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1-39)

by 【고동엽】 2022. 9. 11.

넉넉히 이기느니라.   (롬 8:31-39)

하나님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서슴치 않고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을 읽어보면 그 말씀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데 그것도 역시 사랑입니다.

창세기에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보면 그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힘써 천지만물을 엿새 동안 창조하시었습니다. 얼마나 최선을 다하셨던지 이레째 되는 날에는 하루를 쉬셔야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최선을 다하신 창조의 목적이 우리 인간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하여 창조하신 피조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입니다. 인간 외에 다른 피조물들은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창조하지 않으시고 우리 인간을 위하여 창조하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사랑과 존경과 영광을 받으시고 싶어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은 우리 인간입니다.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힘써 창조하시고 맨 마지막에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담과 하와에게 당신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을 맡겨 주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이 마치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 너를 주려고 만들었어” 저는 하나님의 천지창조에서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보면 구석 구석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애굽 땅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부르짖음에 즉시 응답하여 모세를 보내십니다. 그런데 제가 참 기가 막히게 생각하는 것은 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400여년 만에 한 첫 번째 부르짖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의 고센 땅에서 편안하고 좋을 때 저들은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나안보다 애굽 고센 땅이 더 좋아 보인다고 가나안을 버리고 서슴치 않고 애굽 땅에서 살던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400여년 동안 깨끗이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애굽 땅에서 죽게 되자 염치도 없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저라면 응답하지 않을 겁니다. 응답한다고 하여도 한참 후에 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즉시 응답하십니다. 저는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자존심을 생각했습니다.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하나님은 자존심이 없으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랑은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400여 년 동안 버림 받았다가 다시 부르짖는 이스라엘에게 즉시 기다렸다는 듯이 응답하시는 자존심 없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의 정도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자존심 없으신 사랑은 호세아서에서 극치를 이룹니다. 하나님은 호세아 선지자에게 우리를 사랑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전해 주시기 위하여 호세아에게 음란한 아내 고멜과 결혼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람이 나서 다른 남자와 살고 있는 아내를 가서 다시 데려오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음란한 아내와 살라하십니다. 음란한 아내 고멜을 아내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통하여 호세아에게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정도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시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동물을 참 좋아합니다. 특히 개를 좋아합니다. 저는 출퇴근하며 지나다니는 퇴계로가 너무 좋습니다. 퇴계로에는 애견센터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퇴계로는 정체되어도 전혀 짜증이 나지 않는 유일한 거리입니다. 정체가 되면 제가 좋아하는 강아지들을 차 안에서나마 더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제가 개를 하도 좋아하니까 ‘개 아비’라고 놀립니다. 그렇게 놀려도 저는 그 소리가 싫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개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혹 누가 저를 ‘개 새끼’라고 부른다면 아마 한바탕 할 겁니다. 그렇게 개를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개 아비는 몰라도 개 새끼는 될 수 없습니다. 개를 사람취급 해 줄 수는 있는데 내가 개가 되는 것은 아무리 제가 개르 좋아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것이 제 개 사랑의 한계입니다. 어디까지나 개는 개고 나는 납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내가 개가 되었다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낮아지심입니다. 비참해 지심입니다. 하나님의 우리 인간 사랑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입니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죄인처럼 돌아가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사랑이었습니다. 인간은 상상으로 하나님 외에 많은 거짓 신 즉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위하여 친히 인간이 되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까지 인간을 사랑하시는 신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상상도 뛰어넘는 그런 사랑입니다.

그와 같은 사랑으로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의 35절의 말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에 나오는 사랑은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기 때문에 이 세상에 우리를 대적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를 대적하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보다 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대적하는 것보다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를 대적하는 것을 더 민감해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31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우리를 대적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그리고 그 대적의 힘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36절에 나오는 환난, 곤고, 박해, 적신, 위험, 칼과 같은 표현은 우리의 대적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적이 너무 강하여 때때로 우리는 환난을 당합니다. 곤고함에도 빠집니다. 박해도 받습니다. 박해가 심하여 마치 벌겨 벗겨지는 것 같은 일도 당합니다. 사방의 위험이 마치 칼과 같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와 같은 대적들이 생겨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나타나는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하나님의 징계는 사랑입니다. 히브리서 12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자마다 징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못하였는데도 징계가 없으시다면 우리는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징계를 통하여 우리를 교훈하시고 우리를 바르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징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시기 때문에 그 징계 때문에 우리가 죽거나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으시기 때문에 한계가 있습니다. 정확한 한계가 있습니다. 징계는 적당하면 약이 되지만 지나치면 독이 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100% 약입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독이 되는 법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가 마치 우리의 대적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에 우리의 대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보기에는 마치 대적 같아 보이지만 대적이 아닙니다. 대적이 아니라 오히려 축복입니다.

대적과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우리를 연약한 자로 키우지 아니하시고 강한 자로 훈련시키시려고 하십니다. 강한 자로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환난도 만나게 하시고 박해도 받게 하시고 위험에도 직면하게 하시고 우리의 인생을 곤고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훈련 속에는 우리를 강한 자로 키우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훈련 속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미쳐 깨닫지 못하고 힘든 훈련만 바라보면 훈련 받다가 죽을 것 같아 보입니다. 그 훈련이 대적처럼 느껴집니다. 감당할 수 없는 대적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에 빠지다보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고 계신다고 하여도 나를 사랑하시지 않으시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당하는 어려움과 환난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가 있으십니다. 저희 집에서는 둘째 아이가 제일 먼저 군대에 입대하였습니다. 둘째가 군에 입대할 때 저희 교회에 육사 8기생 집사님이 계시는데 그 집사님께서 점심을 사 주시면서 정말 아주 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훈련을 받다보면 정말 죽을 것 같이 무섭고 힘든 일들이 참 많단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마 수 백 만 명이 그 훈련을 받았지만 그 훈련을 받다가 죽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크게 무서워 할 필요가 없단다. 훈련을 받다가 두려움이 생길 때 그 훈련을 무사히 받고 넘어간 수 백 만 명의 사람들을 생각 하거라.>

두고두고 생각해도 명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훈련을 시키는 사람은 어느 정도 훈련을 훈련병들이 받아낼 수 있는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훈련병들은 마치 죽으라고 자신들을 그와 같은 훈련으로 몰아넣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훈련을 받는 동안 정말 죽을 것과 같은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나 죽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훈련을 통하여 하루하루 자신들이 더 강해지고 튼튼해지는 것을 자신들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잘못하여 받는 어려움이든, 아니면 죄 없이 하나님의 훈련 프로그램 때문에 받는 어려움이든 그것이 어떤 것이든 그것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대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설령 우리가 우리의 죄와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채찍과 징계를 받는 중이라고 하여도 그 징계와 채찍과 징계 속에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징계와 채찍이 환난이라고 하여도, 박해라고 하여도, 곤고라고 하여도, 적신이라고 하여도, 위험과 칼과 같은 것이라고 하여도 그것이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 낼 수는 없습니다.

그와 같은 어려움은 참 쉽습니다. 회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진심으로 회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와 잘못에서 돌이키기만 하면 그와 같은 환난을 끊어집니다.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채찍질 하시고 징계하신 것이기 때문에, 채찍과 징계의 목적이 회개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목적을 달성하시면 즉시 징계를 멈추십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이 우리의 대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훈련을 위한 고난은 오히려 조금 더 어렵지만 그것도 낙심하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잘 감당하고 버티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것을 이길 힘이 자신에게 생겨나 어느 날 고난이 더 이상 고난으로 여겨지지 않게 되고, 환난이 더 이상 환난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강한 자가 되어 대적처럼 느껴졌던 일들이 더 이상 대적꺼리가 되지 못하는 일들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창조의 목적으로 삼으실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창조의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목적으로 삼으시리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시리만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시리만큼 사랑하십니다. 당신의 생명보다 우리의 생명을 더 귀히 여기셔서 당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못 박으시리만큼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심에도 불구하고 어려움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 때문에 생긴 어려움이든,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를 강한 사람으로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당하게 하시는 어려움이든 대적같이, 꼭 우리를 죽이고 망하게 하려고 작심하고 덤벼드는 대적같은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들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내지 못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하시기 때문입니다.

살다보면 힘들때도 있습니다. 죽을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그 고난과 역경이 심하게 되면 36절의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라는 표현과 같이 심리적으로 정신적으로 몰릴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 37절의 말씀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아멘.

‘그러나’라는 말부터 좋습니다. 그 모든 역경과 환난을 단번에 뒤집어엎어 버리는 강력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환난과 박해가 아무리 크고 강하다고 하여도 그 모든 일들을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때문에 넉넉히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이 저는 너무 좋습니다.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는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말씀이 되고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사순절 기간입니다. 예수님의 고난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 사랑의 중심에는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환난 중에 계신 성도님들이 있으실 겁니다. 곤고함 가운데 있으신 교인들도 계실 것입니다. 박해를 당하고 계시는 분들도 계실 것이고 칼과 같은 위험에 빠지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당하고 있는 어려움과 고난만 바라보지 마시고 우리를 위하여 사람이 되신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바울처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라고 하나님과 자신과 사람들 앞에 고백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승리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김동호목사 설교 자료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