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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의 장막, 야곱의 별 (민수기 24장 1-25절)

by 【고동엽】 2022. 9. 1.

야곱의 장막, 야곱의 별  (민수기 24장 1-25절)


약 한 달 전에 영국에서 어떤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 언론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존 라인이라는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가진 폐의 발육부진으로 인하여 의사들로부터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일생 동안 무려 16차례의 죽을 위기들을 넘겼다고 합니다.
  벼락을 두 번이나 맞았던 것을 비롯하여 탄광 사고로 매몰되는 위기와 세 차례의 치명적인 자동차 사고들, 그리고 익사 직전까지 가는 아찔한 순간까지 있었고, 한 번은 어릴 때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팔이 부러져서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는데 그 도중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같은 팔이 또 부러지는 변까지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숱한 위기에도 불구하고 존 라인 씨는 54세가 된 지금까지 멀쩡하게 살아 있었는데, 최근에 맨홀 구멍에 빠져서 중상을 입는 사고를 또 한 번 당하는 바람에 그렇게 화제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전치 32주의 부상'을 입은 그를 보면서도 본인을 포함해서 그의 부인과 가족들은 "별다른 걱정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고 언론은 덧붙여 보도했습니다.
  그처럼 목숨을 위협하는 각종 사고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끈질기게 목숨이 유지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의 인생에서 이런 '억세게 좋은 운'은 계속될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불신자들은 정말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은 세상의 그 어떤 불행도 건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모압의 선지자 발람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와 꼭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이 나타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향하여 진군하던 길에 모압 변경에 이르자 모압 왕 발락은 매우 불안해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발람이라는 선지자를 동원하여 이스라엘을 저주하여 망하게 하려고 계획합니다.
  발람은 비록 '선지자'라고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가 아니라. 본문에서 '이전에 사술을 쓰던 자'라고 말하고 있듯이 오늘날의 무당과 비슷한 우상숭배 선지자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발람이 감히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도록 나귀의 입까지 동원하셔서 주장하신 바람에, 지금까지 두 차례에 걸친 모압 왕 발락의 시도는 계속 실패해오던 중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3장 27절부터 30절에 보면, 발락은 포기하지 않고 이제 세 번째로 발람에게 명하여 또 이스라엘을 저주하도록 합니다.

  하지만 이즈음에 와서는 발람도 이미 포기한 상태가 되었습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에 "1발람이 자기가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선히 여기심을 보고 전과 같이 사술을 쓰지 아니하고 그 낯을 광야로 향하여 2눈을 들어 이스라엘이 그 지파대로 거하는 것을 보는 동시에 하나님의 신이 그 위에 임하신지라 3그가 노래를 지어 가로되 브올의 아들 발람이 말하며 눈을 감았던 자가 말하며 4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 전능자의 이상을 보는 자, 엎드려서 눈을 뜬 자가 말하기를"이라고 기록했습니다.

  다음 25장에 나타나는 사건을 보면 곧 알 수 있는 대로, 지금 발람이 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결코 그가 완전히 하나님 신앙으로 돌아섰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의 진행 과정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자기의 "사술"을 써서 저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게 되었으며, 이제 그 자신은 그저 "하나님의 신"이 임하시는 대로 예언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대언 도구처럼 되어버렸을 뿐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발락과 발람이 기를 쓰고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해도 이미 하나님께로부터 선택받은 이스라엘을 어떻게 건드릴 재주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 발람의 입에서 나오게 된 말은 이스라엘의 미래를 향한 두 가지 축복의 예언이었습니다.
  23장에서 발람은 이미 두 번의 예언을 했었는데, 여기서는 그 세 번째 예언이 "야곱의 장막"이란 말로 시작되고 있으며, 그의 네 번째 예언은 "야곱의 별"을 주제로 선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그 축복들은 둘 다 '야곱'이라는 이름, 즉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원조가 되었던 그 축복의 조상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두 가지 축복들, 신앙의 조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민들에게 대대로 이어지고 있는 확고부동하고도 불변한 축복들이 과연 무엇인지를 함께 확인해보고자 합니다.

  1. 세상의 그 어느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신자의 축복은 바로 교회중심으로 구원의 확신에 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야곱의 장막'을 통하여 누리던 복이었습니다.
  '야곱의 장막' 즉 이스라엘 민족이 거하고 있던 거처란 과연 어떤 곳이었습니까?
  우선 5절부터 7절에 보면 "5야곱이여 네 장막이, 이스라엘이여 네 거처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6그 벌어짐이 골짜기 같고 강가의 동산 같으며 여호와의 심으신 침향목들 같고 물가의 백향목들 같도다 7그 통에서는 물이 넘치겠고 그 종자는 많은 물가에 있으리로다 그 왕이 아각보다 높으니 그 나라가 진흥하리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거하고 있는 장막과 거처를 두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발람은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두고 비유하기를 그들의 거처는 물이 자동적으로 그리고 풍부하게 공급되는 곳에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골짜기"나 "강가," 혹은 "통에 넘치는 물"이나 "많은 물가" - 이 모든 말들이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확연한 것입니다.
  물이 귀한 근동 지방에서는 누구에게 복덩어리가 굴러 떨어지는 경우를 두고 이처럼 '물이 넘친다'라고 흔히 표현했습니다.
  즉 바꾸어 말하자면 이스라엘이 날마다 장막을 치고 거하는 곳마다 복이 따라 다니며 넘친다는 말인 것입니다.
  도대체 이스라엘은 어떤 곳에 장막을 쳤기에 그처럼 가는 곳마다 복이 철철 넘쳐흐르는 백성이 되었습니까?

  그 사실을 두고 바로 이어지는 8절과 9절 말씀에 "8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으니 그 힘이 들소와 같도다 그 적국을 삼키고 그들의 뼈를 꺾으며 화살로 쏘아 꿰뚫으리로다 9꿇어앉고 누움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와도 같으니 일으킬 자 누구이랴 너를 축복하는 자마다 복을 받을 것이요 너를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지로다"라고 기록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9절의 내용은 옛날에 야곱이 그의 아들 유다에게 축복했던 말을 발람이 그대로 반복하는 것임을 볼 때, 이 축복이 야곱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여튼 여기서의 제일 요점은 바로 "하나님이 그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셨다"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 지금 거하고 있는 장막이요 거처요 그 광야 공동체의 실질적인 현주소였던 것입니다.

  온 백성들이 종살이하며 고생하던 그 애굽에서 기적적으로 인도함을 받아 나온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축복의 첫 물줄기와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사람 눈에는 도무지 불가능한 일로만 보였던 출애굽을 하나님께로부터 받게 된 이스라엘에게는 이제 그 앞길에 아무 더 이상 거칠 것도 두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광야 행군이라는 어려운 길도 마치 "들소"와 같은 힘으로써 모든 "적국"들을 거침없이 무찌르며 일사천리로 진행해왔고 또 앞으로도 그리될 것이었습니다.
  지금 가나안을 바로 눈앞에 두고 진을 치고 있는 그 분위기 역시 웅크리고 앉아 있는 "수사자"와 "사자" 같이 아무도 곁에서 함부로 건드리지도 못할 위용으로 넘치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이라는 놀라운 구원 역사로 인하여 사기가 충천해 있었던 까닭에 그들이 지금까지 누려왔고 또 앞으로도 받게 모든 복들은 주위의 그 어떤 민족도 방해하거나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그런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자"만 "복을 받을" 수 있을 뿐이었으며, 반대로 그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자마다 저주를 받을" 뿐이었습니다.
  '야곱의 장막'은 이와 같이 '출애굽의 구원'이라는 현주소에 있었으며, 거기에 거하는 백성의 앞날에는 가는 곳마다 계속하여 물이 절로 넘치는 축복이 따라오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바로 이런 '야곱의 장막'을 중심으로 살고 있는 성도가 받는 복은 아무도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있어서 출애굽과 같은 복의 물꼬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물론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한 구원입니다.
  신자가 진정한 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복의 근원이 먼저 터져야 하며, 일단 이 샘이 이것이 터지게 되면 그 나머지 복들은 그저 줄줄이 따라올 수밖에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지옥의 영벌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 십자가 공로로 구원 얻고 천국의 영생을 얻게 되었는데, 그런 감사와 감격이 심령에 넘치는 사람 앞에 그 어떤 것이 거칠 수가 있겠습니까?
  광야생활이 좀 고달프다고 "아이고, 내 인생이 왜 이 모양 이 꼴일까?"하고 주저앉게 될 리가 없으며, 오히려 "죽을죄도 용서받고 구원 받은 몸인데 이까짓 것쯤이야."하고 그야말로 '들소처럼' 힘을 떨치며 매사에 승리할 것입니다.
  천당소망이 확실한 성도가 아직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 놓지 못했다고 해서 "왜 나한테 아직까지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을까?"하고 기죽게 될 리가 결코 없으며, 마치 움츠리고 있다가 뛰어나가는 '사자'와 같이 언젠가는 이 땅에서 붙잡아야 할 것을 꼭 성취하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바로 그와 같은 십자가 대속의 체험을 가진 성도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밥이나 같이 먹고 잡담 나누는 장소가 아니라 그런 구원 확신의 은총을 나누는 자리이며, 구제품이나 받아먹을 생각으로 모이는 곳이 아니라 영생구원이라는 이 엄청난 복을 내 인생 최고최대의 보화로 받아서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아니함을 자랑하는 신령한 단체입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하면서 이처럼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인생이란 것은 그야말로 '강가에, 물가에 심긴 나무'나 다름없이 그저 '시절을 좇아 절로 과실을 맺는' 복된 삶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단에서 파송 받은 선교사님들은 일단 거주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선교지의 국가로부터 체류비자를 받아야 마음 놓고 선교활동에 종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미국으로 이민 간 교포들은 무엇보다도 영주권부터 받아놓아야 그 다음의 인생을 여유롭게 펼쳐갈 수 있습니다.
  비록 광야와 같은 이 세상살이이기는 하지만, 교회를 자기 인생의 든든한 '거주지'로 받고 이 교회를 통하여 '천당 시민권'까지 이미 확보하고 있는 성도라면 그 앞에 거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은혜의 장막 안에서 구원확신이라는 현주소를 가지고 살게 된 것을 늘 감사하면서, 실로 세상 그 어느 누구도 흔들지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불변의 축복을 바로 이 교회를 통하여 앞으로도 평생토록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인생의 그 무엇도 빼앗아갈 수 없는 신자의 축복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왕 중의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삶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야곱의 별'을 모시고 살았던 축복입니다.
  본문 10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발락과 발람 사이에서 앞에서도 있었던 실랑이가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저주해 달라고 발람을 불러왔는데 오히려 세 번씩이나 축복하는 것만 보게 된 모압 왕 발락은 "이제 그대의 곳으로 달려가라 내가 그대를 높여 심히 존귀케 하기로 뜻하였더니 여호와가 그대를 막아 존귀치 못하게 하셨도다"라고 발람에게 화를 내었습니다.
  즉 "당신이 그 따위로 굿을 했으니 복채 한 푼도 줄 수 없소. 이제 당장 꺼지시오."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 발락에게 발람은 "나는 내 백성에게로 돌아가거니와 들으소서"라고 하면서 한 가지 예언을 덤으로 얹어주었습니다.
  옛날에는 돈 안 받고 남에게 점쳐 준다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했던 발람이 이제 와서는 성령의 역사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또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예언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아주 별난 체험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본문 17절로 24절에 기록하기를 "17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18그 원수 에돔은 그들의 산업이 되며 그 원수 세일도 그들의 산업이 되고 그 동시에 이스라엘은 용감히 행동하리로다 19주권자가 야곱에게서 나서 남은 자들을 그 성읍에서 멸절하리로다 하고 20또 아말렉을 바라보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아말렉은 열국중 으뜸이나 종말은 멸망에 이르리로다 하고 21또 가인 족속을 바라보며 노래를 지어 가로되 너의 거처가 견고하니 네 보금자리는 바위에 있도다 22그러나 가인이 쇠미하리니 나중에는 앗수르의 포로가 되리로다 하고 23또 노래를 지어 가로되 슬프다 하나님이 이 일을 행하시리니 그때에 살 자가 누구이랴 24깃딤 해변에서 배들이 와서 앗수르를 학대하며 에벨을 괴롭게 하리라마는 그도 멸망하리로다 하고"라고 기록했습니다.

  "내가 그를 보아도,"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라고 말하는 대로, 여기서 발람은 분명히 어떤 한 인물을 내다보며 예언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물 출현 시기를 가리켜 "이 때의 일이 아니며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라고, 그것은 미래에 일어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또한 그는 이스라엘의 장래에 나타날 그 어떤 인물의 이름이나 그에 대한 다른 정보는 말하지 않고 있지만 그 대신 "한 별," "한 홀" 그리고 "주권자"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별'은 요즘은 인기 연예인의 상징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군주의 대표적인 상징이었습니다.
  '홀'은 한쪽이 좀 동그랗고 무겁게 된 짧은 막대기 같은 것인데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식이었습니다.
  즉 발람은 이스라엘의 미래에 어떤 강력한 주권자가 등장하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왕이 출현하게 될 때 비로소 이스라엘은 그동안 그들을 괴롭혔던 이방 민족과 나라들을 완전히 압도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당장 이스라엘을 저주하려 하고 있는 "모압"을 비롯하여,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오던 도중에 길을 막고 방해하던 "에돔," 그리고 큰 나라는 아니었지만 이스라엘을 괴롭히는데 있어서는 그야말로 으뜸이었던 "아말렉" - 이런 민족들이 이스라엘에 바로 그 왕이 출현함으로써 완전히 망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나안 땅 주변에 살던 "가인 족속" 즉 겐 족속이나 "깃딤 해변"에서 온 해양민족인 블레셋 족속 등 이스라엘 주변에서 시끄럽게 구는 군소 민족들 역시 다 그 왕의 출현과 함께 깨끗이 처리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 때가 오면 모든 "소동하는 자식들" 즉 신자를 욕하고 핍박하는 무리들이 다 멸망하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 이스라엘은 불신 세력 앞에서 "용감히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왕을 통하여 이루어질 그런 불신자에 대한 심판은 바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인 까닭에 아무도 그 앞에서 "살 자"가 없게 될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왕이 누구겠습니까?
  이 왕은 결코 다윗이나 솔로몬 같은 정치적 군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님에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최전성기에도 이런 주변의 이방 국가들이 완전히 다 망한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분명 장차 메시아 왕국의 주권자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임이 명확합니다.
  이상의 예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인하여 이미 성취되었고 또한 그분의 재림으로 인하여 완전히 성취될 예언들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내 인생의 주권자로 모시고 사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아니 그것이야말로 가장 큰 축복인 것을 우리 신자가 모르고 살아서야 말이 안 됩니다.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미래를 앞에 두고, 또 지금 현재 우리를 괴롭히는 세상 세력들 사이에 끼어 살고 있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든든한 왕을 모시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얼마나 복스러운 일입니까?

  '이반 제니소비치의 하루'라는 소설에 보면 이런 장면이 있습니다.
  그 소설의 배경이 되는 소련의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소 안에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저 목숨만 부지해나가는 것이 모든 죄수의 하루하루의 목표 그 자체였습니다.
  그 무서운 추위 속에 새벽부터 밤까지 눈밭에서 중노동에 시달리고, 바깥 사회에서는 짐승들 사료에나 쓸 것을 식량이라고 그것도 그릇 밑바닥만 겨우 채울 정도로만 주는 곳에서 십년, 이십년 씩 산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사는 게 아니라 언제 죽느냐 하는 생이나 다름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수용소에 살던 이반 제니소비치는 그 와중에서도 반장을 잘 만나게 되서 다행이라고 여깁니다.
  반장이란 같은 죄수들 중에서 한 작업반을 책임지도록 뽑힌 사람인데, 그 반장의 역량에 따라 그 작업반에 속한 죄수들의 식량 배급이나 작업 책임이 좌우되기 때문에 이 반장을 잘 만나느냐 못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죄수의 생사가 갈린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설의 주인공 이반 제니소비치는 다행히도 자기는 능력 있고 수완 좋은 반장을 만나서 목숨은 건졌다고 생각하면서, 그런 반장을 만난 것은 "마치 든든한 모선을 탄 것 같은 기분"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주인을, 예수 그리스도라는 구세주를 만나게 되고 따르게 된 것은 어떠하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정말 다행한 일 아닙니까?
  아니 이것이야말로 내 인생 최고의 복이 터진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주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이 땅에서의 우리 인생이란 모진 세파 속에서, 못된 사람들의 사이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밟히는 가운데 목숨을 연명하기에 급급한 것 외에 아무 것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구주를 알지 못했으면, 혹 이 땅에서는 좀 잘 먹고 잘 살았다 하더라도 결국 영벌의 지옥을 향하여 한 걸음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는 죽음의 수용소나 사실 아무 다름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 어떤 모양으로 살더라도 우리는 사단의 종이 되고 물질을 우상으로 좇는 가운데 비참하기 짝이 없는 짐승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의 주인 하나 잘못 만나면 문자 그대로 인생 끝장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라는 왕을 만나고 그분을 모시고 따르게 된 후에는 완전 딴판이 되었습니다.
  일단 이 분을 자기 인생의 대장으로 따르기만 하면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악한 세력 앞에서도 용감히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일단 이 예수님을 내 구세주로 따르게 되기만 하면 지금 당장은 무슨 모진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일단 목숨만은 확실히 건져놓은 든든한 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실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주님을 모시게 된 저와 여러분이야말로 행운아 중의 행운아이며 복 중의 복을 타고난 백성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야곱의 별'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금세와 내세에서 왕으로 모시고 살 수 있는 것 - 오직 선민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최상의 축복을 결코 놓치거나 빼앗기지 아니하고 끝까지 붙드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본문 끝절에 "25발람이 일어나 자기 곳으로 돌아갔고 발락도 자기 길로 갔더라"고 기록했습니다.
  모압 왕 발락은 이스라엘이 야곱의 이름으로 받은 복을 끝내 조금도 건드릴 수 없었습니다.
  이방 선지자 발람은 아무리 돈 받고 하고 싶어도 이미 하나님께서 복 주시기로 작정해놓으신 이스라엘을 입으로 저주하는 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두 손 번쩍 들고 떠날 수밖에 없었고, 축복의 조상 야곱의 이름을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약속되고 선포된 '출애굽이라는 장막'과 '메시야라는 별'의 축복은 아무도 막을 길 없이 고스란히 성취되고야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선조들 역시 저와 여러분에게 이 두 가지 복을 남겨주고 가신 '축복의 선조'들이 아니었겠습니까?
  돌과 나무 앞에 손 비비고 무당 앞에 복채를 갖다 주고 죽은 조상의 묏자리 잘 고르면 복 받을 수 있다고 하던 '사술'들만 가득했던 이 나라였습니다.
  '발락'과 '발람'이 판을 치던 곳이 바로 옛날의 우리 조국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런 나라에서 우리의 신앙 선조들은 참된 복을 우리에게 전해 주기 위하여 일제와 공산주의자들을 상대로 목숨을 건 싸움을 싸우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분들의 순교의 피 때문에 저와 여러분들은 '참된 진리의 신앙'과 그 '신앙의 자유'라는 이 진짜 복을 오늘까지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난 2006년은 대한민국이라는 사회를 볼 때에는 그렇게 복스러운 한 해는 아니었습니다.
  분명히 간첩 활동을 한 사람들이 민주화 유공자라는 미명으로 국가로부터 연금까지 받게 되는 등 계속 불거지는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으로 인하여 국내 정세는 날이 갈수록 불안해졌으며, 소위 '햇볕정책'이라는 선심의 대가로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기가 막히게도 공산독재자 김정일의 원자폭탄 선물이었습니다.
  "경제는 잘 되어 가는데도 서민생활은 어렵다."라는 어처구니없는 억지를 펴는 위정자들로 인하여 경기는 계속 밑바닥을 맴돌 수밖에 없었으며 얼마 전에는 부동산 가격까지 폭등함으로써 엎친 데 또 덮친 연말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외적 불안 요소들이 결코 건드릴 수 없었던 것, 이 불신 사회가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것이 우리에게는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바로 저와 여러분이 지난 한 해 동안에도 이 '교회'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받고 누렸던 복들입니다.
  '야곱의 장막' 안에 사는 이 든든한 영적 안보와 '야곱의 별'을 내 인생의 유일한 주인으로 섬기며 따라가는 이 믿음직한 영적 리더쉽은 아무도 건드릴 수 없었고 물론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입니다.
  올해도 주일마다 내게 십자가 구원확신을 굳게 붙잡게 해주었던 이 '아름답고 물댄 동산' 같은 경향교회, 날마다 내 원수를 물리치게 하셨고 끝내 사망 권세까지 이기게 하실 '금세와 내세의 영원한 주권자' 예수 그리스도 - 2006년 내내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했던 이 불변의 축복을 진정 감사하면서 주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이 복을 계속 누리는 '야곱의 자손'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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