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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현주소(사도행전 16 : 19-34)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케 하여, 으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송사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가 이러한 영을 받아 저희를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착고에 든든히 채웠더니,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인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여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살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밤 그 시에 간수가 저희를 데려다가 그 맞은 자리를 씻기고, 자기와 그 권속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저희를 데리고 자기 집에 올라가서 음식을 차려주고 저와 온 집이 하나님을 믿음으로서 크게 기뻐하니라.
아름다운 표현으로 세상을 설명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에 고통이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어쩔 수 없이 아픔이 있고 괴로움이 있으며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분명한 운명이 있다면 그것은 고통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그 사실입니다.
철인 하이데거(Heidegger)는 인간은 던져진 생을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를 그래도 이야기한다면 존재 자체인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고통 속에 던져진 생을 사는 존재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통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고난, 어떠한 역경, 어떠한 환난을 겪는다 하더라도 문제는 그 결론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고통의 끝맺음이 어떻게 되는가에 달려 있다는 말입니다. 비록 고생이 된다 하더라도 마치 서부 영화를 보듯이 해피 엔드(happy end)로 끝낼 수 있다면 그 누구든 고통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마지막을 아름답고, 행복하게, 그리고 영광스럽게 끝맺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그 고통을 고통이라 탄식하며 슬퍼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최후의 순간에 웃을 수 있다면 그간의 모든 고통과 흘렸던 눈물은 쉽게 잊어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최종 승리요, 마지막 영광의 여부에 있습니다. 그렇기에 과정으로서의 고통이란 참을 만한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슬픈 것은 마지막에 울어버리는 일입니다. 결과로서의 고통! 그것은, 그야말로 절망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일생동안 행복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하더라도 마지막이 비참해지면 우리는 그를 행복한 사람이라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귀하게 태어나 유복하게 자랐으며 화려하게 결혼식도 했고, 찬란하게 인생을 살아왔다 하더라도 마지막 장면이 비참했다면 우리는 그를 불행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고로 문제는 어떻게 끝을 맺느냐? 에 있습니다. 이 문제가 바로 고통의 의미와 고통의 성격을 결론짓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디까지나 이 마지막이 문제라는 사실을 기억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고통에 대한 우리의 자세입니다. 그 고난이 어떠한 것인가? 얼마나 심한 고통을 겪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를 않습니다. 문제는 그 고난에 임하는 자세가 어떠했느냐? 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는 그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우리가 농사를 짓고, 농부가 수고를 하지만 가을 추수는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땀 흘리며 애써 수고를 했어도 풍년이 되고 안 되는 것은 내 마음대로 결정되어지는 것이 아니더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마지막 일은 부득불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의 이 과정을 어떻게 치루어 나가느냐? 이 한 순간, 한 순간을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바로 거기에 우리가 져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기적이 나타납니다. 기적이라고 하는 것은 참으로 굉장한 일이요 놀라운 사건입니다. 또한 우리가 바라는 바이기도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특별 조치요 특별 행사입니다. 인간 상식선을 넘어서는 그러한 하나님의 역사, 초자연적인 특별 행사를 우리는 기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생각할 때 하나님에게는 기적이란 없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모두가 다 자연스러운 일이요 극히 당연하고도 평범한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무지한 우리 인간이 볼 때에는 그것이 기적이요 놀랍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하여 이적이다 기사다 하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기적의 현주소가 어디인가 하는 것입니다. 기적이라고 해서 아무 곳에서나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상황, 어느 곳에서 기적을 나타내시는 것입니까? 이제 우리는 오늘 주신 본문을 통하여 그 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읽어서 아시는 대로 이 본문에 나타난 이야기는 처음과 그 과정에 있어서는 그렇게 모순되고 잘못될 수가 없는 사건입니다. 귀신들려 점하는 여종의 처지가 하도 딱하고 불쌍하여 사도 바울이 귀신을 내어쫓고 깨끗한 정신으로 돌아가도록 고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이것이 죄가 되어 끌려가서는 자초지종을 묻지도 않는 가운데 이상한 풍속을 전한다 하여 매를 때려서는 감옥에다 넣은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모순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경을 읽어나가다 보면 이 사건만 가지고도 얼마나 분한지 알 수가 없어요. 세상에 원 이렇게 잘못될 수가 있겠는가 싶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 마지막 장면은 충격적인 만큼 너무 너무 통쾌합니다. 그야말로 해피 엔드로 끝을 냅니다.
저는 간간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의 응답으로 바로 이 본문을 제게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다시 찾아 읽어보고는 하는데 얼마나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본문을 매우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우리들 한 사람의 일생이기도 하고 한 사건의 해답이기도 하며 또한 인류 역사의 축소판이라고도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두고 기독교인의 세계관이라 하여도 조금도 잘못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온 세상 역사가 하나님의 손에서 이렇게 전개되는 것이라 믿고 이렇게 충성할 것이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참으로 통쾌한 마지막 장면을 오늘 본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너무나도 시원합니다. 모든 고통의 결과가 이렇게만 된다면 그 누가 고통이라고 마다하겠습니까? 굳이 고통을 사양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모든 고통이 다 이렇게 결론지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치른다고 하여 모두가 다 옥동자를 낳는 것은 아닙니다. 죽은 아이를 낳을 수도 있고 불구자를 낳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또 자식을 낳았다고 해서 그것이 다 영광된 것만도 아닙니다. 마지막에 무자식 상팔자라는 말을 누가 하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이 수고 전부가 하나같이 다 아름다운 해피 엔드를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본문에서 우리 개인의 문제, 국가의 문제, 그리고 세계 역사의 문제와 그 귀결을 해답 받아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보면 죄수가 간수에게 큰 소리를 칩니다. 더우기 괴이한 것은 간수가 죄수에게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며 나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러한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은 매를 맞아 죽을 지경이 된 채 쇠고랑에 채워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몸은 고통 중에 부자유하지만 큰 소시로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외치며 주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놀라운 변화는 계속하여 일어나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하여도 때리며 구박하던 사람이 이제는 집으로 모셔다가 씻기고 음식을 대접하며 그의 말을 청종하는 가운데 온 식구가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재미있는 사건입니까? 역사를 이렇게만 볼 수 있다면! 이렇게 바라보고, 이렇게 전망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쉽게 참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고통의 성격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 18~20절에서 고통을 세 가지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를 분석하여 설명하자면 첫째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애매한 고난이 있으며 둘째는 죄가 있기에 죄 때문에 당하는 심판적 고난, 그리고 셋째는 선을 위하여 스스로 당하는 사랑의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고통은 성경을 읽으면서도 분개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억울한 고통입니다. 정말 죄 없이 당하는 고통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생명을 돌보았기 때문에 당하는 고통입니다. 생각할수록 이렇게 부조리하고 모순적인 고난은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 가책이란 없습니다. 그는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되돌아오는 후회와 유감이 없습니다. 아픔은 있어도 슬픔은 없습니다. 여러분! 아픔과 슬픔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아픔은 없는데 슬픈 일만 많습니다.
여러분! 바울은 매를 맞았습니다. 감옥에 갇혔습니다. 쇠고랑을 찼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추호도 가책이 없습니다. 후회도, 뉘우침도 없습니다. 더구나 부끄러움도 없습니다. 세상에는 부끄러운 영광도 많습니다. 잘 산다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가난해도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하고도 성공했노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패를 하고도 떳떳하게 가슴을 내어놓는 자랑스러운 실패가 있다는 말입니다. 행복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한다(빌 1:20)고 담대하게 외치고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 부끄럽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해 살고 그리고 그 다음에 전개되는 사건에 대해서는 상관할 바 없습니다. 이후의 문제는 다 하나님께 맡기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마음에 슬픔과 고통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떳떳하지 못한 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일이 너무 많단 말입니다. 진정 실패 자체에 아픔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해서는 안 될 일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는 고개를 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 바울 사도는 특별히 한 심령을 살리기 위하여 고생을 자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살리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 사도는 이 고난을 면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하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매를 맞는 중에라도 나는 으로마 사람이라는 한 마디만 했어도 오늘 본문에 이어지는 37절 말씀처럼 이렇게 억울한 매를 맞지 않아도 되었겠고 물론 감옥에는 갇히지 않아도 될뻔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 신분을 말하지 않은 채 끝까지 매를 맞습니다. 오직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 당하는 것을 그는 자처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기적의 현장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적은 의로운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있는 것이지 죄 짓고 매맞는 일에도 기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선을 위한 고난을 당할 때에, 바로 그 실패와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의 역사가 기적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은 이 감옥 안에서 기도합니다.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만난 관계에서 문제의 해결을 보려고 합니다. 그는 결코 지금의 처지를 사람의 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때린 것은 빌립보 사람이지만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기에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모르는 길을 가고 있지만 하나님은 아시겠기에, 나는 무지하게 하나님의 일을 따라가고 있지만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그 지혜와 능력을 믿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순간에도 기도가 막히지 않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아무리 부하게 살아도 기도가 막힌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바울은 비록 감옥에 갇혀 사방이 깜깜한 가운데 있었지만 하늘은 열려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 특권을 가지고 옥중에서도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캄캄한 밤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의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자기를 보고, 하나님을 보며, 또한 자기의 운명과 자기의 이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하나님께 맡겨 버렸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양을 치는 유목민입니다. 그들은 양을 칠 때에 이 양은 내 것이라는 표시로 엉덩이에 화인을 찍습니다. 어떤 이는 책 한 권을 사서도 이것은 내 것이다 하고 사자마자 자기 이름 석자를 크게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몸에 특별한 흔적이 있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17절에 보면 그는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람된 흔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많은 매를 맞았기 때문에 그의 몸 어딘가에 상처의 자국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는 확실한 표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이 고난을 그리스도의 사람된 흔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싸인(sign)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예수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그는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고난 중에서 깨끗한 기도를 드립니다. 이제 그의 기도는 정욕적인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위하여, 가족을 위하여, 만사형통을 위하여 하는 식의 기도가 아닙니다. 진실로 깨끗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의하면 찬미를 부릅니다. 여러분! 혹 억울한 일로 감옥에 갇혀 본 일이 있습니까? 그때 그 속에서 부르는 찬송이야말로 참으로 신비로운 것입니다. 고통 중에 부르는 찬송처럼 힘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때에 부르는 찬송의 깊이와 신비로운 행복은 경험한 사람만이 아는 것입니다. 깊은 고난 중에, 죽음을 앞에 놓고 마지막 찬송을 부르는 그 순간처럼 신비롭고 평화스러운 일은 없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감옥에서 찬송을 부릅니다. 깊고 어두운 밤에 찬송을 부릅니다. 억울하게 매를 맞고 상처난 몸으로 찬송을 부릅니다.
다가올 모든 사건과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마지막 찬송을 부릅니다. 이는 그가 본래의 자기 모습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지난날의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교회를 잔멸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못살게 핍박하며 스데반을 죽이고 그것도 마음에 차지 않아 다메섹을 향하여 기독교인의 뒤를 쫓으며 살기가 등등해 하던 사울이었던 바울! 어쩌면 그는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다가 벼락이라도 맞아 죽어야 할 사람입니다. 그토록 극악 무도한 사람이요 예수를 핍박하던 괴수가 이제는 예수님의 포로가 되어서 사도가 되고, 종이 되어 순교자까지 됩니다. 지금은 예수의 이름으로 매를 맞고 옥에 갇힌 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이 현장에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대로가 특권이요, 영광이며, 축복이었습니다. 이 고난과 이 아픔이 그렇게도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찬송을 부릅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하는 감사의 감격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종말적인 찬송! 바로 여기에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가 옥문이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아니요, 이 감옥에서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도 아닌 줄 압니다. 오히려 감사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그에게 소유로써는 가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됨으로서는 이것이 최고의 성공이요, 영광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로 포장된 하나님의 축복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그 깊은 사랑에 감격하며 마지막 찬송을 부를 때에 거기 기적이 나타납니다. 옥터가 흔들리고 옥문이 열리며 쇠사슬이 풀어지는 놀라운 기적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저는 생각하고 싶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풀어진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그보다 먼저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이미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원망할 시간에 감사하고, 울어야 할 시간에 기뻐하며, 절망할 시간에 감사 찬송을 부릅니다. 다름 아닌 이 자체가 벌써 기적인 것입니다. 그 심령 속에, 그 사람됨에,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 기적의 결과로 옥문이 열리며 자유 하게 되는 또 하나의 기적이 생산됩니다.
여러분! 울음에서 그쳐야 하겠습니다. 원망에서 감사로, 이 절망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는 거기에 기적이 있는 것입니다. 밤은 점점 깊어가고 사방은 캄캄합니다. 돌로 둘러싸인 감옥에서 다시 한번 매여 있는 몸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보며, 하늘과 통하는 순간에 이 놀라운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이때 비로소 이 고난이 왜 내게 있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이제 죄수로서 간수를 향해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며 전도하게 되었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 아닌 바로 자기를 지키고 있던 간수의 집에 들어가서 온 식구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이것이 곧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고난이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징계입니까? 아니면 겸손을 위하여 내리시는 채찍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더 큰 성장을 위하여 내게 주시는 시련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내게만 주신 특권입니까?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 이 감옥과 같은 바로 그 현장이 기적의 현주소가 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는 나의 과거를 지금으로 바꾸어 주신 그 은혜를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의 신념 속에 기적이 나타날 때 옥문이 열리며 매인 사슬이 풀어지는 엄청난 기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현실적으로 있게 될 것입니다.
기도
사랑하시는 주님! 감옥과 같은 세상에서 죄악의 밤은 깊어만 가고, 참을 수 없는 모욕과 굴욕적인 고난에 시달리고 있는 저희들, 그러나 저희들에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그 놀라운 기적이 있게 하시사 오늘의 고난을 오히려 감사하며 기도하게 하시고, 신비로운 찬송을 힘있게 부르게 하시옵소서. 이로써 우리의 심령이 자유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환경, 우리의 주위에 다시 옥문이 열리는 놀라운 기적을 낳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주의 크신 능력을 나타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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