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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섬김

by 【고동엽】 2022. 9. 8.
 
 

빌2:2~4 출20:3~17

하나님의 대 강령은 십계명에 있다. 첫째는 하나님을 섬기라는 명령이요 둘째는 사람들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이것은 사랑의 실천근본을 말함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은사는 영원하다. 믿음 소망 사랑은 항상 있을 것이지만 사랑은 영원한 하나님의 은사이기 때문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다. 사랑인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섬김’의 의미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은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말함이며 이것을 하나님의 섬김이라고 한다.

   이 실천을 삶에서 섬긴다는 것은 헌신의 수고를 말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사랑의 실천임을 알아야 한다(출20;3-17). 그러므로 예수님은 세상에서 그의 삶을 통해 만인의 본보기로 섬김의 삶을 사셨다. 그러기에 예수의 마음은 우리의 섬김에서 사랑으로만 실현가능함을 알게 한다(빌2;24). 섬김의 근거는 자아실현에 있는 것도, 인격수양에 있는 것도 아니다. 섬김의 목적과 근거가 나의 삶 안에 있다면 우리의 인내가 한계에 달 했을 때 섬김도 그치게 된다. 그래서 ‘나의 섬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섬김’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온전한 섬김으로 사회에 그 사랑이 실천해야 하는 때에 이르렀음을 알게 한다.

   어느 노(老)목사님의 설교에서 한국 개신교의 선교 발전에 대해 말하기를 초기에서부터 현제 까지 대체적으로 세 구분으로 언급(言及)함을 들었다. 예컨대 초기에는 예수 믿고 천당 가자고 슬로건을 내걸었고 중기에는 예수 믿고 개화하자고 하였으며 전근대에 와서는 예수 믿고 ‘사람’ 되자고 한 노(老)목사님의 말씀이 마음에 와 닿는다. 오늘의 교회가 이제는 사회를 향하여 보여주는 것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서 예수 믿는 자의 모범이라는 지적을 받게 된 것이다. 우리는 물질위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사람의 창조력을 귀하게 여기는 새로운 민본(民本)사상에 눈을 떠야 한다.

   1960년대 이후 급속한 교회의 양적 성장을 이루어 온 한국 개신교가 1980년대 중반 이후 저 성장 단계로 돌입하면서 개 교회들은 치열한 교회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음을 본다. 비신자나 타종교 신자의 개종에 의한 교인의 증가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게 되자 기독교 신자의 수평이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성장의 한계를 느낀 교단이나 교회들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으며 선교는 교인 증가와 교세확장으로 왜곡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교회의 정체성과 사회의 운동성이라는 이중의 사이에서 이중적 정체성(dual identity)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의 이 사회에 살고 있는 모든 개인들이 그들의 성, 인종, 정치적 성향, 성적성향, 사회적 계층, 육체적 장애의 여부, 나이들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과 가치를 확보해 주기 위한 교회의 관심이 있어야 하고 사회가 보다 하나님 나라에 가까울 수 있는 사회로 되기 위한 변화 발전에 참여함이 사회를 구원하는 교회의 자리가 되어야 한다.

   뜻있는 신학자들은 신 자유주의적 세계와 오늘의 시대가 가져다주는 가치의 전도와 혼란이 ‘돈의 신’을 따라 사는 이 시대의 위기를 넘어서서 교회가 사회에서의 자리는 그 신학적 담론이 ‘하나님의 섬김’(Diakonia Dei)이라고 말한다. 흔히 봉사로 번역되는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기능이상으로 오래된 개념임을 아는 것이다. 교회는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인간성 회복을 보아야 한다. 신약성서에서 ‘디아코니아’는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삶들, 곤궁에 처한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그의 자녀로서 사랑하는 것을 말함이다. 복음의 능력 안에서 행해지는 이웃에 대한 자유로운 희생으로서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의 섬김(갈5;13)으로서 이해하는 것이다.

   디아코니아는 강요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자유로운 결단에 근거하고 있고 여기에는 섬기는 사람과 섬김 받는 사람사이의 차별이 없음을 유의하는 것이다. ‘하나님 섬김’이 주는 의미는 교회나 사회에 지극히 사적관계인 부모와 자식, 부부관계에서 권력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 이런 권력관계에서는 복종에 대한 일방적인 요구와 비겁한 굴종, 눈치 보기, 침묵 또는 저항만이 일어나기 때문에 자유와 창조가 침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섬김의 삶으로 살아야 할 의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며 사는 삶 에 대해 자기가 하나님께 무엇인가 베푸는 것처럼 착각하는 신앙인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오만한 생각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이해하면 우리는 하나님께 충성스럽고 착한 종이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조차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섬김이 아닐까? 하는 의미를 깨달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마땅한 사랑과 감사의 마음임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며 책임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를 통해 섬김을 받으시기를 기뻐하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이웃사랑에 대하여서도 섬기는 삶을 기뻐하심을 알아야 한다.

   톨스토이 문학 작품 중에서 “세 개의 의문”이라는 단편이 있다. 사람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사람의 삶을 어떻게 실현하고 살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의 질을 말하는 질문인 것이다. 그의 작품 내용은 세 가지 질문이다. 첫째는 가장 중요한 시간은 어느 시간인가? 둘째로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셋째로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이다. 그 내용은 가장 중요한 시간은 바로 ‘지금’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며 가장 중요한 일은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뜻과 계획이 있어 인간을 창조 하셨다.

   오! 늘(영원)에 지금(只今)을 주신 창조자인 하나님의 뜻이 그리고 그분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새롭게 하는 그 시간, 그 장소로 제공된 바를 바로 알지 않고서는 삶을 살수가 없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바울 선생도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고후6;2) 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음에 유의하는 것이다. 인간은 공통적으로 자신의 궁극적인 삶의 목표를 위해 끊임없이 지금(只今) 자기물음(정체성)을 묻지 않을 수 없다. 정체성의 위기는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과 그의 영광된 삶은 지금 곧 ‘하나님의 섬김’에서만 가능함을 시사(視事)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공동체로 가는 것이다. 오늘의 한국인들은 그리스도인의 메시지를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사회는 매우 독선적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의 독선주의가 교회를 낡고 시대착오적인 종교로 보게 만들며 나아가 타 종교인들이나 비 종교인들이 교회에 혐오감을 느끼도록 만들고 있는 점에 유의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의 배타주의는 사회인에게 교회를 폐쇄적이고 아집이 가득한 문화적 낙오자로 비치게 됨으로 사회에서 교회의 목소리가 설 자리를 잃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옛적에 예수가 유대인들에게 미움을 받게 된 이유도 유대인들의 인지(認知)는 야훼가 너무 절대적인 분이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야훼의 이름을 직접 부르면 그 자리에서 곧장 죽게 될 정도로 신이 무한자로서의 권위만을 갖고 있다는 믿음을 갖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는 전통적인 유대인과는 달리 절대적이고 무한하신 야훼를 인간의 레벨로 끌어 내려서 아버지라고 부른 것이 예수 잘못이었으며 그 문제로 인해 유대인에게 처형당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있다. 즉 하나님을 아람어로 아빠(Abba) 즉 아버지로 불렀다는 말이 있게 된 것을 알게 한다. 성육신 하신 예수 그는 낮고 천한 곳으로 하향하여 세상에 사람의 삶의 자리에서 마음을 비우며 섬김의 삶을 살았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리를 본다. 우리사회는 구조적으로 이념적으로 양극화 되어 일어나는 병폐적인 사회증후군을 볼 수 있다.

   가치관의 전도, 공동체 붕괴, 정체성 상실, 궁극적 무관심등은 사회의 단면을 말해 준다. 하나님의 나라가 땅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병든 사회 치유를 위해 교회는 섬기는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고 책임 있게 기도를 해야 한다. 뿌리가 약한 나무가 강풍에 쓰러진다. 오늘 우리사회 위기는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대체할 일이 아니고 사회 전체의 구조적인 문제와 사람의 정체성의 결여와 삶의 향유만으로 성장에만 몰두한 나머지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는 그리고 인간성 상실에는 등한히 한 문제를 정확히 보고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사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사물(事物)에 대한 인식과 사실(事實)에 대한 판단 그리고 올바른 관계에 대한 신념 체계와 확고한 정체성의 가치관을 기초로 두어야 한다. 사람의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관계개선, 문제에 대한 기본 태도, 정체성으로 올바른 자아관(自我觀)과 교회관을 가질 때 섬김에 사랑의 철학이 소재(所在)해 있음을 알게 된다. 교회의 기능은 세 가지이다. 예배의 기능(Ecclesia), 친교의 기능(Koinonia), 봉사의 기능(Diakonia)이다. 이 세 가지 기능은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이 세 기능은 사랑으로 엮어가야 한다. 여기에 디아코니아는 일상적인 삶 속에 깃들인 분열이나 좌절을 치유하고 인간의 삶의 터전 즉 나눔이 이뤄지며 자유와 창조가 창출하는 것이다.

   지금(只今)은 한국 교회가 자기중심적 자기 발생적이며 자기만 높이는 현상임을 알 때 교회는 자기를 내어주고 자기를 비우며 ‘하나님의 섬김’ 을 아는 교회로 변해가야 한다. 교회 성장에만 전적인 관심을 갖지 말고 교회가 처한 사회를 위해 문을 열고 책임의식을 가져야 할 때 성숙된 모습을 찾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 된 자로서의 사랑의 응답이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당신의 자녀를 통해 섬김을 받으시기를 기뻐하며 그 자녀가 이웃사랑의 나눔에서 섬김의 자리를 가질 때 하나님의 축복임을 아는 그 은혜에 눈을 떠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섬김’을 뜻한다.

출처/배성산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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