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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 감사하라 (본문 살후2:13-14)

by 【고동엽】 2022. 9. 29.

마땅히 감사하라  (본문 살후2:13-14)


지금은 추수 때입니다. 지구촌 산야의 모든 동식물이 새 천년을 살아가면서 새끼를 낳고 씨와 열매를 맺는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에 순종한 아름다운 조화요 결과이리라 믿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자연의 결실을 보면서 단순히 '아 가을이구나 결실 했구나, 추수했구나' 라고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영적인 눈이 띄어져 하나님의 사랑을 눈을 볼 수 있고 확인하고 감사할 수 있어야 참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난 일 년, 여느때와 같이 태풍과 가뭄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땅에 심기어진 모든 생물들은 결실하게 되고 추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곳에는 불이 났지만 새 생명의 싹이 움돋는 것도 보았습니다. 이것은 한국 땅에서나 미국 땅에서도 상관없이 새 생명의 싹은 계속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길쌈도 수고도 안 해도 잘 자라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잘 먹이시고 입히시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오늘까지 오게 하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이 참 신앙인입니다.


우리는 이 추수의 계절에 하나님 앞에 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 앞에 예배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특히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감사해야 될 줄로 압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기도 하고 사람을 사람되게 하기도 하며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의 삶에는 감사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할 줄 아는 동물은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감사할 능력은 다 가지고 있는데 실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표현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열 명의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문둥병이란 대단히 끔찍한 병입니다. 요즘도 힘들지만 과거에는 더 힘들었던 병이었습니다. 이렇게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으니 얼마나 귀한 일이었겠습니까? 그러나 그 열 사람 중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물으셨습니다. "열 사람은 다 깨끗함을 받지 않았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예수님이 소중히 여기시고 칭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명확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감사하는 마음에서 쏟아져 나오는 그의 경배와 찬양을 기뻐 받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경배를 받으시기 합당한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을 곧 잘 잊는 잘못을 범하기 쉽습니다. 우리는 그럴 때 마다 예수님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하시는 질문,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 다시 말하면 왜 감사할 줄 모르느냐 하는 것은 아닌지 늘 조심해 야 합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은 어떤 이유에서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를 드리지 않을 권리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난 한해 동안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까? 이 감사는 하나님만 좋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만 이 세상에 넉넉하다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워 지겠습니까?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마땅히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마땅히 감사해야 합니까?

1.살아있는 자의 증거입니다.

성경에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는 것은"...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산 자가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사 38:19에 "오직 산 자 곧 산 자는 오늘날 내가 하는 것과 같이 주께 감사하며"라고 했습니다. 죽은 사람은 절대 감사할 수 없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두 번 세상에 태어납니다. 첫째는 육체적으로 부모로부터 태어납니다. 두번째는 영적으로 태어납니다. 중생했다, 거듭났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감사는 구원받은 자의 감사입니다. 이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심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실 때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택하사.." 누구나 하나님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다 지옥가야 할 우리들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나의 육체, 생명도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닌 것처럼 영혼의 구원도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만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나의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하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죽음에서 생명으로, 죽은 자에서 산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영생을 얻고 살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살아 있는 증거는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 속에 있는 물고기와도 같습니다. 살아 있는 물고기와 죽은 물고기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 차이는 무엇입니까? 죽어있는 물고기는 조금만 물이 흔들려도 같이 휩쓸려 내려 갑니다. 그러나 살아 있는 물고기는 아무리 물살이 세도 거슬러 올라 갑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세상에 절대로 떠밀려 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을 거슬러 올라 갑니다. 살아 있는 신앙인은 세상이 어떻게 한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서 하나님이 살게 하시는 그 영생을 가지고 이 세상을 거슬러 올라 갑니다.

"주님 세상에 떠밀려 가는, 세상 사람의 습관대로 살아가는 죽은 신앙인이 아니라 세상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산 신앙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왜 감사가 산 신앙의 증거겠습니까?

성경에서의 감사는 우리가 말로 하는 감사와는 다릅니다. 성경에서의 감사는 언제나 하나님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입니다. 감사의 대상이 사람으로 나타난 것은 네번 뿐입니다. 반면에 감사의 대상이 여호와 하나님인 것은 130번이나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나타나는 감사에는 그 대상이 여호와께 드리는 찬양이 수반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베푸신 놀라운 역사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신 그 아름다운 성품 인자하심에 대해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의 감사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서 감사의 제사를 드릴 때 늘 화목제를 드렸습니다. 화목제에는 언제나 제물이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앞에 감사로서 진실을 아뢰고 기쁨으로 찬양할 뿐 아니라 제물을 자연스럽게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감사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고백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기록된 추수감사절의 내용을 보면 이것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 감사의 절기만 되면 어김없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에서 먼 끝에서도 사람들은 왔습니다. 지금과 같이 자동차나, 비행기가 있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걸어서 오고, 여유가 있는 사람은 말을 타고 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이들은 모두 걸어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와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공수로 나가지 않고 감사 예물을 들고 갔습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추수감사절에 감사 예물을 드리는 데 어떻게 하면 좋은 것으로 드릴까를 생각하면서 조금이라도 좋은 것으로 사 드리려고 과일을 사더라도 돋보기를 가져가 고른다고 합니다.

'에트로그'라고 하는 과일은 아름다운 실과를 상징하는 것으로 겉 모양은 레몬과 비슷하게 생겼습니다. 성경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정성껏 예비한 예물을 가지고 회당에 들어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예물을 드리고 감사제를 지켰던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이들은 초막절이 있습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텐트를 치고 생활했던 때를 기억하는 행사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는 아파트에 살아도 텐트를 치고 그 안에 누워서 이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 초막절에는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를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때에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대대로 알게 함이니라" 그 곳에서 하나님의 출애굽의 은혜를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살아 있는 신앙인들의 추수감사절에는 예배가 빠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믿음의 고백인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기까지 도우신 에벤에셀 하나님'의 제단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운 일을 당할 때일수록 하나님 앞에 나와 제단을 쌓았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에벤에셀의 하나님'은 여기까지 도우셨다, 많은 시련과 환란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 앞에 미스바의 제단을 세우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는 것은 단순한 예물이 아니라 여기까지 도와 주실 것을 믿으면서 하나님 앞에 씨앗을 심는 것입니다. 농사짓는 농부가 지난해에 흉년이었다고 해서 새해에 씨앗 심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장래를 맡기면서 귀한 씨앗을 심는 예물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우리의 구원의문제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영혼을 구원하신 주님, 나를 위하여 예수님까지 보내 주셔서 살게 하신 그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다른 것을 주시지 않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구원자시오 그분 때문에 우리가 살고 승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바로 추수감사절 예배인 것입니다.

주님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생명 있는 자로, 살아 있는 자로 하나님 앞에 감사 드리느냐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자의 감사는 예배가 있고, 물질이 있고, 구원을 주실 것을 믿는 영원한 구원자를 바라보는 예배라고 하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귀의 세계는 절대 감사가 없습니다. 감사는 하나님이 좋아하시고 불평과 불만은 마귀가 좋아합니다. 감사하는 사람 만이 산 자요, 감사하는 자 만이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살아 있는 여러분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마땅한 감사는 주 안에서 사는 자의 감사입니다.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시니라" 성령의 인도하심,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을 때 마땅한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주 안에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입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감격할 일 아닙니까?

밀턴는 말년에 눈먼 소경이 되었습니다. 에디슨은 귀먹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주 안에 있음을 믿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밀턴는 "실락원" 이라고 하는 위대한 작품을 썼고 에디슨은 위대한 발명왕이 되었습니다. 에디슨이 귀먹어리가 되었을 때 그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귀먹어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소리를 듣지 않고 연구에만 몰두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 있는 자의 감사입니다.

빌리그래함 목사님과 함께 늘 찬양하고 간증하는 한 시각장애인이 있습니다. 이분이 한번은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인도할 때 100m앞에 어떠한 장애물이 있다고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내 눈 앞에 물이 있으니 건너뛰라든지, 계단이 있으니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나는 그 인도자의 말만 믿고 따라가면 안전하게 목적지 까지 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렇게 인도하십니다.우리는 10년 앞을 모릅니다. 20년 앞은 더더욱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알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만 믿고 순종하면서 살아가면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무사히 목적지 까지 도착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주 안에 사는 것이 축복이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것처럼 귀한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땅한 감사는 주 안에서 살기 때문에 하는 감사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감사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미국 개신교 중, 그리스도 연합교회가 있는데 이 교단은 교인들에게 하루 생활하면서 12번 감사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운 시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2.조반을 먹을 때는 오늘도 음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3.차를 타고 직장을 갈 때는 오늘도 나를 움직여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직장과 가정에서는 오늘도 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5.일을 하며 잔소리나 비판이나 압력을 받을 때는 도전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6.직장이나 집에서 칭찬이나 격려를 받았을 때는 만족과 행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7.점심시간에는 얘기를 나눌 친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8.하루의 일이 끝나면 작은 성취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9.집에 돌아와서는 가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10.저녁TV나 신문 잡지를 보면서 편히 앉았을 때는 여가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11.머리가 베개에 닫는 순간 잠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12.꿈 속에서 생명이란 귀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주 안에 사는 자의 감사는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실제로 지난 한 주간 동안, 아니 지난 일년 동안 감사한 마음을 얼마나 가졌습니까? 탄식이 많았습니까? 아니면 감사가 많았습니까?

3.마땅히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영광받으십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범사는 평범한 일, 당연한 이에 감사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노력해야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꿈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싸우기 위해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서 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올라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부른 것은 특권을 누리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최대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나 때문에 내 가정이 우리 교회 때문에 이 세상이 아름다워 지도록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여러분 이것은 우리에게 도전을 주는 것입니다. 훈련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애쓰라고 하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땀을 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 속에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모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당연하고 평범한 일을 감사하지 못하고 너무나 당연히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자녀들도 부모의 은혜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들이 넉넉하여 자식을 잘 기우는 분도 있지만 어려운 가운데 자식을 키우는 부모도 있습니다. 부모가 속상해서 야단을 치면 아이는 뭐라고 합니까? "짐승들도 새끼를 위해서 희생하는 것 당연한데 부모가 되어 수고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다른 부모를 보십시오. 더 잘해주고 많이 줍니다. 그런데 제게 해 주는 것으로 생색을 내십니까? 이렇게 반항하기도 합니다. 부모의 은혜를 당연히 여기기 때문에 부모의 은혜를 감사하지 못하는 불효자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스승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스승이 우리를 무료로 가르쳐 주나? 우리는 돈 내고 배우니 감사할 것이 없다"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직장인들도 회사에서 받는 봉급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일 잘 하니까 여기 있고 내가 일하니 봉급받는 것은 당연하다" 일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 당연한 것이 아닙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감사해야 하고 하나님은 감사하는 자들에게 은혜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IMF때 보다 더 어려운 시기를 맞고 있다고 합니다. 많은 회사들이 문을 닫을 지경입니다. 이제 그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어 버리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옳은 것은 옳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대모하는 것, 그렇게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 이끌어 가시든지 그 안에서 내 마음에 들면 드는 대로 감사하고 안 들으면 안 드는 대로 감사할 때 하나님께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는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치부하려고 하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이런 마음은 모두 없애야 합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일들 속에서 감사한 것을 찾아내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감사처럼 우리의 삶과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의 은혜를 당연히 여기고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많은데 만약 여러분의 자녀들이 부모의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효도한다면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시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녀는 어떤 사람이 되겠습니까? 부모의 은혜를 당연히 여기며 사는 사람과 부모의 은혜를 진심으로 감사하면서 사는 사람들 중에 어느 사람이 더 아름답고 아름답고 훌륭하다고 생각되십니까? 어느 마음이 이 세상의 삶을 더 아름답게 한다고 생각되십니까? 눈에 보이는 부모와 스승의 은혜만 알고 살아도 삶은 풍성해 지고 아름다워 지고, 훌륭해 지는데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의 삶은 얼마나 더 훌륭하고 아름다워 지겠습니까?

시 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되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물론이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 즉 하나님의 축복을 눈에 보이도록 나타내 보여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미국 어느 지방 신문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기 실렸다고 합니다. 11월 중순 감사절 기간에 어느 그리스도인이 보내 온 신앙의 간증입니다.


어느 회사의 전무인 40대 남자가 혈압으로 쓰러져 그만 반신불수가 되었습니다. 40대라면 한참 일할 나이 아닙니까? 너무 한심하게 느낀 나머지 병원에서 매일같이 실망과 좌절에 빠져 자신의 신세 타령을 하고 있었습니다. 매일 불만과 불평에 부인 조차 간호면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의 목사님이 오셔서 권면의 말씀을 했습니다.

"신세타령과 불평과 불만을 하지 말고 일생을 살아 오면서 도움 준 사람들을 기억하면서 감사의 조건을 찾아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에게는 또 다른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감사한 사람이 조금도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도 생각나지 않았고 원망스럽기만 했다고 합니다. 부인도 친구도 자식도 고맙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감사할 조건을 가지고 노력하는 가운데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가슴속에 뭉클한 사람이 생각났습니다. 그것은 초등학교 때 여선생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초등학교때 그렇게 공부를 잘 하지 못했지만 그 여선생님이 늘 격려해 주시고 용기를 주셔서 잘 졸업하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마치고 취직해서 회사의 중역까지 되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뜨거워 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내가 잘 해서 똑똑해서 잘 걸어왔는지 생각했더니 그때 그 여선생님의 자신을 격려해준 것이 감사했습니다. 수십년전의 여선생님이 그렇게 고마울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선생님을 수소문 하여 그 여선생님의 주소를 알아 그는 간단한 사연을 적었습니다. 정말 감사의 조건들이 너무나 생각나지 않는데 억지로라도 감사해야 하겠다 생각하고 한 것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저는 반신불수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저의 생애에 있어서 둘도 없는 은사이십니다. 그동안 한번도 감사드리지 못하고 무심했던 것을 용서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편지를 받은 선생님은 남편을 먼저 떠나 보내고 혼자 양로원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이 편지를 받아든 선생님은 너무나 기뻐서 답장을 보냈습니다.


"사랑하는 OO군 내 평생 수 많은 어린이를 가르쳤지만 고맙다고 감사의 편지를 받아 본 제자는 당신 밖에 없네, 이제는 늙어서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노인을 자네는 참으로 행복하고 기쁘게 해 주었네 내가 자네의 편지를 눈물로 읽은 것을 아는가? 나는 자네의 글을 침대 옆에 놓고 매일밤 한번씩 읽는다네 그리고 읽을 때 마다 자네에게 감사한다네. 그리고 이 편지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아는가? 내 생애의 기쁨과 희열을 용솟음 치게 해 주었네. 나는 자네의 편지를 나의 교편 생활의 유일한 보람으로 알고 내가 죽는 날 까지 간직하겠네, 나는 자네의 건강을 간절히 기도하면서... 그대의 선생님이"


40대의 반신불수 환자가 이 편지를 읽는 순간에 실의에 빠졌던 그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을 수 있었습니다. 편지를 받아 들고 그는 삶의 용기를 갖고 일어섰습니다."나를 위해 기도하는 분이 계신다, 나의 간단한 감사의 인사에 기뻐하고 매일 침대 곁에서 읽는다니 뭔가 보람있는 일이었다" 그는 걷는 연습을 했고 말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씩 좋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복직하게 되어 부사장이 되고 사장이 되었습니다. 이 간증을 추수감사절 기간에 써서 신문사에 보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이야기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말해주고 있지 않습니까? 이토록 감사생활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켜 줍니다. 감사생활은 우리들의 영육간에 건강한 삶을 살게 하는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할 일을 찾아봐야 합니다. 평생토록 하나님의 은혜를 찾지 못하며 진심에서 우러 나오는 감사를 찾지 못한 채 불평과 불만을 일삼음으로 그로 인해 자신과 세상을 파괴하면 불행한 삶을 살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살후 2:14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감사 속에는 하나님의 인도 하심이 있고 그 인도하심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한다는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구원 보이리라"는 말씀과도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편기자는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 내가 무엇을 보답할꼬"


만일 여러분의 자녀들이 진심으로 마음속에 '오늘 내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할꼬' 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모에게 효도한다면 얼마나 기쁘시겠습니까? 그보다 더 행복한 일이 세상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마음을 여러분의 자녀들이 가지고 살아 간다면 그 자녀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 마음과 정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잘못될 수 있겠습니까 그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 품고 산다면 하나님은 얼마나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삶을 살게 될까요? 하나님의 은혜를 늘 깨달으며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기를 소원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는 그곳이지만 그 삶의 자리에서 더 많이 감사할 수 있는 새 사람으로 변화 받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찾을 수 없는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속에 이루어 지는 추수 감사주일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오창우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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