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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의 재물로 (눅 16장 1-15절)

by 【고동엽】 2022. 8. 28.

불의의 재물로  (눅 16장 1-15절)

중세 로마 천주교에서 한 때 크게 유행한 것이 바로 수도승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든 사생활과 세속을 등지고 최소한의 수준의 생활만 하면서 자신을 수양시키려 했던 자들로서, 소위 '청빈(淸貧)이라는 귀부인'을 사모하며 사는 자들이라고 추앙되었었습니다.
  반면에 교황청은 최대의 부동산 소유 기업이 되고 사제들은 돈방석에 앉는 등, 양극단의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 이율배반적인 물질관은 오늘날의 종교인들에게서도 여전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지간한 소위 고승들이 무슨 월간 잡지 인터뷰 같은 데에서 정말 흔하게, 아니 거의 예외가 없이 포함되는 소위 도 닦는 요령이란 것이 바로 '무욕(無慾), 무소유(無所有)'라는 것들 아닙니까?
  그러면서도 사찰이나 종단이 소유하고 있는 돈은 또한 엄청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중에 한명인 칼빈은 이처럼 세상 재물을 무조건 악한 것으로 보는 사고방식이 결코 경건한 것도 아니며 참된 성경적 원리가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재물을 버는 것은 지극히 정당할 뿐 아니라 성실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자세라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칼빈의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한 생각이 바로 오늘날의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혁주의 기독교는 재물을 경멸하고 사는 것이 거룩한 경건생활이라고 믿지 않으며, 참된 기독신자들은 '깨끗한 가난뱅이'가 되는 것을 자기 인생의 목표로 하여 살지는 아니합니다.
  그 대신 사람이 재물에 대하여 어떻게 바로 판단하고 그것을 어떻게 열심히 벌고 어떻게 잘 써야 할지를 정확하게 가르치고 실천하려 합니다.
  그리고 실상 이것은 칼빈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사실이었고 칼빈은 그 원리를 성경을 통하여 발견하고 정립했을 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됩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우리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기독신자의 올바른 물질관'이 무엇인지를 두 가지 요점으로 나누어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사람은 자신이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재물을 맡은 청지기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본문 1절로 9절에 기록하기를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 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고 기록했습니다.

  나중에 14절에 보면 바리새인들도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 확실하지만, 원래 이 비유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말씀이었습니다.
  여기 등장하는 어떤 부자의 "청지기"라는 것은 당시 사회에 있던 특별한 직업으로서, 부자인 주인이 자기 종들 중에서 가장 믿을만하고 실력 있는 사람을 뽑아서 자기 재산 관리를 완전히 맡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청지기'의 충성심과 능력에 따라 그 주인의 재산 증식 여부가 결정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 비유에서는, 그렇게 믿고 맡긴 자기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 주인은 그를 해임시키면서 "네 보던 일을 셈하라"고, 즉 그 하던 업무를 후임자에게 물려 줄 수 있도록 마지막 장부 정리를 하라고 명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 청지기는 아주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 자리 쫓겨나면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했던 것입니다.
  "땅을 파자니" 그동안 책상 앞에 앉아 '펜대만 굴리고' 있었던지라 그런 육체노동을 감당해낼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거지처럼 구걸하여 "빌어먹자니" 정말 창피한 노릇이어서 차라리 굶어 죽느니만 못하게 여겨졌습니다.

  고민 끝에 그는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원문의 뉘앙스를 그대로 살리자면, "그렇지!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하고 무릎을 탁치면서 하는 말입니다.
  그는 곧 무직이 될 때를 미리 대비해서 지금 아직까지는 앉아 있는 자기의 청지기 직분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는 법을 생각해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주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채무자들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채무자들과의 빚 문서나 장부 따위는 당연히 그 청지기가 관리하고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당장 그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낱낱이" 불렀습니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씩 은밀하게 면담을 했던 것입니다.
  제일 처음 만난 사람은 그 주인에게 "기름 백 말"을 빚졌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계량 수치로 따진다면 약 3,500리터에 가까운 양의 기름이니 엄청난 액수였음에 틀림없습니다.
  그 청지기는 그 사람의 빚 문서를 기름 "오십 말"로 고쳐 쓰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 사람은 "밀 백석"의 빚을 그 주인에게 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약 600마지기의 밭에서 생산되는 한 해의 수확량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그 청지기는 그것을 "팔십 석"으로 고쳐 쓰게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는 문서를 날조함으로써 그 채무자들의 빚을 주인 허락 없이 마음대로 탕감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가 파면당할 때, 그 채무자들이 자기 은혜를 기억하고 생활 뒷바라지를 해 줄 것이라 계산했던 것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말해서 정말 아주 약삭빠른 보신책이요 간교한 처세술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좀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조금 전에 자기 소유를 허비했다는 이유로 청지기를 파면하려 했던 그 주인이 지금 자기가 받을 빚돈을 마음대로 줄여 버린 청지기를 왜 칭찬했겠습니까?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돈을 빌려 주고 이자를 받는 것은 율법에서 금하고 있는 까닭에 원칙적으로 못할 일로 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인지라 역시 이자놀이는 공공연히 성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주인이 원래 받을 빚돈에 이자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그 청지기가 탕감해 준 액수를 비교해 볼 때 충분히 짐작될 수 있습니다.

  그는 기름 백 말 빚진 사람은 반을 감해 주었지만 밀 백석 빚진 사람은 오분지 일만 감해 주었습니다.
  물물교환이 흔하던 당시 사회에서 기름은 밀에 비해서 훨씬 더 가치가 높은 품목이었습니다.
  가짜를 만든다든지 다른 것을 적당히 섞기가 어려운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에도 환전하면 꼭 같은 가치가 되는 화폐라 할지라도 미국 '달러'와 러시아의 '루블'이 그 신용성에서 차이가 있듯이, 당시의 기름은 밀에 비해서는 훨씬 더 유력한 양화(良貨)와도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연히 기름에 대한 이자율도 밀보다는 높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여기서 청지기가 마음대로 탕감해 준 액수는 바로 그 이자에 해당되는 만큼이었다고 보입니다.
  그래서 기름 꾸어 갔던 사람은 많은 액수를, 밀을 꾼 사람은 상대적으로 적은 액수를 탕감 받았던 것입니다.

  이 주인은 아마도 그 때문에 난처한 입장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기 청지기가 이미 빚 문서 원본을 다 없이해 버리고 새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니 그 원래 받을 빚돈을 다 받아 내려면 모든 사실이 공개적으로 드러나게 되기 마련인데, 그렇게 되면 자기가 이자놀이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불경한 자로 낙인찍히게 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청지기를 그저 잘했다고 칭찬해 줌으로써 자기 체면을 세울 도리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목적이 이런 세상 사람들의 꾀 많은 처세술 그 자체를 칭찬하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비유의 의도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즉 자기 인생 살아가는 문제만 놓고 따질 때, 이 세상의 불신자들이 아주 철저하고 똑똑하게 처신한다는 사실을 말씀하시고자 이런 비유를 드신 것이었습니다.

  불신자들이 특히 어떤 면에서 더 지혜로운 처세술을 보입니까?
  그것은 자기 인생의 미래를 예비하는 면에서 그러합니다.
  이 비유의 결론에 해당되는 9절의 말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는 말씀이 바로 이것을 나타냅니다.
  이 "옳지 않은 청지기"도 자기 인생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이처럼 "지혜롭기" 그지없었습니다.

  또한 여기서 "불의의 재물"이란 말은 '불법적인 재물'이란 뜻이 아니라 '세상적인 재물' 즉 '세속의 재물'이란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 청지기는 이 세상의 재물을 사용해서 친구를 만들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장래에 실직 당할 때를 대비하는 지극히 세상적인 지혜를 보였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빛의 아들들"은 이 세상의 재물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사용함으로써 자기 인생과 내세의 "영원한 처소"를 위해 미리 준비할 줄 아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 이 비유의 요점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유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부인하는 신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유독 재물만큼은 철저히 자기가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착각이겠습니까?
  에덴동산에서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세상 만물을 맡아 다스릴 직책을 주셨습니다.
  즉 이 물질세계를 활용하여 재물을 얻는 과정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처럼 세상 만물에 대한 청지기의 직분을 주셨기 때문에 따라온 결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자기 재물의 주인인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실은 착각 정도가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엄청난 교만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재물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평생을 통하여 항상 더 많은 돈 모으기에만 급급할 것이며, 또 일단 모든 돈은 아까워서 제대로 쓸 수 없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이 청지기인줄 알면 사람은 돈을 쓰는 면에 있어서는 훨씬 더 부담이 적고 자유롭게 되는 법입니다.
  자기가 영원히 가질 재물이 아닌 줄 알고 있으니, 그 재물을 맡아 관리하는 기간 동안 자기의 미래를 위하여 그 재물을 지혜롭게 잘 쓰려고 애를 쓰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버는 돈은 사실은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의 명의로 저금통장에 들어 있는 돈도 결코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닙니다.
  그 돈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그 돈을 잘 사용해야 할 사명과 함께 기회와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신자는 이처럼 자신이 재물의 '소유주'가 아니라 '관리자'인 것을 깨달아야만 그 재물을 바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아무 것도 부족할 것이 없는 저 영원한 처소에 들어가기 위하여, 오늘 이 세상에 살 동안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재물을 바로 사용할 줄 아는 청지기의 신분을 꼭 자각하는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

  2. 사람은 재물을 주인으로 삼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충성스럽게 섬기는 데에 사용해야 합니다.

  10절 이하 13절 말씀에 기록하기를 "10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11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12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13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재물의 주인이 아니라 재물 맡은 청지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를 여기서 예수님께서 강조하고 계십니다. 재물을 바로 쓸 줄 아는 것은 바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이며, 재물을 하나님 섬기는 일에 쓸 줄 모르는 것은 바로 "작은 것에 불의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곧바로 "큰 것"에 충성할 수 있느냐 없느냐로 직결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신자가 과연 '죽도록 충성'하는 순교자적인 큰 신앙인이 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그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께 충성할 줄 아느냐 모르느냐 하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예수님께서는 또한 "불의한 재물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지극히 당연한 논리입니다.
  우리가 세상 재물 가지고 충성하는 법조차 모른다면 하나님께서 도대체 어떻게 '참된 것' 정말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한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맡기실 수가 있겠습니까?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주겠느냐"고 또 반문하셨습니다.
  이 말은 '만일 남이 맡겨 준 재물을 가지고 열심히 일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에게 잘했다고 너희 몫을 떼어 주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즉 재물이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청지기의 자세로 충성치 아니하면, 어떻게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속한 몫이 될 참된 복을 내려 주실 수 있겠느냐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원리에 어김없이 직결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 "하인"이란 말은 '종'이나 '노예'를 뜻하는 말입니다.
  신실한 종업원이나 사원이라면 자기 회사 사장과 경쟁사 사장 사이에서 양다리를 놓을 수 없지만, 특히 옛날 사회의 종의 신분에서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것은 더욱 그러합니다.
  그 당시에 만약 종이 그런 행위를 저지른다면 주인은 그 종을 당장 죽일 수도 있을 만큼 중범죄에 해당되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어떤 종이 자기는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고 한다면 그 내면의 실제상에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경우를 두고 예수님께서는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에 틀림없다고 단정하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만일 자기는 재물도 좋지만 하나님도 좋다고 여기고 있다면, 사실은 그 둘 중에 오직 하나만을 사랑하고 귀중히 여기고 있는 것이며 그 나머지 하나는 실상 미워하고 가볍게 여기고 있는 것임에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는 사실은 이 세상의 그 어느 누구에게도 예외가 있을 수 없는 철칙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가 재물의 주인인 줄로 아는 것도 큰 착각이지만, 또한 거꾸로 재물이 자기의 주인이 되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자보다도 훨씬 더 위험한 상태입니다.
  주인이 무엇입니까?
  종을 자기 마음대로 부리는 사람입니다.
  재물이 사람의 마음을 붙잡고 통제하고 있으면 그 사람은 이미 그 재물의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돈 버는 일을 중심으로 자기의 인생을 계획하고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돈 욕심에만 가득 찬 마음으로 일과를 시작하고 저녁에 자리에 들 때마다 돈 문제가 머리에 꽉 차서 근심거리가 되면, 바로 그것이 이미 재물을 자기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인생인 것입니다.

  우리는 재물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만들지 말고, 오직 그 재물을 우리의 참된 주인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사용할 줄 아는 충성스러운 청지기가 되어야 합니다.
  재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 줄 아는 것,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에 크게 충성된 일군이 되기 위해서 제일 기본적으로 가져야 할 섬김의 자세인 것입니다.

  목사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로서, 말씀 전하는 일에는 죽도록 충성하겠지만 헌금하는 것은 오직 교인들만 알아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사실은 '죽도록 충성'은커녕 아직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줄 모르고 있는 목사입니다.
  몸으로만 때우는 일에는 남보다 앞서서 모범을 보이겠지만 재물로 주의 나라 위해서 섬기는 것은 그저 남만큼 평균치만 하겠다는 장로나 집사는, 실상은 지극히 작은 일에서부터 아주 불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직분자들이나 그런 교인들은 자신이 정말 어느 쪽을 진짜 주인으로, 아니 단 한 명의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지 스스로 솔직하게 반성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나란히 두고서 '너희가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은 우리의 정곡을 그 얼마나 정확하게 찔러서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너희가 하나님과 부모를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든지, '너희가 하나님과 자신의 학벌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든지, '너희가 하나님과 세상 권력자를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더라면, 아마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 말씀에 아무 부담도 받지 아니하고 그저 '아멘, 정말 옳은 말씀이지.'라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고 하시니까, 갑자기 거북하게 들리고 안절부절 못하게 되고 진땀이 나게 됩니다.

  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하필이면 '재물'과 나란히 비교하셔서 듣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처럼 얼굴이 붉어지게 만드시는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사람이 주인으로 섬길 수 있는 대상 중에서 '하나님'과 현실적으로 쌍벽을 이룰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경쟁상대가 바로 '재물'이기 때문입니다.
  실상은 도저히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생들은, 아니 기독신자라고 자처하는 사람들까지도 실제로는 하나님보다는 재물을 더 사랑하고 더 중히 여기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배반을 너무나도 쉽게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정말 누구를 자신의 유일한 주인으로 모시고 있습니까?
  그 대답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아주 간단명료하게 당장 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께서 월급 받은 돈이나 한 주일의 매상을 셀 때와 그 물질의 십일조를 떼어 하나님께 바칠 때, 이 둘 중에 언제 더 행복하십니까?
  구차한 변명의 여지없이 오직 '더 사랑하는' 쪽이 바로 여러분의 실제 주인입니다.
  아파트를 사거나 새 차를 살 때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과 헌당승계나 교육관 계약금 마련을 위해서 백방으로 돈을 마련하는 것, 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중요하며 지극히 당연한 일로 여겨지십니까?
  두말할 필요 없이 '더 중히 여기는' 쪽이 바로 여러분이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쪽일 뿐입니다.
  이것은 목사가 여러분에게 '부담'을 주어서 헌금 더 내라고 '강요'하는 말이 결코 아니라, 바로 우리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양심의 정곡을 콕콕 찔러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재물의 주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사람은 사실상 자신이 재물의 종으로 전락되고 있는 사람인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재물을 하나님 위해 충성하는 일에 쓰는 재미가 어떤 것인지를 조금도 모르고, 그저 재물 모은 것만 기쁘고 그 재물 가지고 나중에 즐길 것만 생각하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은, 이미 그 재물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있으며 하나님 대신 섬기는 우상이 되어 있음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자신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정확히 구별하는 시금석의 말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이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서,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 목적을 위하여 자신의 손에 있는 세속의 재물을 선한 수단으로 사용할 줄 아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14절과 15절에 보면 "14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이와 같은 재물에 대한 가치관을 곁에서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을 비웃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또한 예수님께서는 지적하신 대로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 즉 재물에 대한 가치관에 있어서도 자기네 생각이 확실히 옳다고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내가 애써 벌고 모아 들였으니 당연히 내가 그 재물의 주인이지.'라는 사고방식으로 볼 때, 모든 재물의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사람은 그것을 맡은 청지기의 자세로 재물을 대하고 바로 써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들이 보기에는 그저 코웃음거리 밖에 안 되었던 것입니다. 자기를 재물의 소유주로 아는 것, 혹은 재물을 자기의 주인처럼 섬기는 것 - 이것이 예나 지금이나 바로 '돈을 좋아하는 자'들의 실상입니다.

  기독교는 결코 부자를 무조건 경멸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며 재물 자체를 더러운 것처럼 여기는 수도승들도 아닙니다.
  기독교는 재물의 가치가 제대로 정립될 때, 재물의 주인이 바로 인식될 때, 재물이 쓰여야 할 곳에 바로 쓰이게 될 때, 그 재물은 정말 귀하고 좋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재물이 우상이 되거나, 사람이 재물의 소유주인 것처럼 착각하거나, 재물이 이기적인 목적으로만 사용될 때, 그 재물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어 인생을 찌르고 넘어뜨리며 그런 까닭에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주님께서는 엄중히 경고하신 것입니다.

  '세속의 재물' 그 자체가 거룩하거나 더럽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대하는 사람의 마음자세와 그 쓰이는 용도에 따라 그것은 '불의의 재물'이 되든지 아니면 '거룩한 예물'이 될 수 있습니다.
  만유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재물을 청지기의 자세로 받고, 그 재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충성스럽게 씀으로써,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몫을 받아 누리고 저 영원한 처소에 예비하신 상급까지 풍성히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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