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 (사 37:14~20)
누군가를 감동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헌신, 희생, 정직, 신뢰.. 이런 단어들이 부분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기는 하나 참으로 희귀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현대사회는 感動不在의 時代"라고 합니다.
너무 많이 속아 살았고 또 남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감동을 받는 일도 흔하지 않고 감동을 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능력이고 힘을 가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으면 움직입니다. 감동을 받으면 헌신합니다. 또 감동을 받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습니다.
폭설이 내리는 자정이 지난 시간, 주말 여행을 마친 한 부인이 뉴욕 맨해턴 역에 내렸습니다. 그는 추운 밤길을 혼자서 갈 것을 생각하며 몹시 긴장하였습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까지는 아직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데 누군가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가 발걸음을 재촉하자 그 발소리도 빠르게 뒤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춥기도 하고 무서워서 마음속으로만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그녀에게 바싹 다가왔을 때 그녀는 자기의 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선생님? 짐이 아주 무거워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짐을 받아들더니 그녀와 나란히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집 아파트에 도착해서 그녀가 팁을 주려고 하자 그는 머리를 저으며 말하였습니다.
"부인, 당신에게서는 아무 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나는 당신의 핸드백을 날치기하려고 마음먹고 따라 왔는데 부인께서 저를 믿으시고 짐을 맡기셨기 때문에 차마 그런 짓을 할 수가 없더군요. 나를 믿어주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습니다." 아주 감동적인 이야깁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왜 그렇게 주를 위해 순교하였을까요? 주님의 그 위대하신 사람에 감동되었고 그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는 마음이 생기기에 목숨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왜 마리아가 옥합을 주님께 아끼지 않고 베풀었을까요? 그것도 주님의 그 위대한 사랑에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헌신, 그리고 충성에 감동하신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은 오히려 쉽습니다. 사람에게는 우리의 허물과 단점, 그리고 부끄러운 부분을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감출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데 어떻게, 무엇을 감출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도구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그것이고 찬양도, 헌신도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쓰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 앞에 크게 들어 쓰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의 히스기야를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를 어찌해야 할 것인지를 살피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다 나라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위기가 닥쳤습니다. 북쪽의 앗수르는 점점 힘을 잃고 있는 시점이었고 남쪽의 애굽제국은 점점 힘을 모아가고 있을 때 유다나라 안에는 친앗수르파, 친 애굽파가 형성되어 대립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유대나라를 쳐들어 왔습니다. 대장 랍사게가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을 둘러싸고 히스기야 왕을 협박합니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은 그들이 보낸 협박문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펴놓고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앗수르 왕의 교만한 자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있기도 했지만 히스기야의 기도의 자세가 하나님을 움직인 것입니다.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셨는가?
1.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도는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을 제일 먼저 찾아야 합니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사 사용해 보고 그리고 나서 안되면 하나님께 나오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문제가 생기자마자 하나님께 즉각 아뢰며 기도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 약속했습니다. 역대하7:14~15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15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성전으로 올라가 그들이 보낸 협박편지를 펼쳐놓고 간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전에 올라와 기도하는 자세를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세를 보시고 감동하시어 응답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로는 예수 안에서 기도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聖殿입니다. 왜 예수님 안에서 기도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공로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 씻으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간과하시고 응답하십니다.
둘째는 敎會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성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성도들의 이런 기도를 받으실 뿐 아니라 감동을 받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예수님도 성전은 "萬民이 祈禱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보면 몇몇 성도가 하루에 한번 교회를 들러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런 성도를 보면 기특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목사인 나도 귀하게 보이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보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셨고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이 약속을 붙잡고 믿고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새벽기도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하루의 가장 이른 시간 새벽을 깨우며 주님의 전에 나오는 그 믿음을 우리 주님은 참으로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충분히 감동시키는 기도입니다. 집에서 기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자세가 다르고 은혜가 다릅니다. 새벽기도는 주님을 감동시키는 막강한 무기입니다. 기도하기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힘써 하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플수록, 육체가 피곤할수록, 그리고 시간이 없을수록 더욱 힘써 하시면 그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비법입니다.
2. 히스기야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교훈을 합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렸다가 복을 누리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지 않습니까? 정말 자기 욕심 벗어버리고 지혜를 달라고 순수하게 기도합니다. 그러자 구하지 않은 것도 넘치도록 주시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를 살펴보세요. 어떤 기도가 먼저 나옵니까? 아직도 유치원 아이들처럼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하며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영적 어린아이 모습을 보일 것입니까? 열살이 되었고 스무살이 되었으면 그에 맞는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열살난 아들이 "엄마 맘마 줘~" 하면 뭔가 모자라기에 그러는 것 아닙니까?
기도도 믿음 성숙에 따라 내용과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린아이 같은 우리 기도도 응답하시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 기도가 우리의 신앙 연조보다 더 성숙해야 하나님이 깜짝깜짝 놀랄 것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기도원에서 한 여성도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전제품 사장인줄 아시는지 "주여 ~ 선풍기도 있어야겠나이다. 냉장고도 있어야겠나이다. 세탁기도 있어야겠나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구할 수도 있고, 그것이 잘못은 아니겠지만 산에 올라가다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제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습니다.
선교사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믿지 않는 영혼이 구원을 받도록 중보 기도하여야 하고, 섬기는 교회가 부흥되도록 기도하며 자신의 신앙이 성숙하도록 기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세탁기, 돈 문제, 질병문제, 당장 눈앞에 놓인 문제만을 위한 기도라면 하나님은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일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적 세계의 은혜를 구하는 차원 높은 신앙의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기도도 내용이 달라집니다. 꿈이 있어야 하고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쓰임을 받게 되고 일할 기회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외친 사도 바울을 쓰신 것이고 그들을 협력한 모든 종들을 복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3.히스기야는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고백하며 기도합니다.
37장1절 이하를 보면 히스기야는 옷을 찟고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을 感動케하는 기도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허물을 내어놓고 회개하며 주님께 문제를 아뢰며 기도하면 모든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 일 것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어렸을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아버지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쓰는 조그만한 도끼를 하나 사주었답니다. 손으로 던지면 빙빙 돌다가 벽에 탁 박히는 게 어린 워싱턴은 너무도 신이 났습니다. 너무 재미있어 도끼를 들고 사방에 뛰어 다니다가 실수로 그만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체리나무를 찍어버렸습니다. "이것, 큰일 났다". 겁이 난 워싱턴은 아무도 몰래 땅을 파고 그 나무를 묻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른 척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보기가 민망해서 슬슬 피해 다녔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조지 워싱턴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붙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준 도끼를 휘두르다가 실수로 그 체리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얘야, 나는 네가 한 짓인 줄을 벌써 알고 있었단다. 너 외에 누가 했겠느냐? 그러나 네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단다. 너는 참으로 위대하구나." 칭찬해 주었답니다.
거기서 조지 워싱턴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에 아버지가 "어느 놈이 그랬느냐? 분명히 너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며 요절을 냈다면 어땠겠습니까?. 그러면 사랑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공의는 실현이 되었는지 몰라도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죄 없어서 무사한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어도 회개할 때를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기도는 주님을 감동시키는 능력의 도구입니다.
결과를 보세요.
36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陣中)에서 185,000명 쳐죽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을 모독한 그 앗수르 왕은 자신의 우상신전에 경배할 때 아들들에게 칼로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하고 정확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그 대화가 알맹이 없는 대화라면 주님은 귀를 기울이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들을 만한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다면 얼마나 우리 주님이 좋아 하실까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키면 주님은 우리의 삶을 감동시킬 것입니다.
- 설교 : 최일환 목사
누군가를 감동시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헌신, 희생, 정직, 신뢰.. 이런 단어들이 부분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기는 하나 참으로 희귀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현대사회는 感動不在의 時代"라고 합니다.
너무 많이 속아 살았고 또 남을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사람을 감동을 받는 일도 흔하지 않고 감동을 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누군가를 감동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엄청난 능력이고 힘을 가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으면 움직입니다. 감동을 받으면 헌신합니다. 또 감동을 받으면 목숨이라도 내어놓습니다.
폭설이 내리는 자정이 지난 시간, 주말 여행을 마친 한 부인이 뉴욕 맨해턴 역에 내렸습니다. 그는 추운 밤길을 혼자서 갈 것을 생각하며 몹시 긴장하였습니다. 그녀가 사는 아파트까지는 아직 거리가 좀 떨어져 있는데 누군가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녀가 발걸음을 재촉하자 그 발소리도 빠르게 뒤쫓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춥기도 하고 무서워서 마음속으로만 도와 달라고 기도를 하였습니다.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그녀에게 바싹 다가왔을 때 그녀는 자기의 짐을 내밀며 말했습니다.
"저 좀 도와주시겠어요, 선생님? 짐이 아주 무거워요."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짐을 받아들더니 그녀와 나란히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집 아파트에 도착해서 그녀가 팁을 주려고 하자 그는 머리를 저으며 말하였습니다.
"부인, 당신에게서는 아무 것도 받지 않겠습니다. 솔직히 말씀 드리면, 나는 당신의 핸드백을 날치기하려고 마음먹고 따라 왔는데 부인께서 저를 믿으시고 짐을 맡기셨기 때문에 차마 그런 짓을 할 수가 없더군요. 나를 믿어주는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없었습니다." 아주 감동적인 이야깁니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왜 그렇게 주를 위해 순교하였을까요? 주님의 그 위대하신 사람에 감동되었고 그 사랑에 조금이나마 보답하려는 마음이 생기기에 목숨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왜 마리아가 옥합을 주님께 아끼지 않고 베풀었을까요? 그것도 주님의 그 위대한 사랑에 감동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사랑을 생각하며 모든 것을 다 드려도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헌신, 그리고 충성에 감동하신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들이 벌어질 것인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감동시킨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일은 오히려 쉽습니다. 사람에게는 우리의 허물과 단점, 그리고 부끄러운 부분을 감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감출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아시는데 어떻게, 무엇을 감출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그런 중에도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도구를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지는 예배가 그것이고 찬양도, 헌신도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있는 강력한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그에 못지 않게 쓰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 앞에 크게 들어 쓰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는 "기도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키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오늘 봉독한 본문의 히스기야를 통해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기도를 어찌해야 할 것인지를 살피며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유다 나라가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서 위기가 닥쳤습니다. 북쪽의 앗수르는 점점 힘을 잃고 있는 시점이었고 남쪽의 애굽제국은 점점 힘을 모아가고 있을 때 유다나라 안에는 친앗수르파, 친 애굽파가 형성되어 대립하고 있는 시점입니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이 유대나라를 쳐들어 왔습니다. 대장 랍사게가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을 둘러싸고 히스기야 왕을 협박합니다. 그러자 히스기야 왕은 그들이 보낸 협박문을 가지고 성전에 올라가 하나님 앞에 펴놓고 기도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입니다. 앗수르 왕의 교만한 자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있기도 했지만 히스기야의 기도의 자세가 하나님을 움직인 것입니다.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셨는가?
1. 성전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탄원기도를 드렸습니다.
성도는 문제가 생겼을 때 하나님을 제일 먼저 찾아야 합니다. 이 방법 저 방법 다 사 사용해 보고 그리고 나서 안되면 하나님께 나오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문제가 생기자마자 하나님께 즉각 아뢰며 기도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했을 때 약속했습니다. 역대하7:14~15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 15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이것은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약속하신 것입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성전으로 올라가 그들이 보낸 협박편지를 펼쳐놓고 간구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우리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전에 올라와 기도하는 자세를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자세를 보시고 감동하시어 응답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 기도해야 합니까?
첫째로는 예수 안에서 기도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聖殿입니다. 왜 예수님 안에서 기도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공로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다 씻으신 것입니다. 결국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간과하시고 응답하십니다.
둘째는 敎會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몸이요, 성전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성도들의 이런 기도를 받으실 뿐 아니라 감동을 받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예수님도 성전은 "萬民이 祈禱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요즘 보면 몇몇 성도가 하루에 한번 교회를 들러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그런 성도를 보면 기특하고 아름다워 보입니다. 목사인 나도 귀하게 보이는데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보시겠습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셨고 응답을 약속하셨습니다.
빌립보서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의 이 약속을 붙잡고 믿고 기도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새벽기도는 축복의 시간입니다. 하루의 가장 이른 시간 새벽을 깨우며 주님의 전에 나오는 그 믿음을 우리 주님은 참으로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것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능력이 없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충분히 감동시키는 기도입니다. 집에서 기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자세가 다르고 은혜가 다릅니다. 새벽기도는 주님을 감동시키는 막강한 무기입니다. 기도하기 어렵고 힘들수록 더욱 힘써 하시기 바랍니다. 몸이 아플수록, 육체가 피곤할수록, 그리고 시간이 없을수록 더욱 힘써 하시면 그것이 하나님을 감동시킬 비법입니다.
2. 히스기야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을 교훈을 합니다.
마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렇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기도를 드렸다가 복을 누리는 모습을 우리는 보았지 않습니까? 정말 자기 욕심 벗어버리고 지혜를 달라고 순수하게 기도합니다. 그러자 구하지 않은 것도 넘치도록 주시는 것을 보지 않습니까?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를 살펴보세요. 어떤 기도가 먼저 나옵니까? 아직도 유치원 아이들처럼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이렇게 해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 하며 기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언제까지 영적 어린아이 모습을 보일 것입니까? 열살이 되었고 스무살이 되었으면 그에 맞는 기도를 드려야 할 것이 아닙니까? 열살난 아들이 "엄마 맘마 줘~" 하면 뭔가 모자라기에 그러는 것 아닙니까?
기도도 믿음 성숙에 따라 내용과 자세가 달라져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린아이 같은 우리 기도도 응답하시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 기도가 우리의 신앙 연조보다 더 성숙해야 하나님이 깜짝깜짝 놀랄 것 아니겠습니까?
언젠가 기도원에서 한 여성도가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전제품 사장인줄 아시는지 "주여 ~ 선풍기도 있어야겠나이다. 냉장고도 있어야겠나이다. 세탁기도 있어야겠나이다...."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우리의 필요한 것을 얼마든지 구할 수도 있고, 그것이 잘못은 아니겠지만 산에 올라가다가 그 모습을 지켜보는 제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았습니다.
선교사를 위해 중보 기도하고, 믿지 않는 영혼이 구원을 받도록 중보 기도하여야 하고, 섬기는 교회가 부흥되도록 기도하며 자신의 신앙이 성숙하도록 기도 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세탁기, 돈 문제, 질병문제, 당장 눈앞에 놓인 문제만을 위한 기도라면 하나님은 아무런 감동을 받지 않으실 것입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일을 구하고 하나님의 영적 세계의 은혜를 구하는 차원 높은 신앙의 기도를 좋아하십니다. 그러기 위해 시야를 넓혀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기도도 내용이 달라집니다. 꿈이 있어야 하고 사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쓰임을 받게 되고 일할 기회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외친 사도 바울을 쓰신 것이고 그들을 협력한 모든 종들을 복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3.히스기야는 자신의 허물과 죄악을 고백하며 기도합니다.
37장1절 이하를 보면 히스기야는 옷을 찟고 굵은 베옷을 입고 회개의 모습을 보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을 感動케하는 기도자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허물을 내어놓고 회개하며 주님께 문제를 아뢰며 기도하면 모든 허물과 죄악을 용서하시며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여러분 어렸을 때 들은 이야기 일 것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어렸을 때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그 아버지가 아메리칸 인디언들이 쓰는 조그만한 도끼를 하나 사주었답니다. 손으로 던지면 빙빙 돌다가 벽에 탁 박히는 게 어린 워싱턴은 너무도 신이 났습니다. 너무 재미있어 도끼를 들고 사방에 뛰어 다니다가 실수로 그만 아버지가 제일 아끼는 체리나무를 찍어버렸습니다. "이것, 큰일 났다". 겁이 난 워싱턴은 아무도 몰래 땅을 파고 그 나무를 묻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른 척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보기가 민망해서 슬슬 피해 다녔습니다. 그렇게 사흘이 지나자 조지 워싱턴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서재에 들어가서 아버지를 붙들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준 도끼를 휘두르다가 실수로 그 체리나무를 찍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답니다. "얘야, 나는 네가 한 짓인 줄을 벌써 알고 있었단다. 너 외에 누가 했겠느냐? 그러나 네 스스로 깨닫고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었단다. 너는 참으로 위대하구나." 칭찬해 주었답니다.
거기서 조지 워싱턴이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만일에 아버지가 "어느 놈이 그랬느냐? 분명히 너지? 네 죄를 네가 알렸다!" 하며 요절을 냈다면 어땠겠습니까?. 그러면 사랑을 못 느끼는 것입니다. 공의는 실현이 되었는지 몰라도 사랑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인이 깨닫고 뉘우치고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죄 없어서 무사한 것이 아닙니다. 죄가 있어도 회개할 때를 기다려 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기도는 주님을 감동시키는 능력의 도구입니다.
결과를 보세요.
36절을 보세요.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陣中)에서 185,000명 쳐죽였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하나님을 모독한 그 앗수르 왕은 자신의 우상신전에 경배할 때 아들들에게 칼로 죽임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분명하고 정확합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는 주님과의 대화입니다. 그 대화가 알맹이 없는 대화라면 주님은 귀를 기울이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들을 만한 신앙 고백이 담겨져 있다면 얼마나 우리 주님이 좋아 하실까요?
다시 말씀 드립니다. 우리가 주님을 감동시키면 주님은 우리의 삶을 감동시킬 것입니다.
출처/ 최일환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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