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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란?(사도행전 11장 19~26절)

by 【고동엽】 2024.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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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이란?(사도행전 111926)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어느 날 우연히 오랜만에 한 친구를 만났던 일이 있습니다. 그 친구와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서 보았더니 전에 없이 가슴에 금으로 만든 큰 십자가를 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때 저는 바로 며칠 전에 읽은 수필이 생각나서 그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말해 보았습니다.

"내가 읽은 수필에 이러한 말이 있더군------가슴에 단 금십자가가 크면 클수록 사기성이 더 높다라고 말이야" 그랬더니 이 친구가 즉시 그 자리에서 금십자가 뺏지를 빼어서 호주머니 속에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수필의 표현이 옳은 말이냐 아니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말을 듣고 금십자가를 곧 떼어야 하는 그 마음의 자세가 문제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가진 바 이름을 자랑하며, 또 그 이름을 높이며 사는 사람들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 이름을 부끄럽게 생각하게 되었다면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증거이며 심지어 가슴에 단 십자가가 사기성의 표식이 되었다면 문제는 더욱 심각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러므로 니체는 "기독교인들이 살신행위(殺神行僞)를 한다"고 하는 혹독한 비평을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업고 사는 자와 하나님의 이름을 생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자, 그리스도인의 이름만을 항상 도용하는 자가 많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이름 때문에 영광을 받으며 존경도 받고, 없는 신임도 얻게 되는 그러한 사람을 가리킨 말입니다.

빌립보 318절에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나 실상은 무신론자로, 그리스도 없는 자로, 그리스도와 십자가의 원수로, 그리고 니체의 용어를 빌린다면 하나님을 죽이는 자로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이름을 모독하며 그 이름을 죽이며 사는 소위 그리스도인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본래 그리스도인이란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으로 불려진 이름이라고 사도행전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티아누스(Christianous)란 헬라어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즉 그리스도께 속한 자와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이름이 있기 전에는 기독교인들은 갈릴리사람(Gallilean) 혹은 나사렛당(Nazarenes)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졌다고 봅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이 대부분 갈릴리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쓰여진 이름이며 동시에 예루살렘 곧 수도에 사는 교만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멸시하는 마음에서 촌 사람들의 운동이라는 뜻에서 갈릴리 사람들이라고 부른 듯 합니다. 그리고 나사렛당이란 고향이 나사렛인 예수님의 별명 중 나사렛 사람이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붙게된 이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외에도 "예수의 제자들", "형제들"이 란 말이 쓰여졌고 가장 고상한 이름으로는 "성도" 곧 거룩한 무리, 구별된 무리들이란 이름이 쓰여졌던 것인데 이 때로부터는 새로운 이름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이 쓰여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주시해야 할 점은 이 이름이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교회가 시작될 때 붙이어진 이름이 아니고 이방 땅인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여기에 중대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루살렘에서 처음 교회가 시작될 때는 교회는 놀랍게 성장했고 굉장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적과 기사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방언이 터져서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사람들이 한 언어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신비와 기적을 각자가 몸으로 체험하게 되었으며 이 역사에 동참한 무리들은 서로 사랑하여 유무상통하는 기적 중의 기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적의 무리 신비로운 단체에 주어진 이름이 아니라 오히려 그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하여 박해를 받아 많은 사람이 희생되고 따라서 교인들은 피신하여 정든 땅을 떠나서 이리 저리 유리해야 했으며 여러 가지 곤란을 감수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환난과 역경중에서도 오히려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며 그 괴로운 환경을 믿음으로 이기고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며 선교에 힘쓸 이때에 이방 땅인 안디옥에서 불리워진 이름이 곧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영광의 날에 불려진 이름이 아니고 환난의 날에 고난의 날에 들려진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귀한 이름인 것이 사실입니다.

먼저는 이 이름은 별명으로 불리워진 이름입니다. 좋은 뜻으로 사용된 이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을 존경하고 높이기 위하여 사용한 이름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을 멸시하는 마음에서 농담과 멸시와 비웃음의 조롱조로 모욕하고자 붙여준 별명이었습니다. 모욕적으로 사용한 이름인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 예수께 속한 자, 예수 밖에는 모르는 자 예수에게 미친 자라는 뜻에서 부른 이름입니다.

로마서 116절에 사도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사실상 당시 사람들에게 예수란 이름은 부끄러운 이름이며 수치스러운 대명사였던 것입니다.

대로마 제국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그 때의 형편으로 보아서 도대체 적은 속국인 유대인이란 것만도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명예의 근본으로 하던 시대에 있어서 유대사람이란 자랑스러운 것이 못되며 뿐만 아니라 갈릴리 사람이란 같은 유대사람이라고는 하지만 저 사마리아 땅을 지나서 북쪽에 위치한 소외된 선민지구인 갈릴리 스불론 납달리 지방 사람이란 말이 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실 때 "이 사람들이 누구냐"는 종교 지도자들의 물음에 "갈릴리에서 온 선지자입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모름지기 갈릴리 촌사람들의 장난스런 퍼레드인데 신경 쓸것 없습니다라는 뜻의 말입니다.

니고데모가 신분 높은 자로서 밤에 그리스도를 찾아 온 것도 여기에 뜻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갈릴리 선지자, 죄인과 세리의 친구, 이같은 이름들이 부끄러운 이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당시로 돌아가서 생각한다면 예수란 곧 실패자였기 때문입니다. 시세로의 철학으로 본다면 강자가 진리며 승리자가 곧 의인입니다. 예수는 약자며 패자였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사실은 큰 수치를 말해주는 내용이 되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죽음이란 약소국가의 국민의 서러움 마저 내포된 죽음입니다.

당시 로마 시민은 어떤 죄를 지어도 십자가에 죽이지 아니 하였습니다. 십자가는 저주를 받은 자가 당하고 고난으로 소화되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육체적인 고난만이 아니라 십자가는 수치와 치욕의 뜻을 가졌고 따라서 종교적으로는 완전히 저주를 받았다는 뜻에서의 형벌이 있었습니다. 너무나도 끔찍스러운 죽음이라서 옛날 로마의 황실에서는 식사할 때에는 절대로 십자가란 말을 입밖에 내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가장 부끄러운 이름을 통하여 예수를 따르는 자의 별명으로 부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름을 즐겨 받아 들였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했으며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자처하면서 심지어는 그 그리스도 외에는 알지 아니 하기로 작정했다고 까지 말하고 그 그리스도만 알고 그만을 높이며 그만을 자랑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 이름을 감사히 받아들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541절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그 이름을 위하여 투옥되며 매맞는 것을 오히려 기뻐하며 감사하였고 이 능욕 받는 일에 가담된 것을 자랑하며 옥문을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세례란 예수의 이름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름으로'란 이름 안에서 혹은 이름을 빙자하여란 뜻이 아닙니다. 원어대로는 이름 속으로(eis tononoma)입니다. <not in, But into>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 시간부터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다, 그리스도께 속한다,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뜻이며 좀더 설명한다면 그리스도의 나라의 시민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와 운명을 같이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이름이 곧 그 자신의 이름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그의 생의 목적이며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높이며, 그를 섬기며 그를 사랑하며, 소중히 여기고 그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운명을 그에게 거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용어를 쓴다면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 욕된 이름, 그 부끄러운 이름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던 것이며 모욕하기 위하여 부른 이름을 영광의 이름으로 수락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름은 본래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이란 이스라엘의 제1대 왕의 이름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후로 바울이라고 불렀습니다. 바울이란 아마도 바울이 키가 작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쁜 뜻에서 붙여준 별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별명이 그에게 좋은 이름일 수 없으나 그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후 그는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를 적게 여기고 그 수치스럽고 적다는 뜻인 바울이란 이름을 자기의 이름으로 삼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하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리스도께서 사랑하던 자를 사랑하게 되고 그리스도께서 하시던 일을 계승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자기는 없어지고 그리스도만이 남은 생을 살게 되었고 모두 작은 그리스도가 되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에 주어진 이름이 그리스도께 미친 자라는 이름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513절에서 바울은 미친 자된 자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뜻과 자기의 판단대로 산 것이 아니고 온전히 그리스도의 영에 끌려서 살았으며 그리스도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미친 듯이 그리스도이므로서만 살았습니다. 성령은 곧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 밖에 모르고 그리스도로서 사는 자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이 뿐만 아닙니다. 좀더 실제적인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으로 충만한 사람들에게 형통함과 순탄한 길만이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핍박이 있었습니다. 본래 안디옥에 있는 교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큰 핍박을 받게 되어 이 지방으로 옮겨 피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같은 위험과 박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 다니면서 숨어 지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는 곳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같은 일들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이 된 것입니다. 박해 즉 고난을 어떻게 소화하는가가 문제입니다. 주어진 고난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가 근본적인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 앞에서 운명이나 숙명을 논하지 아니하였으며 그 누구 때문이라는 원망도 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물론 고난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하였거니와 죽음까지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감수 할 자세가 되어 있었으며 특히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는 생각지 아니하며 저주와 형벌의식에 매어서 공포에 떨지도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고난 당함을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고난과 박해를 선교의 기회로 삼았으며 환난과 핍박을 통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았으며 기도의 응답도 실패와 역경을 통하여 들었습니다.

구체적인 사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며 현실적인 모순된 부조리한 사건들을 통하여 오히려 복음을 전하며 이 모든 환경을 선교의 기회로 삼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열심히 더욱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람들을 볼 때에 불신자들은 이상히 여기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마침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부르게 된 것입니다. 고난을 이기는 그들의 신앙과 현실을 극복하는 사랑과 모든 모순과 부조리를 초월하는 소망에 넘치는 생활을 보고 이러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두드러진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도덕적인 순결이었습니다. 당시 물란 하기 이를 데 없는 도덕 사회에 있어서 그리스도인들만은 청결한 생활을 하였습니다. 높은 도덕적인 순결이 모든 사람의 모범이었던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 국가로 선포될 때에 당시 기독교인이 인구의 9%밖에 없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9%밖에 안 되는 기독교인을 가지고 어떻게 기독교 국가라 선포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이유중 하나가 기독교인들의 순결한 도덕 생활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사회는 너무 문란한 도덕 생활로 인해 임산부의 대다수가 불구자와 저능아를 출산하였는데 유독히 기독교 가정에서만은 건전하고 우수한 자녀들을 많이 낳게 되어 이것이 모본이 되었기에 국교 선포가 가능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순결과 사랑, 진실과 정의 등이 그리스도인의 특징입니다.

좀더 나아가서 본문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원수와 화해하며 바나바와 바울이 합심해서 열심히 전도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과 용서와 이렇게 합심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되는 역사를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옛 원수가 친구가 되며 그리스도인을 죽이던 자가 전도자가 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하나가 되며 협력하게 되는 것과 동력 동사하는 것을 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분열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닙니다. 이 진실한 화목이 그리스도의 역사이며 이 화해적인 역사가 곧 그리스도인의 역사인 것입니다.

교부 폴리갑이 순교할 때 그를 화형에 처하던 군인이 "이 사람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다"고 말했다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그리스도인으로 고난 당하고 그리스도인으로서만 죽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생의 끝이 오직 그리스도인으로 끝나야할 것입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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