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우리의 희망 (예레미야 33:14-16)
미국 미시간주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헨리 포드(1863-1947)는 너무 가난하여 초등학교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배우지 못한 것은 평생에 한으로 남는 법입니다만 포드는 어려운 중에도 꿈과 희망은 대단했고 특히 사물을 보는 관찰력은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는 학교에는 다니지 못해서 15세에 이미 공장에 들어가 자동차 제작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자기 옆을 지나가는 마차를 물끄러미 바라다 보면서 "내가 말없이 가는 차를 만들어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부터 자동차 제작에 대한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명실상부한 자동차 왕이 되었습니다. 그의 회사가 만든 자동차가 세계 시장의 70%를 차지할 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의 디트로이트에 있는 기념관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습니다.
"헨리 포드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그의 아내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는 청년시절 한 친구와 매일 성경 한 장씩을 꼭 읽자고 약속했는데 두 친구는 그것을 실천하였습니다. 포드의 그 친구는 세계 1차 대전 때 미국 대통령이었던 '우드로우 윌슨'(Wilson, Thomas Woodrow, 1856∼1924)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하루에 한 장씩 꼭 읽겠다고 약속하고 실천했는데 하나는 미국 대통령이 되었고 하나는 자동차왕이 되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가 어느 날 포드를 만나러 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포드는 세계 최대의 기업을 경영하는 사업가인데다가 78세의 노인이었기 때문에 피곤에 지쳐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카네기는 포드에게 나이 많은 대 사업가로서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포드는 "아닙니다. 제가 하는 모든 일은 사실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심을 믿기 때문에 피곤할 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예레미야 또한 조국의 패망을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하나님 안에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한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야 시대에 남왕국에서 예언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그때는 이미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당한지 100여 년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런데 요시아 12년(B.C. 629년) 앗수르의 앗수르바니팔이 그의 아들 신사이르스쿤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부터 앗수르는 점차 쇠약해지지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앗수르바니팔이 죽은지 20년 만에 앗수르는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근동지방의 패권을 잡은 제국은 바벨론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새로운 실력자로 부상한 바벨론 제국의 느부갓네살은 50년 동안 집권하면서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 지역을 평정하였습니다. 그 와중에 남유다는 국제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헤매다가 기원전 597년 3월 16일에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이 함락당하고 말았습니다. 포로로 끌려간 여호야긴 대신 왕이 된 시드기야는 이집트의 사주로 또 다시 바벨론에 대해 반역을 단행하다가 느부갓네살의 2차 침공을 자초하고 말았습니다. 기원전 588년부터 3년 동안이나 예루살렘을 포위 공격한 느부갓네살에 의해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유다는 마침내 기원전 586년 여름, 예루살렘성이 불타고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조국의 불행을 목격하면서 예언활동을 했던 비운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만 이스라엘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보고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국가적인 위기와 함께 개인적으로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처해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와 절망의 때에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은 대림절 첫 주일에 새로운 희망으로 우리에게 다가 올 것입니다.
1. 절망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기도 뿐입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포로로 잡혀간 여호야긴 왕의 삼촌으로서 21세의 나이에 느부갓네살이 왕위에 앉혀 놓은 인물입니다. 우유부단한 시드기야는 궁중내의 친바벨론파와 친앗수르파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다가 589년에 바벨론에 대항하다가 바벨론이 588년에 예루살렘을 포위하자 당황하여 예레미야를 불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예레미야의 대답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포로로 끌려갈 것이고, 유다는 패망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궁중에 있는 시위대 뜰에 가두고 말았습니다(렘 32:1-5).
다윗 왕조가 끝장나고 예루살렘 성전이 불에 타 없어지는 전대미문의 비극적 사건을 앞두고,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예레미야는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하였습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너에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한 예레미야에게 힘써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기도한들 이미 패망의 길을 걷고 있는 유다민족과 감옥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예레미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보통사람 같으면 기도할 의지도 꺾여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렘 33:2), 즉 전능하신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기도하기만 하면 "크고 비밀한 일"을 보여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크고 비밀한 일"은 다름 아닌 유다 회복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체로 가득찼던 예루살렘을 다시 번성하게 하시고, 인적이 끊긴 성읍을 다시 기쁨이 넘치게 하고, 사람도 짐승도 없는 황폐한 성읍을 양무리가 가득한 평화로운 땅으로 만들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렘 33:10-12).
이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예루살렘이 포위되어 있는 당시 상황으로써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멸망해 가는 유대나라가 어떻게 이런 아름다운 세상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절망의 순간에서도 기도하고 부르짖는 자에게 그러한 아름다운 환상을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인 정경화씨가 미국의 줄리아드 음대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낙심이 되었습니다. 너무 잘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도저히 그들과 경쟁할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지도 교수님을 찾아갔습니다. "선생님, 제가 훌륭한 연주자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러자 그 교수는 물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격려하면서 "전심전력으로 연습해라. 그리고 기다려라"고 당부했습니다. 그 뒤 그녀는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서 기도하는 가운데 훗날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녀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어떤 일이 있어도 열심히 기도하고 하나님께 부르짖읍시다. 기도하고 또 기도하면서 부르짖고 기다립시다. 하나님은 우리가 계획했던 것 보다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2.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궁중감옥의 절망적인 상황속에서도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크고 비밀한 일"을 주시며 또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보라 내가 이 성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강과 성실함에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유다의 포로와 이스라엘의 포로를 돌아오게 하여 그들을 처음과 같이 세울 것이며"(렘 33:6-7)
하나님의 약속은 비록 유다 백성이 죄를 지었지만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심판으로 끝나지 않고 다시 회복시켜 주신다는 것입니다. 실상 하나님의 징계는 우리를 벌하거나 망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회개하고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기뻐하며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알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을 깨닫지 못하여 걱정과 두려움, 불평과 원망에 휩싸이게 됩니다. 요사이 우리 국민들은 경제적인 불황 속에서 살기 어렵다고 야단입니다. 위정자들을 원망하고 세상을 탓합니다. 정말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면 기뻐할 일도, 감사할 일도 없습니다. 희망은 없고 절망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바벨론 군대의 포위 속에서도 새로운 희망을 약속해 주시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시절에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하동굴 카타콤에 숨어서 비참한 생활을 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기쁨으로 살았습니다. 그것은 현재의 고난이 장차 다가올 영광에 비할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롬 8:18). 그리스도인들이 결국에는 승리할 것을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은 보통 은혜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일시적인 고난과 역경을 주시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회복됩니다. 다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께 감사 찬양할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승리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3. 신앙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납니다.
유다 민족이 회복되는 날,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자손 주에서 이상적인 통치자가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날 그 때에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공평과 정의를 실행할 것이라"(렘 33:15) 하나님께서는 공평과 정의로 다스리는 이상적인 통치자가 나타남으로써 유다 민족의 회복이 완성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공평과 정의를 실행한다는 것은 약자들을 돕는 것입니다. 이는 요시야 임금을 평가하는데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신원하고 형통하였나니 이것이 나를 앎이 아니냐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2:16) 요시야 임금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위해 공평과 정의를 행함으로써 형통케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 계약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유다의 왕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돌보는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황폐화된 유다의 회복은 다윗의 후손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공평과 정의를 실행하는 통치자로 인하여 완성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보통 임금들은 자신의 권력을 쌓고 보존하는데 국력을 사용했지,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는 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역사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그 많은 나라들이 지금은 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를 실천하는 나라나 지도자들을 크게 써오셨습니다.
미국의 스텐포드 대학에 다니던 두 학생이 등록금을 낼 수 없는 현편에 처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으로 폴란드가 낳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파데레브스키(Paderewski)를 초청하여 음악회를 열어 그 수익금으로 등록금을 해결하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들은 출연료 2,000달러를 책임지고 지불하겠다는 약속 아래 열심히 연주회를 준비하였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연주회 결과는 예상과는 빗나가 오히려 적자를 보고 말았습니다. 총수익금이 고작 1,600달러였으니, 등록금은커녕 매니저와의 계약금도 치룰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할 수 없이 수익금의 전부와, 모자라는 400달러는 앞으로 갚겠다는 서류를 만들어 파데레브스키에게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의 취지를 뒤늦게야 알게 된 음악가는 가난한 학생들로부터 받은 1,600달러를 다시 돌려주면서 학비로 사용하라고 했습니다. 그후 오랜 시간이 흘러 파데레브스키는 폴란드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는데, 당시 세계 대전이 발발하여 폴란드 국민이 굶주림에 허덕이게 되었습니다. 파데레브스키는, 심각한 기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미국에 식량 원조를 요청할 길밖에 없다고 판단하여 원조를 요청하려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미 많은 식량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에 미국 대통령 후버(Herbert Hoover, 미국의 31대 대통령)를 찾아가 정중히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러자 후버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번 세계 대전으로 폴란드가 기아 문제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것 같아 보내드렸을 뿐입니다. 기억이 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어렵게 대학을 다니던 시절 등록금을 내지 못하는 곤경에 처해 있을 때, 당신이 연주회를 하고 돌려 준 돈은 제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눅 10:30-37)에서 강도 만난 자를 도와줌으로써 사랑을 실천한 이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닌 당시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인 같이 존경받는 종교인들보다 이웃사랑을 실천한 사마리아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율법을 가장 잘 따른 사람이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이웃의 아픔을 알고 눈물을 닦아주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이 곧 참 신앙인이요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축복받는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감사하며 공의를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참 신자요,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사람임을 깨닫고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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