 믿고 감사하고 그리고 헌신할 수 있는 저희들의 생활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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