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6:60-71
세상은 무엇에 의해 이끌리고 있는가?
얼마 전 이런 광고가 있었습니다.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힘!” 바로 포항제철, posco를 선전하는 광고였습니다. 세상은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여 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제 1항, 1조, 2조입니다. 이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주인은 국민이고 국민이 이끌어가는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어떻습니까? 정말 여러분이 이 나라를 이끌어가고 있는 힘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이끌리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오늘의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도 국민이 뽑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대통령에 의해서 나의 삶이 움직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선택은 내가 했지만 내 인생이 누군가 다른 사람에 의해 이끌린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함께 경제적인 측면에서 이 나라의 특성을 대표하는 말이 ‘자본주의’라는 말입니다. 대한민국은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백과사전에서는 자본주의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이 지배하는 경제체제” 한마디로 돈이 지배하는 경제체제가 바로 자본주의입니다. 기업의 목적도 이윤추구입니다. 돈이 되지 않는데 사회를 위해 봉사하겠다고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내가 내 삶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누군가에 의해 이끌리던지, 아니면 물질에 의해, 돈에 의해 이끌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우리는 은연중에 가진 자과 갖지 못한 자가 서로 갈등하며, 상대적인 열등감과 상대적인 빈곤감, 비교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어느 학교를 나왔고, 어느 회사를 다니고, 어떤 집, 어떤 평수에 사는가에 따라 자신의 존재를 낫게 보기도 하고, 못하게 보기도 합니다. 바로 눈에 보이는 환경과 조건들에 의해 나의 존재가 이끌리는 것입니다.
신앙에서도 이런 모습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신앙이 좋다, 별로다를 평가하는 기준이 눈에 보이는 것들에 의지할 때가 많습니다. 주일 예배에 빠지지 않고 잘 나오느냐? 새벽기도를 하느냐? 교회에서 무슨 직책을 맡았느냐?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인도하고, 말씀 공부를 인도하며, 하루 세 번씩 기도를 드리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는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이 참 훌륭한 신앙인이라는 칭찬을 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결코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독사의 자식이라고 맹렬하게 비난하시면서 결코 그들의 신앙의 모습을 본받지 말 것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신앙의 참된 모습은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의 신앙은 무엇에 의해서 이끌려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동기와 목적은 어떤 것이어야 합니까? 오늘 말씀 속에 나오는 무리들과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반응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동기와 목적이 분명하게 고백되는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유월절이 가까웠지만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예수님께서 계신 갈릴리로 몰려왔습니다. 메시야 구원자에 대한 영적 갈급함이 예수님이 계신 빈들로 그들을 스스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그들을 배불리 먹여주셨습니다. 이는 이 표적을 보고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분명히 믿고 예수님을 영접하는 자들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떡을 먹고 배부른 무리는 이제는 떡을 위해 예수님을 쫓아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배고픈 자기들의 물질문제를 해결해 주실 분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육신의 떡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육신의 떡은 먹어도 먹어도 금새 배가 고프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보다도 이제는 그들이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자가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서 일하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자신이 바로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이 떡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면, 다시 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으심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음으로 영접하면, 그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고 영생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어렵도다
그러나 백성들은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60절.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예수님은 물질적인 것에 의해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무리들에게 십자가를 통한 영생의 비밀을 가르쳐 주시며 그들을 생명으로, 참 기쁨으로, 참 행복으로 이끌기를 원하셨지만, 그들은 무슨 소린지 도대체 못 알아듣겠다며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십자가를 통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을 믿음으로 영접함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하나님의 비밀이 이해가 되십니까?
그러나 이 무리들에게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야 한다는 이 말씀이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예수님은 이것보다 더 놀라운 진리도 가르쳐 주실 수 있으셨습니다. 62절. “그러면 너희가 인자의 이전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볼 것 같으면 어찌 하려느냐?” 이제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건, 즉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사건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곧 예수님은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 십자가 위로 들리실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를 다시 일으켜 살리실 것이며, 또한 다시 하나님의 보좌로 들어 올리심을 통해 영화롭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 받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자에게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로 그 말씀을 하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무리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계속 이렇게 영적인 진리들을 가르쳐 주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63a.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살린다는 것은 소생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생기를 불어넣어서 생명을 주는 것을 말합니다. 무엇이 우리에게 생명을 줍니까? 영입니다. 여기에서 말씀하는 영이란 ‘성령’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을 보면 “The Spirit gives life, 성령께서 생명을 주신다”라고 번역했습니다. 또 쉬운성경도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의 힘은 전혀 쓸모가 없다”고 번역했습니다.
여러분, 요한복음 3장 기억하시죠?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남의 역사에 대해서, 영생의 역사에 대해서 설명해 주셨던 곳입니다. 예수님은 거듭남은 학식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명예로 되는 것도 아니고, 권세로 되는 것도 아니고, 돈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된다고 하셨습니다. 영생에 있어서 사람의 힘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육신의 것은 허물과 죄로 죽은 죄인들을 살리는 중생의 역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오직 죽은 영혼을 다시 살리시는 것은 성령님뿐입니다. 그러면 죽은 영혼을 살리실 때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도구가 무엇입니까?
63b.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마치 벌거벗은 것과 것이 모든 것이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히 4:13). 말씀이 들려져야 죄을 깨닫습니다. 죄가 깨달아져야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즉 죄와 허물로 죽은 영혼에게 예수님의 생명의 말씀이 들려지면 그 속에서 생명이 싹이 나고 자라나서 영생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기초는 말씀이어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언제 쓰러지고 무너질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에 기초한 신앙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가뭄에도 결코 마르지 아니하며, 시절을 좇아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신앙의 삶이 생명의 말씀 속에 깊이 뿌리내려 성령의 역사가 충만하시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으면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되지만, 오늘 이 무리들 중에는 오히려 믿지 않는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중에는 예수님을 팔 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팔 그일지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생명을 얻기를 간절히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스스로 생명을 찾아갈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와 허물로 부패하여서 자신의 이성과 행위를 통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65절.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이제까지의 말씀에 의해 영생에 대해 분명히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생명의 떡입니다. 둘째, 누구든지 이 떡을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셋째, 이 떡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죽음을 나를 위한 것으로 영접하는 것입니다. 이것인 예수님의 살을 먹고 예수님의 피를 마시는 것입니다. 넷째, 이러한 생명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이고, 성령의 역사는 곧 말씀의 역사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곧 영이고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도무지 예수님을 믿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말씀이 어려워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육신의 생각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떡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어코 예수님을 떠나고야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떡을 위해 예수님을 쫓았기 때문에, 떡을 주시지 않자 예수님을 떠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열정적으로 진리를 가르치셨지만, 그들은 생명의 말씀을 저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에서 우리도 ‘나는 왜 예수님을 따르는가?’에 대한 분명한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떡을 얻고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떡을 얻으면 떠나갑니다. 병이 낫고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병이 나으면 떠나갑니다. 육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은 육이 편안해 지지 않고, 어려움이 생기고, 질병이 생기고, 아픔이 생기면 예수님을 떠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까지고 예수님께로 가지 못하게 막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이 완전히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잘 되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는 것은 이 세상에서 부자되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런 동기와 목적을 분명히 하지 않으면 조그마한 어려움에도 원망하며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반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우리는 예수님을 끝까지 쫓아야 합니까?
너희도 가려느냐?
여러분! 예수님의 이 음성에 한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67절.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다보면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인간적인 관계가 틀어질 때 교회를 떠납니다.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그 속에서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되고 다툼이 생기고 미움이 생길 때 떠나갑니다. 어떤 경우는 물질 때문에 떠나갑니다. 누가 누구를 믿고 돈을 얼마를 빌려줬는데 못 갚는 건지 안 갚는 건지, 그래서 돈도 잃고 사람도 잃고 떠나갑니다. 그리고 다시는 예수 안 믿겠다고 합니다. 또 어떤 경우는 예수 믿으면 사업도 잘되고 승진도 잘되고 자녀도 잘 될 줄 알았는데, 내 육신의 문제가 내가 원하는 대로 잘 풀리지 않을 때 떠나갑니다. 예수 믿어도 다 소용없더라. 예수 믿어봐야 잘 되는 일 하나 없더라. 여러분 이것은 분명히 잘못된 동기와 목적으로 예수님을 쫓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예수님을 떠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믿음의 뿌리가 생명이신 예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던 물질적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반응하는 사람들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떠나는 무리들을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결코 인간적으로 그들을 붙들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생명을 따르지 않을 때 제발 가지 말라고 사정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닙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불신앙의 죄를 깨닫고, 예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음을 통해 주님께로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야지, 사람인 나를 보고 인정에 이끌려서 다시 교회에 나오게 해서는 영원히 그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떠나는 무리들을 오직 진리로만 훈계하셨고, 그들이 비록 떠날지라도 붙잡으려고 매달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정에 매달리지 마십시오. 오직 진리를 붙드십시오. 생명의 역사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말씀의 역사입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그 안에 있는 생명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구원하는 것도 인정에만 매달려서는 안됩니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께 매어달려 간절히 기도하며, 말씀의 역사가 그 안에서 일어나서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으로 돕는 것입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동기와 목적으로 예수님을 쫓아야 합니까? 68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지금 베드로가 고백하는 이 고백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믿음의 결단이 어떠해야 하는 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예수님, 그래도 의리가 있지 이제까지 예수님 따라 다니다가 떡 안 준다고 예수님을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이러지 않았습니다. 또는 ‘예수님, 그래도 제가 명색의 수제자인데, 제가 떠나면 되겠습니까?’ 이러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이 무엇입니까?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제가 지금 여기에, 당신 곁에 남아 있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맛본 바로 그 말씀이 영생의 말씀이기 때문에 저는 결코 주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베드로의 고백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따르고자하는 동기와 목적이었습니다. 여러분, 왜 신앙생활을 하십니까? 의리때문입니까? 인정 때문입니까? 떡 때문입니까? 베드로는 육신의 떡이 아니라 생명의 떡을 먹고자 예수님을 쫓고 예수님 곁에 머물렀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무리처럼 떡을 위해 쫓는 자가 아니라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께 있기 때문에”, 그 영생을 얻고, 그 안에서 참된 생명의 풍성한 삶을 살기 위해 예수님을 쫓아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베드로는 말합니다. 69절.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 여러분, 여기에서 놀라운 믿음의 세계의 비밀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며, 누구든지 나를 먹는 자가 영생을 가지게 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갔지만 베드로는 남았습니다. 왜 남았습니까?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 곧 하나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믿고 알았습니까? 아니면 알고 믿었습니까? 믿고 알았습니다! 알고 믿은 것이 아니라 믿고 알았습니다. 믿는 것이 먼저입니다. 믿음으로 아는 것입니다. 알면 믿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믿으면 자연히 생명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자는 먼저 내가 예수님을 믿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좇아가는 삶이란 도대체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내게 들려주신 영생의 말씀을 붙들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믿음의 삶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하루 하루의 삶을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사는 삶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붙들고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붙들고 밉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나를 쳐서 복종시킬 때 그 말씀의 생명이 우리 안에 역사하여 세상이 알지 못하고 감당할 수 없는 큰 기쁨과 평안과 지금 이 세상에서의 영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은 단순이 내가 주일에 말씀듣고 위안받고 끝나는 생활이 아닙니다. 영생의 말씀을 쫓아가는 삶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있으십니까?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신다는 신앙의 고백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말씀을 쫓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하는 결단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쫓아가지 않으면,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있는다 할지라도 결국 예수님을 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쫓아가지 않으면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물질을 쫓아가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마귀의 자식이 되었습니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는 동기와 목적을 물질에 두었기 때문입니다. 인정 때문에, 의리 때문에, 돈 때문에, 떡 때문에 예수님을 쫓는다면 반드시 떠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결 론
사람들은 모두 무엇인가에 의해 이끌리는 삶을 삽니다. 그것이 돈이든지, 명예이든지 권력이든지 그것에 의해 이끌리며 울고 웃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육은 무익합니다. 그것 때문에 최후의 순간에,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결코 웃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도 무엇인가에 이끌려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 동기와 목적이 잘못되었을 때는 결국 언제든지 예수님을 떠나거나 배반하여 팔아넘기는 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베드로는 고백했습니다.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참된 동기와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생명이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그 영생의 말씀 안에 우리의 믿음의 뿌리를 내릴 때,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에 충만하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출처/김성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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