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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통신에 의한 시-공간 극복과 하늘과 땅의 지평 융합(1)

by 【고동엽】 2022. 10. 19.

김재진교수 (케뤼그마신학연구원 원장, 연세대학교 교수) 46  

I. 들어가는 말

우리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기도를 할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마 6:9b)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부름에 대하여 즉각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우리는 과연 기도를 통하여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대화를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는 그 하늘이 어디기에, 아무런 전자통신 등의 매개체 없이도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단 말인가? 그 하늘은 이 지상에 있는 그 어느 곳을 가리키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이 의식할 수 없는 초월적 세계를 가리키는 것인가? 성서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天地)를 창조하시니라"(창 1:1)고 기록된 그 하늘이 피조 세계의 어느 곳을 가리킨다면, 하나님은 피조된 하늘과 땅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분이신가? 이러한 일련(一連)의 질문들은, 예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하여도 제기될 수 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곳이 초월의 세계로서의 하늘인가, 아니면 피조된 지상 세계와 구별된 그 어느 세계를 가리키는 것인가? 예수님이 승천하신 하늘이 세상과 완전히 분리된 초월적 세계라면, 오늘날 우리는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교통할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일차적으로 다음과 같은 예수의 증언 속에서 발견될 수 있다: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이러한 예수의 종말론적 진술은 고도로 발달된 현대의 전자통신 사회에서는 아주 쉽게 이해되어진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다원매체(Multimedia)를 통하여 시간(時間)과 공간(空間)의, 다시 말하면 땅과 하늘의 지평융합(地平融合)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대사회는 전자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공간적 간격 내지 거리가 극복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시간의 차이도 극복되었다. 독일 뮨헨(München)에서 실행되고 있는 축구경기를 TV 수상기를 통하여 서울과 워싱톤(Washington)에서 동시(同時)에 시청할 수 있다. 즉 독일 뮨헨에서 서울까지의 거리나, 뮨헨에서 워싱톤까지의 거리차를 고도의 전자통신 사회에서는 느끼지 않는다. 이러한 공간적 간격 내지 거리의 극복은 결과적으로 시-공간을 극복하게 되었다. 결국 전자통신의 발달로 인하여 시간은 절대적-상대적 시간이 되었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전자통신의 도움으로 각 나라 사람들은 동일한 시간대에 살고 있으며, 동시에 태양의 남중(南中)시간을 자국(自國)의 표준시간으로 그대로 갖고 있다. 즉 현대인은 상대적 자연의 시간과 절대적 동시간을 함께 갖게 되었다. 서울의 아침 8 시는 독일의 새벽 0 시이다. 그러나 위성통신으로 8 시간의 간격이 극복되고 전화를 통하여 각 나라 사람은 동일한 시간대에 그리고 동일한 상황 속에 - 독일이 새벽 0시 이건, 한국이 아침 8시 이건 - 살수 있게 되었다. 독일에서 서울의 시간대에 참여할 수 있고, 서울에서 독일의 시간대에 참여할 수 있다. 이러한 시-공간의 극복 내지 시-공간 차원의 융합으로 인하여 설명이 어려웠던 영원과 시간의 만남 혹은 자연과 초월의 만남에 대한 신학적 해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아래의 작은 논문에서는 영원과 시간의 만남에 대한 신학적 해명을 위하여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현대 물리학의 발달로 인하여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현대 물리학자들이 발견해 낸 시간과 공간의 질적-양적 차이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 제 II 장에서 우선 현대 물리학이 발견해 놓은 시간의 개념에 대하여 알아보고, 그 다음 제 III 장에서 현대 물리학에서의 공간 개념을 알아보고자 한다. 그 다음 제 IV 장에서 시간과 공간이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 분석하고, 그리고 난 다음에 제 V 장에서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적 차원이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늘의 개념에 의해서 극복됨을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기도문 속에 나타난 하늘과, 예수가 부활하여 승천한 그 하늘이 뜻하는 신학적 의미를 쁹아보고자 한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현대 전자통신 사회와 기독교 신앙의 대화를 모색하고, 오늘날의 고도로 성장된 위성통신 사회에서 기독교의 영원(永遠) 개념이 어떻게 수용될 수 있는지 인식하게 될 것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전자통신 사회에서 기독교가 주장하는 하나님의 영원성(Ewigkeit Gottes)을 보다 더 자세히 인식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예수의 부활과 승천이 시-공간의 지평융합 속에서 어떻게 새롭게 이해될 수 있는지 그 해석의 신학적 근거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II. 시간의 상대적 인식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의 상대성 이론이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시간을 절대적이고 고정되어 있으며, 우주 어디에서도 적용되는 보편적인 - 물체나 관찰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 것으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시간은 "역동적"이다. 시간을 "역동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현대 물리학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현대 물리학의 혁명 가운데 하나는 아인슈타인의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운동에 관한 상대성 원리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그의 특수 상대성이론의 첫 번째 공헌은, 시간이 절대적이며,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믿음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그는 실제로 시간은 탄력성이 있으며, 운동에 의해서 늘어나거나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다시 말하면 각각의 관찰자는 그 자신의 개별적인 시간의 길이를 갖고 있으며, 그 시간의 길이는 다른 사람들의 시간의 길이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여기에 중력의 효과를 포함시키기 위하여 그의 이론을 일반화시켰다. 그 결과로 생겨난 일반 상대성이론은 중력을 하나의 힘으로써가 아니라, 시-공간 기하학의 비틀림에 참여시킨다. 여기서 "구부러진 공간(spacewarps)"과 "구부러진 시간(timewarps)"이 생겨나게 되었다. 즉 시간은 지구 중력이 약해진 우주공간에서는 실제로 더 빨리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중력이 강하면 강할 수록 시간의 구부러짐은 더 심하다는 것이다.
이렇듯 보편성이라는 족쇄에서 시간을 해방시켜 관찰자 각자의 시간이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흐를 수 있도록 함으로써 우리는 지금까지의 시간에 대한 몇 가지 가정을 버릴 수밖에 없게 되었다. 예를 들면 <지금(Jetzt)>이라는 시간의 현재성(現在性)에 대하여 더 이상 동의하지 않게 되었다. 즉 각자가 갖고 있는 시간의 크기가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고속으로 운행하고 있는 로켓트 안에서의 <지금>은 지구 위에서의 <지금>과 같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보편적인 "현재 순간(瞬間)"으로서의 <지금>은 없다는 것이다. 보편적인 "현재 순간"이 없다는 것은 사실상 결과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질서정연한 시간 구분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두 사건 A와 B를 한 사람의 관찰자는 동시에 일어나는 것으로 판단하는 반면에, 서로 다른 관찰자는 B가 일어나기 전에 A가 먼저 일어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관찰자는 B가 먼저 일어난 것으로 판단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고는 서로 다른 관찰자에게는 타당하지 않다. 결과적으로 과거 현재 미래의 예리한 구별은 서로 다른 공간에서는 더이상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오히려 과거 현재 미래는 동시에 실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과거는 다른 사람에게는 현재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미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을 공간과 함께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시간과 공간은 상대성 이론에서 따로 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현대 물리학자들은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묶어 <시-공간>이라고 부른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구별이 <시-공간> 안에서 없어진다면, 여기서 영원이 시간 안에서 경험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즉 영원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의 시간 속에서 경험하고 인식될 수 있는 분이시다. 이것이 오히려 보다 더 성서적(biblisch)이다. 왜냐하면 영원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 역사 속에 임재해 계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영원하신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현재도 우리들의 역사적 시간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영원전 부터"라는 시간의 개념을 "이 땅 위라는 공간"과 결합하는 것은 곧 시간과 공간의 결합이요, 영원과 시간의 결합이외에 다른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원> 개념은 기독교의 전통적 <영원> 개념에 상충된다. 왜냐하면 종교에서는 영원을 시간과 분리하여 공간적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통적인 종교적 <영원>의 개념이 무너진다. 왜냐하면 전통적 종교적 의미의 <영원>은 무한(無限)의 기간으로서 시작도 끝도 없이 존재하는 것으로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결합으로서 종교적 <영원>의 개념이 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공간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게 됨으로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우리들의 시간밖에 계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시간 안에 즉 우리들의 공간 안에 계신 분으로 더욱 우리와 가까워졌다. 즉 공간 속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들의 시간 속에 계신 하나님이다. 역으로 말하면 시간 속에서 일하고 계신 분은 우주 속에 계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주의 법칙과 동떨어져 있는 분이 아니라, 이 우주 속에 계신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주이시라면, 그 분은 곧 시간의 창조주이시다. <시-공간>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한다면, 우주의 창조주는 시간 내지 역사의 창조주이다. 더 나아가 <시-공간>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게 됨으로서 하나님은 시간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라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이러한 사고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에 의해서 일찌기 주장되었고, 안셀름(St. Anselm)에 의해서 확고해졌다. 안셀름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시간 밖에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 물리학의 발달로 인하여 시간과 공간을 하나로 묶어 생각하게 됨으로서, 시간 내지 역사와 우주적 초월을 구별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시간 속에 계시기에 생각하고,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그 계획을 실현시켜가시는 인격적인 분이다. 동시에 그러한 하나님은 공간 속에 계신 분이시기에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구별을 넘어 시간을 초월해 계신 분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공간 속에 계신 하나님은 절대적 시간 속에 계시지만, 그 분은 시간 속에서 상대적으로 우리에게 인식된다. 동시에 하나님은 상대적 시간 속에 계시지만 우주 속에 계신 절대적인 분으로 인간의 이성에 의해서 인식된다. 즉 하나님은 시간 밖의 우주 속에 계신 분이며, 동시에 우주 속에 계시면서 시간 속에서 일하고 계신 인격적인 분이다. 이러한 하나님 인식은 전자통신 사회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바로 그러한 하나님 인식이다. 즉 하나님은 우주공간 속에 계시기에 시간 밖에 계신 분으로, 곧 우리의 경험 밖에 계신 분으로 인식되지만, 동시에 시간 속에 계신 분이시기에 우리의 경험 속에서 인식될 수 있는 분이시다. 이것은 마치 멀리 외국에서 일어난 사건이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경험 밖에 있지만, 전자통신을 통하여 그 공간이 극복되어지므로 시간 속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것과 동일하다.

III. 동시적 관계의 장(Relationsfeld)으로서의 공간

화이트헤드(A. N. Whitehead)는 "공간 속의 모든 물체는 독립된 조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한다. 즉 "모든 물체는 공간 내에서 모든 다른 체적(體積)을 자신 속에 반영한다"고 한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공간과 물체에 대한 생각은 한 공간 안에서 서로 떨어져서 발생한 다른 두 사건의 동시성에 대한 암시를 제공해 준다. 왜냐하면 한 사건의 발생은 다른 사건의 발생과 전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공간은 단순히 시각적(視覺的)으로 지각할 수 있는 허공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공간이 시각적으로 지각될 수 있는 빈 공간이 아니라는 의미에서 "상대성 이론의 지지자들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시각화는 단지 습관의 산물"이라고 평한다. 이 말은 우리의 지각을 통한 사물인식이 언제나 참인 것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공간 속에 나타난 현상들에 대한 인식은 "시각화"(視覺化)를 통해서가 아니라 수학화 혹은 개념화를 통하여 더 자세히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라이헨바하는 추상화의 우세를 다음과 같이 진술한다: "인간 정신은 추상적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시각적 심상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것을 성취한 후에는 새로운 심상을 만들어 내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래서 드리쉬(H. Driesch)는 순수시각화(純粹視覺化)란 단지 "논리적 관계"라고 말하였고, 크리스(J. von Kries)는, 공간 속의 운동이나 법칙을 순수 시각화하는 것은 단지 "인공적 다양체"일 뿐이라고 하였다.
앞에서 기술한 바와 같이 공간 속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법칙의 기하학적 시각화의 문제로 인하여 수학에서 유클리드(Euclid)의 기하학은 현대의 전자통신 사회에 더이상 그 특권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기하학의 공리는 수학 내에서 참<眞理>으로 판명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기하학의 공리는 이제 함수관계 속에서 취급되게 되었다. 함수관계란 순수 연역적 체계를 뜻한다. 순수 연역적 체계란, 다른 말로 말해서, 시각적 도상의 역할을 뜻한다. 힐베르트(Hilbert)에 의하면 수학적 기하학에서는 시각적 그림이 필요없으며, 구조와 법칙의 수학적 의미는 순수하게 개념적인 관계만으로도 가능하다고 한다. 즉 a와 b의 관계는 요소, 관계, 1 대 1 대응, 함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방식으로 순전히 논리적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라이헨바하는 "모든 기하학적 개념은 관계 뿐만 아니라, 요소도 이 기본 개념의 함수로서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공간 속에 있는 두 개의 실체를 수학적 기하학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호 논리학적으로 표시하고, 두 개의 실체 사이의 관계를 함의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현대 수학의 업적이라고 한다면, 이제 한 공간 속에 존재하는 두 실체의 관계는 수학적 혹은 기호 논리학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념적으로 규정될 수 있다는 입장이 전개된다. 그래서 카르납(R. Carnap)은 함의적 정의에 의해 주어진 점, 직선 등으로서의 개념을 "비고유적 개념(improper concepts)"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그것들의 특수성은 한 사물을 그것의 성질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다른 것들과의 관계에 의해서 특성화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기차의 마지막 칸은 다른 칸들과의 위치에 따라서 규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두 실체 사이의 관계의 개념은 한 공간 안에서 이동하는 점의 문제로 설명될 수 있다. 예를 들면 공간 속의 어느 한 점 A가 다른 곳으로 옮겨진 자리를 B라 할 경우, A에서 B로 옮겨간 것을 수학적-평면적 좌표로 표시 하면 A → A'로 옮겨간 후 B로 움직이는 방식과 A → A''로 옮겨간 후 B로 움직이는 방식이 있다. 이를 수학적 언어로 말하면 우리는 점 A를 우선 A'로 그리고 A'를 B에 좌표화시키는 좌표적 조작 O에 대하여 이야기해야 한다. 이 때에 A와 B사이의 좌표적 조작은 상대적 곱인 O1O2이며,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공리는 "상대적 곱" O1O2가 "상대적 곱" O2O1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동은 수학적인 관계 구조를 변화시키지도 않고, 수학적인 주장에 다른 내용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두 점 사이의 공간적 거리는 한 점의 이동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더우기 그 이동 시간이 극히 짧은 경우에는 점 A와 점 B는 동시적으로 한 공간에 위치해 있으며, 동일한 점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제시한 바와 같이 전자통신의 발달로 인한 경험에 의하면 서울과 독일의 뮨헨은 동일한 장소가 되는 것이다. 절대시간의 개념으로 말하면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하나인 것이다.
서로 다른 두 장소가 갖는 이러한 공간의 동일성은 광속도(光速度) 일정(一定)의 원리에 의해서 더욱 분명해진다. 이 법칙에 의하면, 빛은 유일한(unique)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 원리에 의하면 -현재까지 측정된 속도에 의하면- 광속도를 추월할 속도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광속도 한계적 성격의 원리이다. 따라서 현재까지의 측정에 의하면 광속도는 거의 무한한 속도이다. 그래서 현대 물리학에 의하면 광속도는 "모든 인과적 전달의 속도에 대한 극한치"로 인정받고 있다. 두 번째로 이 광속도 일정의 원리에 의하면, "시공간의 거리가 막대자나 시계에 의해서 정의된다 하더라도, 광속도는 일정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원리를 가리켜 "빛의 거리적 유일성의 원리"라고 명명한다. 이 두 가지 원리를 종합하면, "광속도 일정의 원리"는 바로 광기하학(光幾何學)과 물질기하학(物質幾何學)의 일치를 원리화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동시성의 상대성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정의, 곧 빛의 특수한 성질은 상대성 이론의 결과가 아니라 전제이다. 역으로 이러한 경험적 사실은 상대론적 시공간 이론을 물리학적으로 중요하게 만들어 주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광기하학을 물리학의 자연적인 기하학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코온(E. Cohn)은, 이 모델은 모든 관계를 재생산해 주고 동시성의 상대성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 준다고 평가한다.
이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광속도 일정의 원리"에 의하면 단위 공간 내에서 일어난 사건은 동일 시간내에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광속도를 추월할 수 있는 정도의 거리를 벗어나지 않는한 광속도의 거리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동시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이 분명해 진다: 공간 곧 거리의 문제는 "광속도 일정의 원리"에 의해서 동시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시-공간의 결합은 광속도 속에 있는 점의 이동 속에서 인식 될 수 있다.

(다음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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