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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깨어진 마음과 기도 (행9:11)

by 【고동엽】 2022. 9. 13.

 깨어진 마음과 기도  (행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행9 :11)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9장은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자신의 체험을 간증하고 있는 장입니다.
바울은 주님을 만나기 전, 유대 교회를 뛰어난 열심히 섬겼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회 입장에서 누룩처럼 번져가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무리들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의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던 사울은 대제사장에게 체포영장쯤 되는 공문을 청해 받고, 다메섹에 있는 기독교인들을 잡아가기 위해 길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그 여행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경험을 합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었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진리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때까지 해온 그 많은 공부와 확신있는 가르침들이 모두 잘못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단지 몇 말씀만 하셨을 뿐입니다.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며 스스로를 밝이셨고, 이제 그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몇 마디 이르시기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만남은 사울의 모든 것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의 가치관과 신앙관은 물론 그의 인생 전체가 이 만남을 계기로 바뀐 것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이때 사울은 몹시 혼란스럽고 두려웠을 것입니다. 더구나 그는 눈도 보이지 않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별의별 생각이 다 그의 머리를 스쳐갔을 것입니다. ‘아 그래 내가 그렇게 나쁜 짓 했더니 결국은 그 예수님이라고 하는 분이 벌하셨구나.

나는 결국은 눈도 못 뜨고 이렇게 장님으로 살다가 죽겠구나! ’하는 생각에서부터 ‘그러면 나는 뭘 믿어야 하는가! 그러면 도대체 이전에 내가 배운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예수님을 인정하면 나의 신앙관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나는 이제 누구를 위해서 살아야 되나! ’ 등등 추수릴 수 없는 많은 고민들로 큰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언어없는 기도
그런데, 그때에 사울은 이런 혼란 속에서 고민하도록 자신을 방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즉시 기도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가 그 순간 무엇을 기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때 그의 기도가 구체적인 기도 제목이 있는 논리적인 기도였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펄전 목사님도 이 부분에 대해 아마도 그는 그저 넋 나간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앞에 잘못했다고 고백하면서 사흘이라는 시간을 보냈을 것이라고 추측하셨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는 분명히 그렇게, 비통에 차서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논리적인 말이나 현란한 수식어구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지 않아도, 주님이 기쁘게 들으시고 우리 마음을 이해해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주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현란한 수식어구나 많은 성경지식으로 하는 기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예수님을 피고석에 세워놓고 검사가 심문하듯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말 기쁘게 받으시는 기도는 이 바울과 같이 폭탄 맞은 자의 마음이 되어서, 하나님을 잘못 알았던 모든 지난 날의 편견과 아집을 깨트리며 하는 기도입니다. 이런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위대한 힘이 있습니다.

적절한 언어를 찾지 못해서 한숨만 쉰다고 할지라도, 이런 마음으로 드리는 한숨은 하늘로 올라가서 천국의 거문고를 움직여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기도의 곡절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깨트려진 마음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를 화려한 수식어구가 붙은 화려한 언어의 기도보다 훨씬 더 기쁘게 받으시는 것입니다.

기도와 심령의 관계는 마치 향유와 옥합의 관계와 같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 큰 감동을 드리는 기도가 되고 우리의 부르짖는 그 기도가 주님의 마음에 커다란 감화를 불러일으키는 기도가 되기 위해서는 그 기도가 우리의 입술과 혀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치 향유가 옥합이 깨트려 짐을 통해 온 집안을 향기로 가득 채우듯이, 단단한 자아가 깨트려 지고 이전에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옛 삶에 대한 깊은 회개가 우리의 심령을 깨트려 짐을 통해 진실한 기도가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사실 기도의 깊은 경지에 도달했던 사람들은 공통적으로 기도의 가장 깊은 경지에서는 언어를 잃어버린다고 말합니다. 언어가 아니라 깨어진 그 마음자체가 바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힘은 육체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의 영혼이 철저하게 부서지고 깨트려 져서 하나님 그 분 앞에서 매달리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기도와 일
본문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시켜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사울을 찾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아나니아는 이상 중에 주님의 진실을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던 사람이었습니다. 즉,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을 기억하십니까? 두 사람 다 기도하던 가운데 만났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각기 이방 선교의 역사의 새 장을 여는 주님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여기서도 기도하던 사울을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 살아가는 아나니아가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원의 역사에서 새로운 터닝 포인트를 마련하실 적마다 반드시 기도의 사람들을 세우시고 그 기도의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역사들을 보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쓰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무엇에 힘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귀한 해답이 됩니다.

바울이 되기 전 사울이나 아나니아나 사실 내놓을 만한 업적이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한 선교의 새 시대를 여는 주역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학식이 많고, 재물이 많으며, 종교적인 명분이 있는 사람들을 사용하시는 대신에 이렇게 기도하는 중에 있는 사람들을 찾으셔서 당신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일까요? 그것도 그냥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을 말입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는 사람들, 더욱이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들은 하나님만을 온전히 바라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깨트려진 것은 그 영혼이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주시함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죄악된 모습을 온전히 보게 된 결과입니다.

즉, 이런 사람들은 온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돌아보십니다. 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을 만난 후,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를 찾아오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깨어진 마음을 특별히 어여삐 여기시는 것은 마음이 깨트려 졌다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트려진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실망한 사람들입니다. 자신에 대해 철저하게 좌절했기 때문에 하나님만 붙들 수밖에 없고, 그래서 모든 소망이 하나님을 향해서 고정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당신의 놀라운 뜻들을 이루십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도구로 하여 크고 놀라운 일들을 이룬다고 할지라도, 자신을 향해 철저히 실망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큰 뜻을 이룬 후에도 그 모든 일들을 이루신 하나님을 자랑하지 그 일에 도구로 사용된 자기를 자랑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뛰어난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나, 뛰어난 기술로 할 수 있는 일, 많은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은 모두 한정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유능함을 믿고 그 유능함을 도구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한다면 해 낼 수 없는 일들도 많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진정한 자질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깨트려진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가 주님의 마음에 긍휼과 사랑을 불러일으켜 하나님의 도우심을 맛보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트려진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모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깨뜨려진 기도와 소명
기도도 결국은 마음의 일입니다. 기도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활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어떤 상태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기도했느냐 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실제로도 우리는 서너 시간을 기도해도 만족스럽지 않다거나, 삼십 분밖에 기도 하지 못했는데 영혼에 만족이 오는 것을 경험하곤 합니다. 따라서 결국 기도의 문제에 있어, 우리가 정말 주의깊게 점검해야 할 것은 기도의 횟수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기도하는 그 마음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완고하고 고집으로 가득찬 죄인들입니다. 하늘의 신령한 것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땅에 있는 속된 것들을 위해서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기보다는 이 세상에 우리의 보물을 쌓고 하나님보다 그 보물을 의지하며 살려고 하는 인간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가 필요합니다.

매일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 된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리하여 날마다 새롭게 깨트려지고 겸비해 지는 일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잃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수시로 상기하고 깨닫는 것이 깊은 기도의 사람이 되는 비결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이 계심으로 내가 있고, 주님이 계시지 아니하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들의 주님을 향한 절대적인 의존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울의 기도를 통해 상하고 깨트려진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배웁니다. 깨트려진 마음이란 지금의 이 사울처럼 절망에 깊이 직면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절망 없이는 누구도 깨어진 마음이 될 수 없고 절망하지 않고는 누구도 상한 마음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지금 사울은 그동안 주님을 부인하고 거스르며, 주님을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박해하던 삶을 살다가 주님을 만나고 거꾸러진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야 이 일을 통해 사울이 바울이 되고, 하나님께서 그를 크게 사용하시리라는 것을 알지만, 정작 사울 자신은 그런 나중일은 모른 채 절망과 혼란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이 순간까지 드러난 것이라곤 사울이 하나님께 징계를 받은 표징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깊은 절망을 경험하며, 물같이 녹은 마음으로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그가 기도한 것은 특별한 기도의 제목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매달리는 일 말고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기도하자 하나님은 그에게 아나니아를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놀라운 소명을 주셨습니다. 즉 사울의 절망과 좌절이 오히려 소명을 받는 기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당신의 사람으로 쓰시기 위해서, 먼저 이렇게 철저하고 자기를 부서뜨리게 하셨고 그 깨어진 마음으로 올리는 기도를 배우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상하고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는 기도는 우리 주위에 있는 환경과 여건을 놀랍도록 바꾸어 놓습니다. 난공불락이던 상황들이 깨트려진 마음으로 기도 할 때에 고쳐지고 바뀌는 것입니다.

맺음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늘의 권능을 불러오는 기도를 위해서는 강력한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무참히 부서진 마음, 하나님의 도우심 밖에는 소망할 것이 없는 그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능력 있는 기도를 위해서는 능력 있는 마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능력 없는 마음이 요구되며, 위대한 기도를 위해서는 위대한 마음이 아니라 비참하리 만치 낮아진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도의 위대한 능력은 위대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비천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깨트려져서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는 마음, 바로 거기에서 위대한 기도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깨트려진 마음으로 기도하고 계십니까? 여러분 모두가 사울이 경험했던 바와 같이 이렇게 상하고 깨트려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출처/김남준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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