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누가복음 19:41-44)
우리는 그동안 고난주간을 중요하게 여겨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종려주일도 중요하게 여기며 그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됩니다. 종려주일이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종려주일의 중요성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에 관한 기록이 많습니다. 그중에서 사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사건은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전도, 오병이어의 기적, 예수님과 제자들의 최후의 만찬, 십자가의 죽음, 예수님의 부활사건이 사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종려주일도 사복음서에 모두 나옵니다. 사복음서에 나온다는 일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살펴봄으로,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을 품읍시다.
첫째, 나귀를 타신 왕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까지 오셨습니다(눅 19:28,29). 충분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갑자기 제자 둘을 부르셔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고 하셨습니다(눅 19:30). 그리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가셨습니다(눅 19:35). 예수님은 로마황제처럼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실 수도 있으셨지만,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예수님이 빌린 나귀를 타신 것은 예수님이 오시기 5백 여 년 전에 이미 예언된 말씀입니다(슥 9:9). 이제 만왕의 왕께서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말은 전쟁과 용맹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나귀는 평화와 겸손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군림하기 위함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높아지기 위함이 아니라, 낮아지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셔서 겸손하게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우리 모두 나귀 타고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합시다. 겸손히 무릎을 꿇고 왕의 왕 되심을 찬양합시다. 평화와 겸손의 왕이신 예수님께 영원한 안식이 있습니다. 성경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 11:29)라고 말씀합니다.
둘째,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자 무리가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안장을 만들고, 겉옷과 나뭇가지를 길에 펼쳤습니다. 또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찬양을 불렀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 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마 21:9).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고 찬양합니다. 그러나 무리가 몰려갔던 것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당장 새 나라를 세울 것을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대했고, 부패한 지도자들이 심판받을 것을 기대했습니다(눅 19:11). 또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정치적 해방자로만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을 통해 권력을 얻으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께 정치적 해방과 물질적 풍요만 기대한 것입니다. 혹시 우리도 예수님을 오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을 통해 세상적인 풍요만 얻으려 하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 헛된 기대를 벗어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갑시다.
십자가 없는 소원은 헛된 욕망입니다. 헛된 욕망이 무너지자 사람들은 돌변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던 입술이 예수를 죽이라고 외칩니다. 이제 우리 속에 헛된 욕심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십자가 지면, 부활의 영광이 찾아옵니다.
셋째, 돌들도 소리지른다
수많은 무리가 찬양하자, 바리새인들이 항의합니다(눅 19:39). “호산나” 외치는 제자들과 무리들을 잠잠케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로마 군과 유혈충돌이 일어날까 염려하는 것입니다(요 11:47,48). 예수님은 그들의 항의를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요 19:40)고 말씀하십니다. 돌들이 “호산나” 외치며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의외의 발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드러나는 것과 높아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찬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의 진정한 왕이 입성하시기 때문입니다. 만물의 주인이 행진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는 가장 위대한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을 힘껏 찬양합시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증거합시다. 우리가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릅니다. 우리 모두 돌보다 못한 존재가 되지 맙시다(사 1:3). 예수님은 찬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넷째,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나귀를 타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에 가까이 가려면, 감람산을 넘어야 합니다. 감람산에 올라가면 두 가지 이유로 기분이 좋아집니다. 지중해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예루살렘이 한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원어를 보면, 예수님은 이때 통곡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눅 19:42). 또한 멸망의 날이 다가왔는데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눅 19:43,44).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그것은 때를 분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눅 19:44).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때에 관심이 없었고, 하나님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일에만 바빴습니다. 예루살렘이 영적으로 죽어가는데 무관심했습니다(눅 19:46).
우리가 사는 도시는 어떻습니까? 개인주의와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 도시를 보시고 우셨듯이, 우리도 우리가 사는 도시를 위해 울어야 합니다. 기도의 눈물을 뿌리고, 복음의 땀방울을 흘리고, 화합의 손으로 이 도시를 감싸 안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도시를 성시화 해야 합니다.
다섯째, 아! 고난의 길
드디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하늘 영광 보좌를 버리고 오신 길입니다. 천군 천사들의 경배를 뒤로 하고 오신 아주 먼 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먼 길을 자처하고 오셨습니다. 예루살렘의 길은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 의해 배신의 길로, 무리들에 의해 죄인의 길로, 부패한 정권에 의해 죽음의 길로 내몰리셨습니다. 가시면류관과 대못과 창과 십자가는 육체의 고난입니다. 그러나 더 큰 아픔은 어머니 마리아보다 먼저 죽는 고난의 길을 가는 것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외면당하는 고난의 길을 가tu야 했던 것입니다. "제 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마 27:46). 이것은 죽음보다 더 큰 아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고난의 길을 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우리도 갑시다. 우리는 지금 어느 길을 가고 있습니까? 또 다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이 우리 위해 고난당하셨듯이 우리도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고난의 길을 갑시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영혼들과 도시를 위해 우셨습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웁시다.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을 위해서, 우리가 사는 도시와 나라를 위해서, 북한의 동포들을 위해서 우리가 예수님처럼 울면, 세상은 복음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 지고 가면, 모든 사람이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출처/최성규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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