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귀의 시험을 이기려면 (벧전 5:1~11)
일전에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기 유익을 위해서는 부모도, 이웃도 비정하게 살해해 버리는 살인범을 끈덕지게 추적해서 때려잡는 어느 형사의 이야기입니다. 그 형사는 우리 사회에 기생하는 인신매매범, 악덕 사채업자, 조폭 등을 일컬어 ‘공공의 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외에도 부정부패를 자행해서 우리 사회를 타락시키는 자들도 ‘공공의 적’에 포함시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되려면 부정부패를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정죄 받아야 할 ‘공공의 적’은 따로 있습니다. 마귀가 곧 공공의 적입니다. 마귀는 온 인류의 적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이 마귀이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를 꾀여 하나님의 금하신 나무 실과를 따먹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함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쫓겨났습니다.
아담의 타락은 그 혼자의 불행으로 그치지 않고 그의 후손으로 태어난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마치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담을 뚫고 들어온 강도와 같이 온 인류를 죄에 빠지게 해서 지옥 백성이 되게 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한량없으신 하나님께서 인생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독생자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대속의 십자가를 지게 하심으로 그를 믿는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습니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발아래서 마귀의 머리가 상하였으며,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마귀를 이기고 승리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 마귀로 인한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귀는 상처 입은 맹수와 같이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는 더욱 분 내어 성도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마치 굶주린 사자와 같이 울부짖으며 삼킬 자를 찾아다닙니다. 이 마귀의 도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마귀를 무저갱에 가두시기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이 시간 저는 성도들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를 사도 베드로의 권면을 통해서 말씀해 드리려고 합니다.
첫 번 째로, 우리가 겸손하게 행할 때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이유는 그들이 교만한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간교한 뱀이 하와에게 던진 말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5)는 것이었습니다. 마귀는 하와에게 하나님처럼 되고자 하는 교만한 마음을 넣어 주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금하신 나무의 실과를 따먹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이 교만해지면 바른 말이 들리지 않습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뱀의 말을 들었을 때 조금만 생각을 바로 했더라면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선, 그들은 하나님이 진실하신 분이심을 생각했어야 마땅합니다. 그랬더라면 “16)…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 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보아 뱀의 말이 거짓됨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말을 듣고 교만한 마음을 품은 아담과 하와는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용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이 피조물임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시나 그들은 지음 받은 존재에 불과합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어찌 지음 받은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처럼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 장난감 인형이 사람이 되겠다고 하는 것처럼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처럼 교만한 마음을 품으면 분수에 넘치는 망상을 하게 되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결코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십니다.
에스겔서 28장에 의하면, 마귀는 본래 하나님을 호위하는 천사장 루시퍼로서 매우 아름답고 능력과 지혜가 탁월한 존재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는 수하에 수많은 천사를 거느렸습니다. 루시퍼는 그만 자기의 아름다움과 권능과 지혜에 도취했습니다. “나도 하나님처럼 되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보좌를 넘보고 반역을 꾀하다가 천상에서 내쫓기고 말았습니다(사 14:12-15).
그 때로부터 마귀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마귀가 인간을 범죄케 한 것 역시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마귀는 그 자신이 가졌던 불의한 욕망을 아담과 하와의 마음에 넣어 주는데 성공했습니다.
누구나 교만하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고 맙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보십시오. 처음에 그는 얼마나 겸손했던지 사무엘과 백성들이 그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였을 때 너무 황송하여 숨기까지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토록 겸손한 사울을 선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 사울은 초심을 버리고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말렉을 쳐서 진멸하라 명하셨으나 아말렉 왕 아각을 살리고 기름지고 살진 우양을 남겨 두었습니다.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를 위해 전승비를 세웠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울을 버리시고 그를 대신하여 다윗을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만하게 되지 않도록 늘 조심해야 합니다. 마음이 교만하게 되는 것은 마귀의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남보다 지혜로운 것은 좋은 일이나 그 때문에 교만해 지면 안 됩니다. 그러면 그 지혜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남보다 능력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 때문에 교만하면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광활한 지역을 다니면서 많은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고 했습니다.
우리도 사도의 겸손을 본받아 모든 공로를 하나님께 돌려야 합니다. 우리는 남보다 신앙 연조가 오래면 그 때문에 교만하기 쉽고, 남보다 은사를 많이 받으면 또 그 때문에 교만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사실은 정반대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 연조가 오랠수록 더 겸손하고, 받은 은사가 크면 클수록 더 겸손해야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나 자기를 낮추어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신 주님의 겸손하심을 배워야 합니다. 항상 겸손한 마음을 갖고 행함으로써 마귀로 시험할 틈을 얻지 못하게 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 째로,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길 때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염려와 걱정은 우리로 하여금 마귀의 시험에 빠지게 하는 올무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긴 들어도 결실치 못하는 사람의 마음을 가시떨기의 뿌리가 박혀 있는 밭에 비유하셨습니다. 주일 성수하고 올바로 하나님을 섬겨야지 결심했다가도 쉽게 무너지고 마는 것은 무엇을 먹고 살까 염려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 하루 일하면 얼마를 벌 텐데…’ 그렇게 재리의 염려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는 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잘 알기 때문에 물질 문제로 우리를 시험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 생활을 할 때였습니다. 농사도 지을 수 없고, 무역도 할 수 없는 광야에서 무슨 방법으로 300만에 달하는 백성을 먹일 수 있단 말입니까? 이스라엘 자손은 출애굽한 지 한 달 보름이 지나자, 가지고 나온 양식이 동이 났습니다. 그러자 온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습니다.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았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하여 내어 이 온 회중으로 주려 죽게 하는도다”(출 16:3)고 했습니다.
언뜻 보면, 백성들의 심정을 이해할 만도 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을 해 보면 백성들의 태도가 매우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을 망각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어떤 신이십니까? 열 가지 재앙으로 바로를 벌하시고 그들을 해방시키셨으며, 홍해를 갈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물며 그들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굶어죽게 하시겠습니까?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 자손이 양식을 위해 걱정한 것은 그들에게 믿음이 없음을 드러낸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경외하는 하나님께서는 능력이 한이 없으신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뿐 아니라,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의 사정을 외면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굶어 죽게 되었다고 아우성치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서 매일 아침마다 일용한 양식을 하늘에서 내려 주셨습니다. 만나가 그것입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만 내려주신 것이 아니고 광야생활을 끝마칠 때까지 무려 40년 동안이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내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하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먼저 하나님을 섬기는데 힘쓰십시오. 먼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자신을 바치십시오. 그리할 때 천부께서 우리 육신의 생활을 위해서 필요한 모든 것을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위해 몸과 시간과 물질을 드리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니요 손해 보는 일이 아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힘쓸 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한편, 우리에게는 물질적인 것 말고도 여러 가지 염려 거리가 있습니다. 육신의 병약함 때문에 염려하기도 하고, 남편이나 아내 혹은 자녀들의 일로 인해 염려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장 일로, 사업상의 일로, 혹은 인간관계의 갈등으로 인해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코로 숨 쉬고 사는 사람 치고 염려, 근심이 전혀 없이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염려, 근심에 사로잡히면 마귀의 시험에 빠지기 쉽다는 것입니다.
성도님들께서는 다윗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골리앗과 싸워 이스라엘을 구했습니다. 또 여러 번 전쟁터에 나가 큰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정당한 대접을 받기는커녕 사울왕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 다니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언제 붙잡혀 죽임을 당할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시의 심정을 다윗은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시 3:1)
다윗이 염려하고 걱정하려면 끝도 없이 해야 할 형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쓸데없이 걱정, 근심하지 아니하고 모든 짐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리했더니 비록 광야로, 토굴로 도망 다니는 신세였지만 그의 심령은 한없는 평안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시편 55편은 다윗의 시편인데, 그 22절에 이르기를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말씀하기를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님들께서는 무슨 염려거리가 있든지 다 하나님 아버지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하늘의 평강을 받아 누리심으로 어떠한 마귀의 시험도 능히 물리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 번 째로, 깨어 기도할 때 마귀의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말씀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하였습니다. ‘근신하고 깨어 있는 것’은 곧 기도를 의미합니다. 마귀는 산책하듯이 또는 시골 장터를 구경하듯이 한가롭게 다니지 않습니다. 굶주린 사자처럼 신속하고 민첩하게 다닙니다. 삼킬 자를 찾기 위한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닙니다.
마귀가 삼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마귀의 종이 된 상태이므로 더 이상 마귀의 공격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 마귀가 노리는 대상은 곧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인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어디를 가면 마귀를 만날 수 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렇지, 많은 사람이 모여서 술 마시며 떠드는 술집에 가면 마귀가 우굴거리겠구나. 그러나 막상 가보니 마귀 하나가 구석에 앉아서 꾸벅 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이상하다 싶어서 이 사람은 졸고 있는 마귀를 깨워서 다른 마귀들은 다 어디 갔느냐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그 마귀가 대답하기를 “다들 교회로 갔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의 공격 목표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조금만 신앙생활을 등한히 하면 언제 알아챘는지 마귀가 시험을 가해 옵니다. 마귀는 뱀같이 간교하고 끈덕집니다. 한두 번 시험해 보고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 기도하지 않고서는 마귀의 시험을 당해 낼 재간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도하러 가셨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해서 모든 제자가 하나같이 졸며 잤습니다. 그 결과, 대적들이 예수님을 잡으러 들이닥치자, 모두 시험에 빠져 주님을 버리고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다 주를 버릴찌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찌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호언장담했던 베드로조차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깨어 기도하지 않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장사는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한 것은 그들이 주님을 덜 사랑했기 때문일까요? 베드로가 비겁한 사람이어서 주님을 부인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은 이 세상의 그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이 예수님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부모, 처자, 직장, 청운의 꿈 등을 헌신짝처럼 내어버리고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신 주님을 따라 나섰던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검을 휘둘러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잘랐던 베드로를 보고 겁쟁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들이 시험에 든 것은 기도하지 않은 탓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인간의 지혜와 용기로 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영적인 일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 영적인 일은 오직 깨어 기도할 때라야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거기서 주님은 순식간에 변형되셔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고 그 옷이 눈처럼 희어졌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서 주님과 대화하는 황홀한 광경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산 아래에 남아 있던 제자들은 벙어리 귀신 들린 아이를 앞에 놓고 진땀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파리하여 가는데도 제자들은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처한 형편을 아시고 서둘러 하산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아이에게 들어 있던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내쫓으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조용히 와서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막 9:28) 하였을 때,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막 9:29)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활이 바쁠지라도 항상 깨어 기도 생활에 힘쓰심으로 간악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네 번 째로,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할 때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말씀하기를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선생도 말씀하기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과 같이 우리가 마귀를 이기려면 적극적으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평소에 영적 싸움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갖추어야 할 영적 무장에 대하여 에베소서 6장 10절 이하에는 이같이 말씀합니다. “종말로 너희가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진리로 너희 허리띠를 띠고 의의 흉배를 붙이고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이로써 능히 악한 자의 모든 화전을 소멸하고 구원의 투구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0-17)
먼저 우리가 주안에 거하여 강건해져야 합니다. “주 안에”라는 말씀에 유의하십시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의 능력을 힘입어 강건하게 됩니다. 우리는 늘 젖이나 먹는 상태에 머물러 있지 말고 딱딱한 음식도 먹고 소화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자라나야 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하여 마귀가 틈타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먼저, 진리의 허리띠를 띠어야 합니다. 허리띠를 꼭 졸라매야 힘을 쓸 수 있고 몸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진리를 허리띠로 삼을 때, 무슨 일을 만나도 힘차게 대처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 다음, 의의 흉배를 붙여야 합니다. 이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의로 옷 입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 다음,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어야 합니다. 튼튼하고 편한 신발을 신어야 거친 산과 들판을 누비며 싸울 수 있듯이 하나님의 평안이 우리 속에 충만할 때 어떠한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도 담대히 전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 위에 믿음의 방패를 가져야 합니다. 마귀는 성도들을 향하여 불화살을 쏩니다. 마귀의 불화살을 맞으면 의심과 허영과 탐욕과 정욕과 시기와 같은 불이 마음을 태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방패로써 마귀의 불화살을 막아내야 합니다.
그 다음,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합니다. 이는 성도들이 천국의 소망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영광스런 천국을 바라보며 또 주님께서 주실 영원한 구원과 상급을 소망하는 것이 곧 구원의 투구로 무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격 무기로서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검이라고 하는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기 때문입니다(히 4:12).
지금, 성도님들의 영적 상태는 어떠하십니까?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무장하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십니까? 그렇다면 마귀를 피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대적하십시오. 그리할 때 마귀는 한 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하고 말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이 시기는 주 예수의 강림이 가까운 때입니다. 마귀는 자기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고로 더욱 맹렬한 기세로 성도들을 공격하여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던 자들 가운데 마귀의 시험에 넘어져 믿음을 잃고 세상 물결에 떠내려간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마귀가 쏘는 불화살을 맞아 쓰러진 신자들도 생겨납니다. 그렇게 된 것은 자만하고 방심한 결과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귀는 지금도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갖은 수단 방법을 다해서 공격하고 있습니다.
마귀의 시험을 이기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사람이 되십시오.
모든 생활의 염려거리를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그 위에 늘 깨어 기도하십시오.
마귀를 두려워 말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오늘 주신 말씀을 성도님들의 삶에 적용하심으로 날마다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고 영적 승리를 누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김양인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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