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2권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의 구원> 29쪽에 있는 글입니다.
20.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로마서 6장 12~23절
근간에 들어 기독교가 무력하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됩니다. 성경적인 표현을 빌자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점점 짠 맛을 잃어 가고 있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합니다.
무엇이 교회를 무기력하게 만듭니까?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말씀을 알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데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주일이 되면 교회에 나와 설교를 듣습니다. 그리고 교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주중에 몇 번은 성경공부를 합니다. 또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시간을 가집니다. 이와 같이 말씀을 많이 듣고 배우고 읽는 데 비해서 우리의 삶이 알맹이가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자기의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끝나는 것만큼 영적으로 해가 되는 것은 없습니다. 알기만 하고 실천이 따르지 않는 지식은 그 사람을 형식주의에 빠지게 하고 교만하게 만듭니다. 결국은 말로만 떠드는 추악한 위선자로 전락시켜 버립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늘어가면 예수 믿는 자와 안 믿는 자를 구별할 수 없는 혼탁한 시대를 막지 못할 것입니다. 적신호가 켜진 오늘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를 위해 본문 말씀은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귀를 열어 주시도록 기도하면서 말씀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본문은 "그러므로" 라는 말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그러므로'가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인지 주목해야 합니다. 자난 장에서 우리는 6장 1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을 검토해 보았습니다. 그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와 하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죽으심으로 우리는 죄의 속박에서 벗어났습니다. 주님이 살아나심으로 우리는 새로운 신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교리입니다. 신앙의 이론적인 체계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교리를 배우는 것으로 만족하고 끝난다면 우리의 영혼은 병들고 말 것입니다. 교리를 배우는 것은 실천이라는 집을 세우기 위해서 터를 닦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2절의 '그러므로'는 이제 터가 닦였으니 말씀을 실천하는 집을 세워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2, 13절을 보십시오. '하지 말라'는 명령과 '하라'는 명령이 나란히 나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운 만큼 실천에 옮기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입니다. 실천은 항상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병행합니다. 하나님께서 하라고 명령하시는 일은 우리가 해야 하고, 하지 말라고 명령하시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문제는 우리의 자유 의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실천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자유가 있는 반면에 자기의 행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책임을 반드시 요구하십니다. 순종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하나님의 편에서 다 해 주셨기 때문에 책임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받은 것은 예수님이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와 죽음의 권세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느 것을 보아도 우리가 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일 뿐입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킨 분도 하나님이요 우리로 하여금 죄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새로운 자리에 옮겨 놓으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죄가 왕 노릇 하지 못하도록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으로 세워 주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다 마련해 놓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가 순종할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향해 '하라', '하지 말라' 하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서 키워 보신 분은 잘 아실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아이가 태어난 지 1년 내지 1년 반 정도가 되면 걷기 시작합니다. 아이가 걷게 되기까지 어머니는 정성껏 온갖 헌신을 아끼지 않습니다. 아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 해 줍니다. 때가 되어서 엄마는 아이에게 요구합니다. "아가야, 이제 걸을 때가 되었어. 일어나 걸어 봐. 어서!" 하고 요구를 합니다. 아이가 일어나든 안 일어나든 그의 자유입니다. 그렇지만 못 일어나면 아이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을 엄마가 다 해 주었는데도 아이가 엄마의 요구에 응하지 못한다면 엄마는 매우 실망할 것입니다. 아이는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엄마가 보는 앞에서 발을 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를 위해 수고한 엄마에 대한 도리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를 위해 다 준비해 주지 않았니? 이제 걸음을 떼어 봐. 배운 대로 실행에 옮겨 봐!" 하고 말씀하실 때 우리가 순종해야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러므로'입니다. 참으로 중요하고 진지한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이 '그러므로'의 은혜가 항상 넘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죄로 왕 노릇 못하게 하라!
먼저 우리가 해서는 안 될 것부터 검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2절을 주목해 봅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로 너희 죽을 몸에 왕 노릇 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을 순종치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죄가 우리 몸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만약 우리가 그렇게 하면 어떻게 됩니까? 악한 정욕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결국 우리 지체를 죄에 불의의 병기로 주는 꼴이 되고 맙니다.
우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주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다음에 나오는 세 가지 사실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 죄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이지 죄가 우리에 대해서 죽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우리도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죄는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의 힘이 사라졌다거나 죄가 행동을 멈추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죄는 여전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 힘은 아직도 막강하여 이 세상을 끔찍한 악의 소굴로 만들고 있습니다. 죄는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죄의 실체를 똑바로 보아야 합니다.
둘째, 죄가 우리의 몸에 아직 자리를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을 몸'은 언젠가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갈 육체를 가리킵니다. 우리 몸, 'body'를 13절에서 지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몸을 자꾸 거론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거듭난 것은 우리의 영혼이지 몸은 아닙니다. 거듭난 내 속사람은 죄의 지배로부터 자유했지만 내 몸은 그렇지를 못합니다. 우리 몸이 살아 있는 한, 죄가 몸 안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이 연약성을 우리 모두가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죄의 영향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부패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이 살아 있는 한 죄가 우리 몸에 자주 들어와 활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몸에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 본능은 이미 부패된 성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죄로부터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죄로부터 유혹을 받아들이면 악한 정욕으로 돌변합니다. 이것을 본문에는 '몸의 사욕'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고 중생을 받은 자라도 자기의 사욕에 이리저리 끌려다닐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본능은 옛날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것을 마귀가 이용하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에베소 교인들을 들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잘 믿어서 칭찬을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4장에 보면 기막힌 권면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엡 4:25, 28).
왜 이와 같은 충고를 그들에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까? 그들이 거짓말을 예사로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도적질을 예사로 하니까 이와 같은 권면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마귀가 에베소 교인들의 몸에 남아 있는 죄성을 이용해서 그들로 하여금 거짓말하게 하고 도적질하게 만들고 음행하게 하고 나쁜 짓만 골라 가면서 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어도 이와 같은 죄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몸은 다양한 지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손, 발처럼 눈에 보이는 지체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지체가 아닙니다. 힘이나 기능, 성향, 재능, 상상력과 같은 보이지 않는 정신 세계까지 지체에 포함됩니다. 마귀는 죄의 힘을 이용해서 우리의 본능을 충동질하여 죄를 범하게 만듭니다. 가서는 안 될 곳으로 가게 하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게 하려고 덤빕니다.
그러나 여의치 않으면 마귀는 이차적으로 보이지 않는 우리의 정신 세계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상상, 공상의 세계로 침입하여 들어옵니다.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발 하나 움직이지 않고서도 상상으로 추악한 죄를 범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우리 몸이 갖고 있는 약점입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죄 짓는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의 생각 속에는 무수한 죄들이 쌓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마귀가 우리의 몸을 이용할 때 이와 같이 간교한 짓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범죄하면 우리의 지체는 불의의 병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13절에 나오는 "병기"는 군인의 손에 들려 있는 무기를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도구'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가 마음대로 사용하는 도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드린다'는 말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드린다는 말은 죄에 우리 자신을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고 갖다 바치는 것과 같습니다.
13절을 보면 "죄에게 드리지 말고"라는 말이 나오는가 하면 또 "하나님께 드리며"라는 말이 동시에 나옵니다. 둘 다 드린다는 면에서 똑같습니다. 우리 몸을 죄에 드리든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몸을 죄짓도록 내버려 두면 마치 우리 몸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과 같이 우리 몸을 헌신하는 꼴이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우리 몸을 죄의 도구로 사용할 수 없는 이유
우리 몸을 죄의 도구로 허용해 버리면 우리는 매우 심각한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아울러 영적으로 대혼란을 겪게 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16절이 말씀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순종하는 대상에 따라 그의 종이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죄가 원하는 대로 우리 몸을 내어 준다면 우리는 죄의 종이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신분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다시금 죄의 종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 18절).
우리는 절대로 다시 죄의 종이 될 수 없는 신분입니다. 죄가 하는 대로 우리 몸을 내맡기는 일은 예수 믿기 전에 하던 버릇입니다. 또한 중생받지 못한 채 교회를 드나들 때 하던 짓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몰랐을 당시에는 19절의 말씀처럼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르는 짓만 했습니다.
"너희가 죄의 종이 되었을 때에는 의에 대하여 자유하였느니라"(20절).
그때는 의를 행해야 할 어떤 책임도 우리에게 따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책임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너희가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뇨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21절).
그때는 우리에게 못된 열매만 있었습니다. 그 열매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죽음밖에 남을 것이 없는 바보짓을 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의 입장이 다릅니다.
"이제는"이라는 말이 19, 21, 22절에 연속해서 나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먼저 19절을 봅시다.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19절).
지금 우리는 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또 21절을 봅시다.
"이제는 너희가 그 일을 부끄러워하나니 이는 그 마지막이 사망임이니라"(21절).
지금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더 이상 옛날처럼 부끄러운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 다음에 있는 22절을 봅시다.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22절).
우리는 지금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의 몸을 죄에 드려 죄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면 우리는 대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죄의 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요, 죄의 도구로 자기를 바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살전 4:3).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하려고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가 됩니다. 우리가 이런 엄중한 사실을 깨닫는다면 함부로 죄를 범할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정직하지 못한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 봅시다. 흔히들 도덕성의 척도는 정직성 여부에 달려 있다고 말합니다. 사회 구성원들이 얼만큼 정직한가 하는 점에 초점을 두고 조사하면 그 나라의 도덕성을 측정할 수 있다고 합니다. 좋은 예로 몇 년 전에 서울대 박모 교수가 2만 7천여 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자료를 봅시다. "세계에서 가장 정직한 국민을 꼽는다면 어느 나라 국민이라고 생각합니까?" 라는 질문에 73%의 응답자들이 일본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마 여기에는 이의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한국 사람은 어떠한가 하고 물었습니다. 거기에 대한 답은 제가 안 하겠습니다. 너무 불쾌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경악할 만한 것은 "우리 사회에서 정직하면 잘살 수 없다고 생각합니까?" 라는 질문에 무려 73%가 동의를 했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73%의 응답자 중에서 십대, 이십대가 차지하는 비율이 80%를 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하여 우리 젊은이들이 얼마나 깊이 병들어 있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습니다. 정의와 진리 앞에서 꿋꿋하게 앞날을 설계해야 할 젊은이들이 그릇된 가치관을 안고 이미 패배감에 젖어 있는 것을 보면 비참한 생각마저 듭니다.
일본에는 크리스천이 전 국민의 0.5%도 안 됩니다. 그런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정직한 국민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우리나라는 인구의 4분의 1 이상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는데도 정직하지 못한 백성으로 스스로 낙인을 찍고 있습니다. 저는 외국에 나갔을 때 우리나라에 천만 성도가 있다는 말을 좀처럼 안 합니다. 부끄러워서 못하겠어요. 우리 교회를 가리켜 대형 교회라는 말들을 하는데 저는 우리 교회 교인의 수를 쉽게 밝히지 않습니다. 질문을 받기 전에는 제 입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워서 못하겠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는 적당한 거짓말을 하지 못하면 바보라는 사고방식이 상식처럼 통하고 있습니다. 정직해야 한다는 양심의 소리가 희미해짐으로써 사회 전반이 심장마비를 일으킬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중에 자동차 정비업을 하시는 분이나 관공서에 계시는 분들은 용서하시고 들으시기 바랍니다. 절대 다 그렇다는 말이 아닙니다. 자동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분들이 정비소에 가면 자동차를 일부러 고장 내놓고 부속을 갈아야 한다고 어거지를 씁니다. 엔진오일을 갈아 넣지 않고서도 갈았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관공서에 가면 법적으로 하자가 없는데도 안 된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뿌리 깊은 병폐 중의 하나에 불과한 이야기입니다.
거짓말은 죄악입니다. 불행하게도 소위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람들이 거짓말을 공공연히 하는 것을 봅니다. 절대 안 됩니다. 거짓말하는 자기의 입을 죄의 도구로 바치는 격이 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을 보면 거짓은 다른 죄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귀가 하와를 죄 짓게 만든 무기가 무엇이었습니까? 거짓말입니다. 마귀는 하와를 유혹할 때 거짓말을 사용했습니다. 절대 죽지 않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다음과 같은 기막힌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거짓을 말하는 것이 마귀의 본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짓말은 마귀의 전용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을 보고 마귀의 자식이라고 할 때 그 이면에는 거짓말쟁이라는 뜻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롬 3:4).
하나님과 사람을 딱 잘라서 한마디로 구별해 보십시오. 세상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요, 반면에 하나님은 진실하신 분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거짓을 말하면 마귀의 자식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의 종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거짓말하는 입을 죄의 도구로 내어 주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 마귀의 대변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닙니다. 새사람으로서 살아야 할 의무가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어떤 흑인에게 "노예처럼 행동하지 마" 하고 말하면 그를 모욕하는 언사가 됩니다. 이미 노예가 아닌 사람에게 노예처럼 행동한다고 말하는 것은 큰 모욕입니다. 다 큰 자녀를 보고 "어린애 같이 무슨 짓이야?" 하고 말하면 자녀의 표정이 어두워집니다. 어린애가 아닌 사람을 보고 어린애 같은 짓을 한다고 하니까 자녀가 모욕감을 느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의 종처럼 거짓말하지 마" 하고 꾸중을 듣는다면 벌써 우리는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죄의 종이 아닌 사람을 보고 죄의 종같이 행동한다고 하는 것은 가장 큰 모욕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지체를 의의 병기로
다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라'고 명령하시는 내용을 살펴 봅시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절).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고린도후서 5장 15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주님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것은 우리를 하나님께 헌신하는 자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손, 발, 머리, 재능, 감정, 어느 것 하나도 자기 자신을 위해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바치는 의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의의 병기로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성결해야 합니다. 우리 지체를 죄를 짓는 데 사용하는 한, 하나님께 헌신할 수 없습니다. 왜 우리 입을 가지고 범죄하지 않으려고 합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데 사용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헌신을 위해서는 성결이 필요합니다. 성결의 목적은 헌신에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헌신하면 참 놀라운 축복이 따라옵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자에게는 놀라운 약속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 약속은 14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기만 하면 죄가 이기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약속을 믿고 실천해 보십시오. 죄가 절대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도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죄가 우리를 주관치 못한다는 약속의 말씀을 실제로 체험하려면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도구로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짓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죄를 안 지을 뿐 아니라 자신의 몸을 하나님을 위해 기쁘게 드리는 경지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에베소교회 안에 도적질하는 사람을 향해 무엇이라 권면했습니까?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을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도적질하던 사람이 도적질만 안 하면 됩니까? 배가 고프면 또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적질도 하지 않아야 하지만 그 몸을 갖고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자신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일할 뿐 아니라 나아가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것이 인간답게 사는 차원 높은 생활입니다.
신경정신과 의사의 말에 의하면 정신병원에 들어오는 환자들 중에 남자보다 여자가 많다고 합니다. 아마 더 예민하기 때문에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진짜 이유는 그게 아닌 것 같습니다. 여자들 중에서도 시간적으로 여유가 많은 사람이 정신 질환에 걸리는 확률이 더 높다고 합니다. 아이를 하나만 낳아 키우는 주부는 나중에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자녀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엄마는 가슴 한 모퉁이가 허전한 느낌이 들기 시작합니다. 아이를 위해서 부지런히 뛰어야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마음이 공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하다가 별 재미가 없으면 좋았던 옛날 시절을 생각합니다. 애틋하게 헤어진 첫 애인을 떠올려 보기도 하고 행복하게 지냈던 학창시절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분을 푼답시고 카페에 가서 술을 마셔 보고 이상한 곳에 가서 춤을 추기도 합니다. 처음에는 심심풀이로 시작했던 일이 나중에는 대단히 심각한 자리로 빠져 들어갑니다. 급기야 가정이 깨어질 위기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 지경에 이른 부인들이 찾아가는 곳이 바로 정신병원이란 곳입니다.
이것은 좀 극단적인 이야기 같지만 물질 만능의 풍조에 젖어 있는 소위 유한마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애를 키우고 나서 좀더 보람 있는 일에 자기의 여가를 사용했다면 그렇게 병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의사의 말이 그렇습니다. 병원에 들어오는 부인들 중에서 애를 다섯 이상 낳은 사람이 없다고요. 정신 없이 애들을 키우다 보면 딴 생각할 틈이 없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할 일이 없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신하라고 하시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바쁘게 뛰다 보면 죄를 지을 정신적,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우리는 죄를 안 짓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더 나아가 주님을 위해 우리 몸을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 몸을 전도하는 일에 바쳐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구제하는 일에 우리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쁩니다. 주일마다 교회 앞에서 교통 봉사하는 분들을 보십시오. 주방에서 우리 교우들을 위하여 음식을 장만하는 분들을 보십시오. 주일학교 교사들이 새벽부터 나와서 수고하는 것을 보십시오. 순장들이 얼마나 정신 없이 뛰는지를 보십시오. 성가대원들이 시간을 쪼개어 연습에 몰두하는 것을 보십시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열심히 뛰어야 합니다. 이렇게 헌신할 때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은혜 아래 있는 우리
둘째로,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다는 사실을 알고 행동할 때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14절 중간을 보십시오.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
여기에서 말하는 "법"은 율법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법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에는 '하지 말라'는 법을 주셨으나 신약시대에는 '내가 하겠나이다' 라고 자원하는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의 이상과 인간의 삶의 실체가 은혜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파스칼이 아주 의미 깊은 말을 했습니다. "율법은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만 은혜는 요구하는 모든 것을 준다." 은혜는 우리에게 감격을 안겨 줍니다. 은혜는 자원하는 심령을 불러일으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생명이라도 내어놓게 만듭니다. 은혜는 우리를 진정한 자유인으로 만듭니다. 어거스틴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밖에 없는 자유인, 이것이 바로 은혜받은 사람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법의 구속이 없어지고 은혜 안에서 자유인이 되면 오히려 방종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방종이 죄를 더 지을 수 있게 만드는 구실이 되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은혜의 능력을 몰라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15절).
은혜를 아는 사람은 강합니다. 죄가 덤빌 때에 겁을 내거나 도망가지 않습니다. 은혜가 충만한 심령은 기꺼이 죄와 싸울 준비를 합니다.
시골에서 살아 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시골에는 집집마다 개를 많이 키웁니다. 개 중에는 사나운 놈들이 더러 있습니다. 낯선 사람이 지나가면 얼마나 짖어대고 덤비는지요. 제가 하도 혼이 나서 개와 싸우는 데는 이력이 난 사람입니다. 개가 짖으며 가까이 올 때 겁을 먹고 도망가면 그놈은 기고만장해서 쫓아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개를 이기는 삼단계 전투법이 있습니다. 첫째, 버티고 서서 노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가 멈칫합니다. 못 덤벼요. 다음으로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개처럼 땅에 쭈그리고 앉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개처럼 웅얼거리면 더 효과적입니다. 어디 한번 해 보자는 식으로 대들면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 그 다음으로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개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손에 돌이나 막대기를 하나 쥐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백전백승입니다. 저는 그렇게 해서 한 번도 져본 일이 없습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험상궂게 생긴 놈일수록 쉽게 도망을 간다는 것입니다. 앙칼지게 짖어대는 놈일수록 쉽게 무너지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그러니 개의 겉모양만 보고 지레 겁을 집어먹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는 삼단계 전투법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거짓을 예로 듭시다. 죄가 거짓말을 하도록 유혹해 올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있는 말씀대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산 자를 마귀가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이 마귀야, 어디 한번 해볼래" 하면서 딱 정면으로 마주보면 아무리 간악한 마귀라도 멈칫합니다. 덤비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처럼 엎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눅 22:40).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은혜를 위해 기도하라
세 번째로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은혜의 막대기를 손에 쥐는 것입니다. 은혜의 막대기를 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이 복음을 전하다가 끌려갔습니다. 재판장은 폴리갑에게 예수를 욕하고 모른다고 하면 석방해 준다고 했습니다. 폴리갑은 그 소리를 듣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80 인생을 살도록 주님이 한 번도 나를 섭섭하게 하신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내가 살아남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있을 수 없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어." 이것은 은혜의 막대기를 손에 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십니까? 자격이 전혀 없는 우리를 불러서 선하냐 악하냐를 따지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혀 주시고 "너는 내 아들이야" 하고 끌어안아 주셨습니다. 가끔 우리가 넘어질 때도 있고 못된 짓을 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 주님을 우리가 어떻게 배반합니까? 우리의 지체를 주님을 위해 드려야지 마귀에게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생각을 주님께 드려야지 죄 짓는 데 바칠 수 있습니까?
"내가 손해를 보아도 좋아. 아무리 손해를 보아도 주님이 좋아하시지 않는 것을 내가 할 수 없어. 나는 주님 때문에 살아난 사람이야. 나는 주님 때문에 구원받은 사람이야." 이것을 깨닫고 죄에 대항하며 끝까지 양보하지 않는 사람이 은혜의 막대기를 손에 쥔 사람입니다. 은혜는 강합니다. 은혜 충만한 사람은 죄가 절대로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 교회의 어느 집사님이 쓴 시를 소개합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을 잘 나타내 주는 시입니다.
내가 주께 무엇을 드릴 수 있다면 좋겠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가득 자란 들 말고
자꾸 울어도 마르지 않는 눈물의 샘 드리고 싶네
내가 주께 무엇을 드릴 수 있다면 좋겠네
쫓고 쫓기다가 넘어지고 피 흘리어 패자의 공물 같은 율법 말고
자꾸 불러도 쉼없이 솟는 사랑의 노래 드리고 싶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14절 말씀을 외워 두시기 바랍니다.
"죄가 너희를 주관치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14절).
옳습니다. 우리는 이제 죄의 종이 아니므로 죄가 절대로 우리를 주관치 못합니다. 우리 지체를 죄에 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명심합시다. 우리 지체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거룩하게 구별하여 헌신합시다.
우리가 은혜 안에서 살면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은혜받은 자는 강합니다. 은혜 안에서 삽시다. 당신은 은혜의 능력을 아시는 분입니까? 우리의 삶이 깨끗해지고 거룩해질 수 있는 길은 은혜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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