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히 가르치라 (신명기 6:1-9)
유럽에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으로 항해하는 여객선에 어떤 부부가 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큰 돈을 벌기 위해 고향에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먼 거리를 떠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참을 순항하던 여객선은 무인도를 지나는 중에 그만 암초에 걸려 파선하고 말았습니다. 다들 물에 빠져 아우성인 상황에서 그들 부부는 천신만고 끝에 큰 나무 조각을 붙잡고 무인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불행히도 목숨을 건지지 못하고 다 죽고 말았습니다. 홀로 남게 된 그들 부부는 좌초한 배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무인도에 옮겨 놓고 무인도를 탐험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초조한 마음으로 무인도를 둘러보던 그들은 저 멀리서 뭔가 반짝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금이었습니다. 주위를 돌아보니 그 섬 여기저기에는 금덩어리가 잔뜩 깔려있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고향을 등지고 먼 타국으로 가던 그 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두말할 것도 없이 날이 새기가 무섭게 금을 채취하는데 열중하였습니다. 매일 동굴에 쌓여가는 금덩어리를 보며 그들은 행복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금덩어리를 모으기에 열중하던 부부는 어느 날, 혹시 그들이 구조되지 못하면 어떻게 할까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만일 가까운 시일 안에 구조되지 못할 것을 위해서 준비하자고 했습니다. 든든하게 울타리도 치고, 음식도 준비해 놓자고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은 구조되기 전에 금덩어리를 하나라도 더 모아 놓자고 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다른 일은 뒤로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금덩어리 모으는 일에 모든 시간을 다 할애했습니다.
오랜 시간이 흘러 한 탐험가가 그 무인도를 탐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해안가 동굴 안에서 금덩어리가 수북히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는 두 사람의 해골이 누워있었습니다. 그 해골은 무인도에서 금을 모으며 행복감에 도취되었던 바로 그 부부였습니다. 금을 모으는데 열중하던 그들은 결국 굶어 죽고 말았던 것입니다. 금을 모아 풍요롭게 살려던 그들의 꿈은 목숨을 연명할 양식을 구하지 못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하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십니까? 아마도 현대인은 경제활동을 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과 정성을 바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정성의 대가로 가족이 살아가고, 조금씩 재물도 쌓여갑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행복해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유하게 사는 것이 인생의 목표가 되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문제는 신앙인들 마저도 그러한 생각에 동조하여 교회에서 예배드리고, 말씀 듣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신앙 생활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일쑤라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당장 먹고 사는 일과 관계 있는 것도 아니고, 바쁘게 살아도 잘 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는 판국에, 그러한 일에 시간과 정성을 할애하는 것이 낭비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녀들이 시간을 아껴서 공부하여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에 다니는 것이 인생의 성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학원이다 과외다 하면서 세상적인 지식을 많이 배울 수 있도록 뒷바라지 하는 것을 자식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 부모님들의 '극진한 사랑'을 받는 우리 자녀들은 행복하다고 생각하고 있을까요? 한국청소년개발원의 최원기 박사가 쓴 '청소년 자살의 원인 및 예방정책에 관한 국제비교연구'에서 보면, 한국의 청소년이 자살하는 사회구조적인 이유 가운데, 대입경쟁으로 인한 공부 압력을 가장 큰 요인으로 꼽고 있습니다. 과도한 경쟁과 대학진학, 성공에 대한 압박이 심약한 청소년들에게 우울증등 정서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동안 부모들은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 왔지만, 그 노력이 잘못될 소지가 많다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들은 진정 무엇을 가르쳐야 할 지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1.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법을 가르쳐야 합니다.
시편 127:3에는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라고 말하면서 자녀의 귀함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각 가정마다 그러한 귀한 자녀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가는 최대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서 그 고민을 해결해 주고 있습니다.
신명기는 40년 간의 광야 생활을 마치고 요단강 앞에 선 모세가 자신의 최후를 감지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 세 편의 설교입니다. 특별히 모세는 오늘 본문인 신명기 6:4-9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자녀교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분명한 지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6:4-9을 흔히 "쉐마"라고 부릅니다. 4절 첫 부분에 보면 "이스라엘아 들어라!"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를 히브리어로 하면, "쉐마 이스라엘"(Shema Israel)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를 "쉐마"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이 "쉐마"는 유대인 조기교육의 첫 번째 방법이며, 최초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매일 아침과 저녁으로 이 "쉐마"를 암송하면서 자손들에게 신앙을 전수하였습니다. 신약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으뜸이 무엇이냐고 질문을 받으셨을 때, 서슴없이 "쉐마"를 말씀하셨습니다(막 12:28-34).
"쉐마"(들으라)는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길은 '들음'에서 난다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신명기 28장, 일명 '축복과 저주의 장'에서도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자녀들을 복 있는 자녀로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걸음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이유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이시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4절). 이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너는 세상에 둘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생명을 다해 사랑해야 할 유일한 존재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를 만드시고 역사를 지배하시는 분이, 별 볼일 없는 죄인인 '나'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 이외에 그 누구를 섬기고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톨스토이의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보면, 인간은 그 무엇보다 '사랑'을 통해서만 인생의 참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지상 최대의 행복이요 목적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무인도에서 굶어죽은 두 부부처럼 황금에서 행복을 찾고, 명예에서 보람을 찾고, 권력에서 삶의 목적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님의 사랑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 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지방에 사는 어떤 장로님은 자기 딸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 입학하여 기숙사로 들어가게 될 때, 두 가지를 약속했다고 합니다. 하나는 매일 밤 10시에 부모와 딸이 서로를 위해 기도하자는 것이고, 또 하나는 매일 아침 잠언을 한 장씩 읽는 것이었습니다. 그 장로님은 이렇게 객지 생활을 하는 딸의 인격과 생활을 하나님께 맡기도록 했던 것입니다. 딸은 그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매일 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부모를 위해 함께 기도함으로써 일상의 생활도 경건해졌습니다. 또 31장으로 되어 있는 잠언을 한 달에 한 번, 일년이면 열 두번을 읽게 되면서, 세상을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자녀에 대한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고 있습니까? 자녀들에게 좋은 음식, 예쁜 옷, 편리한 학용품을 사주고 등하교 길에 편하게 승용차로 데려다 주는 것도 부모의 사랑이요 기쁨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의 방법은 잠시 뿐입니다. 진정 자녀들을 사랑한다면 하나님 보시기에 기쁜 자녀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자녀들의 속사람이 하나님 보시기에 훌륭한 인격으로 자라나도록 신앙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대학 들어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키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런 자녀들을 찾고 계십니다.
2. 자녀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시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녀들을 신앙으로 가르치면, 그 장래가 번성케 된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아 삼가 듣고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얻고 네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허락하심같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의 수가 심히 번성하리라"(3절).
"삼가 듣고 그것을 행하라"는 말씀처럼, 자녀를 신앙으로 키우기 위해서는 말로만으로는 안됩니다. 자녀들에게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기 위해서는 우리 부모들이 생활이 하나님 중심, 신앙중심, 교회 중심이어야 합니다. 요게벳이 모세를 기르듯이(출 2:9), 마노아가 삼손을 신앙으로 기르듯이(삿 13:4-5), 그리고 한나가 사무엘을 기르듯이(삼상 1:26-28), 기독교 가정은 구별된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부모님들은 자녀들이 일류 대학에 진학하는 것 만이 참된 행복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에만 전력 투구하고 있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학도 중요합니다. 직장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게 하나님을 소홀히 여겨도록 해서는 안됩니다. 교인들 가운데서도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자녀들에게, 먼저 대학에 진학해 놓고 보아야 하니까 1년 동안 교회는 쉬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일류 대학에 합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녀가 잠깐의 성취감은 맛볼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겠습니까? 믿는 가정에서조차 자녀들이 정직 보다 요령과 융통성을 배우고, 양보대신 경쟁을 배우고, 겸손 대신 자신의 이익을, 협동보다 내 몫 챙기기를 먼저 배운다면, 장차 위선적인 신앙 밖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기독교 가정만이라도 자녀교육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과 경륜에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은 내 자식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내 중심으로 키우지 말고 생명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원하시는 인격을 키워 주어야 합니다. 어릴때부터 주의 말씀으로 양육되면 장성해도 곁길로 가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자녀를 '내 새끼'로만 키워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키워야 합니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돌보지 않는 이기적인 사람으로 키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인 사랑과 평화와 정의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자로 키워야 합니다. 부모님들이 이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양육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위한 큰 일에 그들을 써 주실 것입니다.
3. 자녀들이 이웃에 대한 배려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전 유엔사무총장 [대그 함마슐드]는 196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였는데, 독실한 신앙인이었던 그의 일기가 공개되어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가 죽기 전에 쓴 마지막 일기에는 "나를 위하여 몸을 바치신 주님, 저도 주님께 '예' 하고 대답하나이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부모님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일기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여러 번 나에게 가장 만족한 인생은 조국과 인류를 위하여 몸을 바치는 생애라고 일러 주셨다. 그리고 나의 어머니는 되풀이해서 하나님의 정의를 위하여 인간을 섬기는 생활을 하라고 말씀해 주셨다." 함마슐드의 부모는 그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에 "예" 하고 대답하라는 교훈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유산은 주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 가운데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라는 '쉐마'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수준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마 22:39). 그런데 우리가 말로는 사랑을 가르치면서도 이웃 사랑의 모범을 보이지 않으면 그것은 참된 교육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모진 고초를 다 받으시고 죽으시기까지 하셨는데,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요일 3:17-18).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신앙 교육을 하는데 이웃 사랑에 대한 교육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녀를 망치는 10가지 비결'이라는 글을 보면, 자녀가 원하는대로 다 해주는 것을 비롯하여 해서는 안되는 자녀교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웃을 위해 공부해서 큰 사람이 되는 것보다 사리사욕을 위해 공부해서 큰 사람이 되기를 가르친다'거나, '베풀기보다 소유하는 방법만을 가르친다'. '경건한 인생을 위해 고난 당하는 삶보다 세속적인 인생을 위해 편하게 사는 삶을 가르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렇게 남들을 돌아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 아는 자녀로 키우면 백발백중 자녀를 망친다는 것입니다.
"백문(百聞)이 불여일견(不如一見)"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로 귀로 듣는 것 보다 눈으로 보는 교육이 580배의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듣는 교육보다는 눈으로 보는 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웃 사랑 또한 몸으로, 삶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남을 위해 베풀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것은 백번 말로 해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가 먼저 모범을 보여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변해야 자녀들이 변합니다.
요즘 주 5일제가 확산되는 가운데, 현재 전국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월 1회씩 등교하지 않는 날을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마 앞으로 얼마 안가서 주 5일 수업이 정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에게 이렇게 많은 시간은 주어지는 반면, 그 시간을 적절하게 보낼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은 아직 미비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시간은 남고 갈 곳은 없는 아이들은 PC 방이나 만화방을 전전하거나 길거리를 배회할 뿐 마땅히 할 만한 것도, 갈 만한 곳도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자녀들에게 유익하고 건전한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 이외에는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의지나 능력을 갖춘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교회에서 입시 위주의 비인격적인 교육환경과, 빈부격차에 따라 소외된 아이들을 위해 대안학교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에 '인재를 양성하는 교회'를 표방하는 우리 교회도, 제도권 학교에서 감당하지 못하는 자녀들의 취미교육과 예능교육, 인격교육과 봉사활동 등을 감당할 수 있는 대안학교를 하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필요한 인재, 우리 민족을 치유하는 인재, 세계를 이끌어 나가는 평화의 일꾼 등을 키우고자 합니다.
이러한 비전을 품고, 새로 건축하는 성전은 교인들만 모이는 집회 장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상처 받은 이들을 치유하고, 지역사회를 섬기며, 인재를 키워내는 커뮤니티 센타(Community Center)로써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사역들은 단순한 생색내기가 아닌 전문적인 사역으로 자리를 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에게 부모의 신앙 유산이 전달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
자기 세대에는 신앙 생활을 잘했어도 자녀의 세대에 믿음의 대가 끊어진다면 정말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비잔틴 문명의 중심지인 터키의 이스탄불이 오늘날 이교도의 도시로 변한 것은, 바로 자녀들에게 대한 신앙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의 유산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 민족의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지런히 이것을 가르치는 교회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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