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름에 합당하게 사는 삶
2002-04-13 14:53:45 read : 1258
엡 4:1-6 // 20020407
< 따뜻한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일으킵니다 >
2차 대전 때에 <폴 틸리히>라는 유명한 독일신학자가 미국에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대학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은 그의 독일식 발음에 자주 웃었습니다.
그런 비웃음에 깊은 우울증에 빠졌는데 어느 날 한 학생이 카드를 보내왔습니다.
"교수님! 학생들의 웃음은 교수님의 발음 때문이지 강의내용 때문이 아니랍니다.
교수님 강의는 너무 훌륭해요. 우리는 다 교수님을 사랑해요. 힘내세요. 교수님!"
그 카드 한 장이 폴 틸리히를 일으켰습니다. 나중에 그분은 강조합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의 위로도 필요하지만 주님을 믿는 사람의 위로도 필요합니다."
왜 마음이 허전합니까? 위로하고 위로 받는 삶이 필요하다는 싸인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고통이 넘쳐 있는 세계입니다.
전쟁, 테러, 환경 파괴, 경제적인 어려움, 해고, 인간관계의 갈등이 가득합니다.
그러나 세계에만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도 고통이 참 많습니다.
이 마음의 고통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0장 24-25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우리는 단순히 '내가 사람을 사랑하고 선행을 하는 삶'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모이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 부름에 합당하게 사는 삶의 3가지 의미 >
우리는 상처 많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이 말씀에서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말은 무슨 의미를 가진 말일까요?
1. 첫째, 목적이 있는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사실상 이 세상의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부름 받은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인생도 하찮은 인생은 없고, 어떤 일도 하찮은 일은 없습니다.
혹시 길을 가다가 아스팔트길을 뚫고 나온 들풀을 보신 일이 있습니까?
연약한 풀잎이 딱딱한 아스팔트길을 뚫고 나온 것이 너무 신기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모습입니까? 그것이 바로 생명의 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이 세상에 하찮은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풀잎 하나조차 하찮은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생명은 얼마나 더 소중합니까!
또한 우리가 생명의 창조주인 하나님께 예배한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한 일입니까!
우리는 가끔 비전의 중요성을 말하는데, 그 비전이 참된 하나님의 비전이 되려면
반드시 어떤 일도 하찮게 여기지 않는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하는 태도, 좋은 일을 하려는 태도!
그러한 태도는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니라 우리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일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 하나님께 찬송하는 것! 그것도 결코 하찮은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가 실패할지라도, 하나님은 그 실패조차 멋있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특히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를 하나님의 걸작품이라고 말합니다(엡 2:10).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을 향한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이 꾸미는 우리의 계획보다 훨씬 더 훌륭한 계획을 꾸미십니다.
'걸작품'이라는 말은 헬라어 '포이에마(poiema)'라는 말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서 영어의 '포임(poem,시)'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즉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의 시, 하나님의 걸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세상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만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몸매가 좋지 못하고, 얼굴도 잘생기지 못하고, 말까지 더듬는다면
그분의 마음에 진정으로 만족이 있을까요? 대개 없습니다.
어떤 남자가 돈도 하나도 없고, 그저 그렇게 생겼다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대개 학력, 부, 외모, 능력으로 사람들을 평가하기 때문에
돈 없고, 배경이 없는 사람들은 자기에 대한 확신을 가지기 힘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가치가 능력이나 인기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 모두를 하나님의 시요,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지금보다 더 아름답고 가치 있게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산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작품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열심히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살아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한 일을 많이 하라고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선행으로 구원받지는 않았지만, 선행을 실천하라고 구원받았습니다.
즉 선행이 결코 구원의 이유는 될 수 없지만, 구원의 결과로 선행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으면.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좋은 일 많이 하시도록 우리를 내어드려야 합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분들로서 선한 일을 많이 하겠다는 목표를 가지십시오.
그러한 목표를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는 삶'입니다.
그런 삶이 없으면 영혼은 굶주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4장 34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우리에게 힘을 주는 먹는 행위와 똑같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수록 우리의 영혼과 육신은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2. 둘째, 성숙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본문 2절 말씀을 보십시오.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이 말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그리스도인답게 성숙하게 살라는 말입니다.
성숙함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겸손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절에서도 성숙한 삶의 첫 번째 요건으로 겸손함을 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겸손하면 넘치게 주어지지만 교만하면 어느새 사라져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교만한 마음과 태도를 가져서는 안됩니다.
능력은 없고 마음만 높은 것이 아니라 능력은 갖추되 마음은 낮춰야 합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 95년 1월 호에 실패한 사람들의 8가지 습관이 나와 있습니다.
1) 약속을 잘 깨는 자기 기만적 태도 2) 노력이 없는 태도 3) 친구들을 무시하는 태도
4) 예의 없는 태도 5) 남과 어울리지 못하며 사는 태도 6) 항상 부정적인 태도
7) 쓸데없는 논쟁을 괜히 일으키는 태도 8) 우선 순위를 상실한 태도라고 합니다.
이 모든 태도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교만으로 요약됩니다. 결국 교만이 문제입니다.
그리고 성숙을 위해 또 하나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시간입니다.
호박은 3달이면 충분히 자라지만, 믿는 사람은 3달만에 성숙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호박과 같은 성도보다는 참나무처럼 견고한 성도를 더 원하십니다.
그래서 참된 성도가 되려면 시간과 경험과 무엇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사랑은 쉽게 성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아는 사람은 사소한 일에 금방 짜증을 내지 않고 침착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원자폭탄처럼 짜증을 탁 내버리고 나서 나중에 변명합니다.
"성질을 내서 미안하지만, 아시잖아요? 저는 뒤끝이 없어서 금방 풀잖아요?."
폭탄을 터뜨려 사람을 죽여 놓고 자기는 풀었다고 하니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태도입니까?
자기는 금방 풀겠지만 상대방에게는 그 행위가 얼마나 큰 데미지를 주는지 모릅니다.
성질 내는 것은 아무리 적게 내도 상대방에게 대단히 큰 상처를 남깁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감정적인 사랑이 아닌 성숙한 그리스도인다운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서 항상 다른 사람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우는 사람들이 되어야지, 헐고 뜯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살랑거리는 말로 남에게 아첨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세워주라는 것입니다.
'남에게 아첨하는 것'과 '남을 세워주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너무 상처를 잘 받는 존재이기에 서로 격려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누군가 마음이 상했을 때 그분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왜 상처를 입에 되었는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필요합니까? 적절한 충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분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이해요, 같이 있어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큰 어려움에 빠지면 대개 심한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님의 또 다른 이름이 '보혜사'라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보혜사'라는 말의 원 뜻은 '우리 옆에서 우리가 부를 때 계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령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고, 조용히 우리 말을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어떤 일보다 '함께 있어주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충고'를 진지하게 주기보다 '우리 자신'을 진지하게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하듯이,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형제들의 말을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듣는 귀도 주셔서 듣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우리는 듣기를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사실상 '말하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욱 소중한 헌신과 봉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좋은 소식(복음)을 주셨지 좋은 충고를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남에게 좋은 충고를 주기보다 우리 자신을 주기에 더욱 힘써야 합니다.
3. 셋째, 하나가 되어 살라는 말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이 말은 한 몸 안에서 서로 교제하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고독한 종교가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서로 OO하라!"고 30번 이상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고독하게 사는 것은 모순입니다.
참 제자의 모습은 교회라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 있어야 발휘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밖에서 잘하기 전에 먼저 교회 안에서 잘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정의감이 넘칩니다. 그래서 "교회가 바르게 되어야 해!"라고 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는 관대하게 대하면서 교인들에게는 참으로 엄격하게 대합니다.
여러분! "교인이니까!"라고 하면서 같은 교인들에게 너무 엄격하지 마십시오.
언뜻 보면 그런 언행이 정의인 것 같지만 오히려 가장된 정의일 수도 있습니다.
교인들도 연약한 줄 알고 따뜻한 눈으로 그들을 먼저 품을 줄 알아야 합니다.
자세히 보면 "요새 교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못해!"라고 말하는 분보다
"교인도 부족하지!"라고 교인을 품을 줄 아는 사람들이 진짜 정의로운 분들입니다.
우리는 가짜로 정의를 내세우는 분들의 모순을 가정에서 흔히 발견합니다.
어떤 사람은 밖에 나가서는 그렇게도 상냥하고 헌신적이고 많이 이해해줍니다.
그런데 집에만 들어오면 처자식에게 험한 말을 하고, 이해심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 모습은 그의 남을 향한 사랑과 이해심이 거짓과 위선임을 폭로해줍니다.
자녀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자라면 자녀도 헛된 정의감이 넘치게 됩니다.
그처럼 자기 식구를 이해하지 않고 남에게만 잘하는 행동은 위선에 가깝듯이
자기 교회와 교인을 사랑하지 않고 하는 정의로운 말은 거의 위선에 가깝습니다.
여러분! 교회를 한번 더 이해하시고, 교회를 한번 더 이해하는 훈련을 하십시오.
우리는 항상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예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나 친구나 자녀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표현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표현입니까?
'신부!' 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그 단어는 헌신과 사랑과 친밀성이라는 개념을 가장 잘 보여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무 생각 없이 교회를 그분의 신부라고 표현했을까요?
아닙니다. 그 말은 주님께서 교회를 그토록 사랑하시고 아끼신다는 말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는 가장 위대한 꿈의 산물입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영원히 지속시킬 것이고, 어느 누구도 교회를 파괴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보존할 책임이 있습니다.
가끔 보면 교회에서 사소한 일로 싸우는 모습을 봅니다.
본당 페인트 색깔을 어떤 색깔로 하고, 피아노는 어느 편에 놓을지 하는 문제로
교회의 아름다움이 훼손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 새 오르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인들이 강단의 어느 쪽에 그 오르간을 놓아야 하는지에 관해
큰 분쟁에 휘말리다가 마침내 그 교회가 깨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그 조그만 지역에 교회가 두 개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르간이 강단 오른쪽에 있는 교회와 오르간이 강단 왼쪽에 있는 교회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내적 갈등은 외적 핍박보다 훨씬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세 가지 개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첫째, "갈등과 차이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차이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갈등은 그 차이가 교회의 소중한 정체성을 훼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에 차이는 있을지라도 갈등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갈등은 교회를 무력화시키기 때문입니다.
둘째, '해결과 화해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어떤 문제가 모든 사람들이 속시원하게 해결되지 않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지라도 사람들끼리 화해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하도록 차이를 억지로 없앨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차이가 있어도 우리는 화해의 정신을 가지고 서로 섬겨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회의 하는 모든 일에 다 똑같이 동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항상 뒤의 일은 잊어버리고 용서와 화해의 정신으로 전진해야 합니다.
셋째, "평화롭게 사는 것과 평화를 만들며 사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평화롭게 사는 사람은 수동적으로 평화를 즐기면서 살지만,
평화를 만들며 사는 사람은 능동적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면서 삽니다.
여러분! 모두 능동적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면서 사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들 사이에 여러 차이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도 서로 화해하며 살아야 합니다.
오늘 성찬식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의 생명공동체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여러분을 통해서 항상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따뜻한 평화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분당 사랑의 교회)
< 선교사의 꿈을 가진 분들을 위한 안내말씀 >
미국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기독교선교연합회, 약칭 C&MA)에 의해 설립된 미국 최초의 신학대학(Bible College)으로 시카고에 있는 휘튼(Wheaton) 대학과 함께 미국 복음주의의 양대산맥으로 여겨지는 나약대학(Nyack Bible College)과 그 대학교의 신학대학원인 얼라이언스신학대학원(Alliance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선교사의 꿈을 가지고 공부해보세요.
C&MA(http://www.cmalliance.org)는 미국 내에 2천 개의 산하교회와 20만 명의 성도, 전 세계에 3만 5천 개의 선교지 교회와 300만 명의 선교지 성도가 소속된 교단으로, 현재 미국에서만 전 세계로 120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교단입니다. 세계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미국에서 공부하기를 원하는 분들은 이곳의 문을 두드려보세요. 저희들에게 전화를 주시면 자세히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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