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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일한 것도 없고 경건치도 못한데

by 【고동엽】 2022. 9.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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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227쪽에 있는 글입니다.

 

 

12. 일한 것도 없고 경건치도 못한데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기록된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로마서 4장 1~17절

 

 

 

 

 성경에 있는 무슨 진리든지 한 번 배워서 잘 깨닫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끔 특별한 분들이 있기는 합니다. 많이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말씀을 너무 잘 깨닫는 것을 보면 참 신통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 대부분은 한두 번 들어 가지고는 금방 흘려 버리고 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러한 약점을 잘 아시고 교육학에서 말하는 반복학습이라는 방법을 성경에 도입하고 계십니다. 반복학습은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여 가르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어 보면 같은 내용이 반복되어 나오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 좋은 예로 복음서를 들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의 교훈과 행하신 일이 나머지 복음서에 두 번, 세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마음이 둔하고 어두운 우리들을 두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심한 배려를 하고 계시는가를 엿볼 수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계속해서 읽고 있는 로마서는 하나님의 반복학습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현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3장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이렇게 동일한 내용의 말씀이 두세 번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런데 4장으로 넘어오면 같은 말씀이 또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가르쳐도 우리들처럼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살던 당시에는 유대인들이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받지 않는 못된 기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잘 알아듣지는 못하고 엉뚱한 소리만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뭐라고 했는지 압니까? "구약의 우리 선조들은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고 구원 받았어. 그런데 믿기만 하면 된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우리 중에도 유대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자꾸 왜곡시키는 자들이 있습니다. 구원의 도리를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자들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가르치기를 원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멸망당하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인 것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이유를 간단히 비유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가령 지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어떤 환자가 있다고 합시다. 그에게 가서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시오. 그러면 나을 수 있을 것이오"라고 말한다면 그 환자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제 죽는가 보다 하고 크게 낙심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이것은 최근에 개발된 약인데 열심히 먹어 보세요.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혹 효능이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하고 권한다면 아마 적극적으로 매달릴 것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보다 무엇이든 해 보라는 쪽을 선호하는 것이 대개의 성향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문제도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 자랑할 만한 것을 들고 나오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거부감 없이 수용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고 오직 믿기만 하라니까 납득을 못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현대인들 중에서 신판 유대인이 참 많습니다. 자비로우신 우리 하나님은 4장에서 겉으로 보기에 소망이 없어 보이는 이들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시려고 합니다.
 어떻게 하시는지 아세요? 그들이 잘 모르고 있었던 사실을 한 가지 지적하신 다음 똑같은 이신칭의의 교리를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너무 몰랐던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선조들이 율법 때문에 구원 얻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얻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어려운 진리를 추상적으로 설명하면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진리라도 삶을 통해서 표출되는 어떤 사람의 실례를 들어 가르친다면 설득력이 있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가 자식에게 '너는 꿋꿋하게 살아야 돼' 하고 가르친다면 아이가 그 깊은 속뜻을 잘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나 "얘야, 네 아버지 좀 봐. 아버지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아니?" 라고 하면서 아버지의 삶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면 아이는 꿋꿋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를 합니다.
 이와 같은 원리에 입각해서 하나님은 마음이 완고한 유대인에게 접근하고 계십니다. '너희들이 이해를 잘 못하니까 내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해 주마' 하고 마치 자상하고 지혜로운 아버지가 자녀를 가르치듯 4장 첫머리를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다윗에 대해서 비교적 잘 알고 있는 편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유대인에게 주신 율법을 받기 이전의 인물로서 유대 민족의 조상입니다. 다윗은 율법시대에 살았고 이스라엘 역대 왕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손꼽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 두 사람이 선행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십니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이신칭의의 진리를 쉽게 받아들일 것으로 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위해 기록된 복음서라고 일컬어집니다. 이 복음서는 이런 말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마 1:1).
 
 이것은 로마서 4장과 동일한 의도를 담고 있습니다. 구약의 성도를 대표하는 아브라함과 다윗이 그들의 후손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과연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을까요? 옳습니다. 그는 분명히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본문 말씀은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세 가지 근거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1, 2절). 아브라함은 할례를 통해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9~12절). 아브라함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다(13~17절). 지금부터 이 세 가지를 가지고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받은 세 가지 근거
 
 행위로 구원받지 못함
 첫째로 아브라함은 행위로 구원받지 않았습니다. 1, 2절이 이 사실을 뒷받침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 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1, 2절).
 
 1절에 나오는 '육신으로' 라는 말은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어떤 것, 곧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들고 나가는 자랑거리를 의미합니다. 즉 2절의 행위, 선행을 말합니다.
 사실 아브라함에게는 자랑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근거가 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우리가 창세기 15장을 펴서 읽으면 의미심장한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서 가나안 땅에 들어왔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가 그곳에 들어온 지도 어언 15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일점 혈육이 없었습니다. 8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는데도 자식이 생길 기미가 없자 그의 마음은 암담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찾아와 아브라함을 불러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밖에 나가 보니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너무나 황홀하게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하나님은 그에게 하늘의 별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손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이 80에 자식도 하나 없는 사람에게 하늘의 별처럼 후손이 많아지리라고 하다니 이것이 대체 믿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창 15:6).
 
 이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액면 그대로 "아멘' 하고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처럼 생각됩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기적 중의 기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킨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믿음을 아브라함의 의로 받으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때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2천 년 전의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시기 전의 사건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장차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주실 것을 알고 있었을까요? 창세기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한 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아브라함은 모호하게 알았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후손 예수를 구원자로 받아들였습니다. 아직 나지도 아니한 예수, 수천 년 후에 오신다는 그 예수를 내다보고 믿었다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우리 중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가 정말 예수를 알고 믿었을까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가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는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을 믿었을까 하는 의심이 생기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해 우리 예수님은 모든 의혹을 단번에 쫓아 버릴 수 있는 시원한 대답을 해 주셨습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아브라함은 자기 씨를 통해서 인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실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을 아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실 것을 내다보고 기뻐하기까지 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믿음 때문에 의인으로 인정받고 구원 얻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되고도 남을 인물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을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인이 되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입니다. 다른 길은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의 선한 행위를 들고 나오지 마세요. 과거에 무슨 공로를 세웠다고 자랑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보다도 예수 믿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세상에 오시고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거룩한 역사적인 행적을 세세하게 기록한 말씀을 앞에 놓고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모호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보다 훨씬 더 잘 믿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보지 못하고 믿는 자보다 보고 믿는 자는 더 유리한 자리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례로 구원받지 못함
 둘째로 아브라함은 할례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의롭다 함을 받은 후 14년이 지난 뒤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할례받기 14년 전에 이미 믿음으로 구원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할례는 그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의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할례가 칭의의 조건이 못 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10절).
 
 구원은 할례받기 전에 받은 것이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은 할례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형식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표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칭의를 내용이라 한다면 할례는 그것을 인정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아 의인이 되었다고 한 유대인들의 생각은 틀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할례를 받았으니 구원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크게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 5장 6절은 이 점을 선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를 받고 안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의 할례는 우리가 사는 신약시대의 세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세례는 죄사함을 받았다고 확증하는 것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나중에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결코 죄 용서함을 받기 위해 세례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톨릭에서는 영세받아야 죄 용서받는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와 거리가 먼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자마자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세례만 받는다고 죄 용서받을 수 있나요? 세례는 할례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형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받은 것을 자랑거리로 들고 나오지 마세요. 가끔 보면 세례받은 연도가 오래된 것을 가지고 은근히 내세우는 분들이 있는데 잘 몰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 구원받는 것은 세례와 무관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유대인들이 빠졌던 오해를 피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함
 셋째로 아브라함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만약에 아브라함이 율법에 있는 조항을 잘 지켜서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인정받았다면 그는 당연히 율법시대에 살았어야 논리에 맞습니다. 그런데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살던 당시에는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언제 율법을 주셨나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때로부터 430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무슨 재주로 그가 율법이라는 것을 알았겠습니까? 그는 율법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대 사람들이 자기 조상 아브라함이 율법을 잘 지켜서 구원받았다고 믿었으니 착각을 해도 보통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13절).
 
 여기서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는 말이 약간 애매하게 들립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을 아브라함이 낳을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한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킵니다. 이 약속은 하늘의 별처럼 많은 후손을 주신다는 약속에 뒤따라 온 축복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손의 복이건, 가나안 영토의 복이건 복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때문이지 어떤 행위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원리는 아브라함이 의인으로 인정받는 구원의 문제에까지 그대로 적용이 되었던 것입니다. 모두가 믿음으로 얻어진 것이지 율법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하고는 무관했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다윗
 지금까지 우리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의인으로 인정받았습니까? 다윗은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허물도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시편 32편을 보면 그는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 7절에 나와 있는 말씀입니다.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이 말씀은 다윗 자신의 신앙 고백입니다. 자기가 바로 무조건 용서받은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편에서 무조건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시편 32편에는 다윗이 죄를 짓고 난 뒤 처절하게 고통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는 뼈가 쑤시고 살갗이 타들어 가는 고뇌를 안고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떠오르는 진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용서해 주셔야만 평안을 얻을 수 있지 혼자 아무리 몸부림쳐도 소용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도 따지고 보면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의롭게 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의 죄 문제를 잘 처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무조건 불쌍히 여기시고 모든 허물을 덮어 주셨기 때문에 의인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다윗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그러므로 신구약을 통틀어 구원의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입니다. 구약에 있는 성도들이나 신약에 있는 성도들이나 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이 사실을 웅변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 11장입니다. 여기에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구약의 위대한 성도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할례를 받지 않은 믿음의 선배가 아벨, 에녹, 노아 세 사람이고, 율법을 모르던 시대에 살았던 성도가 일곱 사람입니다. 또 율법을 받은 후에 살았던 성도가 여덟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을 통칭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히 11:13).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다 이와 같이 믿음으로 구원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그들은 우리 주변에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과 같습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죄 용서받고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영웅적인 그들의 생애를 가지고 증거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나 우리나 하나님 앞에 죄 용서받기 위해서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는 것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히 12:2).
 믿기만 하면 의롭다 함을 받는 진리를 실감나게 가르쳐 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예를 들어 설명하시던 하나님은 그것으로 안심을 할 수 없으셨는지 이어서 노동 법칙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우리를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4, 5절).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일해서 받는 삯은 정당한 대가이지 선물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 일을 하지 않았는데 일당을 받는다면 그 사람에게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노동자는 일한 만큼 임금을 받습니다. 임금을 받는 사람은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여기기 때문에 특별히 감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을 변변치 않게 했거나 전혀 하지 않았는데도 임금을 받게 된다면 아주 황송하게 생각할 것입니다. 일에 대한 대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거저 받은 셈이 되므로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받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5절에서 "일을 아니한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이것은 의롭게 살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는 성품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의로 여기신다"는 말은 우리가 예수 믿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구좌에 예수님의 의를 갖다 넣고 예수님의 구좌에는 우리의 죄를 갖다 넣는다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다'에는 참으로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4장 안에서 약간 모호한 것까지 합하면 11번이나 나오는데 하나님이 아예 그대로 인정해버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의롭게 살지 못했으나 의롭게 산 사람으로 인정하시고 깨끗한 성품이 아닌데도 깨끗한 사람으로 인정해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묻지 않고,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를 따지지 않고 우리를 대신하여 피 흘려 주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분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일을 하지 않고 하루종일 빈둥거린 노동자가 분에 넘치는 일당을 주니까 염치없이 받아 가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혹시 <바라바>라는 영화를 보신 적이 있나요? 빌라도가 예수님과 바라바를 세워 놓고 군중에게 누구를 원하느냐고 묻는 장면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의 사주(使嗾)를 받은 군중들은 바라바를 풀어 달라고 했습니다. 바라바는 살인자요, 민란을 일으킨 인물입니다. 그는 로마법으로 보아서는 죽어야 마땅한 사형수였습니다. 그런데 빌라도가 갑자기 그에게 무죄를 선언하고 풀어 주었습니다. 그 순간 바라바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그는 아마 제 정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바라바의 배역으로 나왔던 안소니 퀸의 표정이 아직도 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넋이 나간 듯 어리벙벙해 하는 표정으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걸어나오는 그의 연기는 한마디로 일품이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바라바의 처지에 있는 사람입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죽을 줄 알았던 자가 죽지 않고 살아 나오는 얼떨떨함, 감격, 흥분을 말합니다. 우리 모두가 바라바인 것입니다.
 멀린 케로더스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는 <감옥생활에서 찬송생활로>라는 저서를 남긴 분입니다. 이 책은 70년대 교계에서 베스트셀러로 유명했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케로더스 목사는 굴곡이 많은 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이력을 보면 '어떻게 이런 사람이?' 하고 놀랄 정도로 부끄러운 과거가 있습니다. 그는 감옥을 자기 집 드나들 듯이 자주 출입했습니다. 어두운 시절에 그가 겪었던 이야기를 한 토막 하겠습니다.
 그가 감옥생활을 하던 중, 가출옥 혜택을 입고 잠시 동안 자유를 누릴 때의 일이었습니다. 감옥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날짜가 점차 가까워 오자 그의 마음은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가출옥 기간을 연기해 보려고 담당 검사를 찾아갔습니다. 검사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하자 그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당신은 아직도 그 사실을 모르고 있소?" 하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검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멀린 케로더스, 축하하오. 트루먼 대통령이 당신을 특별 사면했소. 전과 기록이 말소되었으니 나가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오."
 케로더스는 매우 기뻤습니다. 자기가 예전에 전쟁터에서 세운 공적으로 말미암아 특별 사면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는 범죄 경력이 다양한 사람이었습니다. 전과자요, 포악한 공수 대원이요, 유명한 도박꾼이요, 게다가 암시장 거래꾼으로 소문난 인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자기의 훌륭한 공로를 인정받아 모든 죄를 용서받고 풀려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예수 보혈의 공로로 사면을 받습니다. 우리의 공로는 필요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이 선물을 놓고 체면(?)을 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는데요. 하나님 좀 기다려 주세요. 좀 떳떳해지면 받겠습니다. 지금은 부끄러워서 손을 못 내밀겠어요."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보고 겸손하다고 하지 마세요. 그는 크게 잘못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싫어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보세요. 그는 아내 사라를 데리고 애굽에 갔을 때 얼마나 비열하게 행동했는지 모릅니다. 아내가 궁중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자기 목숨 하나 부지해 보려고 오빠니, 누이니 하는 거짓말을 늘어놓는 야비한 짓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죄를 온통 무시해버리고 믿음 하나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나 같은 것이 어떻게 용서받을 수 있겠어요? 과거 애굽에서 얼마나 나쁜 짓을 많이 했는지 몰라요" 하고 하나님 앞에 구실을 들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무조건 순종하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자만이 누리는 행복
 
 케로더스 목사님에 대해 좀더 이야기하겠습니다. 그는 할아버지의 강요로 처음 교회에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마지못해 예배에 참석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마음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과거를 불문하고 믿기만 하면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하나님 앞에 드디어 그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했습니다. 얼마나 그 기쁨이 충만했던지 전혀 딴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애지중지하며 들고 다니던 돈 가방을 챙겨 들었습니다. 그 속에는 불법으로 모아 둔 막대한 현금과 수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 돈 가방을 들고 화장실로 달려갔습니다. 1950년대니까 아마 수세식 화장실이 아니었나 봅니다. 그는 가방을 열고 돈과 수표를 한 움큼씩 집어서 변기 속에 던졌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하자 어느새 가방이 텅 비었습니다. 이때의 그의 가슴에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의 파도가 출렁대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그는 이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돈뭉치가 변기 속에 던져질 때마다 내 가슴속에는 기쁨이 해일처럼 넘쳐 흘렀다."
 드디어 그는 돈의 노예에서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그를 수 년 동안 나쁜 데로 끌고 다녔던 돈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것입니다. 아귀다툼을 하며 매달렸던 정욕의 덩어리를 집어던져버리자 놀라운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그의 마음이 세상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진정한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이것이 믿음 하나로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에게 찾아오는 하나님의 축복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케로더스의 사건을 남의 이야기로 듣지 맙시다. 그것은 당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신칭의의 진리를 머리로만 인정하지 마세요. 우리 마음에서 새로운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 믿고 죄 용서받으면 마음에 행복이 찾아옵니다.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무거운 짐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알 수 없는 평안함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을 느낍니다. 불안과 고통에서 벗어나 마음껏 해방감을 맛보게 됩니다. 할렐루야를 외치며 뛰고 싶은 기쁨이 생깁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행복입니다. 아브라함도 이 행복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다윗도 이 행복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 행복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자격도 없고 경건하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달은 자는 가난해도 찬송할 수 있고, 실패해도 기뻐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당신에게 이런 행복, 이런 감격이 넘치고 있습니까? 성령께서 우리 모두에게 의롭다 함을 받은 자의 행복을 회복시키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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