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뺏앗지 못할 기쁨 (요 16: 12~24)

by 【고동엽】 2022. 9. 12.

  뺏앗지 못할 기쁨   (요 16: 12~24)

오늘 가정의 달인 5월 첫 주일을 맞이하면서 모든 가정마다 기쁨이 넘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기독교는 감사의 종교요 기쁨의 종교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성도들의 영적 문제점은 불만과 불평의 바이러스 때문에 기쁨과 감사가 점점 살아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어떤 독감보다도 더 무서운 병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이 말씀을 중심으로 [빼앗지 못할 기쁨]이라는 제목으로 감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서 기쁨이 충만한 가정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지금 우리들에게 시급한 것은 잃어버린 기쁨을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하면서 보니까 최근에 와서 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처음의 드림]이 살아지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기쁨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수퍼마켓에 가면 산처럼 쌓아 놓은 과일들, 특별히 바나나와 오렌지, 고기들. 과거에 말로만 듣던 미제, 일제 차들. 한국에서 버스 타고 다니던 사람들이 좋은 차들을 타고 다니고. 영화에서만 보던 관상수들이 있는 집에 살게 되고, 미국에서는 생각 못할 그런 호화로운 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환경에서 오랜 세월 살다가 보니 나중에는 [멍하니] 되었습니다. 환경이 과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는데 [행복의 지수]는 오히려 많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과거보다 잘 사는 데 기쁨은 상실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잃어버린 기쁨을 다시 회복하려면 먼저 우리는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 환경 속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보다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만 보지 말고, 위만 보지 말고 내 밑에 있는 사람들이 몇 배나 더 많고, 우리의 위치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세계에는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 화)

손자의 병법에 재미있는 [어미돼지와 새끼돼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새끼 돼지 몇 마리가 어미돼지를 따라서 늪에서 먹을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가까운 길로 소 몇 마리가 관리들에게 이끌려 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두 깨끗이 목욕을 하고, 몸집이 좋았습니다. 뿔도 발톱도 구슬처럼 반짝입니다. 털도 부드럽고 비단 같이 윤기가 흘렀습니다.

흙탕 속에서 이것을 보면서 돼지 새끼 중에 하나가 불평을 합니다. 우리는 왜 돼지로 태어났을까? 저렇게 예쁜 소로 태어나지 못했을까? 그러자 다른 새끼들이 동조를 합니다. 그래, 그래 나는 엄마 돼지가 원망스러워. 그러나 이것이 돼지 팔자가 어쩔 수 없지 않아?

이 말을 듣고 있던 엄마 돼지가 말합니다. 꿀 꿀 꿀. 아무 것도 모르면 가만히 있어. 무슨 불평이 그렇게 많으냐? 아까 끌려간 소들은 지금 징발되어서 도읍으로 가는 것인데 머지않아 뿔은 금과 은으로 장식을 할 것이고, 몸에는 금실과 은실로 수놓은 아름다운 옷을 입게 된단다. 그리고서 제물로 바쳐진단다.

엄마 제물이 뭐예요? 죽는 거야. 그 때에는 아무리 울어도 소용이 없어. 그러자 새끼 돼지들은 조용해졌습니다. 그러자 엄마 돼지가 엄숙한 말로 말했습니다. 곱게 태어나서 잘 먹고 편하게 지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겠니? 그러므로 이제 불평하지 말고 돼지 팔자가 최고인줄 알고, 기쁨으로 살아라.

우화입니다만 이 이야기 속에는 큰 교훈이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환경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을 꼭 같은 기준으로 보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각기 다른 환경을 주셨지만 다 서로 다른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나대로의 환경이 있고, 나는 나대로의 기쁨과 감사가 있는 것입니다.

과연 감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로 기쁨과 감사의 회복에 있습니다.

(예 화)

항상 구원의 기쁨을 가지고 살았던 다윗이 범죄한 후에부터는 기쁨이 살아졌습니다. 그래서 시편 51:12절에서 “주의 구원의 기쁨을 내게 회복시켜”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지금 구원의 기쁨이 있습니까? 있다면 감사하면서 계속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 우리들에게 구원의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다면 우리에게는 영적인 병이 깊은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독감에 걸리면 음식이 다 쓰듯이 지금 우리가 영적 독감인 감사불감증에 걸려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들은 잃어버린 기쁨과 감사를 찾아야 합니다. 왜 잃어버렸습니까? 귀한 줄 모르고, 있다가 방임 상태에서 잃었습니다. 오늘날 도시화, 산업화, 기계화로 인해서 잃은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양심을 잃었고, 또 신앙을 잃었고, 기쁨을 잃었고, 감사를 잃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입니다.

2. 두 가지 종류의 기쁨이 있습니다.

하나는 빼앗길 기쁨이고, 다른 하나는 빼앗지 못할 기쁨입니다. 세상에는 누구나 기쁨이 있지만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빼앗길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뻐하는가 싶었는데 얼마 안 가서 그 기쁨은 사라집니다.

계속해서 그 기쁨을 구하지만 빼앗지 못할 기쁨이 아니라 잠정적인 기쁨, 살아지는 기쁨이기 때문에 금방 다시 사라집니다. 처음부터 그 기쁨은 사라질 기쁨인데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잘못입니다.

예를 들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에 기쁨이 있지만 화장실에 한번 갔다 오면 그 음식을 먹었던 기억만 남아있을 뿐 음식을 먹을 때의 그 기쁨은 더 이상 존재하지를 않습니다. 세상의 기쁨은 나누면 줄어들고, 없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돈이나 재물은 나누면 없어집니다. 그러나 천국의 기쁨은 나눌수록 커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빼앗지 못할 기쁨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3. 빼앗지 못할 기쁨을 소유하려면?

(1)탕자가 아버지를 찾아가듯이 우리의 본향의 집으로 돌아가야 기쁨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찬송 : “나 집에 돌아갑니다, 어머님 기도 못 잊어.” 집을 떠난 사람은 참 기쁨이 없습니다. 여행 중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좋은 것 보아도 다 그림의 떡입니다. 다윗이 기쁨을 상실한 것은 하나님과 담을 쌓게된 그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지를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2)[주안에서] 기쁨을 구해야 합니다.

주안에서 기쁨을 구한다는 말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을 본다는 뜻입니다. 롬8:28절,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믿습니까?

빌립보서에는 18번에 걸쳐 [기뻐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거기서 바울은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기쁨의 방향을 말해줍니다. 당시 바울은 감옥에 갇혀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은 위로부터 주시는 기쁨, 주님과 함께 하고, 동행하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3) 남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천국의 기쁨이어야 합니다.

기쁨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기쁨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은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기쁨의 생활을 요청하신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기뻐하는 것을 흠향하시고, 그 기쁨 속에서 영광을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남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 중에는 거짓된 기쁨도 있습니다.

(예 화)

단5장에 보면 벨사살 왕이 일 천명의 귀빈들과 함께 흥겨웁게 주흥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벽에 쓴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란 경고 한 마디로 그 웃음과 기쁨은 금방 슬픔으로 변했습니다.

왜냐하면 [메네]란 말은 세어보니 끝났구나란 뜻이고, [데겔]이란 말은 저울에 달아보니 부족하구나란 뜻이고, [우바르신]이란 말은 이제 나라가 조각나게 될 것이란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날 밤에 벨사살 왕은 죽고 다리오가 페르샤 제국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벨사살의 기쁨은 꿈 같은 기쁨이요 육적인 기쁨이요 거짓 기쁨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가진 것도 없고, 잘난 것도 없어서 남들과 나눌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남들과 나눌 복음은 누구에게나 있지 않습니까?

더구나 잃은 양 한 마리가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그처럼 기뻐하시는데, 또 우리들에게 최소한 미소는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사실 미소를 대하는 사람은 참으로 기분이 좋습니다. 금방 친구가 되고, 남을 행복하게 해줄 수가 있습니다.

우리 문화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기뻐도 그 기쁨을 경솔하게 표현해서도 안 되고, 슬퍼도 그 슬픔을 표현해서도 안 되는 유교적 체면문화가 문제입니다.

(4) [구원의 기쁨, 소망의 기쁨]이 있어야 아무도 빼앗지 못합니다(빌1:21-26).

하늘의 소망은 나누면 커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환경에 관계없이 기뻐할 수 있는 기쁨입니다.

(예 화)

하박국 선지자의 기쁨과 감사.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원망하고 항의한 선지자입니다. 내가 어느 때까지 부르짖어도, 외쳐도 응답이 없습니까?

첫째로 왜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어찌하여 악인들을 징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했습니다. 내가 사납고 무서운 갈대아 사람들을 일으킬 것이다.

둘째로 그러자 그는 왜 하필이면 더 악한 바벨론 사람들입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 응답했습니다. 정한 때가 있다. 정녕 응하리라. 의인은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유명한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후에 바울의 신학의 핵심이 된 구절입니다.

그 후 3장에 가서 그는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리로다.”

(5) [이미 받은 것을 귀한 줄로 알고, 잘 간직해야] 그 기쁨을 아무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귀한 은혜를 받고도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간직하다가 잃어버린 사람이 많습니다.

에서는 장자권을 가볍게 여기고 팥죽 한 그릇에 야곱에게 팔아 장자권을 빼앗겼고, 르우벤은 도덕적으로 작은어머니(빌하)를 간통함으로 동생 유다에게 장자권을 빼앗겼고, 사울 왕은 교만하여 다윗에게 왕권을 빼앗겼고, 셉나는 불충성하다가 엘리아김에게 국고의 책임을 빼앗겼고, 요압 장군과 아비아달 제사장은 불충성하다가 브나야와 사독에게 직분을 빼앗겼고, 가룟 유다는 주님을 배신하여 맛디아에게 사도 직을 빼앗겼습니다.

맺는 말

이제 바라기는 가정의 달을 맞아서 불만, 불평 바이러스의 영적 병은 다 살아지고,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우리의 가정이되기를 축원합니다.


출처/신성종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